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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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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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주체 | ||
인명 피해 | 사망 | 531명 이상 (원장 박인근의 주장) 657명 이상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결과) |
실종 | 불명 | |
부상 | 불명 | |
구조 | 알 수 없음 | |
1. 개요2. 상세3. 실체4. 사법 처리5. 사건 이후6. 원장 박인근7. 검찰의 비상상고8. 법원의 국가 손해배상 책임 인정9. 미디어 자료
9.1. 영화 '종점 손님들'9.2. 뉴스타파M 1회9.3. MBC 시사매거진 2580 876회9.4. 한겨레 《형제복지원 대하 3부작》9.5. SBS 그것이 알고싶다 932, 977회9.6.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184회9.7. MBC 탐사기획 스트레이트 74회9.8. 부산일보 《살아남은 형제들》9.9. tvN 알아두면 쓸데있는 범죄 잡학사전 1회9.10.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1회9.11. MBC PD수첩 1348회9.12. JTBC 아무도 몰랐던, 비하인드 4회9.13. 넷플릭스 나는 생존자다 1,2화
10. 관련 자료11. 외신 언론보도12. 대중 매체에서13. 해외 사례14. 여담15. 외부 링크16. 관련 문서17. 둘러보기![]() |
형제복지원 시설 입구 |
이 사건은, 정부가 부랑인 정책 및 제도에 따라 경찰 등 공권력의 적극적 개입에 의하여 또는 이들의 허가.지원.묵인 하에 부랑인으로 지목한 불특정 민간인을 적법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단속하여, 1960. 7. 20.부터 ~ 1992. 8. 20.까지 운영되었던 부산 소재 형제복지원에 장기간 자의적 구금을 했고, 그 과정에서 강제노동, 가혹행위, 성폭력, 사망, 실종, 등이 자행 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이다.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2국,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사건 보고서(2023. 3. 16.)
형제복지원 사건은 당시 내무부 훈령 제410호에 근거해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부랑인 단속이라는 명분으로 3천 명 이상의 무고한 시민을 강제로 감금하고 강제 노역, 폭행·살인 등을 저지른 인권 유린 사건이다. 복지원 기록에 따라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망자만 551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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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한종선이 당시를 증언하며 그린 그림에 1980년대 걸개그림으로 잘 알려진 전승일 작가가 채색하고 동아일보 기사와 합성한 이미지# |
박인근이라는 일개인의 사업 목적과 국가의 부랑아 단속이라는 정책이 결합하여 강제 수용소로 전락한 복지 단체가 무지막지한 폭력을 통해 약 30년간 수백 명의 피해자를 발생시킨 20세기 최악의 흑역사 중 하나로, 뉴욕 타임스가 실제 지옥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국제적인 망신을 얻은 사건이다.
부산 시내의 부랑인을 수용, 선도함으로써 범죄의 사전 예방 및 건전한 부산시가를 형성하는 데 이바지하고 있다.
언론에서 1975년 박정희 정부가 시행한 내무부 훈령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인지, 1975년부터 1987년까지만 피해가 일어난 줄 아는 경우가 많으나 민간인 집단 학살 및 인권 유린 행위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시기부터 벌어지는 등 훨씬 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10] 박정희 정부는 형제복지원의 실체를 잘 알고 있었지만, 인권 의식 자체가 후진적일뿐더러 사회의 쓰레기들을 치운다는 명목으로 이러한 강제 수용소들을 설립하는 것을 오히려 장려했다.[11] 그 결과 경찰과 공무원들이 승진을 위해 아무 사람이나 잡아 가두는 일이 빈번했으며, 이미 1960년대부터 덕성원, 희망원, 서울시립갱생원, 선감학원, 서울시립아동보호소 등 국가에서 세운 여러 강제 수용소들과 국가 권력과 강하게 유착한 장항 수심원, 부산 덕성원, 양지원 등 일부 수용 시설에서 비슷한 피해가 벌어졌으며, 일부는 2010년대에도 잔존해 있었다. 국가 권력이 나서서 국민의 아이들을 유괴한 것이다. # 형제복지원은 이들 중에서도 너무 크고 너무 많이 죽어나갔으며 증언도 너무 많았기에 가장 유명해졌을 뿐이다.
4.3 사건, 보도연맹 학살 사건 이후 대한민국 최악의 학살 사건 중 하나로 꼽히며, 1987년 말까지 수용자 학대가 자행되었다. 특히 1980년대 전두환 정부 당시에는 1986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88 서울 올림픽 개최를 전후로 길거리에서 장애인 및 부랑자, 달동네를 외국인들이 보는 것은 나라 망신이라 치워야 된다는 다분히 전시 행정적인 이유로 장애인 및 부랑자 단속 및 달동네 강제 철거가 횡행하였다.[12][13] 이 때문에 대한민국 제4공화국~제5공화국 시기 최악의 국가 폭력 중 하나로 꼽힌다.
약 12년간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피해자의 수는 최소 513명(박인근의 주장)으로 알려졌지만, 시체는 암매장 또는 근처 의과 대학에 해부용으로 돈을 받고 팔았기 때문에 정확히 몇 명이 죽었는지 확인이 불가능하다. 2022년 8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 결과에 따라 공식 사망자만 657명으로 늘었다.
4.3 사건, 보도연맹 학살 사건 이후 대한민국 최악의 학살 사건 중 하나로 꼽히며, 1987년 말까지 수용자 학대가 자행되었다. 특히 1980년대 전두환 정부 당시에는 1986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88 서울 올림픽 개최를 전후로 길거리에서 장애인 및 부랑자, 달동네를 외국인들이 보는 것은 나라 망신이라 치워야 된다는 다분히 전시 행정적인 이유로 장애인 및 부랑자 단속 및 달동네 강제 철거가 횡행하였다.[12][13] 이 때문에 대한민국 제4공화국~제5공화국 시기 최악의 국가 폭력 중 하나로 꼽힌다.
약 12년간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피해자의 수는 최소 513명(박인근의 주장)으로 알려졌지만, 시체는 암매장 또는 근처 의과 대학에 해부용으로 돈을 받고 팔았기 때문에 정확히 몇 명이 죽었는지 확인이 불가능하다. 2022년 8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 결과에 따라 공식 사망자만 657명으로 늘었다.
피해 생존자 증언에 따르면 대다수는 자신의 집 앞에서 놀다가, 또는 자기 집에서 자다가, 명절을 맞아 고향으로 가기 위해 부산역을 경유하다가 경찰 등에 붙잡혀 형제복지원으로 넘겨졌다.1986년 기준으로 전체 수용자 3천975명 중 경찰에 의해 입소한 인원은 3천117명이나 됐고, 구청을 통해 입소한 인원은 253명에 달했다. 원생 대다수가 경찰이나 행정관계자에 의해 형제복지원으로 넘겨진 것이다.살아남은 형제들, 형제복지원 생존자 33인의 기록
수천 명의 원생들 중 70%가 일반인이었으며, 형제복지원 직원들에 의해 납치, 구금되었다. 당시 납치에 부산시청과 부산 경찰이 적극 협조하였기 때문에 원생들은 탈출해도 공권력에 의해 다시 잡혀 들어갔다. 게다가 2022년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전두환도 뒷배를 든든히 책임졌으므로 피해자들은 한번 붙잡힌 이상 외부의 도움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원장 및 관리자급 직원 4명이 체포되어 특수감금죄 등의 혐의로 기소됐으나 윗선의 지시로 살인죄로는 기소되지 않았으며, 반정부 시위로 번질 것을 두려워한 전두환의 지시로 2년 만에 석방되었고 박인근은 2011년 사임을 전후하여 치매를 앓다가 2016년 사망했다.
대한민국 내부에서 같은 한민족이 한민족, 그중에서도 특정 계층을 감금하고 인권을 유린했다는 점은 사실상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나 소련의 굴라크 등의 강제 수용소와 결이 같아 일각에서는 한국형 아우슈비츠라고 불린다. # 절대다수의 학살은 정부나 무장 집단[14]에서 주도한 경우가 많지만, 이 사건과 같이 정부에서 일한 적도 없는[15] 일개 비무장 민간인이 정부와 유착한 채 그 정부의 지원과 조력을 바탕으로 사실상의 살인 공장을 만들어 수백 명의 자국민을 학살한 경우는 외국에서도 거의 유례를 찾아볼 수가 없다. 문자 그대로 정부가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정부가 조력해 준 학살, 사실상 대리 학살인 셈이다.[16][17]
원장 및 관리자급 직원 4명이 체포되어 특수감금죄 등의 혐의로 기소됐으나 윗선의 지시로 살인죄로는 기소되지 않았으며, 반정부 시위로 번질 것을 두려워한 전두환의 지시로 2년 만에 석방되었고 박인근은 2011년 사임을 전후하여 치매를 앓다가 2016년 사망했다.
대한민국 내부에서 같은 한민족이 한민족, 그중에서도 특정 계층을 감금하고 인권을 유린했다는 점은 사실상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나 소련의 굴라크 등의 강제 수용소와 결이 같아 일각에서는 한국형 아우슈비츠라고 불린다. # 절대다수의 학살은 정부나 무장 집단[14]에서 주도한 경우가 많지만, 이 사건과 같이 정부에서 일한 적도 없는[15] 일개 비무장 민간인이 정부와 유착한 채 그 정부의 지원과 조력을 바탕으로 사실상의 살인 공장을 만들어 수백 명의 자국민을 학살한 경우는 외국에서도 거의 유례를 찾아볼 수가 없다. 문자 그대로 정부가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정부가 조력해 준 학살, 사실상 대리 학살인 셈이다.[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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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옹성, 형제복지원 | |
1. 서로 서로 도우고 사랑하자.
2. 열심히 배우고 연구하자.
3. 정직하고 충실한 일꾼이 되자.형제복지원의 원훈
형제복지원은 육군 부사관이던 박인근이 1962년에 장인으로부터 인수한 감만동 형제육아원(1960년 개원)을 모태로 한 개신교계 부랑인/부랑아 보호 시설로[18], 인수 후 용당동으로 이전했다. 1965년에 사회복지 법인화하고 부산시로부터 아동 복지시설 인가를 받았다. 1971년에는 기존 목적이던 유아 보호시설에서 부랑아 보호시설로 변경했고, 박정희 정부가 대대적인 부랑아 단속을 위해 발표한 1975년 내무부훈령 제410호에 근거하여 부산직할시 부산진구 주례동 산18번지[19]의 토지를 사서 이듬해에 준공했다. 1979년에 형제원에서 '형제복지원'으로 명칭을 바꿨으며, 1983년부터 부랑아/부랑인 직업 보도 업무를 개시했고 이듬해에는 정신요양원을 열었다. 기관지로는 월간 <새마음>이 있었다.
1975년 이후 12년 동안 국고 횡령, 아동 강제 노동 등의 천인공노할 범죄 행위를 자행해 오다가 1987년 3월 22일에 시설 직원들의 구타로 원생 1명이 숨지고 35명이 집단 탈출 하면서 그 실체가 세상에 알려졌다. 부랑아 선도를 명목으로 길거리나 역에서 노숙자, 행려병자들, 고아들은 물론 통금 이후에 돌아다니는 사람부터 심지어는 그냥 길을 잃은 어린아이까지 무차별적으로 끌고 가서 불법적으로 감금 및 강제 노역을 시켰다.[20] 원생들을 중대나 소대별로 나누어 관리하고 원장-부원장-총무-중대장-소대장-조장-조원 순으로 수직적으로 통제하는 군대식 구조를 지녔다. 시설 측은 탈출을 막기 위해 경비원 13명과 경비견 13마리를 풀어 24시간 감시했으며 축사 주위에 철조망 및 초소 2개도 설치했다.
시설 측은 미성년자 유인 약취, 납치, 폭행을 동반한 납치 등 갖은 방법으로 사람들을 모은 후 저항할 수 없게 하기 위해 다시 폭행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저항을 꺾을 수 없으면 살해, 유기하였고 순종적으로 만들어 길들이고 자신의 명령=옳다를 증명하기 위해 세뇌해 일을 시키는 도중에도 갖가지 이유를 만들어 매일 구타를 가했다. 잡혀 온 피해자가 10세 이하의 아동이라도 예외는 없었다. 1984년 개금국민학교가 시설 내에 분교(통칭 개금분교)를 차리기는 했으나 일부 아동들만 뽑혀 통학했으며 정상적인 교과 과정은커녕 시설과 박인근 원장을 찬양하는 교육만 받은 데다 주의가 산만하면 교사와 총무계장이 가차 없이 폭행을 가했다. 같은 시기에 야간 중학교가 차려지긴 했으나 1985년경에 폐교됐고 개금분교와는 달리 미인가 교육 기관이라 원생 명단이 없다.
1987년 기준으로 수용되었던 3,164명 중 남성은 2,811명, 여성은 353명이었고 어린이와 만 60세 이상 노인도 무려 543명으로 전체의 1/6*.[21]에 달했다고 한다. #
혼란스러운 사회상 속 기존에도 선감학원, 덕성원, 삼청교육대 등 복지 시설을 가장한 인권 유린의 터소는 수많았지만, 이들은 부랑아라는 제한된 인원들만 수용하였고 성인이 된다면 탈출할 수 있다거나 이수 조건만 채우면 퇴소라도 이루어지는 최후의 돌파구라도 마련되었다. 그러나 형제복지원의 경우는 앞선 시설보다도 더 악질인 것이, 위 통계처럼 수용 대상자는 남녀노소를 가리질 않았던 데다 이곳을 절차상 정식으로 퇴소할 조건이 아예 존재하질 않았다는 것이다.[22] 사실상 한번 잡혀 들어오다간 영구히 온갖 유린을 견뎌야 했고 이 개미지옥을 나오기 위해선 시체가 되거나 도주하는 것밖엔 방도가 없었으니, '한국판 아우슈비츠'라는 이명따라 뒷배가 없고 부산 땅을 밟은 이상 누구나 구금과 유린의 잠재적 대상자였고 가혹한 유린 행위도 악명 높은 수용소 못지않았다.
1975년 이후 12년 동안 국고 횡령, 아동 강제 노동 등의 천인공노할 범죄 행위를 자행해 오다가 1987년 3월 22일에 시설 직원들의 구타로 원생 1명이 숨지고 35명이 집단 탈출 하면서 그 실체가 세상에 알려졌다. 부랑아 선도를 명목으로 길거리나 역에서 노숙자, 행려병자들, 고아들은 물론 통금 이후에 돌아다니는 사람부터 심지어는 그냥 길을 잃은 어린아이까지 무차별적으로 끌고 가서 불법적으로 감금 및 강제 노역을 시켰다.[20] 원생들을 중대나 소대별로 나누어 관리하고 원장-부원장-총무-중대장-소대장-조장-조원 순으로 수직적으로 통제하는 군대식 구조를 지녔다. 시설 측은 탈출을 막기 위해 경비원 13명과 경비견 13마리를 풀어 24시간 감시했으며 축사 주위에 철조망 및 초소 2개도 설치했다.
시설 측은 미성년자 유인 약취, 납치, 폭행을 동반한 납치 등 갖은 방법으로 사람들을 모은 후 저항할 수 없게 하기 위해 다시 폭행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저항을 꺾을 수 없으면 살해, 유기하였고 순종적으로 만들어 길들이고 자신의 명령=옳다를 증명하기 위해 세뇌해 일을 시키는 도중에도 갖가지 이유를 만들어 매일 구타를 가했다. 잡혀 온 피해자가 10세 이하의 아동이라도 예외는 없었다. 1984년 개금국민학교가 시설 내에 분교(통칭 개금분교)를 차리기는 했으나 일부 아동들만 뽑혀 통학했으며 정상적인 교과 과정은커녕 시설과 박인근 원장을 찬양하는 교육만 받은 데다 주의가 산만하면 교사와 총무계장이 가차 없이 폭행을 가했다. 같은 시기에 야간 중학교가 차려지긴 했으나 1985년경에 폐교됐고 개금분교와는 달리 미인가 교육 기관이라 원생 명단이 없다.
1987년 기준으로 수용되었던 3,164명 중 남성은 2,811명, 여성은 353명이었고 어린이와 만 60세 이상 노인도 무려 543명으로 전체의 1/6*.[21]에 달했다고 한다. #
혼란스러운 사회상 속 기존에도 선감학원, 덕성원, 삼청교육대 등 복지 시설을 가장한 인권 유린의 터소는 수많았지만, 이들은 부랑아라는 제한된 인원들만 수용하였고 성인이 된다면 탈출할 수 있다거나 이수 조건만 채우면 퇴소라도 이루어지는 최후의 돌파구라도 마련되었다. 그러나 형제복지원의 경우는 앞선 시설보다도 더 악질인 것이, 위 통계처럼 수용 대상자는 남녀노소를 가리질 않았던 데다 이곳을 절차상 정식으로 퇴소할 조건이 아예 존재하질 않았다는 것이다.[22] 사실상 한번 잡혀 들어오다간 영구히 온갖 유린을 견뎌야 했고 이 개미지옥을 나오기 위해선 시체가 되거나 도주하는 것밖엔 방도가 없었으니, '한국판 아우슈비츠'라는 이명따라 뒷배가 없고 부산 땅을 밟은 이상 누구나 구금과 유린의 잠재적 대상자였고 가혹한 유린 행위도 악명 높은 수용소 못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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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의 강제 노동 | |
젊거나 나이 어린 여성, 그리고 일부 남성[23]에게는 구타 이외에도 성폭행이 더해졌으며 거의 모든 피해자들에게는 제대로 된 식사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복지원 내부에 식료품 공장도 있었으나 대부분 외부로 판매되었고 모두의 국가 보조금과 작업 수당까지 원장에게 뺏겨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으며 신민당 실태조사단 1차 보고서에 따르면 일반 수용자들의 수당은 1일 3~5백 원, 장애인들은 2백 원,[24] 요양원 입원자는 3일에 버스 토큰 1개씩이었다.
외부에 선전하기 위해 몇몇 적금 통장이 만들어졌지만 복지원에서 나가려면 도망치거나 시체가 되는 방법밖에 없다시피 했으니 피해자들이 그 돈을 받는 일은 없었으며 설령 탈출을 시도하려고 해도 경비원들에게 잡혀 두들겨 맞았다.
정신요양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는데 원칙적으로 의사 2명의 진단과 경찰 입회하에 입원해야 했으나 이들 중 70%가 변칙 입원 된 일반인들이었다. 복지원에서도 악명 높은 부랑인을 실장 또는 소대장으로 뽑아 통제하고 입원자 가족들에게 월 10~15만 원을 받으면서도 치료라곤 1일 3~4회씩 신경 안정제만 놔줘서 중독 상태에 놓인 피해자가 흔했다. #
피해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곤 몸을 누일 허술한 공동 숙소와 빈곤한 식사뿐이었는데 당연히 숙소 건설과 식사 준비 역시 모두 피해자들이 스스로 해야 했다. 당연하게도 질병 치료는 엄두도 낼 수 없었으며 지속되는 구타와 고된 작업으로 수많은 피해자들이 병으로 사망하였다.
이런 일이 무려 12년 동안 지속되면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원생의 수만 513명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물론 이는 박인근의 일방적 주장이고 그간 은폐하던 정황과 후술하듯 미심쩍은 사망자 처리까지 수두룩하니 실상은 저보다도 훨씬 많을 것이 유력하다. 진실화해위의 조사 결과 이보다 100명 이상 늘어난 658명으로 밝혀졌고 조사할수록 더 늘어날 전망이다. 밝혀진 사망자만 하더라도 약 1.7%의 사망율을 보였던 것인데, 여타 악명 높은 수용소의 사망율과 비교해 봐도 굴라크와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것은 5~10% 추산되는 정도니 형제복지원의 저 수치가 얼마나 엽기적인지 체감이 될 것이다.
여기다 일부 원생들의 시신은 인근 의과 대학에 해부 실습용으로 3백~5백만 원에 팔려나갔다. 수천 명의 원생 중 약 70%가 억울한 케이스였다. 가족이 있고 멀쩡한 직장이 있는 건강한 성인 남성이 밤늦게 퇴근하는 길에 잡혀가서 4일 만에 '폐렴 및 합병증'으로 몸에는 수많은 타박상을 남긴 채 사망해서 나오는 식이었다.
1977년, 박형대 씨는 친구를 만나러 갔다 부산역에서 경찰을 만났습니다. 12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박형대/형제복지원 피해자 : "꼬마야 너 이리 와 봐라. 예, 왜요? 그러니깐. 너 왜 부모는 어디 가고 혼자 오냐?"]
다니는 학교, 부모님 존재도 알렸는데 경찰은 그를 막무가내로 끌고 갔습니다. 도착한 곳이, 형제복지원이었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갇힌 그곳에서, 폭행, 강제 노역, 심지어 성폭력까지 이어졌습니다.1986년 형제복지원에 끌려갔다 1년 만에 탈출한 서상열 씨.
실상을 외부에 알리려 하자, 부산시 공무원들이 찾아와 진술서를 강요했습니다.
'사회에서 충실하게 생활한 사람은 형제복지원에 들어오지 않는다', 강제 입소를 부정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서상열/형제복지원 피해자 : "진짜 많이 맞았죠. 인간이, 사람의 도리가 아닙니다."]
가장 주목할 점은 이 사건이 한 개인의 부도덕 문제에 한정 지을 것이 아니라 부산시 공직 사회가 공조했다는 것이다. 소위 소대장이라고 불리는 감독관 중 대장 격인 왕소대장이라고 불렸던 이의 증언에 의하면 부산시, 부산시 사회복지과, 부산경찰 모두의 합작품이었다. 시설 관리를 전문 지식이 없는 부산 북구청 주사보 1명이 맡았으며 암묵적으로 돈을 주고받으면서 폭력, 비리에 방조하였고 납치도 적극적으로 밀어주었다. 원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들이 원래 사는 곳을 알려주어도 "찾아 줄 테니 경찰차에 타라"고 하고 복지원으로 데려다주었다고 한다. 후에 수사가 이루어지자 당시 김주호 당시 부산직할시장은 담당 검사에게 청탁 전화를 하고 보건사회부 장관에게 원장이 바로 석방되도록 건의하는가 하면 문민정부 시절 법제처장을 지낸 송종의 부산지검 차장검사는 수사 철수를 지시하는 등[25] 부산시 공직 사회가 전체적으로 공모한 문제였다.
여기에 더해 당시 부산시 의료 관계자들도 부검 서류를 날조하거나 사망 원인을 고의로 날조하는 등 학살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으며 병리과 의사[26]가 아닌 산부인과 의사가 부검을 맡는 등 의료 행정도 개판이었다. 내무부 훈령상 관할 지서/파출소장이 1주에 1회 순찰토록 했음에도 이행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현실에 나타난 지옥도로, 피해자들이 같은 부산 시민인데도 사회의 그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형제복지원이 출범하던 1975년은 내무부 훈령으로 국가 차원에서 부랑민 단속을 장려하던 시대상이었고, 부산으로서도 몰려드는 부랑민 문제,[27] 1988 서울 올림픽 준비 과정의 길거리 정화라는 허울 좋은 이유들로 포장되어 오히려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시설이었다. 이렇게 대외적으론 봉사 및 복지 시설을 표방하여 사실상 성역화된 지대엔 감시와 견제가 마땅히 이뤄지질 못했고, 닿지 않는 시야 속에서 인권 침해가 남모르게 자행되었으니, 장항 수심원과 양지마을 등 여타 사건들과 더불어 약자 수용 시설엔 시민들의 감시가 얼마나 필요한지 교훈을 안겨준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국가에서는 형제복지원을 단순히 방조만 했던것이 아니라 국가보안법 위반자나 시위 중 검거된 정치범들을 무연고 처리 후 강제로 감시 및 수용시키는 유배지 삼는다던지, 보안사와 안기부 차원에서 간첩조작 수사 공작을 이행하려 공작원 침투도 시도했다는 사실이 2022년 진화위를 통해 뒤늦게 문건이 공개되었다.# 이는 정부 차원의 수작과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다는 물증으로서 부산시를 넘어 국가 차원의 정책으로서 지옥도를 의도적으로 건설시켰다는 방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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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형제복지원 강제 노동 현장을 발견한 부산지검 울산지청 김용원 검사 | |
1986년 당시 부산지방검찰청 울산지청의 김용원[28] 주임검사가 포수와 함께 꿩 사냥을 나갔다가 현장을 발견하고 이를 사진으로 찍은 뒤 압수 수색 영장을 받아 형제복지원의 참상과 비리를 목격했다.
1987년 1월 17일에 원장 박인근을 비롯해 총무 김돈영, 사무장 주영운, 목장파견대장 성태은, 목장파견대 소대장 임채흠 등 5명이 각각 횡령, 특수감금죄와 외화관리법[29], 초지법[30], 건축법 위반[31] 혐의로 울산남부경찰서에[32] 구속되었다. 구속 당시에도 박인근은 복지원 운영에 관여하는 한편 경찰관의 집이나 여관에서 수갑을 푼 채 목욕을 하거나 송 모 경사의 도움으로 병원에 가는 등 4월 10일부터 5월 16일까지 32회나 외출이 허락됐다. 이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자 송 경사는 해직됐다. 전국부랑인시설연합회도 1987년 2월에 구속 상태인 박인근을 회장으로 뽑았지만 여론의 반발로 이를 철회했다.
정작 전두환 정부에서는 이 사건을 빨리 덮어 버리고 싶어 했는데 일단 전두환 본인이 강제 수용 지시를 했던 터라 세부 사항을 알았건 몰랐건 명백히 책임 소재가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 이 사건이 일어난 1987년 3월이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에서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기였고 시민 단체의 활동이 싹트려고 했던 만큼 이러한 사건이 계속 일어날수록 반정부 성향이 강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 자명하고 정권에 득이 될 것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외압을 넣어 검찰은 박인근에 대해 고작 징역 15년과 벌금 6억 8,178만 원을, 김돈영 등 공범들에게는 각각 3~7년밖에 구형하지 못하였고 이조차 줄어들어 1987년 6월 23일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원은 1심[33]에서 박인근에게 징역 10년과 벌금 6억 8,178만 원을 선고하는 데 그쳤으며[34], 1987년 11월 12일 대구고등법원 항소심 재판[35]에서 주간 감금 행위를 무죄로 보고 징역 4년을 선고했다가, 1988년 3월 8일 1차 상고심[36]에서 파기환송됐다.
동년 7월 7일 대구고법은 1차 파기환송심[37]에서 박인근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으나 2차 상고심[38]은 이를 번복했고, 1989년 3월 15일 대구고법 2차 파기환송심[39]에서는 벌금 없이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하고 7월 11일 대법원은 3차 상고심[40]에서 김용원 검사 측의 상고를 기각했다.[41] 이에 따라 박인근은 출소하였고 6억여 원의 벌금도 재판을 거치면서 결국 없어졌다. 심지어 폭행, 살인, 시신 유기, 시신 암거래 등은 기소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건 이후 세월이 흘러 여러 이슈에 밀려 잊혀진 채 공소시효는 전부 지났고, 시설은 흔적도 없이 철거되었으며 현장에서 증거 수집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전두환은 박인근에 대해 "박 원장은 훌륭한 사람이오. 박 원장 같은 사람 덕분에 거리에 거지도 없고 좋지 않소"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 #2, #3 전두환이 형제복지원의 박원장이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 대해 한 말이다. 이 평가 한마디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의 뒷배를 책임진 권력이 드러난다. 형제복지원이 세워진 배경부터가 4공의 절정기인 1975년에 발효된 '내무부 훈령 410호'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노태우를 제외한 군사 정권 전반에 배경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AP통신의 폭로로 전두환 정권이 형제복지원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고 한 사실이 드러나 의미가 없어졌다. 전두환은 1995년 구속 후 사형까지 선고받았다가 1997년 대법원에서 무기징역 선고 후 12월 특사 때 석방되었다.
31년 뒤인 2018년 11월 20일 문무일 검찰총장이 이 사건과 관련한 비상상고를 대법원에 요청하였다.# 다만 과거 판결을 바로잡는다고 해도 이미 내려진 무죄 효력은 뒤집지 못한다. 비상상고 제도가 재심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부랑인 수용시설의 인권 침해 문제가 언론과 시민 단체의 화두로 등장하자 내무부는 1987년 2월 16일 훈령 410호를 폐지하고 부랑인과 관련된 업무를 보건사회부에 맡기도록 했다. 부랑인 시설 운영 개선을 위해 입·퇴소 절차 개선, 수용 보호의 전문성 확보 및 직업 보도 강화 등 복지 서비스 제고 및 시설 운영의 내실화에 관한 부랑인 선도 시설 운영 규정(1987. 4. 6.)을 제정(보건사회부 훈령 제523호)하였다.
이에 따라 부산직할시는 박인근 대표 등 기존 이사진들을 공식적으로 몰아내고 그 자리에 관선 이사들을 파견하도록 한 뒤 기존 수용자들을 타 시설로 전원 조치토록 하는 한편 1988년경 재단명을 '재육원'으로 고쳤지만, 실질적으로 해결된 게 별로 없었고 시설은 사실상 폐허 상태였다. 1991년에 박인근이 그 재단을 되찾고 일부 건물을 고쳐 '실로암의 집'이란 중증 장애인 요양 시설을 세웠다. 1995년에 상당수 부지를 대왕건설에 팔고 2001년에는 실로암의 집을 기장군 정관면 달산리의 새 건물로 이전시켰다.
이에 따라 이곳에는 주례 한일유앤아이아파트, 반도보라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기사 덕분에 형제복지원은 제대로 된 징벌은커녕 오히려 부지 매각을 통해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단지 공사 중 약 40~50여 구의 유골이 쏟아졌지만 죄다 무연고 처리 후 납골 시설들에 안치하고 말았다. 400여 구의 시신은 찾지도 못한 상태다. 시신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는 이미 들어선 아파트 단지 때문에라도 시신을 찾기 매우 힘들다.
부산직할시공원묘지관리소(현 영락공원 사업단) 매장처리부에 기재된 무연고 시신 현황 자료에 따르면 형제복지원의 참상이 사회 문제화되고 이사장이 구속돼 관선 체제로 전환된 1987년 이후에도 2년간이나 30여 명의 사망자가 추가로 발생했으며 이들은 모두 무연고 시신으로 처리된 것으로 드러났는데, 관선 체제 시기에도 복지원 내부 악습이 끊이지 않았냐는 의혹이 있었다. (연합뉴스, 노컷뉴스)
한편 사건이 알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장소인 형제복지원 울주 수용시설 건물 2동은 2014년 연합뉴스 보도에 의하면 다 쓰러져 간 채로 남아 있었으며 노역이 진행됐던 나머지 주변 지역 중 청량면 일대 10필지 10,329m²는 2001년 울산광역시교육청 강남교육지원청에 팔리고#, 2003년 삼정리 784번지 27만 8,164m² 토지는 재단 이사 이XX 등에게 팔리다가 3년 후 이 이사의 해임으로 박인근의 첫째 사위에게 팔리는 등 우여곡절을 거쳐 아파트 1,800여 가구와 초등학교가 자리 잡았다.# 위 구 울주 수용시설 건물 부지도 2016년 느헤미야 법인 청산 후 법원 공매 과정에서 13차례의 유찰 끝에 개인 4명에게 팔렸다가 2017년 울산 모 농협이 사옥 부지 확보를 위해 85억 원에 사들였다. 이 과정의 뒷얘기가 2021년 부산일보 단독 보도를 통해 알려졌고 울산적폐청산시민연대 측이 해당 지역농협을 울산북부경찰서에 고발했으며 그해 10월 국정감사에서도 거론되었으나 경찰은 불송치 결정을 내렸으며 2022년 1월 울산지방검찰청도 검토 결과 재수사 요청을 하지 않는다고 경찰에 통보했다. #
이 사건의 피해자 중 상당수는 아직도 이 사건의 후유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야기인즉슨 사건 이후 일부 원생들은 피해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해방 이후 재사회화도 엉망으로 진행되는 바람에 가족 단위로 끌려온 피해자는 풀려난 뒤 같이 풀려난 후 행방을 알 수 없었던 아버지와 작은 누나를 2007년 정신 병원에서야 찾을 수 있었다고 한종선 대표는 회술했으며 몇몇 피해자는 범죄의 덫에 빠져 전과자가 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부산직할시는 박인근 대표 등 기존 이사진들을 공식적으로 몰아내고 그 자리에 관선 이사들을 파견하도록 한 뒤 기존 수용자들을 타 시설로 전원 조치토록 하는 한편 1988년경 재단명을 '재육원'으로 고쳤지만, 실질적으로 해결된 게 별로 없었고 시설은 사실상 폐허 상태였다. 1991년에 박인근이 그 재단을 되찾고 일부 건물을 고쳐 '실로암의 집'이란 중증 장애인 요양 시설을 세웠다. 1995년에 상당수 부지를 대왕건설에 팔고 2001년에는 실로암의 집을 기장군 정관면 달산리의 새 건물로 이전시켰다.
이에 따라 이곳에는 주례 한일유앤아이아파트, 반도보라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기사 덕분에 형제복지원은 제대로 된 징벌은커녕 오히려 부지 매각을 통해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단지 공사 중 약 40~50여 구의 유골이 쏟아졌지만 죄다 무연고 처리 후 납골 시설들에 안치하고 말았다. 400여 구의 시신은 찾지도 못한 상태다. 시신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는 이미 들어선 아파트 단지 때문에라도 시신을 찾기 매우 힘들다.
부산직할시공원묘지관리소(현 영락공원 사업단) 매장처리부에 기재된 무연고 시신 현황 자료에 따르면 형제복지원의 참상이 사회 문제화되고 이사장이 구속돼 관선 체제로 전환된 1987년 이후에도 2년간이나 30여 명의 사망자가 추가로 발생했으며 이들은 모두 무연고 시신으로 처리된 것으로 드러났는데, 관선 체제 시기에도 복지원 내부 악습이 끊이지 않았냐는 의혹이 있었다. (연합뉴스, 노컷뉴스)
한편 사건이 알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장소인 형제복지원 울주 수용시설 건물 2동은 2014년 연합뉴스 보도에 의하면 다 쓰러져 간 채로 남아 있었으며 노역이 진행됐던 나머지 주변 지역 중 청량면 일대 10필지 10,329m²는 2001년 울산광역시교육청 강남교육지원청에 팔리고#, 2003년 삼정리 784번지 27만 8,164m² 토지는 재단 이사 이XX 등에게 팔리다가 3년 후 이 이사의 해임으로 박인근의 첫째 사위에게 팔리는 등 우여곡절을 거쳐 아파트 1,800여 가구와 초등학교가 자리 잡았다.# 위 구 울주 수용시설 건물 부지도 2016년 느헤미야 법인 청산 후 법원 공매 과정에서 13차례의 유찰 끝에 개인 4명에게 팔렸다가 2017년 울산 모 농협이 사옥 부지 확보를 위해 85억 원에 사들였다. 이 과정의 뒷얘기가 2021년 부산일보 단독 보도를 통해 알려졌고 울산적폐청산시민연대 측이 해당 지역농협을 울산북부경찰서에 고발했으며 그해 10월 국정감사에서도 거론되었으나 경찰은 불송치 결정을 내렸으며 2022년 1월 울산지방검찰청도 검토 결과 재수사 요청을 하지 않는다고 경찰에 통보했다. #
이 사건의 피해자 중 상당수는 아직도 이 사건의 후유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야기인즉슨 사건 이후 일부 원생들은 피해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해방 이후 재사회화도 엉망으로 진행되는 바람에 가족 단위로 끌려온 피해자는 풀려난 뒤 같이 풀려난 후 행방을 알 수 없었던 아버지와 작은 누나를 2007년 정신 병원에서야 찾을 수 있었다고 한종선 대표는 회술했으며 몇몇 피해자는 범죄의 덫에 빠져 전과자가 되기도 했다.
형제복지원은 1987년에 실체가 폭로된 후 한동안 잊혀지다가 2012년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한종선이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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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수용 되었을 당시(1984년)의 9살의 나이의 한종선[42] | 2012년 37세로 성장한 한종선이 국회 앞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모습.[43] | 한종선, 전규찬, 박래군 공저 <살아남은 아이>[44] |
인권/시민사회단체를 비롯해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사건이었지만 2012년에 형제복지원 생존자인 한종선과 언론학자 전규찬 교수가 글과 그림으로 기록, 증언하고 인권운동가 박래군[45]과 공동 저술하여 "살아남은 아이"라는 책이 출간되면서 1987년 이후 다시 세상에 알려졌다. #
한때 나는 개였고 소였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 나 역시 아니 우리 가족 역시 당신들과 같은 가정이 있었던 일반 사람이었다. 사람에서 짐승처럼 되긴 쉽다. 그렇지만 짐승에서 사람으로 온전히 돌아간다는 것 그것은 말로는 쉽지만 사실은 너무나 힘이 든다. 죽을 정도로 말이다. 나는 지금 힘들지만 짐승에서 사람으로 돌아가려 한다.- 한종선,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한종선은 이후로도 꾸준히 언론을 통해 사건을 환기하는 활동을 지속해 왔고,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모임을 직접 꾸리며 피해자 대표를 자처하는 행보를 이어오고 있다.진실의힘 소개페이스북
이를 계기로 2013년 1월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 준비위원회'가 결성, 3월 22일 '형제복지원 사건 진실규명과 해결방안 모색을 위한 토론회'를 열고 전국에 산재한 피해자들을 찾아다니며 형제복지원 입소 과정, 일상에서의 인권 유린, 감금, 강제노역 등에 대한 증언을 채록하고 국가기록원, 국립중앙도서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등서 관련 자료들을 찾아가며 자료집 <한국의 홀로코스트,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실을 말한다>를 내고 인권운동사랑방 소식지 <인권오름>과 공동 기획으로 '26년, 형제복지원'을 연재하기도 했다. 11월 22일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역사관에서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를 출범했다.#
1982년 당시 중학생이었던 최승우는 4년 8개월간 형제복지원에 강제 수용 되었고 진상 규명을 위해 2019년 11월 5일부터 24일간 단식 투쟁을 하다가 실신해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
2020년 5월 29일에 20대 국회가 종료되면서 과거사법이 불투명해지자 최 씨는 5월 5일에 무기한 단식을 선언하고 국회의원 회관 지붕에 올라가 고공 농성을 벌였다. 사흘째 되던 날 미래통합당 김무성 의원의 중재로 중단되었으며 김 의원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과거사법)을 통과하겠다고 약속하였다.
2020년 5월 20일 열린 본회의에서 일제 강점기 이후부터 권위주의 정권 시대까지 발생한 인권 침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개정안이 통과되어 이 사건을 진상 규명 할 길이 열렸다. 최 씨는 이 소식을 듣고 김무성 의원에게 감사의 인사로 큰절을 하였으며[46] 행정안전위 간사로 과거사법을 논의했던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의원에게 형님이라고 부르며 끌어안았다고 한다.
2020년 5월 29일에 20대 국회가 종료되면서 과거사법이 불투명해지자 최 씨는 5월 5일에 무기한 단식을 선언하고 국회의원 회관 지붕에 올라가 고공 농성을 벌였다. 사흘째 되던 날 미래통합당 김무성 의원의 중재로 중단되었으며 김 의원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과거사법)을 통과하겠다고 약속하였다.
2020년 5월 20일 열린 본회의에서 일제 강점기 이후부터 권위주의 정권 시대까지 발생한 인권 침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개정안이 통과되어 이 사건을 진상 규명 할 길이 열렸다. 최 씨는 이 소식을 듣고 김무성 의원에게 감사의 인사로 큰절을 하였으며[46] 행정안전위 간사로 과거사법을 논의했던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의원에게 형님이라고 부르며 끌어안았다고 한다.
최승우 씨는 이후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생존자다에도 출연했다. 여기서 밝히길 자신을 형제복지원에 수용되게 한 경찰들로 인해 깊은 트라우마를 겪었고, 이 때문에 경찰에게 비협조적으로 대응하며 전과가 39건에 이른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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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외신인 알자지라가 공개한 박인근 부부 사진(좌)과 원장 박인근(우) | |
박인근은 직업 군인 출신으로, 1948년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여 4.19 혁명 당시 육군 모 부대 특무상사로 근무했다고 한다.[47] 1960년 부산 감만동에 형제육아원[48]을 설립/운영하면서 매년 20억 원에 달하는 국고를 지원받아[49][50] 횡령, 착복하여 고급 아파트나 콘도, 골프 회원권을 샀고 경남 울주군 청량면 삼정리에 있는 자신의 야산 27만여 m²에 있는 개인 토지에 목장과 운전 교습소를 세운다며 원생들을 축사에 감금시키고 하루 10시간씩 강제 중노동을 시켰다. 이쯤 되면 나치 독일, 일본 제국과 다를 바 없는 짓을 대한민국에서 자국민을 상대로 저지른 셈이다. 이를 바탕으로 1981년 국민포장 석류장, 1984년 국민훈장 동백장 등 온갖 수훈을 받고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상임위원까지 역임했으며 1982년에는 MBC에서 이 시설을 다룬 2시간짜리 대형 드라마 <탄생>(극본 심영식, 연출 이병훈)이 방영되었는데 당시 박인근 역은 배우 전운이 맡았다.
박인근은 이 사건에 대해 "양심적으로 시설 운영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을 했는데도 이를 시기하는 사람들 때문에 뜻밖의 변을 당했다"는 주장을 했으며, 자신도 시대적인 상황으로 인해 국가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던 피해자였다는 다소 말이 되지 않는 말도 했다. 또한 김용원 검사에 대해 자신을 형제복지원을 통해 불쌍한 원생들을 노예처럼 강제 노역 시키는 것처럼 묘사했다며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였다.
반성은 없고 당시의 부를 그리워하는
'형제복지원을 운영 하면서 가족 전체가 부랑인들과 시설에서 함께 고생하며 살아 왔는데 모략과 중상, 시기와 질투로 의욕상실이라는 위기를 맞기도…"
"전적으로 경찰의 허락과 도움을 받아 입소, 퇴소 절차를 밟았음에도 불구하고 불법운영 등 모략과 중상을 받아 왔기에..."
2004년, 박인근이 한국기독신문과 교회복음신문에 인터뷰한 내용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유 없이 감금당했고 폭력과 성폭력에 노출되었으며 강제노역과 비인간적인 대우로 26년이 지난 지금에도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고 있으며 삶의 버거움에 비틀거리고 있다. 그 때의 사건은 자신을 부정하는 기제로 작동했고 일상은 가난과 불안을 오가며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인근은 지금까지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기는 커녕 오히려 거짓으로 왜곡하며 공공의 재산을 사적으로 이용하는데 급급하고 있다. 형제복지원 폐쇄 사건을 일부 언론 및 검사의 중상과 모략으로 치부하고 있고 사비를 털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과 봉사, 사랑으로 수용자들을 보살폈다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외화, 엔화가 금고에서 쏟아질 정도로 가득했고, 33개의 필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여러 개의 콘도회원권, 골프회원권이 발견되었지만 모든 사실들을 부정하며 지금까지도 똑같은 방식으로 사회복지법인을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 박인근은 지금도 형제복지원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보기만 해도 섬뜩한 83년도 완공된 형제복지원 수용소 사진을 〈실로암의 집〉 1층 거실에, 수용자들을 착취해 강제노역을 시켰던 사진을 2층 거실에 버젓이 걸어 놓은 걸 보면 반성은커녕 폭력으로 획득한 권력과 부를 그리워하는 듯하다.- 인권오름, [26년, 형제복지원]<3> 87년 형제복지원, 아직도 건재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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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당시 박인근의 모습[51] |
출소한 박인근은 개신교 집사가 되었다가 재육원(구 형제복지원)을 되찾고 이름을 바꿔 가면서 사업을 확장했는데 1991년에는 중증장애요양원 '실로암의 집'을 차리며 재단명을 '욥의마을'로 변경했고 2002년에는 형제복지지원재단, 2014년에는 느헤미야 등으로 법인명을 세탁했다. 또한 사회복지법인대표자협의체의 회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재단 측은 2001년에 '실로암의 집'을 기장군으로 옮기기 위해 주례동 부지를 팔고 2002년에는 사하구 장림동의 대형 레포츠 센터, 2004년에는 괘법동 해수온천 건물을 각각 인수하여[52] 사업부별로 나눠 가면서 운영해 왔다.
셋째 아들 박천광은 '실로암의 집'[53]을 운영했다. 그의 독단적인 운영에 반발하는 이사들은 1명도 없었으며 특히 1990년부터 6번 이사를 지낸 이 모 씨는 2014년 <한겨레>와의 전화 통화에서 "자신은 서울에만 살며 1년에 몇 번 정도만 부산으로 내려간다"고도 밝혔다.
부산광역시로부터 지속적인 지원마저 받으면서 재산과 재단을 불리고 끊임없이 위세를 이어 온 이들을 언론에선 일명 '복지 재벌' 이라고 일컬었다. 박씨 일가는 4·5공 군사 정권에서 시작된 공권력이나 교계와의 유착이 매우 끈끈하여 허가 없이 실로암의 집 내부에 무허가 종교 기관을 세워서 운영해 왔고 관련 공무원들을 강사로 초청하였다. 이에 공무원들은 부산시의 특별감사를 받았으나 경징계에 그쳤으며 이마저도 취소되었다고 한다. # 박인근 대표는 2001년 주례동 토지 매각 당시 대금 중 20억 원을 부산저축은행에 입금하면서 김양 부회장과 인연을 맺었고 부산저축은행 등으로부터 끊임없이 거액을 빌렸는데 특히 2005년부터 4년간 재단이 그 저축은행으로부터 118억 원을 불법 대출 한 사실이 국정감사에서 드러났다.
게다가 한국에만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 2015년 3월 21일 자와 <한겨레> '형제복지원' 3-4회 등에 따르면 1995년 6월 22일 호주의 대형 골프장을 운영하는 비상장 법인 잡스타운사를 인수하더니 부인 임 씨와 딸, 사위에게 차례로 대표를 맡기고 거기에서 스태프로 고용했던 소수의 인원[54]조차 형제복지원 원생 부리듯 부린 것이 당시 스태프였다가 쪽방촌에서 살던 어느 노인의 증언으로 밝혀졌으며 처가 및 사위는 현지 한인교회에서 목사로 신분을 세탁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골프장 자체가 어찌 보면 한국에서의 일부 자산 세탁 목적도 겸하고 있었던 듯하다.
2011년 부산저축은행 사태가 터지자 형제복지원 문제가 다시 수면에 떠올랐고 2012년 9월 18일에는 부산시가 재단 감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그 사실이 동년 10월 24일 KBS2 <추적 60분>에도 보도됐다.
2014년 4월에 이런 사실이 드러나자 동년 5월 박천광은 시 보조금 횡령죄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으나 박인근은 뇌출혈로 쓰러진 상태라 3년 구형만 받았을 뿐 재판이 실시되지 않았다. 검찰은 재단과 유착한 공무원들을 기소할 방침이라고 전했고 경남·부산 지역에서 복지 재벌로 이름을 떨친 박인근 일당의 이같은 복지 사업의 운용 자금은 2014년 5월 시사저널이 조사한 결과 99%가 국고 지원금이었던 것으로 드러났으며 부산시는 '실로암의 집'을 법인 청산 하려고 한다고 했지만 수십억대 금액을 지속적으로 차입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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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암의 집'의 모습 | 잠금장치가 있는 방의 모습 |
2013년 현재 형제복지지원재단
그렇다면 2013년 현재 형제복지지원재단이 운영하는 유일한 시설, 〈실로암의 집〉 모습은 어떠할까. 대부분의 거주인들이 70~80년대 수용시설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똑같은 스포츠형의 머리모양에 고무줄이 들어간 츄리닝을 입고 있었다. 또 장애가 경한 사람들만 식당에서 밥을 먹을 뿐, 장애가 심한 사람들은 냉면 그릇 같은 커다란 그릇에 밥과 반찬을 모두 넣은 채 각자의 방안에서 혼자 벽을 보고 식사하고 있었다. 자해를 한다는 이유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침대에 끈을 묶어 허리를 결박한 사람도 있었고 하루 종일 창밖만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채광이 되지 않는 방안에서는 울부짖는 소리가 간간히 들렸고, 마당을 나와 걷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4층 건물에 1층만 거주인들의 숙소로 사용되고 있었고 2층 프로그램실, 교실(순회교육), 의무실은 모두 잠겨 있었다. 3층은 교회로, 공적인 시설에 무단으로 들어와 있어 부산시에 의해 고발조치 됐다. 공공시설물에 종교시설이 들어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4층은 뭘 하는 곳인지 모른다고 한다. 그곳에서 십몇 년을 산 거주인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 안에서조차 자유롭지 못한.....그곳의 주인들이었다. 그런데 이동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어디어디를 맘대로 못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지금은 아니라고 하지만 1층 법인 사무실 한 쪽 벽면에는 6-7대의 CCTV 화면 모니터가 박혀 있었다. 섬뜩했다. 옛날 형제복지원을 운영, 유지했던 방식과 똑같이 거주인들을 감시와 관리의 대상으로 취급했다는 방증이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뿐만 아니었다. 식단 또한 딱 3가지 반찬에 먹을 것이 없었고, 어묵 반찬은 상했는지 구토가 날 지경이었다. 부실한 식단 때문인지 거주인들 대부분은 비쩍 말라 있었고, 그들의 일상은 그저 무기력하게 초점 없는 쾡한 눈으로 허공을 맴도는 것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문을 열어놓고 있었지만 모든 거주인들의 방문에는 밖에 잠금장치가 걸려 있었고 침대 외에 개인 소지품이라고 볼 수 있는 물건은 단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지적, 자폐성 장애가 아닌 지체, 뇌병변장애가 있는 거주인 두 사람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의사를 표현했다. “'나가서 살고 싶다!”'고.- 인권오름, [26년, 형제복지원]<3> 87년 형제복지원, 아직도 건재하다 #
뉴스타파에서 박인근을 취재하려고 할 때 항변한, 그의 3남 박천광이 운영한 '실로암의 집'도 2013년 '인권오름'에서 조사한 결과 그다지 사정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박인근 본인은 2011년 4월 7일에 재단 대표이사 자리를 3남 박천광에게 넘기고 병환으로 인해 자택과 요양 병원을 오가면서 칩거했다가 2016년 6월 27일에 전라남도의 모 요양병원에서 사망했다.
2014년에 박인근 일가는 재단을 서종범 밀성학원 이사장에게 팔았고#, 부산시에서 뒤늦게 법인 청산을 시도했다. 이에 재단 측이 법인처분 취소소송을 제기했으나 2016년에 법원은 청산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빼돌릴 것은 다 빼돌리고 빈껍데기만 남은 상황이라 청산을 한다고 해도 국고 환수는커녕 적자 청산이 될 상황이라고 하며 기존 실로암의 집 이용자들은 타 시설로 보내졌다. #1, #2
박인근 사망 후, 막내딸은 사위와 함께 정신요양병원을 운영하고 형제복지원 산하 정신요양원 총무였던 차남은 술집을 운영하는 등 사실상 건재한 모습을 보였다. 2019년 2월 7일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서 해당 사건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육아원 시절 인권 유린 행위까지 폭로되었다. 취재진들은 박인근 전 원장의 차남을 만났으나 그는 아버지에 대해 모른다며 당시의 일을 싹 다 부정했다.
2018년 4월 11일, 법무부 과거사위원회 및 대검찰청 진상조사단은 법무부는 이 사건에 대해 재조사를 하기로 했다. #
2018년 9월 13일, 대검찰청 산하 검찰개혁위원회[55]는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 권고에 따라 재수사가 진행 중인 형제복지원 사건을 비상상고하라고 문무일 검찰총장에게 권고했다. #
2018년 11월 20일, 검찰은 비상상고(非常上告)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문무일 검찰총장은 대법원에 이 사건에 대한 비상상고를 요청하였다. # 비상상고란 판결에 중대한 법령 위반이 있는 경우 검찰총장이 대법원에 그 법령 위반을 이유로 판결의 변경을 구하는 것이다. 대법원은 비상상고 요청을 받으면 적법 요건을 확인한 후에 요청을 수용해 사건을 다시 심리하거나 기각할 수 있다. 일사부재리 원칙상 박인근에 대한 무죄 판결을 유죄 판결로 바꿀 수는 없지만 판결의 이유에서 박인근의 죄상과 이에 면죄부를 발급한 법원의 잘못을 선언할 수 있기 때문에 대법원의 이름으로 역사의 심판을 내릴 수는 있는 것이다. 형제복지원 특별법이 통과된다면 국가나 박인근의 유족에 대한 손해 배상 소송의 근거가 될 수 있다. #
그러나 2021년 3월 11일에 대법원은 비상상고를 기각하면서 무죄 판결을 유지했다. 재판부 측은 박인근이 내무부 훈령에 근거해 수용소를 운영했다는 점으로 보아 형법 20조에 의거 특수감금죄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피해자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당했다는 점으로 보아 국가 차원의 책임을 인정했다(2018오2 및 2019오1, 법률신문 기사).
2018년 9월 13일, 대검찰청 산하 검찰개혁위원회[55]는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 권고에 따라 재수사가 진행 중인 형제복지원 사건을 비상상고하라고 문무일 검찰총장에게 권고했다. #
2018년 11월 20일, 검찰은 비상상고(非常上告)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문무일 검찰총장은 대법원에 이 사건에 대한 비상상고를 요청하였다. # 비상상고란 판결에 중대한 법령 위반이 있는 경우 검찰총장이 대법원에 그 법령 위반을 이유로 판결의 변경을 구하는 것이다. 대법원은 비상상고 요청을 받으면 적법 요건을 확인한 후에 요청을 수용해 사건을 다시 심리하거나 기각할 수 있다. 일사부재리 원칙상 박인근에 대한 무죄 판결을 유죄 판결로 바꿀 수는 없지만 판결의 이유에서 박인근의 죄상과 이에 면죄부를 발급한 법원의 잘못을 선언할 수 있기 때문에 대법원의 이름으로 역사의 심판을 내릴 수는 있는 것이다. 형제복지원 특별법이 통과된다면 국가나 박인근의 유족에 대한 손해 배상 소송의 근거가 될 수 있다. #
그러나 2021년 3월 11일에 대법원은 비상상고를 기각하면서 무죄 판결을 유지했다. 재판부 측은 박인근이 내무부 훈령에 근거해 수용소를 운영했다는 점으로 보아 형법 20조에 의거 특수감금죄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피해자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당했다는 점으로 보아 국가 차원의 책임을 인정했다(2018오2 및 2019오1, 법률신문 기사).
이 사건과 관련한 국가 손해 배상 소송이 여러 건이 진행되었다.
- 사건 번호: 서울중앙지방법원 2021가합596894
- 재판부: 서울중앙지법 민사29부(한정석 부장판사)
- 사건 번호: 서울고등법원 2024나2004450
- 재판부: 서울고등법원 제4민사부
- 사건 번호: 서울중앙지방법원 2021가합1402, 서울중앙지방법원 2021가합563146
- 재판부: 서울중앙지법 민사14부(서보민 부장판사)
- 1년당 약 8천만 원을 기준으로 재판부는 대한민국이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두 번째로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한 판결이다. #
서울뿐 아니라 부산에서도 이와 별도로 진행 중인 재판이 있다.
- 사건 번호: 부산지방법원 2022가합48062
- 재판부: 부산지법 민사11부(전우석 부장판사)
- 2024년 2월 7일, 부산에서도 국가와 지자체가 배상해야 한다고 법원이 판결했다. #
- 사건 번호: 부산지방법원 2024가단323487
- 재판부: 부산지법 민사7단독(김유신 판사)
- 2025년 1월 22일에도 국가의 손배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이 나왔다. #
2013년 11월 3일에 방송되었다.
한겨레에서 2014년에 제작한 기획기사.
- 인트로
- 제1회
- 제2회
- 제3회
2014년 3월 22일(#932)에 '홀로코스트, 그리고 27년 - 형제복지원의 진실'이란 부제로 방영하면서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2014년 신안 염전 노예 사건과 더불어 조명받았다.[56]
이후 2015년 3월 21일(#977)에 '형제복지원 다시 1년,, 검은배후는 누구인가'라는 부제로 취재 1년 후의 상황을 취재한 방영분이 방송되었다.
이후 2015년 3월 21일(#977)에 '형제복지원 다시 1년,, 검은배후는 누구인가'라는 부제로 취재 1년 후의 상황을 취재한 방영분이 방송되었다.
2019년 12월 9일에 방송되었다.
부산일보에서 2020년에 제작한 '살아남은 형제들' 사이트와 영상 자료.
- '살아남은 형제들' 홈페이지 - 이 사이트에는 피해자들의 증언과 형제복지원 측 자료까지 총망라돼 있다.
2021년 7월 4일에 방송되었다.
2021년 10월 21일 방송되었다.
2022년 10월 4일 방송되었다.
2025년 7월 22일 방송되었다. 부산 형제복지원 소송을 위해 피해자 아들을 찾아나는 변호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2025년 8월 15일에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나는 생존자다 1화와 2화에서 다루고 있다.
2013년 3월 22일에 열린 형제복지원 사건 진실 규명 및 해결 방안 모색을 위한 토론 회의 자료집. 이 사건에 대한 기억·내용 및 관련 범죄자들이 건재한 현황, 사건과 국가 책임, 역사·국제적 유사 사례까지 망라되어 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2023년에 발행한 보고서.
- AP finds South Korea covered up mass abuse, killing of ‘vagrants’, CBS4, 2016-04-19
- "형제복지원 사건, 알려진 것보다 더 잔혹하고 광범위…한국 정부가 조직적으로 은폐" AP통신, 뉴시스, 2016-04-20
- Secrets of South Korea’s house of horrors hidden in Australia, Al Jazeera, 2021-12-10
- 라이프 온 마스 - 2018년에 방영된 OCN의 드라마. 1988년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의 12회에서 '행복복지원'이라는 곳이 등장하는데 88 올림픽으로 인하여 정화 활동을 했다는 멘트가 등장한다. 이 사건과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동네변호사 조들호2: 죄와 벌 - 2019년에 방영된 KBS 2TV 드라마. 이 사건이 모티브로 사용되었다.
- 은희 - 2020년에는 박유리 작가가 이 사건을 바탕으로 한 팩션 소설.
- 담보 - 작중에서 형제희망원이라는 복지원이 나오는 데 형제복지원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보인다.
- 오징어 게임 -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작중 게임이 열리는 섬의 분위기를 해당 사건을 모티브로 채용했다고 한다.
- 블라인드 - 2022년에 방영된 tvN 드라마. 드라마의 중심 사건이 되는 희망복지원 사건은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을 주요 모티브로 하였다. 사건의 경위와 세부적인 전개, 당시 관련자들이 솜방망이 처벌을 받은 것까지도 대부분 일치한다. 문제는 지금도 사람들 관심이 없는 틈을 타서 부산 형제복지원처럼 불법 감금 및 학대, 노동 착취가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 모범택시 2 - 2023년에 방영된 SBS 드라마. 15-16회의 에피소드가 이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복지원은 '형제자매복지원'으로 나온다.
- 휴먼버그대학교 - 일본의 영상 툰 콘텐츠. 명확하게 한국의 형제복지원 사건으로 소개되었으며, 일본어 원판으로 업로드된 후 2024년 6월 4일자 한국어 더빙판으로도 제작되어 업로드됐다.
- 2014년 7월에는 멕시코 서부 미초아칸주 아동 복지 시설 '대가족의 집'에서 생활하던 600여 명(어린이 492명 포함)이 썩은 음식을 먹고 쥐가 돌아다니는 더러운 방에서 생활하고 거리에서 구걸을 강요받으면서 폭행·마약 복용·성폭행까지 당했던 사실이 밝혀진 멕시코판 형제복지원 사건이 터졌다. 이 시설이 40년 동안 멕시코에서 대표적인 복지 시설로 손꼽혀 왔던 점[59], 설립자가 고위층과 유착한 점[60], 멀쩡한 집의 아이를 납치해 수용했다는 것, 설립자 본인도 범죄에 가담했다는 의혹이 있다는 것[61]도 이 사건과 유사하다. 이후 설립자이자 주인이던 로사 베르두스코(Rosa Verduzco, 1934~2018)[62]는 멕시코 법원에 납치, 인신매매, 조직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치매를 앓고 있다는 이유로 기소가 면제되었다고 한다. 결국 그녀는 제대로 된 죗값을 치르지 않은 채 실체가 발각된 지 4년도 안 된 2018년 6월 3일 향년 8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출처]
-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시기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고아원[64]들도 정부가 직접 학살을 지시하지는 않았으나 피해자들의 양산을 조장하고 수용 시설 점검도 아예 하지 않아 참혹한 환경 속에서 대량 학살 수준 인명 피해가 나왔다는 점에서 형제복지원과 비슷하다. 자세한 사항은 차우셰스쿠의 인구 정책 문서 참조.
- 이 사건이 발각된 시기와 완전히 똑같은 시기에 대전 성지원(현 자강의집)[68]에서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1987년 2월 10일 현장 조사를 한 야당(신한민주당) 의원들이 오히려 성지원에서 사주한 원생들에게 폭행당할 정도였다. 이 사건은 형제복지원보다 더 솜방망이 처벌로 끝났고 운영 재단인 천성원은 1998년에 양지마을 사건을 일으켰다. 그 사건은 규모만 축소되었지 이 사건과 완전히 똑같은 일이 민주화 이후[69]에도 계속된 사건이다. 양지마을은 사건 이후에도 '금이성 마을'로 교묘히 명칭을 바꾸어 아직도 군림하고 있다.[70] 그나마 성지원 사건은 2024년 9월 서울시립갱생원(현 시립은평의마을), 대구시립희망원, 경기 성혜원 등과 함께 진실화해위에서 진실 규명 결정이 내려졌다. # 당시 전두환의 1986 아시안 게임과 1988 서울 올림픽을 위한 '사회 정화' 목적으로 이런 유괴 및 학대에 동참한 사회 복지 시설은 한둘이 아니었다. 서울시립아동보호소와 동부여자기술원, 부산 덕성원, 성람재단, 경기여자기술학원에서도 국민을 마구잡이로 납치해서 잡아 가두고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으며 전두환 이전에도 선감학원, 대한청소년개척단 등이 존재했다.
- 사실 부산에는 형제복지원 사건 이전에 영화숙/재생원이라는 부랑아 수용시설이 있었는데 형제복지원과 비슷하게 부랑아들을 모아다 학대시켜놓은 시설이었다. 시신을 아무렇게나 거적데기를 덮은뒤 똥밭에 묻어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증언자에 따르면 그 형제복지원보다도 더 끔찍했다고 한다. 심지어 최고 관리자(이순영)가 퇴역군인 출신이라는점도 같다. 1960년대 말 들어서 점점 영화숙/재생원의 비리가 가시화되기 시작했고, 바로 시설 옆에서 천주교 계통의 행려환자구호소를 운영하던 외국인 신부 알로이시오(A. 슈월츠)가 영화숙/재생원을 고발했지만 시설 운영인측은 공권력의 비호를 업고 계속 버텼다. 결국 알로이시오 신부의 꾸준한 노력 끝에 시설은 해체되었고 1981년 수괴였던 이순영도 자연사했다. 거기 있던 원생 중 일부는 알로이시오 사제가 운영하는 시설로 전원되었지만, 불행이도 또 다른 일부는 형제복지원 등의 타 시설로 전원된 것으로 보인다. 노년기까지 살아남은 이들은 모여서 다른 아이들이 암매장되었을 영화숙 터 뒷산에 올라가 제사를 지내거나, 진실 규명을 위해 뛰고 있다. 영화숙/재생원에 관해서는 시사 직격 2023년 3월 31일에 다룬 적이 있으니 이 보도를 참고하면 된다.
- 2012년에는 형제복지원 횡령 등의 비리 사건에 대해 일부 복지 법인 대표이사들이 부산시, 시 의회를 대상으로 소명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 2019년 11월 9일 형제복지원이 돈벌이를 위해 해외 입양아 '공급책' 역할을 했다는 AP통신 보도가 나왔다.
- 2020년 7월에는 부산광역시 산하에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 추진위원회'가 설치됐다.
- 2021년 5월 20일,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 소속 피해자 13명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 배상 소송을 벌였다.
- 2021년 5월 27일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기가 결성되자 이 사건도 조사 대상에 포함됐고 8월 31일 부산시인권위원회도 박형준 부산시장에게 이 사건 피해자의 명예 회복 및 지원 체계 강화를 권고했다. 2022년 8월 24일 진실화해위는 이 사건이 "국가의 부당한 공권력 행사에 의한 인권 침해 사건"이라고 하여 진실 규명 결정을 내렸다.
- 당시 부산에는 밤 시간대에 애들이 밖에 돌아다니면 잡아간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이미 퍼져 있어 좀 조심해야 한다고 애 키우는 가정에 부모가 어린애들한테 야간 통행금지[71] 비슷한 언질을 전달하였으며 잡아가는 차량이 '선도차'라고 적혀 있는 차량인지도 시민들이 꽤 알고 있었다. 이 부분에서 가장 큰 문제가 잡혀가면 파출소 같은 데서 약간의 소란을 피우던 취객처럼 꾸중을 듣는 줄 알았지 경찰, 공무원들이 아이를 납치 유괴 한 후 그대로 지옥행일 줄은 상상도 못 하는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서산개척단도 이런 부분이 국민들(대의민주주의 유권자)에게 문제라고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의 한 연구에서 지적하였다. #
- 이 사건 피해자 중에서는 선감학원에 끌려갔다가 나온 뒤 형제복지원으로 다시 잡혀갔던 사례도 있다. 삼청교육대에서 끌려갔다가 나온 뒤 형제복지원으로 다시 잡혀갔던 사례[72]도 있다.
- 다행히 다른 사건들과는 다르게 국가가 권력으로 피해자들의 손해 배상을 무효로 만들지 못한 사건 중 하나이다.
- 형제복지원tv - 생존자들이 모여 만든 유튜브 채널. 당시 상황과 증언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1] 형제복지원 운영 기간 전체로 넓힐 경우 1960년 7월 20일부터 1992년 8월 20일까지.[2] 현재 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 주례한일유앤아이아파트, 주례센텀아파트, 주양초등학교, 반도보라아파트, LG신주례2단지아파트 일대[3] 2022년에 형제복지원에 과거 국가보안법, 국방경비법, 반공법 등의 위반 사범 15명을 형제복지원에 무연고자로서 강제 수용 하고 감시했을 뿐만 아니라 간첩 조작 수사 공작을 위한 공작원 위장 침투도 시도된 사실이 밝혀졌다. #[4] 형제복지원 담임목사이자 2인자. 박인근의 사위.[5] 박정희 정부, 최규하 정부 및 전두환 정부.[6] 사건 은폐 및 아동 유괴 가담.[7] 사건 은폐 가담.[8] 1975년 내무부 훈령으로 확대 개편 된 것이지 전신인 '형제육아원'은 이미 제3공화국 초기부터 있었다.[9] 1987년 박인근이 체포된 후 관선 체제에도 과거 악습은 끊이지 않았는지 후술했듯 1988년까지 시설 내에서 사망한 무연고자 38명이 더 나온 게 2014년 부산직할시공원묘지관리소(현 영락공원사업단) 매장처리부서 확인됨.[10] 내무부 훈령은 강제 수용의 최소한의 법적 근거를 만든 것일 뿐, 그 전부터 아래 나열되듯 공권력에 의한 납치와 구금 등 국가 폭력이 자행되었으며 이 훈령 자체도 당연히 국민 기본권을 침해한 불법이다.[11] 내무부 훈령 또한 전년도에 발발한 박정희 대통령 저격 미수 사건으로 부인을 잃고 본인도 암살당할 뻔하던 트라우마로 하여금 발발한 박정희 정부 폭주의 일환으로 해석하는 것이 정설이다. 당시 간첩의 위장 수단으로 써먹을 여지가 많았던 부랑아와 양아치가 제대로 찍혀버린 상태였고 반공 방첩이란 핑계로 이들을 닥치는대로 구금시킬 명분이 필요했던 것.#[12] 자세한 내용은 1988 서울 올림픽 문서 참고.[13] 이 때문에 당시 1988 서울 패럴림픽에 대해 장애인 단체에서 냉소적인 시선이 많았다. 패럴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직위원회 사무국을 의료보험관리공단 청사에 마련했을 때 장애인 단체 사이에서 "장애자 올림픽 개최할 돈으로 장애인에 대한 복지에 써라. 우리는 수십 년 노력해도 사무실 한 칸 얻기도 힘든데 이런 데 낭비를 하느냐"는 식의 질타가 많이 쏟아져 나왔을 정도로 분위기가 꽤 험악했다는 에피소드가 나올 정도.[14] 군대, 갱단, 민병대, 마약 카르텔 상관없이[15] 다만 박인근 원장은 육군 상사 출신의 전직 군인이긴 했고, 이것이 형제복지원 학살 구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16] 지방 자치제가 1991년에야 부활할 정도로 부산 시정도 중앙 정부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었기에 정부에서 직접적으로 학살을 지원, 조력해 줬다고 봐도 무방하다.[17] 그나마 외국에서 유사한 사례라 할 수 있는 곳은 옛 칠레의 콜로니아가 있지만, 행적은 형제복지원보다는 아가동산과 더 유사하다.[18] 그래서인지 시설 안에는 '새마음교회'란 종교 시설이 있었다.[19] 현재 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 백양대로 372[20] 노역자들 중 정치범도 포함되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뿐 일부 노역자들이 할당량 채우기에 혈안이 된 관계자들에게 잡혀간 점, 피해 보상이 제대로 안 되었다는 점은 삼청교육대, 주 납치 대상이 어린이었다는 점을 보면 선감학원과 유사하다. 특히 5공 시절에는 이 3개의 시설이 동시대에 운영 중이었다.[21] 당시 한국의 인구 중 60세 이상 인구의 비중은 5% 미만이었다.[22] 개중은 입소 사실이 가족들에게 알려지면 친지 차원의 강력한 항의로 풀려나는 일부의 경우들은 존재했다. 허나 접근한 가족마저 형제복지원에 감금시켜 같은 희생양 삼는 비극까지 만들기도 하였고, 가족들의 수소문에도 끝내 형제복지원 소재 사실을 알아내질 못하여 실종자 취급받거나 아예 가족이 없는 실제 부랑인이라면 꼼짝없이 영영 갇히는 셈이었다.[23] 남녀동이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성 성폭력 피해자는 절대다수가 직원에 의한 것이다. 남성 피해자는 직원과 기존 수감 인원이 모두 포함된다.[24] 복지원이 한창 운영되던 1980년대 기준 쥐꼬리로 악명높던 공무원의 월급이 20만원 내외, 일당 환산시 8천원 수준이던 사실과 비교하자면 저 금액조차 얼마나 터무니없는 박봉인지 체감될 것이다.[25] "미친놈, 지금이 어느 땐데 그런 수사를 하느냐" - 브레이크 없는 벤츠(1993, 예하)[26] 병리과 의사가 법의학자가 된다.[27] 부산역은 선로 최남단에 위치해 있다 보니 도시로서의 특성과 겹쳐지며 부랑민과 불량아들의 종착지로도 악명 있는 곳이었다.[28] 부산항 법률사무소 대표 변호사. 윤석열 정부에서 임명된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룸살롱에서 경찰관 폭행, 위안부 관련 망언, 12.3 비상계엄 옹호 및 헌법재판소 파괴 선동 등의 과격한 행보를 보이며 평판이 심하게 추락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29] 원장실의 대형 금고를 산소 용접기를 동원하여 열어 보니 각종 예금 증서들과 달러화, 엔화 등이 쏟아져 나왔다.[30] 초지였는데 정식으로 초지 훼손 허가가 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31] 동물들을 위한 축사를 수용자들의 숙소로 용도 변경[32] 당시 울산에는 구치소가 없었다.[33] 사건 번호 87고합33[34] 당시 박인근의 변호는 전 대법관 전상석과 이재환이 맡았으며 무엇보다 이 시기는 6월 항쟁이 절정에 달하는 과정에 있던 시기랑 맞물려 있다. 자연스럽게 관심을 덜 가질 수밖에 없었다.[35] 사건번호 87노1048[36] 사건번호 87도2671[37] 사건번호 88노144[38] 사건 번호 88도1580[39] 사건번호 88노593[40] 사건번호 89도698[41] 상고심 당시 대법관 중에는 훗날 박근혜 정부의 초대 총리 후보로 거론됐던 김용준이 있었으며 주범 박인근에게 2년 6개월의 형을 확정한 부분에 대해서는 김용원 변호사는 엉터리 전제하에서 내려진 판결이라고 자신의 저서에서 비판했다.[42] 위에 사진에서 봤듯이 강제 수용 되었을 때 머그샷처럼 찍은 것이며 얼굴 밑의 번호는 '수용된 연도(1984년)-수용된 달(10월)-수용된 사람의 번호'(3618번째)를 뜻한다.[43] 국제신문[44] 2012, 문주출판사/2013, 이리(도서출판 리젬)[45] 민주화운동가 박래전 열사의 형.[46] 여담으로 김무성 본인 역시 부산광역시 출신이었다.[47] 경향신문 1991년 3월 12일자.[48] 1971년부터는 형제원, 1979년에는 형제복지원으로 각각 변경했다.[49] 운영자금 명목으로 1985년에는 18억 원, 이듬해에는 21억 원을 국가 및 부산시에서 지원받았다 - 브레이크 없는 벤츠(1993, 예하)[50] 1980년대를 기준으로 놓으면 2023년 환율로 연간 80억 원가량을 지원받은 셈이다.[51] 시사매거진 원본 기사[52] 단, 그 중 'ㅂ' 스포츠센터는 2011년에 건물 소유권이 넘어가서 형제복지지원재단 측과 더 이상 관련이 없다는 얘기가 있다.[53] 기장군 정관면 곰내재 부근에 있으며 약 400m 앞에 형제복지지원재단 정류장이 있다. 하지만 이 정류장을 지나는 버스는 73번뿐인데 이 노선은 배차 간격이 60~75분이다. 더 자주 오는 다른 노선을 이용하려고 해도 곰내터널입구까지 2.4km를 걸어야 하기 때문에 탈출을 감행하려고 하더라도 탈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으며 2016년 재단 청산으로 문을 닫아 폐건물이 됐다. 심지어 2002년 8월에는 이곳에서 호우로 인한 산사태가 발생하여 원생 4명이 매몰되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이때 박인근이 "내가 책임질 문제냐고, 내가 죽였냐!!!"라고 고함을 질렀다. 참고로 한국어 위키백과에도 해당 사건을 다룬 문서가 있다.[54] 한국인이었는데 그것도 교민이 아니라 한국에서 데려온 직원이었다. 현지인이나 교민을 팼다가는 당연히 문제가 생기므로 영어를 못 해 현지인에게 도움을 청하기 힘든 순수 한국인들만 데려와 부려먹었다. 이 방식은 2018년에도 어떤 작자가 벤치마킹했음이 밝혀졌다.[55] 위원장은 송두환 전 헌법재판관이다.[56] 두 사건의 공통점은 장애인, 노숙자 등을 납치해 강제 노역을 시켰다는 것과 지역 사회와의 봐주기식 유착이 있었다는 것이다.[57] 3년간 사망자가 무려 76명이다.[58] 당시 오카다 갱생관의 관장이 워낙 교묘하게 은폐 공작을 벌여서 지역 사회에서는 '모범 시설'로 칭송이 자자했으나 마이니치신문 기자 오모리 미노루와 고니시 겐키치가 목숨을 걸고 갱생관에 잠입 취재 한 내용이 보도되면서 진상이 밝혀졌다.[59] 베르두스코는 부유층 집안의 딸로써 1947년 이 시설을 설립했다고 하며 실체가 밝혀지기 전까지 '마마 로사(Mama Rosa)'로 불려 왔다.[60] 그녀는 기업, NGO, 멕시코 정부로부터 백만 달러의 기부금을 받아 왔으며 늦어도 1985년부터 그녀에 실체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다고 하지만 모두 불기소 처분되었다. 심지어 그녀가 체포되자 25명의 작가, 정치인, 지식인으로 구성된 그룹이 그녀가 누명을 썼다는 내용의 공개 서한을 발표하거나 비센테 폭스 전 멕시코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그녀를 옹호하는 등 뭐가 수상한 냄새가 나는 모습을 보였다.[61] 베르두스코는 아이들에 대한 성적 학대를 인지하면서도 묵인한 것은 애교였고 어린이들에 대한 성적 학대를 지시한 것을 넘어 본인도 소녀에 대한 성적 학대에 가담했다고 한다.[62] 본인은 의도적으로 시설을 열악하게 만든 것은 아니고 나이가 들면서 시설 관리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고 주장했지만 첫 기소될 당시 베르두스코의 나이는 늙지는 않은 나이인 51세였다.[출처] SBS, 연합뉴스, EBS 뉴스, BBC 기사 1, BBC 기사 2, 멕시코 언론 기사 1, 멕시코 언론 기사 2, 멕시코 언론 기사 3[64]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 특성상 저 고아원들은 모두 국영이었다.[65] 실질적으로는 1930년[66] 형제복지원처럼 당연히 어린이와 노인들도 수감되었다.[67] 외부의 가장 가난한 노동자보다 생활 수준이 더 낮아야 한다며 의도적으로 생활 환경을 열악하게 했다고 한다.[68] 운영 주체는 사회복지법인 천성원이며 법인 설립자는 노재중. 500명을 수용했는데 1984년부터 1987년까지 단 3년 동안 121명이 죽어나간 곳이었다. 물론 수용되었다는 부랑자들은 절대다수가 억울하게 검거, 납치된 일반인들이었다.[69] 그것도 국민의 정부 극초기까지.[70] 공식적으로는 이름을 바꾼 뒤 2003년경 금이성마을을 포함한 몇 개의 시설을 묶어 별도의 사회 복지 법인으로 독립시켰지만 독립한 사회 복지 법인의 이사장이 노재중의 후처이며 금이성마을 직원들도 양지마을 사건 당시의 그 직원들이라고 한다.[71] 공식적으로는 1982년 극초반 해제되었다.[72] 이 피해자는 부마민주항쟁에 참여했다.[73] 문서 상단에 언급된 2020년 국회의사당에서 고공 농성을 했던 최승우 씨로, 넷플릭스 '나는 생존자다'에서 해당 내용을 증언했다.[74] 학교에서 급식으로 받은 빵이었다고 한다. 당시 할머니와 단 둘이서 살았던 조손가정이어서 받은 것이라고.[75] 당연히 최 씨는 절도 혐의를 부정하였으나 경찰의 고문으로 거짓 자백을 하였다고 밝혔으며, 지금도 경찰 제복만 보면 트라우마가 발작하고 경찰과 시비가 붙어 전과도 여러 차례 받았을 정도로 정상적인 생활을 보내지 못하는 등 인생이 망가졌다.[76] 여기서 그치지 않고 경찰에게 고문당했을 때는 라이터로 성기를 지지는 고문까지 당했다고 하며, 입소 초반에는 동성 성폭행 피해까지 입었다고 한다.[77] 1987년에 지혜의 눈이라는 제목의 강의에서도 언급된거다.===
1930년 경상남도 울산군 강동면 정자리 (現 울산광역시 북구 정자동)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1948년에 중학교[A]를 졸업한 후 국방경비대에 입대해 헌병 병과에서 상사(부사관)으로 복무하다가[8] 1962년에 제대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며 육군 특무대 소속이었던 1960년에 군무이탈죄로 영창에 갔다 온 전과가 있다. # 그러나 박인근의 헌병 전적도 알고 보면 사칭이었고 실제로는 수송 병과 출신이었다고 한다. #
군 복무 시절 그는 휴가 때마다 장인이 운영하던 부산광역시 남구 감만동에 위치한 형제육아원에 드나들면서 사회복지사업에 관심을 가졌는데 제대 후 장인으로부터 형제육아원을 인수하고 1965년 아동복지시설 인가를 따내 시설을 급속히 확장시켰다.
1975년 부산시와 '부랑인 일시 보호 위탁계약'을 맺고 부산직할시 북구 주례동 산 18번지(現 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 일대) 국유림을 헐값으로 불하받아 시설을 옮긴 후, 1980년대까지 사회복지사업의 거물로 이름을 날렸으며 1983년 '한국부랑인복지시설연합회(현 한국노숙인복지시설협회)' 설립에 참여하여 초대 회장을 지냈다.
그는 복지시설을 운영하면서 정부 관계자 및 부산시 공무원과 끈끈한 인맥을 맺었으며, 이러한 인맥을 바탕으로 1981년 국민포장 석류장, 1984년 국민훈장 동백장 등 온갖 수훈[9]을 받고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상임위원까지 맡았으며, 1981년 <종점 손님들>[10] 이라는 형제복지원을 미화한 영화도 제작됐고#, 1982년에 <탄생>이라는 제목의 박인근을 미화한 드라마가 방송되기도 했을 정도였다.[11]

자세한 내용은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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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근 朴仁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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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사망 | |
학력 | |
병역 | |
국적 | |
종교 | |
자녀 | |
경력 | 형제복지지원재단 대표이사 (1965~1987/1991~2011) 형제복지원 원장 한국노숙인복지시설협회 1대 회장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상임위원 사회복지법인 신양원 이사장 (2008~2010) |
대한민국의 기업인. 사회복지법인 느헤미야(舊 형제복지원)를 설립했다. 인권 유린 사건인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의 총책임자이자 악질 특수감금 사범이다. 대한민국 군사정권과 유착하여 성폭행, 유괴, 인신매매가 일어난 형제복지원을 포함한 본인의 다양한 사업체에서 횡령, 폭행, 강제노동, 특수감금 등의 범법행위를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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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외신인 알자지라에 보도된 부부 사진 |
1930년 경상남도 울산군 강동면 정자리 (現 울산광역시 북구 정자동)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1948년에 중학교[A]를 졸업한 후 국방경비대에 입대해 헌병 병과에서 상사(부사관)으로 복무하다가[8] 1962년에 제대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며 육군 특무대 소속이었던 1960년에 군무이탈죄로 영창에 갔다 온 전과가 있다. # 그러나 박인근의 헌병 전적도 알고 보면 사칭이었고 실제로는 수송 병과 출신이었다고 한다. #
군 복무 시절 그는 휴가 때마다 장인이 운영하던 부산광역시 남구 감만동에 위치한 형제육아원에 드나들면서 사회복지사업에 관심을 가졌는데 제대 후 장인으로부터 형제육아원을 인수하고 1965년 아동복지시설 인가를 따내 시설을 급속히 확장시켰다.
1975년 부산시와 '부랑인 일시 보호 위탁계약'을 맺고 부산직할시 북구 주례동 산 18번지(現 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 일대) 국유림을 헐값으로 불하받아 시설을 옮긴 후, 1980년대까지 사회복지사업의 거물로 이름을 날렸으며 1983년 '한국부랑인복지시설연합회(현 한국노숙인복지시설협회)' 설립에 참여하여 초대 회장을 지냈다.
그는 복지시설을 운영하면서 정부 관계자 및 부산시 공무원과 끈끈한 인맥을 맺었으며, 이러한 인맥을 바탕으로 1981년 국민포장 석류장, 1984년 국민훈장 동백장 등 온갖 수훈[9]을 받고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상임위원까지 맡았으며, 1981년 <종점 손님들>[10] 이라는 형제복지원을 미화한 영화도 제작됐고#, 1982년에 <탄생>이라는 제목의 박인근을 미화한 드라마가 방송되기도 했을 정도였다.[11]
형제복지원 운영 과정에서 그는 오만 악행들을 저질렀는데 그 악행들은 실로 극악무도하고 무자비했다. 수천 명[12]에 이르는 일반인 남녀를 납치하여 감금한 후[13] 강제노동, 폭행, 고문 등의 무자비한 가혹행위를 자행했고 납치된 여성은 미성년자 소녀까지 성폭행과 성고문을 통해 노예로 만들어서 강제노동에 투입했으며[14] 이러한 과정에서 본인이 인정한 것으로만 513명을 살해했다.
2022년에 형제복지원에서의 공식 사망자 수는 657명으로 변경되었다. # 이는 쉽게 말해 12년 동안 빠짐없이 1주일 동안 1명씩 죽어나간 셈이고 평시 수용자 수를 3,000여 명이라고 가정하면 형제복지원의 연간 사망률은 거의 2%에 육박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15]
형제복지원 수용자 중 중 70%가 노숙자가 아닌 가족과 멀쩡한 직장이 있는 일반인이었다. 심지어 그는 울산 작업장의 대장, 소대장을 임명할 때에는 고의적으로 전과가 많고 난폭한 자들을 임명했다고 한다.[16]
의무과 직원에 의해 남자 어린이도 성폭행을 당했다는 피해 당사자의 증언이 있으며 얼굴이 예쁘장한 어린이라면 누구나 성별과 상관없이 성폭행의 대상이었다는 증언이 있다. 남자 아이들은 여장을 시킨 채 강간했다고 한다. 게다가 복지원 안에서 임신하면 계단에서 굴리거나 때려서 낙태시켰고 임산부가 사망하면 암매장했으며# 심지어 그가 직접 구타해 살해한 사람이 40~50여 명이라는 증언까지 나왔다. #1 #2[17][18]
아버지가 사라진 아들을 찾으러 전국을 해메다가 결국 죽었다고 생각해 낙담한 나머지 자살을 선택했지만 아들은 납치당해 이곳에 붙잡힌 채로 생존해 있었다거나 납치된 아들과 딸을 구출하러 찾아온 아버지마저 감금된 후 강제노동에 투입되었다는[19] 비극적인 사례도 있다.
생존자들은 해운대 바닷가에 놀러 왔다가 끌려온 서울대학교 학생과 일본인 2명도 있었다고 증언했고(#) 심지어 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정치범까지 형제복지원에 강제 수용되었다고 한다.[20] 물론 그들의 정확한 생사는 확인할 수 없다. 집단매장한 곳에 아파트가 들어섰기 때문에 정확한 살해 피해자 수는 현재까지도 알 수 없다.[21]
물론 그는 국고보조금을 횡령해 그 돈으로 고급 아파트, 여러 개의 콘도미니엄과 골프 회원권 등을 구입하고[22] 체포될 때까지 33개의 필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23] 납품청부서와 세금계산서를 변조하며 운영자금, 피복비, 급식비, 약품비, 장례비까지 횡령해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부족한 치료 속에서 죽어나간 것과 달리[24] 현금 20여억 원[25], 부동산으로 주택 10여채[26]와 울산과 울주 등지의 야산을 포함해 총 300억 원대의 재산을 보유했던 것은 물론이고[27]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던 시기에 일본, 홍콩, 대만을 자주 드나든 것을 넘어 '외국 복지시설 시찰'을 이유로 들어 미국을 다녀온 적도 있다고 한다.[28]
그러면서 그는 1983년까지 집 한 채도 마련하지 않은 채 가족을 복지원 사무실에 기거하게 하고 옷 한 벌 변변하게 해 입지 않는 등 철저히 자신을 사회사업가로 위장했던 이중적 모습이었다. # 물론 이조차도 외부에만 노출하는 쇼에 불과했으며, 복지원 내에서 박인근이 거주하는 시설은 매우 안락하게 만들어져 있었고, 가족들은 그 시절에도 사치를 부리며 부유하게 생활하였다.
2022년에 형제복지원에서의 공식 사망자 수는 657명으로 변경되었다. # 이는 쉽게 말해 12년 동안 빠짐없이 1주일 동안 1명씩 죽어나간 셈이고 평시 수용자 수를 3,000여 명이라고 가정하면 형제복지원의 연간 사망률은 거의 2%에 육박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15]
형제복지원 수용자 중 중 70%가 노숙자가 아닌 가족과 멀쩡한 직장이 있는 일반인이었다. 심지어 그는 울산 작업장의 대장, 소대장을 임명할 때에는 고의적으로 전과가 많고 난폭한 자들을 임명했다고 한다.[16]
의무과 직원에 의해 남자 어린이도 성폭행을 당했다는 피해 당사자의 증언이 있으며 얼굴이 예쁘장한 어린이라면 누구나 성별과 상관없이 성폭행의 대상이었다는 증언이 있다. 남자 아이들은 여장을 시킨 채 강간했다고 한다. 게다가 복지원 안에서 임신하면 계단에서 굴리거나 때려서 낙태시켰고 임산부가 사망하면 암매장했으며# 심지어 그가 직접 구타해 살해한 사람이 40~50여 명이라는 증언까지 나왔다. #1 #2[17][18]
아버지가 사라진 아들을 찾으러 전국을 해메다가 결국 죽었다고 생각해 낙담한 나머지 자살을 선택했지만 아들은 납치당해 이곳에 붙잡힌 채로 생존해 있었다거나 납치된 아들과 딸을 구출하러 찾아온 아버지마저 감금된 후 강제노동에 투입되었다는[19] 비극적인 사례도 있다.
생존자들은 해운대 바닷가에 놀러 왔다가 끌려온 서울대학교 학생과 일본인 2명도 있었다고 증언했고(#) 심지어 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정치범까지 형제복지원에 강제 수용되었다고 한다.[20] 물론 그들의 정확한 생사는 확인할 수 없다. 집단매장한 곳에 아파트가 들어섰기 때문에 정확한 살해 피해자 수는 현재까지도 알 수 없다.[21]
물론 그는 국고보조금을 횡령해 그 돈으로 고급 아파트, 여러 개의 콘도미니엄과 골프 회원권 등을 구입하고[22] 체포될 때까지 33개의 필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23] 납품청부서와 세금계산서를 변조하며 운영자금, 피복비, 급식비, 약품비, 장례비까지 횡령해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부족한 치료 속에서 죽어나간 것과 달리[24] 현금 20여억 원[25], 부동산으로 주택 10여채[26]와 울산과 울주 등지의 야산을 포함해 총 300억 원대의 재산을 보유했던 것은 물론이고[27]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던 시기에 일본, 홍콩, 대만을 자주 드나든 것을 넘어 '외국 복지시설 시찰'을 이유로 들어 미국을 다녀온 적도 있다고 한다.[28]
그러면서 그는 1983년까지 집 한 채도 마련하지 않은 채 가족을 복지원 사무실에 기거하게 하고 옷 한 벌 변변하게 해 입지 않는 등 철저히 자신을 사회사업가로 위장했던 이중적 모습이었다. # 물론 이조차도 외부에만 노출하는 쇼에 불과했으며, 복지원 내에서 박인근이 거주하는 시설은 매우 안락하게 만들어져 있었고, 가족들은 그 시절에도 사치를 부리며 부유하게 생활하였다.
1987년 1월 10일, 부산지방검찰청 울산지청이 형제복지원과 관련해 수사에 착수했으며 동년 1월 17일 원장 박인근, 총무 김돈영, 사무총장 주영은, 목장파견대장 성태은, 목장파견대소대장 임채홍 5명을 특수감금, 초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했고 박인근의 아들 박두선을 입건했다.
울산남부경찰서에 구속된 상태였는데도 복지원 운영에 관여하는가 하면 동년 4월 10일부터 5월 16일까지 경찰관의 집에서 목욕을 한다거나 관절염으로 병원에 가는 등 32번이나 외출이 허가된 바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당시 간수장이었던 송 모 경사는 뇌물수수 혐의로 5월 20일에 구속됐고 경찰서장 등 3명이 징계를 받았다.
6월 9일 부산지방검찰청 울산지청의 김용원 검사는 결심공판에서 박인근에게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위반(업무상횡령), 특수감금, 초지법위반, 외국환관리법위반, 건축법위반 혐의로 징역 15년에 벌금 6억 8천 1백 78만원을 구형했다.
1987년 6월 23일,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원 형사합의부(재판장 고왕석 부장판사)는 그에게 특수감금,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위반(업무상횡령) 등 5개 죄목을 적용해 징역 10년, 벌금 6억 8천 1백 78만원을 선고했다.
그러나 1987년 12월 12일, 항소심 재판부인 대구고등법원 형사2부(재판장 송재헌 부장판사)는 "박인근 피고인의 사회사업가로서의 공과에 대한 평가 등 정상을 참작한다"며 벌금 없이 징역 4년으로 대폭 형량을 축소시켜 선고했다.
1988년 3월 10일, 대법원 형사1부는 "원생들을 수용한 것은 법령에 의한 정당행위"이므로 특수감금죄 적용은 법리를 오해한 위법이라며 파기환송해 대구고등법원으로 사건을 되돌려보내기까지 했다.
1988년 7월 8일, 대구고등법원 제1형사부(재판장 정용인 부장판사)가 감금죄에 해당한다며 대법원의 결정에 불복했지만 그에게 기존 2심보다 낮은 징역 3년을 선고했다.
1988년 11월 8일, 대법원은 다시 특수감금을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했고 1989년 3월 대구고등법원은 특수감금을 무죄로 판단해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했다.
결국 1989년 7월 13일, 대법원 형사1부(주심 배만운 대법관)[29]는 그에게 선고한 원심 판결을 인정했고 징역 2년 6개월이 확정되었다.
헌법재판소에 그의 불법감금 혐의 무죄가 부당하다는 헌법소원도 접수되었지만 1989년 9월 6일에 헌법재판소는 이를 각하 처분하였다.
울산남부경찰서에 구속된 상태였는데도 복지원 운영에 관여하는가 하면 동년 4월 10일부터 5월 16일까지 경찰관의 집에서 목욕을 한다거나 관절염으로 병원에 가는 등 32번이나 외출이 허가된 바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당시 간수장이었던 송 모 경사는 뇌물수수 혐의로 5월 20일에 구속됐고 경찰서장 등 3명이 징계를 받았다.
6월 9일 부산지방검찰청 울산지청의 김용원 검사는 결심공판에서 박인근에게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위반(업무상횡령), 특수감금, 초지법위반, 외국환관리법위반, 건축법위반 혐의로 징역 15년에 벌금 6억 8천 1백 78만원을 구형했다.
1987년 6월 23일,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원 형사합의부(재판장 고왕석 부장판사)는 그에게 특수감금,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위반(업무상횡령) 등 5개 죄목을 적용해 징역 10년, 벌금 6억 8천 1백 78만원을 선고했다.
그러나 1987년 12월 12일, 항소심 재판부인 대구고등법원 형사2부(재판장 송재헌 부장판사)는 "박인근 피고인의 사회사업가로서의 공과에 대한 평가 등 정상을 참작한다"며 벌금 없이 징역 4년으로 대폭 형량을 축소시켜 선고했다.
1988년 3월 10일, 대법원 형사1부는 "원생들을 수용한 것은 법령에 의한 정당행위"이므로 특수감금죄 적용은 법리를 오해한 위법이라며 파기환송해 대구고등법원으로 사건을 되돌려보내기까지 했다.
1988년 7월 8일, 대구고등법원 제1형사부(재판장 정용인 부장판사)가 감금죄에 해당한다며 대법원의 결정에 불복했지만 그에게 기존 2심보다 낮은 징역 3년을 선고했다.
1988년 11월 8일, 대법원은 다시 특수감금을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했고 1989년 3월 대구고등법원은 특수감금을 무죄로 판단해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했다.
결국 1989년 7월 13일, 대법원 형사1부(주심 배만운 대법관)[29]는 그에게 선고한 원심 판결을 인정했고 징역 2년 6개월이 확정되었다.
헌법재판소에 그의 불법감금 혐의 무죄가 부당하다는 헌법소원도 접수되었지만 1989년 9월 6일에 헌법재판소는 이를 각하 처분하였다.
출소 후에는 개신교 집사가 됐다가 1991년에 재단을 되찾아서 중증 장애인 요양시설 '실로암의 집'을 개설했고 2000년대 들어 부산저축은행 등으로부터 돈을 끌어모아 온천, 헬스장, 부동산(#) 임대 사업과 한국 야산을 소유했으며 1995년에는 호주의 비상장법인 잡스타운사를 사들여 골프장이 포함된 대형 스포츠센터를 소유한 후 고용된 한국인 직원[30]의 치아가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심한 안면 구타와 피해자에게 평생 장애로 남게 된 골프채 폭행을 통해 갑질과 저비용으로 경영해 왔다.
513명 살해가 발각된 후 형제복지원에 관선 이사들이 파견됐고 1988년 재육원을 거쳐 1991년 그가 되찾은 욥의 마을, 2002년 형제복지지원재단에 이어 2013년 2월에 "느헤미야"로 법인명을 변경해서 법의 제한 사항 없이 그와 가족에 의해 멀쩡히 경영해 왔다. 오히려 헐값에 매입했던 기존의 주례동 형제복지원 부지를 아파트 건설회사에 200억이라는 비싼 가격에 팔고 정관으로 이전하면서 막대한 차익을 얻었다. # 이렇게 박인근 일가가 보유한 수익이 약 1천억 원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또 다른 비리와 횡령 사건을 일으켜서 당국의 수사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비리와 횡령 사건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2002년에 해당 재단 산하 시설인 실로암요양원에서 중증 지체장애인 청소년 4명이 산사태 사고로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해당 시설을 준공할 때 부지의 경사가 심해 복지시설이 들어설 장소가 아니라는 이유로 기장군청이 세 차례나 거부했지만 삼풍백화점의 이준처럼 행정심판까지 벌여 공사를 강행했다. # 2002년 8월 10일에 이 사건을 보도한 KBS 뉴스 9의# 1분 20초 부분을 보면 "내가 책임질 문제냐고, 내가 죽였냐!!!"라고 소리치는 그의 모습이 나온다.[31] 적어도 2008~2009년까지는 공개적으로 활동했다.#[32]
2010년에는 '명예회복을 하겠다'며 14권 분량, 총합 1,885쪽의 회고록 겸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형제복지원 이렇게 운영되었다!>를 발간하기도 했다.[33]
513명 살해가 발각된 후 형제복지원에 관선 이사들이 파견됐고 1988년 재육원을 거쳐 1991년 그가 되찾은 욥의 마을, 2002년 형제복지지원재단에 이어 2013년 2월에 "느헤미야"로 법인명을 변경해서 법의 제한 사항 없이 그와 가족에 의해 멀쩡히 경영해 왔다. 오히려 헐값에 매입했던 기존의 주례동 형제복지원 부지를 아파트 건설회사에 200억이라는 비싼 가격에 팔고 정관으로 이전하면서 막대한 차익을 얻었다. # 이렇게 박인근 일가가 보유한 수익이 약 1천억 원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또 다른 비리와 횡령 사건을 일으켜서 당국의 수사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비리와 횡령 사건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2002년에 해당 재단 산하 시설인 실로암요양원에서 중증 지체장애인 청소년 4명이 산사태 사고로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해당 시설을 준공할 때 부지의 경사가 심해 복지시설이 들어설 장소가 아니라는 이유로 기장군청이 세 차례나 거부했지만 삼풍백화점의 이준처럼 행정심판까지 벌여 공사를 강행했다. # 2002년 8월 10일에 이 사건을 보도한 KBS 뉴스 9의# 1분 20초 부분을 보면 "내가 책임질 문제냐고, 내가 죽였냐!!!"라고 소리치는 그의 모습이 나온다.[31] 적어도 2008~2009년까지는 공개적으로 활동했다.#[32]
2010년에는 '명예회복을 하겠다'며 14권 분량, 총합 1,885쪽의 회고록 겸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형제복지원 이렇게 운영되었다!>를 발간하기도 했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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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의 박인근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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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의 박인근 출처 당시 나이가 만 78세다.
그는 출소 후에도 자신의 악행을 뉘우치기는커녕 이를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며 여러 상상을 초월하는 망언들을 남겼다. 1991년 3월 12일에 경향신문과 한 인터뷰에서는 "파렴치범으로 지탄받은 것이 가슴 아프다"며 "비록 죄가 있다고 벌을 받긴 했지만 양심적으로 시설 운영을 위해 헌신적인 일을 했는데 이를 시기하는 사람들 때문에 뜻밖의 변을 당했어요. 원생들도 언제나 사랑으로 이끌었는데 혹사 감금 폭행 치사 등 온갖 나쁜 죄는 다 뒤집어쓴 것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고 1993년 10월에는 형제복지원 수사 과정 등을 담은 '브레이크 없는 벤츠'라는 책을 발간한 김용원 검사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부산지검에 고소하기도 했다.[34]
2004년에는 한국기독신문, 교회복음신문과 한 인터뷰에서 '형제복지원을 운영 하면서 가족 전체가 부랑인들과 시설에서 함께 고생하며 살아 왔는데 모략과 중상, 시기와 질투로 의욕상실이라는 위기를 맞기도…", "전적으로 경찰의 허락과 도움을 받아 입소, 퇴소 절차를 밟았음에도 불구하고 불법운영 등 모략과 중상을 받아 왔기에..."라며 자신이 아무 잘못도 없는 피해자인 것처럼 가장하기도 했고 심지어 1983년에 완공된 형제복지원 수용소 사진을 〈실로암의 집〉 1층 거실에, 수용자들을 착취해 강제노역을 시켰던 사진을 2층 거실에 버젓이 걸어 놨다고 한다. # 이 정도면 과장이 아니고 사이코패스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다.
그는 출소 후에도 자신의 악행을 뉘우치기는커녕 이를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며 여러 상상을 초월하는 망언들을 남겼다. 1991년 3월 12일에 경향신문과 한 인터뷰에서는 "파렴치범으로 지탄받은 것이 가슴 아프다"며 "비록 죄가 있다고 벌을 받긴 했지만 양심적으로 시설 운영을 위해 헌신적인 일을 했는데 이를 시기하는 사람들 때문에 뜻밖의 변을 당했어요. 원생들도 언제나 사랑으로 이끌었는데 혹사 감금 폭행 치사 등 온갖 나쁜 죄는 다 뒤집어쓴 것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고 1993년 10월에는 형제복지원 수사 과정 등을 담은 '브레이크 없는 벤츠'라는 책을 발간한 김용원 검사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부산지검에 고소하기도 했다.[34]
2004년에는 한국기독신문, 교회복음신문과 한 인터뷰에서 '형제복지원을 운영 하면서 가족 전체가 부랑인들과 시설에서 함께 고생하며 살아 왔는데 모략과 중상, 시기와 질투로 의욕상실이라는 위기를 맞기도…", "전적으로 경찰의 허락과 도움을 받아 입소, 퇴소 절차를 밟았음에도 불구하고 불법운영 등 모략과 중상을 받아 왔기에..."라며 자신이 아무 잘못도 없는 피해자인 것처럼 가장하기도 했고 심지어 1983년에 완공된 형제복지원 수용소 사진을 〈실로암의 집〉 1층 거실에, 수용자들을 착취해 강제노역을 시켰던 사진을 2층 거실에 버젓이 걸어 놨다고 한다. # 이 정도면 과장이 아니고 사이코패스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다.
2007년~2008년 경에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 병세가 점차 악화되어 갔고, 결국 2011년 4월 7일에 3남 박천광에게 대표직을 물려주고 자택과 요양병원을 넘나들며 치료를 받았다.
실제로 2014년 3월에 그의 부인이 남편과 아들에 대한 재판에 출석하여 증인으로서 증언한 바에 따르면 그는 이미 양쪽 뇌에 문제가 생겨 거동은커녕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도 없게 되었으며 치매에도 걸려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는 데다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35]
결국 그는 오랜 기간 동안 병마의 고통에 시달려 오다가 2016년 6월 27일에 전라남도의 한 요양병원에서 86세를 일기로 숨졌고 장례식도 가족과 몇몇 지인들 정도만 참석한 채 조용히 치러졌으며 사망 사실조차 약 2개월 뒤인 2016년 8월 25일에야 정식 공표되었다. #
물론 공소시효도 지난 뒤라서 법의 심판도 필요없게 된 것은 물론 건강했을 때 누릴 수 있는 것은 이미 다 누렸기 때문에[36] 대중들은 '천수를 누린 것만으로도 화가 나 죽겠다', '저런 인간은 절대로 편히 죽어서는 안 됐는데...' 식의 반응을 보였다.[37]
실제로 2014년 3월에 그의 부인이 남편과 아들에 대한 재판에 출석하여 증인으로서 증언한 바에 따르면 그는 이미 양쪽 뇌에 문제가 생겨 거동은커녕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도 없게 되었으며 치매에도 걸려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는 데다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35]
결국 그는 오랜 기간 동안 병마의 고통에 시달려 오다가 2016년 6월 27일에 전라남도의 한 요양병원에서 86세를 일기로 숨졌고 장례식도 가족과 몇몇 지인들 정도만 참석한 채 조용히 치러졌으며 사망 사실조차 약 2개월 뒤인 2016년 8월 25일에야 정식 공표되었다. #
물론 공소시효도 지난 뒤라서 법의 심판도 필요없게 된 것은 물론 건강했을 때 누릴 수 있는 것은 이미 다 누렸기 때문에[36] 대중들은 '천수를 누린 것만으로도 화가 나 죽겠다', '저런 인간은 절대로 편히 죽어서는 안 됐는데...' 식의 반응을 보였다.[37]
그가 2016년 6월 27일 사망함에 따라 솜방망이 처벌을 받은 자식들이 가업(?)을 승계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법인 청산이 되었다고는 해도 이미 법인의 주요 자산들은 헐값에 셀프 매각되어 버린 상황이다 보니... 이와는 별개로 2020년 YTN 보도에 따르면 형제복지원 총무였던 차남 박두선은 부산에서 두꺼비 오뎅 당리점(부산 사하구 낙동대로 456)을 2025년까지 운영했고 막내딸은 사위와 함께 같은 지역에서 정신요양원을 운영 중이다. 반면 장녀가 운영하던 신영중-고등학교는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2013년에 폐교되었다. #
그나마 문재인 정부 아래에서 2018년 4월 11일에 법무부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재조사하기로 했다. # 거기다가 그가 정권의 비호를 통해 받은 훈장들은 전부 박탈하기로 했다. #
조사가 크게 진행되면서 전두환과 그의 비리에 대한 추악한 진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1, #2
2018년 오거돈 부산광역시장은 대국민 사과까지 하면서 당시 비호했던 담당공무원들을 싸그리 대검찰청에 재수사 의뢰했다고 한다. 이에 문무일 검찰총장은 재수사 지시로 화답했다.
법무부 권고에 따라 2018년 11월 27일 문무일 검찰총장이 대법원에 비상상고를 제기하였으나 안타깝게도 2021년 3월 11일 대법원은 그것을 기각함에 따라 그의 "특수감금"에 대한 "무죄" 판결은 그대로 유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대법원이 “이 사건의 핵심은 헌법의 최고 가치인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됐다는 점”을 강조하며 피해자와 유가족의 피해와 명예의 회복을 위해 정부의 조치를 주문해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는 의미가 크다는 해석도 나왔다. #
한편 그가 살아 있던 2011년에 부산저축은행 사태가 발발한 후 이듬해에 부산시 감사 결과 재단 측의 횡령 사실이 드러났고 온천 등 상당수 자산들이 가압류됐다. 2014년에는 서종범 밀성학원 이사장에게 재단을 팔았고 부산시에서 형제복지원 법인(느헤미야)을 청산에 착수했으나 이미 빼돌릴 때로 빼돌려서 빈 껍데기만 남은 상황이라 청산해도 적자청산이다 보니 잔여 재산의 국고 환수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 오히려 셀프 매각으로 청산인 배만 불린다는 논란도 나왔지만 역시나 부산시에서는 그냥 팔짱만 낀 것으로 알려졌다. #
2017년 청산 후 실로암의 집은 문을 닫아 폐건물이 됐고 이용자들은 타 시설로 옮겨졌다.
2021년, 카타르의 알자지라와 영국의 데일리 메일에서 박인근의 후손들이 호주에 골프장 및 리조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도하면서 이들의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기도 하였다. 2025년 형제복지원을 다룬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생존자다가 공개된 후 호주 골프장 인터넷 리뷰는 별점 1개와 다양한 언어로 된 비난 댓글들로 뒤덮이게 되었다. #
그나마 문재인 정부 아래에서 2018년 4월 11일에 법무부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재조사하기로 했다. # 거기다가 그가 정권의 비호를 통해 받은 훈장들은 전부 박탈하기로 했다. #
조사가 크게 진행되면서 전두환과 그의 비리에 대한 추악한 진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1, #2
2018년 오거돈 부산광역시장은 대국민 사과까지 하면서 당시 비호했던 담당공무원들을 싸그리 대검찰청에 재수사 의뢰했다고 한다. 이에 문무일 검찰총장은 재수사 지시로 화답했다.
법무부 권고에 따라 2018년 11월 27일 문무일 검찰총장이 대법원에 비상상고를 제기하였으나 안타깝게도 2021년 3월 11일 대법원은 그것을 기각함에 따라 그의 "특수감금"에 대한 "무죄" 판결은 그대로 유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대법원이 “이 사건의 핵심은 헌법의 최고 가치인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됐다는 점”을 강조하며 피해자와 유가족의 피해와 명예의 회복을 위해 정부의 조치를 주문해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는 의미가 크다는 해석도 나왔다. #
한편 그가 살아 있던 2011년에 부산저축은행 사태가 발발한 후 이듬해에 부산시 감사 결과 재단 측의 횡령 사실이 드러났고 온천 등 상당수 자산들이 가압류됐다. 2014년에는 서종범 밀성학원 이사장에게 재단을 팔았고 부산시에서 형제복지원 법인(느헤미야)을 청산에 착수했으나 이미 빼돌릴 때로 빼돌려서 빈 껍데기만 남은 상황이라 청산해도 적자청산이다 보니 잔여 재산의 국고 환수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 오히려 셀프 매각으로 청산인 배만 불린다는 논란도 나왔지만 역시나 부산시에서는 그냥 팔짱만 낀 것으로 알려졌다. #
2017년 청산 후 실로암의 집은 문을 닫아 폐건물이 됐고 이용자들은 타 시설로 옮겨졌다.
2021년, 카타르의 알자지라와 영국의 데일리 메일에서 박인근의 후손들이 호주에 골프장 및 리조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도하면서 이들의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기도 하였다. 2025년 형제복지원을 다룬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생존자다가 공개된 후 호주 골프장 인터넷 리뷰는 별점 1개와 다양한 언어로 된 비난 댓글들로 뒤덮이게 되었다. #
- 사회적 과시를 위해 각종 행사나 지역 모임에 기부금을 주고 감사패를 받는 것을 좋아했다고 하며, 원장실과 회의실에 메달과 기념패를 수십 개나 진열했다고 한다.
- 일본의 이시카와 미유키와도 평행이론 수준으로 비슷한 점이 매우 많은데, 보육시설을 운영한답시고 백 단위의 무고한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다는 것, 주범이 직접 살인 행위에 가담했다는 것, 거액의 보조금을 횡령해 호화 생활을 해 왔다는 것, 악행이 발각되기 전까지 자신이 명성(?)을 얻은 분야에서 명사로 알려졌다는 것, 악행의 양과 질과 비교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솜방망이를 넘어 물방망이 처벌을 받았다는 것, 출소 후에도 부동산 사업으로 거액을 벌었다는 것, 자신이 성심껏 남들을 보살폈다고 뻔뻔스럽게 주장한 것, 구순 가까운 나이까지 천수를 누렸다는 것 등이 있다.
[1] 사망 소식도 2개월 뒤에야 뒤늦게 알려졌다. #[A] 2.1 2.2 1948년에는 지금의 고등학교가 존재하지 않고 6년제 구제중학교가 존재했다. 1951년 6년제 중학교를 3년제 중학교와 3년제 고등학교로 분리하면서 '교육법개정에따르는현존학교에관한조치령' 제8조에 따라 6년제 중학교 졸업자의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인정하였다.[3] 실로암교회의 장로였으며 형제복지원 내부에서도 개신교 활동을 강제시켰다. 형제복지원의 담임목사인 임영순은 박인근의 처남으로, 형제복지원의 2인자로써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인권침해에 가담했다.[4] 전 형제복지원 산하 정신요양원 총무.# 2025년까지 두꺼비 오뎅을 운영. 주소는 '부산 사하구 낙동대로 456'였으며 현재 네이버 지도에서는 삭제됐고 다음 지도만 남아있다. 넷플릭스에 <나는 생존자다>가 공개된 후 파장이 커질 적 위 사실 때문에 네티즌들이 해당 점포 관련 비난글을 올려대자 박인근의 손주며느리(박두선의 며느리)라고 주장하는 인물이 스레드에서 입장을 표명했다. 그녀는 이미 시부모와 절연한 데다 남편이 형제복지원이 문닫은 시점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해당 점포는 시어머니(박두선의 아내)가 원해서 차린 거라 형제복지원과는 무관하다고 주장, 당 점포에 대한 공격을 멈춰달라면서도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을 향한 사죄 방법을 모색하겠다고 밝혔다.#[5] 나는 생존자다에 출연해 제작진과 인터뷰를 진행하였다.[6] 나는 생존자다 2화에서 이름이 공개되었다.[8] 형제복지원의 폭력성이 그의 헌병 시절 경험에서 비롯되었다는 의견도 있는데 실제로 형제복지원은 모든 편제가 군대식이었다고 한다.[9] 물론 사후에 이 훈장들은 다 박탈되었다.[10] 이러한 제목이 붙은 이유는 부산이 경부선의 종점이고 당시 유기된 어린 아이들이 많았다고 한다.[11] MBC 아카이브에도 올라와 있다.[12] 도합 4만여 명 #에 이른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 수치는 12년 동안의 연도별 수용인의 수를 모두 합쳐 계산하여 정확하지 않다. 같은 사람이 몇 년간 수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실제 피해자는 수천 명 정도이다. 애초에 4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면 그 시절이라도 진작에 난리가 났을 일이다.[13] 1987년 기준으로 수용되었던 3,164명 중 남성은 2,811명, 여성은 353명이었고 어린이와 만 60세 이상 노인도 무려 543명으로 전체의 1/6에 달했다고 한다. # 이는 당시 부산 인구(약 360만 명)의 무려 0.08%에 달한다. 심지어 후술하듯 수감자 대부분이 성인 남성이었다는 걸 감안하면...[14] 심지어 소년들까지 성폭행을 당했다고 한다.[15] 북한 로동교화소의 평상시 연간 사망률이 그 수준으로 추정된다고 하며 소련 굴라크의 연간 사망률이 2~3% 정도였다.[16] 그러면서 박인근은 '나는 수용자들에게 어떤 폭력도 행사하지 못하게 했다'고 뻔뻔스럽게 주장했다. 이정도면 폴 포트, 마시아스 응게마에 맞먹는 악마라고 표현해도 시원치않다.[17] 다만 40~50명을 살해했다는 것만큼은 전해 들은 말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치더라도 박인근이 직접 내리갈굼의 형태로 수용자들을 폭행했다는 생존자들의 증언이 많다는 것과 그의 살인 가담을 증언한 사람이 원장실에 유일하게 접근이 가능했던 사람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황상 직접 살인에 가담한 게 사실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18] 심지어 그가 50명을 구타해 죽였다는 주장은 2014년에도 알려져 있었다. 기사 댓글에서도 언급되었다. 아마 형제복지원 원생들 사이에서도 그런 소문이 돌았던 모양이다.[19] 그 아버지는 친딸에게 행해진 부산 형제복지원의 성범죄를 알게 된 충격으로 그만 정신을 놓았다고 한다. 부녀는 정신병원에 입원했으며 피해자의 아들은 그런 끔찍한 일을 겪은 가족을 힘들게 부양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20] 실제로 2022년에 형제복지원에 과거 국가보안법, 국방경비법, 반공법 등의 위반 사범 15명을 형제복지원에 무연고자로서 강제 수용하고 감시했을 뿐만 아니라 간첩조작 수사 공작을 위한 공작원 위장 침투도 서슴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21] 단편적으로 지나갔지만 그것이 알고싶다 방송에서 아파트 인근 주민들은 이 일대를 흉흉하게 바라봤다. 귀신드립은 덤. 참고로 기존 형제복지원 자리를 매각하여 아파트를 지으면서 박인근 일당은 제대로 된 징벌은커녕 부지 매각대금으로 막대한 차익을 얻었다.[22] 구체적으로는 해운대에 있는 40평형 맨션을 5,800만 원에 구매했고 한국콘도미니엄 회원권을 1천만 원에 매입하고는 타인에게 등기했으며 한 재일 한국-조선인 명의로 1,950만 원에 골프회원권을 사들였다고 한다. #[23] 실제로 1985년부터 1986년까지 단 2년 동안 박인근은 국고 18억 9천여만 원 중 거의 60%에 달하는 정확히 11억 3,554만 원을 횡령해 신용금고 예금 등으로 3억 3,555만 2천 원, 부랑인 시설 대표들에 대한 대여금 1억 8,900만 원, 대한교육보험로 등 불입금 1억 5천만 원, 골프회원권 구입비 1,950만 원, 처남에게 준 돈 1,100만 원, 아파트 구입비 650만 원, 부산시 남구청 총무국장에게 준 대여금 6,500만 원, 형제복지원 촉탁의사에게 준 대여금 5천만 원을 썼다고 한다. #[24] #1 #2[25] 금고 속에 외화로 미화 5천 달러, 일화 546만 엔이 있었던 것과 달리 월급은 겨우(?) 60만 원이었다고 한다. 다만 1986년 기준으로 공무원 기준으로 박인근보다 월급이 많았던 케이스는 1급 공무원(7~10호봉)밖에 없었다. #[26] 실제로 박인근은 1983년 4월에는 형제복지원 구내에 건평 45평의 주택을 짓기도 했으며 이들 중 부산 시내에 있던 고급주택 3채는 그 80년대에 시가 수십억원대를 호가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27] 고향 부근에도 싯가 20억 원에 이르는 10만 7,500여평의 땅을 사 뒀다고 하며# 4억여원짜리 개인목장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 목장은 180여명의 원생을 강제로 동원해 만든 것이었다.[28] #[29] 당시 대법관 중에는 제2대 헌법재판소장, 제18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김용준이 있었다.[30] 교민이 아니라 한국 본토에서 데려왔다.[31] 이와 비슷하게 민주화 시위에 참여하다가 수감된 학생들 수십 명을 감옥까지 찾아가서 직접 때려죽인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독재자 장 베델 보카사도 만행이 폭로된 후 외국인 기자들에게 '나는 기독교인이고, 많은 아이들의 아버지라 아이들을 해칠 수가 없다'는 소리를 했다. 참고로 보카사는 만행이 들통나 고국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사면된 후에는 기독교에 귀의해 검소하게 살았다고 한다.[32] 다만 이 기사를 쓴 사람들은 박인근의 실체를 전혀 몰랐을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특히 기사의 마지막 부분을 박인근의 실체가 드러난 후에 보면 어이없는 기분이 들 것이다. 물론 댓글들은 하나같이 박인근을 맹비난하고 있으며, 형제복지원 생존자로 추정되는 사람이 단 댓글도 있다.[33] 이 책에서 박인근은 '박정희·전두환 정권, 부산시가 시킨 일을 한 것일 뿐'이라며 자신이 단지 정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했으니 실로 미친 인간 쓰레기라고할 수 있겠다.[34] 당연히 '혐의 없음'으로 끝났는데 박인근은 중병에 걸려 쓰러지기 직전에 발간한 회고록에서 "아내의 권유로 김용원 전 검사를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용서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제가 부족함으로 여기고 용서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습니다. 2년 6개월간의 형무소 생활을 마치고 출옥을 할 때도 원망 대신 기쁜 마음이 있었습니다. 형무소에서 지내는 동안 앞으로의 생활을 구상하면서 대한민국에 거지가 없는 나라, 노숙자가 없는 나라, 젊은 사람이 직업 없이 행패 부리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겠다는 일념을 가지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요즘 들어 가끔 서울역, 구포역, 부산진역, 영등포역 등을 돌아볼 때 눈에 띄는 부랑인을 볼 때에 이 모든 것이 김용원 전 검사의 책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반드시 진실을 규명할 것입니다."라면서 김용원 검사를 문자 그대로 사탄으로 묘사했다. #[35] 결국 박인근은 이 때문에 재판에 출석하지 못했는데 실제로 형제복지원 재판을 담당한 주임검사는 2013년에 박인근의 자택을 방문했을 때 박인근이 간단한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로만 답변했고 치매 증세 탓에 조사를 할 수 있는 대화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을 정도였다. #[36] 실제로 형제복지원 사건이 재조명된 것도 박인근이 중병으로 대표직을 사임한 지 1년이나 지난 후인 2012년이었다.[37] 실제로 형제복지원의 생존자들은 박인근이 사과도 하지 않고 죽었다며 원통함을 감추지 못했는데 형제복지원의 피해 생존자 이혜율 씨는 방송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TV에서 화면이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박 원장 얼굴을 다시 보는데, 정말 밥 먹다가 밥숟가락을 떨어뜨릴 만큼 너무 놀랐었어요. 나는 박 원장이 당연히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은 줄 알았어요."[38] 수영장이 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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