한겨레21이 사랑한 논픽션 작가
이라영, 대신하는 목소리 [21WRITERS①]
[한겨레21이 사랑한 논픽션 작가]<우리는 다 태워버릴 것이다> 쓴 이라영 작가 인터뷰
제1405호
사진=김진수 선임기자
이라영(46)은 스스로를 예술사회학자라 칭한다. 인터뷰를 위해 그를 직접 만나기 전까지는 예술사회학이 사회학의 여러 갈래 중 하나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라영의 글은 항상 사회를 가장 뜨겁게 달구는 주제를 정면으로 다뤘다.이라영은 2011년부터 2022년까지 매달 한 편씩 신문 <한겨레>에 꾸준히 글을 실은 ‘장수 필자’ 중 하나다. <한겨레>뿐 아니라 <뉴스민> <월간 참여사회> 등에도 꾸준히 글을 보낸다. 여성과 성소수자, 난민을 비롯한 소수자의 입장에서 본 권력자, 특히 진보를 자칭하는 지식인들의 모순적인 언행을 비판하는 데 늘 거침이 없다.2022년 3월2일 경기도 한 도시에 위치한 이라영 작가 집을 찾았다.
유학 갈 때 받은 질문
이라영은 대학 학부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미술비평을 전공한 거냐 물으니 그게 아니라 그림을 그렸단다. 서양화학과를 나온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화가’ 말고 다른 꿈을 꾼 적이 없었다. 언제부터 글을 썼는지 묻자 “어려서부터 메모하고 일기 쓰는 습관이 배어 있었다. 딱히 언제부터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답이 돌아왔다.이론 수업이 많아진 대학교 3학년 때 이라영은 자신이 무언가 분석하고 비평하는 일을 재미있어한다는 걸 느꼈다. 평론가가 되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서양화학과를 나와 그림만 그려서는 먹고살 길이 막막하기도 했다. 그림을 그리려면 돈을 벌기는커녕 오히려 써야 했다. 글은 그림에 비하면 결과물 나오는 속도도, 보수(원고료) 들어오는 속도도 빨랐다. 본격적으로 예술비평을 공부하려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했다.이라영이 처음 원고료를 받고 정기적으로 글을 쓴 곳은 영화비평지 <씨네21>이다. 우연히 객원기자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해 선발됐다. 당시 서울 홍익대 근처에 막 생기기 시작한 이색적인 카페를 다니며 사장을 인터뷰했다. 공연이나 전시, 영화를 보고 짤막한 평을 쓰기도 했다. 원로 무용가 머스 커닝햄의 내한공연을 직접 보고 한마디 쓸 수 있었던 것이 특히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매일 학교에서 책으로만 접하던 공연을 직접 보고 뭔가 개입할 기회를 갖는다는 게 정말 재미있더라고요.”매체에 글을 막 기고하기 시작한 이가 받는 원고료는 20년 전인 그때나 지금이나 200자 원고지 1장당 1만원 수준. 모아봐야 “한 달에 100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 먹고살 수는 없었다. 미술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부터 전시장 지킴이 아르바이트, 전시 기획, 연구 용역까지. 해가 떠 있는 동안 온갖 일을 하고 대부분의 글은 밤 시간을 이용해 썼다.20대 후반 부천문화재단에서 문화기획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따박따박 월급이 들어오자 계획을 세워 저축도 할 수 있게 됐다. 더 늦기 전에 무리해서라도 유학을 가야 순수미술 전공자로서 장기적으로 경제활동을 할 길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다. 32살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겠다고 하자 사람들은 하나같이 걱정했다.그런데 그 걱정의 내용이 ‘앞으로 네 공부가 얼마나 어렵겠니’가 아니었다. ‘그럼 결혼은 언제 해?’였다. “20대까지만 해도 결혼한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 사이에 구분이 없다시피 했는데, 30대가 되면서부터 ‘결혼한 여자가 아니’라는 정체성이 생겨요. 그 정체성이 내가 하려는 공부나 일보다 더 중요해지고요.”이라영은 “30대 이전까지 여성주의를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던 사람은 아니었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미술이나 미학을 공부하다보니 당연히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 같은 글을 읽으며 지적인 충격을 받은 건 맞아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적인 충격에 그쳤어요.”30대에 접어들자 함께 공부하고 일하던 여성 ‘동지’들이 결혼과 임신, 출산을 겪으며 사라져갔다. 일하는 환경이 자연스럽게 남성들로 구성돼갔다. ‘이게 여전히 현실이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여성주의가 ‘지적인 충격’을 넘어 일상을 침투해 들어오기 시작했다.선택적 기억, 이는 일종의 속임수
“하이데거가 어떻고 베냐민이 어떻고 하는 공부와 내가 직접 하수도 구멍에 손을 넣어가면서 사는 일상의 괴리가 너무 큰 거예요. 일상과 공부 사이에서 찾은 가장 큰 접점이 여성주의였어요.”30대 초반 프랑스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며 그는 예술적으로는 전위적이고 정치적으로는 급진적인 한 레즈비언 작가에 대해 논문을 썼다. 그러면서도 그가 여성주의를 논문의 주된 주제로 다루길 주저하자, 지도교수가 정확한 언어로 말했다. “페미니즘을 다뤄야 해.” 지금 돌아보면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덕분에 여성주의를 본격적으로 공부할 용기와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20대일 때부터 활동가로 살며 앞서 싸운 사람이 많잖아요. 저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사실은 수치심 같은 걸 늘 가졌어요. 나는 내 공부, 내 생활을 해야지, 말할 기회는 20대 때부터 싸워온 사람들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정말로 먹고사는 일이 너무 힘들기도 했고요.”예를 들어 ‘강남역 살인사건’ 같은 여성혐오 사건이 벌어지면 전문가 의견을 묻는 전화가 기자들로부터 걸려온다. 그러면 그는 자신은 그 분야 전문가가 아니라며 뒤로 빠지곤 했다.“지금은 그런 기회가 오면 되도록 말하려 해요. 저는 그냥 그림 좋아하고 음악 좋아하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편하게 미술작품이나 영화, 문학을 감상하고 있을 상황이 아닌 거예요. 세상이 저 같은 사람까지 말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다소 늦게 공부하기 시작한 여성주의는 “이전까지 내 속에서 꼬여 있던 말들이 비로소 길을 찾는 듯한 기분”을 선사했다.“저는 계속 예술이라는 세계를 살았잖아요. 그렇게 많은 작품을 보고도 어떤 경우는 너무 동의하기 어려웠어요. 작품, 특히 영화나 문학에서 여성이 재현되는 방식이 여성인 나를 소외시키는 경험이 반복됐어요. ‘예술이라는 장 안에서 작품이나 작가에 대해서만 다루는 거로는 성이 차지 않는구나, 나는 작품과 사회 사이의 연결고리가 있어야 성이 차는 성격이구나’ 하는 걸 점차 깨달았어요.”그 과정에서 글을 통해 비평하는 대상이 예술에서 사회 쪽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여기엔 사적인 맥락뿐 아니라 사회적 맥락도 크게 작용했다. 마침 2000년대 후반, 김대중과 노무현 시대가 막을 내리고 이명박과 박근혜의 보수 집권기 10년이 막 시작된 때였다.“1980년대에 ‘빨갱이’로 취급받던 김대중이 1997년 대통령에 당선되는 걸 보면서 ‘어떻게든 싸우고 비판하면 세상이 점진적으로 변하는구나’ 하고 긍정적인 충격을 받았던” 그에게 이명박의 대통령 당선은 “10년 전과 달리 불안한 의미의 충격”이었다. 그는 “역사가 퇴보할 수 있다는 생각을 미처 못했던 건데 지금 생각하면 순진했다”고 말했다.이명박 정부에 대한 반감도 있었지만 그에 대한 비판을 위해 김대중과 노무현이라는 과거가 미화되는 일 또한 이라영으로 하여금 “말을 참을 수 없도록” 했다.“2007년 노무현 정권 당시 한·미FTA를 반대하기 위해 분신한 허세욱 열사가 있다. 하지만 <나꼼수>는 사실보다 당파성이 중요했기에 노무현 정부 당시 FTA에 반대했던 수많은 목소리를 ‘없는’ 취급한 채 이명박의 FTA만 문제로 삼았다. 선택적 기억, 이는 일종의 속임수다. 이명박 비판 효과를 최대화하기 위해 노무현 정부는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게임의 법칙은 철저히 지켜졌다.”(<타락한 저항>, 73쪽)*이라영, 사랑에서 나오는 글을 쓰는 예술사회학자 [21WRITERS②]로 이어집니다.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1781.html이라영이 예술과 사회에 대해 글을 쓴 지는 20년이 넘었다. 그의 첫 단행본은 2016년에야 출간됐다. 도서출판 동녘에서 펴낸 <환대받을 권리, 환대할 용기>다. 남성, 이성애자, 엘리트가 아닌 여성, 성소수자, 비정규직 노동자 등 변방의 시선으로 한국 사회를 들여다본 칼럼을 재구성해보자는 편집자의 제안을 받고 수년간 망설인 끝에 3년여 만에 첫 책을 냈다.이어서 낸 <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동녘, 2018)에선 ‘완벽한 페미니즘’에 대한 강박보다 여성 개개인이 구조와 권력 앞에서 자신의 경험을 해석해내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타락한 저항>(교유서가, 2019)에선 진지함에 대한 반감과 반지성주의가 소수자 혐오와 차별을 어떻게 강화하는지 분석했다. 이어 <폭력의 진부함>(갈무리, 2020)에선 1980년대부터의 사적 역사를 복기함으로써 개인의 역사를 지워내는 사회구조가 어떻게 만들어져왔는지 들여다봤다.<정치적인 식탁>(동녘, 2019)에서는 음식을 매개로,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문예출판사, 2020)에서는 공간과 문학작품을 매개로 여성의 삶에서 말하기와 글쓰기, 읽기가 ‘빵’만큼이나 중요한 이유를 기록했다.이 외에 <비거닝>(동녘, 2020), <절멸>(워크룸프레스, 2021) 등의 공저와 <우리는 다 태워버릴 것이다>(바다출판사, 2021) 공동번역에 참여했다.이라영 제공
정인선 <코인데스크 코리아> 기자 ren@coindeskkorea.com*한겨레21이 사랑한 논픽션 작가들 모아보기http://h21.hani.co.kr/arti/SERIES/2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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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영, 사랑에서 나오는 글을 쓰는 예술사회학자 [21WRITERS②]
[한겨레21이 사랑한 논픽션 작가]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 쓴 이라영 작가 인터뷰
제1405호
등록 : 2022-03-27 23:15 수정 : 2022-03-28 12:50
사진=김진수 선임기자
*이라영, 대신하는 목소리 [21WRITERS①]에서 이어집니다.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1780.html
적을 만드는 것, 신격화하는 것
당파성이 무엇보다 우선되는 가운데 누군가의 여성성은 줄곧 조롱의 대상이자 수단이 됐다. 2012년 4월 총선을 앞두고 김용민 당시 민주통합당 후보가 과거 <나는 꼼수다>에서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부 장관을 강간하자’고 발언한 게 뒤늦게 문제 된 게 대표적이다.“대부분의 풍자와 조롱은 이성애자 남성의 시각에서 만들어지기에 여성이나 성소수자 입장에서는 함께 웃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중략) 남성 정치인에게는 하지 않는 ‘강간’ 발언이 특정 여성 정치인에게 향할 때, 그것은 이미 ‘정치인’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공격이 된다.”(<환대받을 권리, 환대할 용기>, 57쪽)이라영에게 30대는 20대에 쌓은 지적인 생태계를 완전히 새롭게 재점검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한때 “열심히 쫓아다니던” 지식인들의 글을 언젠가부터 편히 읽을 수 없게 됐다. “발화 권력, 요즘 말로 하면 ‘좋아요’에 도취되고, 자신이 말해온 것을 스스로 배신하는 사람들이 계속 출몰”한 탓이다.“누군가를 악마화해 공격하고, 정권이 교체되면 만사형통이 되는 것처럼 이야기들을 하는데 세상이 그럴 리가 없잖아요. 한쪽에 적을 만든다는 건 다른 한쪽을 신격화하게 된다는 점에서 위험하고요. 매체 환경이 변하면서 누구 하나를 온라인에서 조롱해 바보로 만드는 게 쉬워졌는데, 그럴수록 더 조심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지식인들이 앞장서 조롱의 언어를 생산한다는 게 너무 위험해 보였어요.”비슷한 맥락에서 이라영은 글을 쓰는 행위 자체에 지나친 의미부여를 경계한다. 2018년 10월 <한겨레>에 쓴 칼럼 ‘애도의 윤리’에서 그는 “글쓰기는 자아도취의 끝없는 향연을 펼칠 수 있는 장이며 타인을 짓밟을 수도 있는 강력한 무기”라고 적었다.가장 최근에 펴낸 책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에서 이라영은 끊임없이 읽고, 보고, 쓰는 원동력이 크게 세 군데서 나온다고 썼다. “분노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 우울함과 잘 살아가기 위해, 오만을 다스려 무지를 발굴하기 위해.”“함께 사는 남편이 ‘맨날 티브이와 멱살 잡을 듯이 싸운다’고 할 정도로” 분노가 글쓰기의 원천이 되는 경우가 많지만, 결코 화난 상태에서 감정을 문자로 옮기지 않는다. “전선을 확실히 긋고 어떤 대상을 공격하는 걸 목적으로 글을 쓴다면 결국 내 생각이 편협해질 위험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것까지 목표로 하진 않아요. 어렴풋이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만 이렇게 생각하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어떻게 하면 그들을 대신해 단호하고 명료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을지 생각하며 글을 써요.”사진=김진수 선임기자
작은따옴표, 부연설명, 참고 문헌, 각주, 미주…
이라영은 스스로 ‘생각을 마구 정리했다가 준비되면 내보내는 성격’이라고 말했다. 그의 집 서재와 거실 소파 앞 등 손 닿는 모든 곳에 형광색 접착식 메모지가 널브러져 있었다. 티브이를 보다가도, 길을 가다가 광고지를 받아도, 매달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새로 놓이는 지역 신문을 읽다가도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수시로 메모한다.“산발적으로 적어둔 메모 속에서 어떤 흐름을 찾을 때가 있어요. 그럼 도서관에 가서 관련된 것을 막 찾고 열심히 구글링도 해요. 그러다보면 연결고리가 없을 것 같던 메모들 사이에서 써야 할 글의 구조가 나오기 시작해요. 그다음부터는 충실하게 쓰면 되는데, 거기까지 가는 게 힘들죠.”이라영의 글에는 작은따옴표가 많다. 그가 “지저분함을 무릅쓰고” 굳이 글에 작은따옴표를 사용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무엇보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어떤 단어를 대신해 쓸 만한 말이 없는데, 도무지 그 단어를 쓰는 게 불편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불륜’이라는 단어엔 사회의 규정과 판단이 들어가 있다.“할머니면 할머니이지 굳이 ‘외’를 붙인” ‘외할머니’ 같은 단어에도 “그 말을 아무 의심 없이 사용하는 사회에 동화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따옴표를 친다.“물론 우리는 공식적으로는 같은 모국어를 쓰는 대한민국 사람이지만 결코 같을 수가 없어요.”‘남성혐오’와 같이, 스스로 동의할 수 없는 개념을 비판하기 위해 언급하는 경우에도 따옴표를 사용한다. 이 외에 특별하게 의미를 부여해 강조하기 위해서도 쓴다.<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에서 이라영은 에밀리 디킨슨의 시에 “부연 설명하는 기능을 가진 문장부호 대시(-)가 많다”며 “하고 싶은 말이 숨겨져 있는 이 대시를 삭제하는 행위는 어쩌면 그의 진짜 목소리를 삭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썼다.참고 문헌이 많다는 점도 이라영이 쓰는 글의 특징이다. “에세이라고 하기엔 참고 문헌과 각주, 미주가 마구 달려 있”고,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학술적인 글로 분류하기도 어렵다. 어떻게 보면 어정쩡하다.글 쓰는 사람들 사이에선 ‘중학교 2학년도 읽을 수 있게 써야 한다’는 말이 격언처럼 전해지지만, 이라영은 쉽게만 쓴 글이 지닐 수 있는 폭력성을 경계한다. 어떤 대통령 후보는 단 일곱 글자 쉬운 말로 정책 공약을 대신해도 “‘아무 말’이라고 여겨지기는커녕 모두가 열심히 해석해주는” 시대가 아닌가.“대중적 글쓰기와 학술적 글쓰기 사이 중간지대가 풍요로울수록 한 사회가 풍부하게 담론을 형성하기에 좋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사람들이 계속해서 알고자 하는 자극을 받잖아요. 책 하나를 읽고 나면 다음 갈래로 마구 나가고 싶은 욕구가 드는 책 있잖아요. 그런 글쓰기를 지향해요. 그게 적극적인 독서이고요.”<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에서 이라영은 ‘자기방어나 증오심에서 나온 글, 남에게 명령하거나 반박하기 위한 글, 남을 공격하거나 남에게 사과하기 위한 글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온 글을 써야 한다’는 미국 소설가 유도라 웰티의 말을 늘 떠올리며 글을 쓴다고 했다. 하지만 그도 글쓰기의 원천이 ‘사랑’이어야 한다는 말을 처음 접했을 땐 ‘뭐 이런 낭만적인 이야기가 다 있나’ 생각했다.이라영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1995년부터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는 필통. 김진수 선임기자
“어디에서든 뭐라도 해보려고 싸우는 ‘사람’”
강원도 강릉 출신인 그는 지금까지 주거지를 서른 번 가까이 옮겨다녔다. “물리적으로 자주 이동하는 사람은 타인과 그만큼 자주 이별한다. 그 헛헛함과 함께 살아가려면 장소 자체와 관계를 맺을 줄 알아야 했다.”(<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 23쪽)그는 “어디를 가더라도 그 안에서 뭐라도 해보려고 싸우는 ‘사람’으로 관점을 돌리려 노력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면 할 수 있는 게 굉장히 많이 보이더라고요.”예를 들어 2010년대 중반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까지만 해도, 이라영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은 양당정치의 나라’라고 생각했다. “밖에서는 ‘대통령이 누구인지’처럼 큰 것만 보잖아요. 그런데 지역으로 들어가서 정말 많은 소수자 단체가 싸우는 걸 눈으로 보니 ‘나도 편견이 있었구나’ 싶었어요.”“어디서든 자꾸 싸우는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게 되더라고요. 그들의 이야기가 마음속에 들어와서 쌓이면 저는 그걸 또다시 말로 뱉어내죠. 이게 다 설명이 안 돼요. 마음이 그렇게 되는 거예요.” 3월 첫째 주 어느 오후, 서울 한복판에서부터 1시간가량 차를 몰고 경기도 한 도시의 이라영 집을 찾았다. “‘서촌에서 만나자’는 말이 서울에 사는 사람과 부천에 사는 사람에게 결코 똑같이 들릴 수는 없다”는 구절을 그의 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운전하는 내내 그 구절이 떠올랐다.“무엇을, 어떻게, 왜, 누가, 어디에서, 언제 먹었는지에 대해, ‘먹기’를 둘러싼 인간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정치적인 식탁>, 11쪽)는 그의 집을 빈손으로 찾기가 뭐해, 봄동 두 포기를 들고 갔다. 인터뷰 전날 어머니가 운영하는 채소가게에 들러 급하게 준비한 선물이었다.낯선 이를 집에 들이면서 이라영은 “이사를 자주 다닌 탓에 사진을 찍을 만큼 멋들어진 서재가 없다”고 겸연쩍어했다. 사진기자가 이라영을 촬영하는 동안 실례인 줄 알면서 그의 주방을 몰래 구경했다. “누군가가 해준 음식, 혹은 누군가와 함께 먹은 음식을 매개로 결국 그 사람을 기억한다”는 이는 주로 무얼 먹고 사는지 궁금했다. 금방 요리를 마친 것처럼 찐 콩이 채반에 조금 남아 있었다.사진 촬영을 마치고 인터뷰하려 앉은 작은 탁자에는 그가 아침에 손수 만들었다는 곶감말이(그 안에 찐 콩이 들어 있었다)와 함께 그의 어머니가 만든 깨강정이 놓여 있었다. 호의를 베풀어야 할 의무가, 많은 경우 여성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은 여전히 불편하지만,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위해 마련할 수 있는 가장 큰 호의는 역시 먹을거리라는 생각을 하며 강정을 깨물어 먹었다.길어야 2시간 정도를 예상한 인터뷰가 4시간 가까이 걸린 탓에 서울로 다시 나오는 길에는 해가 다 져 있었다.정인선 <코인데스크 코리아> 기자 ren@coindeskkorea.com*한겨레21이 사랑한 논픽션 작가들 모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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