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o Jung G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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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가치함이라는 고(苦)>
- 드라마 <모자무싸>가 보인 불교적 구원의 서사 -
유정길 (불교환경연대 공동대표, 녹색불교연구소 소장)
불교잡지 <고경>의 기고의 글
<드라마 「모자무싸」의 깨달음 법문>
부처님오신 날인 5월 24일에 종료한 JTBC 12부작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이하 「모자무싸」)가 종영하자마자 SNS는 엄청난 공명의 글들로 넘쳐났다. 그 반향은 예사롭지 않았다. 단순한 감동이나 위로를 넘어, 시청자 각자의 마음 깊이 오랫동안 맺혀 있던 상처를 정확하게 건드렸기 때문이다. 드라마 한 편이 이토록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만든 것은, 단순히 이야기가 재미있어서만이 아니다. 이 드라마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장 깊이 앓고 있는 병에 대한 이름을 정확하게 건드렸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이 드라마는 불교라는 언어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는다. 스님도 나오지 않고, 경전 구절도 없다. 그럼에도 나는 이 드라마가 불교가 말하려는 핵심 통찰을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담아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아저씨」, 「나의 해방일지」로 이미 깊은 공명을 일으켜 온 박해영 작가의 작품이다. 그녀는 언제나 인간의 존엄과 해방을 주제로 글을 써왔다. 이번 작품도 예외가 아니다. 다만 이번에는 그 주제를 더욱 정면으로, 더욱 날카롭게 다루고 있다.
드라마의 전체 스토리는 영화 동아리 '8인회'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주인공 황동만(구교환 분)은 8인회에서 20년간 단 한 편의 작품도 만들지 못한 인물이다. 그 열등의식을 동료들의 영화에 대한 잔인한 악평으로 메워온 그는, 마침내 자신의 첫 영화를 완성해 신인감독상을 받기에 이른다. 여주인공 변은아 (고윤정 분)는 9살 때 친모에게 버림받은 깊은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간다. 자신을 버린 어머니가 다름 아닌 최고의 여배우 오정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증오와 화해 사이를 오랫동안 오간 끝에 진정한 인정과 화해에 이른다. 이 두 인물의 내면 여정이 드라마의 중심 골격을 이룬다.
여기에 영화 3편을 만들었지만 여전히 불안과 열패감에 시달리는 선배 박경세, 그를 곁에서 지지하는 보조작가 박정민, 황동만이 입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영화사 대표 고혜진, 그리고 황동만의 형이자 이 드라마의 은밀한 철학적 화두를 던지는 황진만이 얽히며 이야기는 풍부해진다. 이 모든 인물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는 것이 드라마의 핵심 설정이다.
<무가치함이란 무엇인가 : 苦(고)의 진단>
드라마의 제목이 곧 주제다. 대체 '가치 있음'과 '무가치함'의 기준은 어디에 있을까? 드라마의 맥락에서 그것은 분명하다. 자본주의 경쟁 사회가 만든 기준이다. 좋은 학교를 나오고, 돈을 잘 벌고, 높은 직위에 오르고, 인정받는 작품을 만드는 것. 이 기준을 충족하는 사람은 '쓸모 있는 존재'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쓸모없는 존재'가 된다. 황동만의 열등의식과 악평 습관은 바로 이 구조가 한 개인 안에서 내면화된 결과다.
현실에서 경쟁에서 이기는 사람보다 지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은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무가치함을 반복적으로 체험한다. 잠깐 승리했다 싶어도 더 큰 게임에서 곧 좌절한다. 드라마에 200-300%의 공감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시청자 대부분이 아닌 척하지만, 사실은 누구나 어떤 영역에서 20년간 작품 한 편 못 만든 황동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불교가 말하는 苦(괴로움)의 현대적 형태이다.
물론 불교는 고(苦)의 더 깊은 원인을 찾는다. 바로 무명(無明)과 무아(無我)에 대한 무지다. 드라마 속 대사 '생각이 나일까? 몸이 나일까?'는 이 불교적 질문을 일상의 언어로 던진다.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몸도, 감정도, 생각도 '나'가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한순간 인연으로 생겨난 흐름일 뿐이다. 강물처럼 끊임없이 변하는 흐름에 불과한 것을 우리는 '이게 나다'라고 고정시키고, 거기에 집착하는 순간부터 괴로움이 시작된다. 그 집착이 바로 드라마가 '무가치함과의 싸움'으로 표현하는 고의 뿌리다.
황동만이 20년 동안 영화를 만들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나는 못 만드는 사람'이라는 자기 이미지에 갇혔다. 그 이미지가 곧 자신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시작하지 못했다. 변은아가 오랫동안 어머니를 용서하지 못한 것도 마찬가지다. '버림받은 나'라는 자기 이야기가 너무 단단하게 굳어버려, 그 이야기 밖으로 나오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고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낸 자기 마음의 집착에서 오는 것이다. 실제 사람들은 팩트(Fact)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라, 그 “팩트에 대한 자기의 해석”이 자기를 괴롭히는 것이다. 한 마음의 장난이다
<특별해야 한다는 갈애(渴愛) : 集(집)의 분석>
오정희가 딸의 이름을 왜 그렇게 특별하게 지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남편이든 자식이든 자신에게 딸린 모든 것을 특별하게 만들어 돋보이게 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라고. 이 한 마디가 집착(集)즉 갈애(渴愛)의 구조를 섬뜩할 만큼 정확하게 드러낸다. 누구나 특별해지고 싶다. 누구나 인정받고 싶다. 누구나 사랑받고 싶다. 그런나 문제는 그 욕망 자체 보다 욕망이 경쟁의 구조 안에 포섭될 때다.
경쟁 사회에서 특별함이란 상대적인 것이다. 내가 특별해지려면 다른 사람이 덜 특별해야 한다. 올라가려면 타인을 밟아야 한다. 그 결과 우월한 타인을 향한 선망과 열등의식, 열등한 타인을 향한 경멸과 우월감이 동시에 발생한다. 황동만이 동료들의 영화에 가했던 잔인한 악평은 단순한 악의가 아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만들지 못했다는 열등의식의 거울상이다. 곧 타인을 끌어내림으로써 자신의 무가치함을 잊으려는 몸부림이었다.
드라마는 이것을 '아수라의 세계'로 표현한다. 불교의 아수라(阿修羅)는 끊임없이 싸우는 존재들이다. 싸워서 이겨야 안심한다. 잠시 이기면 다음 싸움을 찾는다. 이 욕망의 끝은 '지옥'이라고 드라마는 말한다. 황동만의 형 황진만이 끊임없이 던지는 화두 '목적이 무엇이냐'는 바로 이 싸움의 방향성 자체를 묻는 불교적 화두이다.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특별해지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그 인정을 받으면 영원히 행복해지는가?라고
불교는 이 갈애(渴愛)가 결코 채워질 수 없다고 말한다. 인정을 받아도 더 많은 인정을 원하게 된다. 특별해져도 더 특별해지고 싶어진다. 박경세가 영화 3편을 만들었어도 여전히 불안하고, 오정희가 최고의 여배우가 되었어도 딸의 인정을 갈망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갈애는 채워지지 않는다. 그것이 괴로움의 원인(集)이다.
<존재 자체로 충분하다 : 滅(멸)의 비전과 道(도)의 실천>
황동만의 형 황진만은 이 드라마의 숨은 철학자이자 선사이다. 그는 동생과 친구들에게 끊임없이 화두를 던진다. '목적이 무엇이냐.' 그리고 결정적인 한마디를 한다. '인간은 쓸모가 있고 없고, 가치가 있고 없고와 무관하게 존재 그 자체로 존귀하다.' 이것이 드라마의 핵심 선언이다. 불교의 언어로 표현하면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이요,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다.
무언가를 해야만 가치가 생기는 Human Doing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이미 가치인 Human Being. 이 전환이 드라마 전체의 방향이다. '그냥 존재하라.' 꽃은 꽃인 채로 소중하다. 바람은 바람인 채로 가치 있다. 열매를 맺지 않는 꽃이라도, 방향을 모르는 바람이라도, 그 존재 자체가 이미 완전하다. 진정한 해방은 특별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굳이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다.
드라마 최종회에서 황동만이 '그냥 웃기게 살 것'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포기의 선언이 아니다. '웃기게'라는 표현이 의미심장하다. 진지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거창한 의미 부여와 집착을 내려놓고 “걸림 없이 가볍게 살겠다”는 결심이다. 불교의 무위(無爲), 결과에 대한 집착 없이 행하는 무애행(無碍行)의 선언이다. 드라마는 황동만이 결국 신인감독상을 받는 것으로 결말을 맺지만, 수상이 그의 가치를 증명한 것이 아니다. '그냥 웃기게 살 것'이라는 각오를 품었을 때, 그는 이미 무가치함에서 벗어났다. 조건이 갖추어질 때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순간 이미 자유로워지는 것, 불교가 말하는 해탈(해방)의 구조이다.
<감정시계 : 정념(正念),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 >
그렇다면 그 길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달할까? 드라마는 여기서 흥미로운 장치를 등장시킨다. 바로 '감정 워치'다. 심장 박동, 혈액, 체온, 뇌파 등의 신체 변화를 측정해 현재 감정 상태를 화면에 표시해주는 이 장치는, 현대 기술로 구현한 위빠사나(vipassanā) 수행의 알레고리이다. 위빠사나는 '있는 그대로 보는' 수행이다. 호흡을 관찰하고, 몸의 감각을 알아차리고, 마음에 일어나는 감정을 판단하지 않고 바라본다. 이 알아차림이 정념(正念, sati)이다.
감정시계의 빨간 불은 착용자에게 '지금 내 마음에 불안이라는 손님이 찾아와 머물고 있구나.'를 알려준다. 그 알아차림 자체가 치유의 시작이다. 감정과 '나' 사이에 거대한 공간, 즉 객관적 거리가 형성된다. 감정이 곧 내가 아님을 아는 순간, 그 감정이 나를 무가치하게 만들던 파괴적 힘은 서서히 ‘엷어지면서’ 결국 해체된다. 변은아의 회복 과정이 바로 이 구조다. 트라우마로 굳어 있던 자기검열을 인식하고, 내면을 직면하고, 마침내 내려놓는 것이다. 수행의 억압적 반응을 멈추고(戒),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定), 자신의 실상을 보는 지혜(慧)를 얻는 것이다. 불교의 계(戒)·정(定)·혜(慧)의 수행 단계와 정확히 겹친다.
<‘같아지려는 삶’과 ‘묻어가는 삶’ : 중도(中道)와 연기(緣起)의 지혜>
황동만은 한때 절친이었다가 원수가 된 선배 박경세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도 영화를 한 편 만들어야 당신과 같아질 수 있다. 그래야 화해할 수 있다.' 이 '같아짐'의 논리가 흥미롭다. 경쟁 사회에서 화해는 동등한 계급이 되어야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열등한 자는 우월한 자와 같아져야 비로소 관계가 회복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잠깐의 위로는 되겠지만 실은 이것도 망념이다. 경쟁의 계단을 한 칸 올라가도, 더 위에는 또 다른 계단이 기다린다.
이 사실을 깨달은 박경세 자신이 웅변한다. 영화 3편을 만든 그도 자신보다 잘나가는 선배들 앞에서는 똑같은 열패감을 느낀다. '같아짐'은 영원히 달성되지 않는 목표다. 그것을 목표로 삼는 한, 누구도 진정한 화해에 이를 수 없다. 인정의 욕망, 성공의 욕망, 사랑의 욕망은 갈애의 다른 이름들이다. 이 욕망들에 이끌려 싸우고 경쟁하는 세계는 결국 지옥이다.
그 대안을 드라마는 의외의 인물을 통해 제시한다. 박경세의 보조작가 박정민이다. 그녀는 박경세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지하고 격려하여 새로운 활력을 주는 케릭터이다. 그녀는 '합창에서 내가 못해도 옆 사람에게 묻어가는 것이 즐겁다'고 하며 ‘묻어가는 삶’을 예찬한다. 실제 '묻어가는 삶'은 무능의 인정이 아니다. 자신이 중심이라는 독선을 내려놓고, 타인과 맺는 거대한 그물망의 인연법에 자신을 맡기는 하심(下心)의 태도다. 서로 촘촘히 의존해 존재하는 연기(緣起)적 세계속에서 살아가는 지혜의 삶이다.
이 태도에서는 타인의 성공이 질투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일이 된다. '타인이 잘되면 좋겠다, 그래야 나도 얻어먹지'라는 표현이 바로 상생(相生)과 자비(慈悲)의 마음이다.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타인 덕분이라는 깨달음, 타인의 기쁨이 나의 기쁨과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이 여기에 있다. '같아지려는 삶'이 수직의 위로 올라가는 성공이라면, '묻어가는 삶'은 옆으로 연결되는 수평의 성공이다.
박경세가 부인에게 '나는 1등은 못 해도 3등은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순간, 그는 1등에 대한 집착이 고(苦)의 원인임을 인식한 것이다. 드라마의 대사 '너무 몰입하지 마라. 행복에도 몰입하지 말고, 불행에도 몰입하지 말라'는 표현은 집착하지도 않고 포기하지도 않는 중도(中道)를 그대로 번역한다. 성공을 원하되 그것에 자신의 가치를 걸지 않는 것, 과정에 충실하되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것, 중도의 실천이다.
<생명의 살림과 죽임의 사회>
이 드라마는 성공을 향한 맹목적인 경쟁 사회가 어떻게 계급과 양극화, 지배와 피지배의 위계를 만드는지 보여준다. 이 속에서 탈락한 이들은 자존감을 상실한 채,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 아등바등하며 고통받는다. 패배의식과 열등감은 깊은 정신적 상처로 남고, 이것이 누적되면 우울증을 넘어 과로사와 자살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진다. 한국 사회가 OECD 자살률 압도적 1위라는 불명예를 안게 된 것은, 우리 사회가 이미 서로 스트레스를 만드는 '죽임의 문화'에 강력하게 포섭되었음을 증명한다.
이러한 인간 내면의 황폐함은 사회를 넘어 자연과 생명의 위기로 직결된다. 인간 사회의 무한 경쟁은 자연에 대한 착취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개발과 이윤에 눈이 어두워 기업간에 경쟁적으로 산과 강, 바다를 정복의 대상으로만 바라본다. 이러한 어리석은 미망(迷妄)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한정된 지구 자원을 무한히 성장하며 무한히 소비할 수 있다는 어리석음이 인간과 자연 모두를 죽음의 길로 몰고 간 것이다.
미래세대와 비인간 존재를 배제한 채 '지금, 인간만' 누리는 풍요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우리가 버린 오염물질은 당장의 편익을 줄지언정 결국 우리 자신의 미래를 파괴할 뿐이다. 진정한 공존이란 타인의 고통과 자연의 희생 위에 쌓는 신기루 같은 행복이 아니다. 인간과 자연, 현세대와 미래세대가 평등하게 연대하여 함께 피어나는 것이다.
생태 위기를 극복하는 첫걸음은 인간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탐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뙤약볕에서 땀흘려일하는 농부, 그 농부에게 채찍을 맞으며 무거운 쟁기를 끌어 힘들어하는 소의 고통, 그 쟁기에 드러나는 벌레들, 그 벌레들을 쪼아먹는 새들을 보며 약육강식의 비극과 생명에 대한 깊은 연민으로 "어떻게 해야 모든 생명이 함께 행복할 수 있을까"를 고뇌했던 농경제(農耕祭)에 참여한 부처님의 고뇌가 바로 불교가 존재해야할 출판점임을 다시 확인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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