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5-23

台湾人日本兵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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台湾人日本兵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台湾人日本兵統計
軍属(1937年-1945年)126,750名
軍人(1942-1945年)80,433名
総数207,183名
戦死者数30306名(15%)
日本厚生労働省援護局資料(1990年発表分)
台湾人日本兵

台湾人日本兵(たいわんじんにほんへい)は日本が台湾を領有していた時代に、日本軍の軍務に服した台湾人

概要

1944年4月以降に志願兵として軍務に従事した者は特に台湾特別志願兵とも称される。これとは別に台湾原住民等の志願者で構成された高砂義勇隊も存在し、同隊員の身分は軍属であり軍人ではなかった。高砂義勇隊は兵站や土木工事を本来の任務としたが戦闘にも投入され、南方のジャングルに慣れない日本軍にとって戦闘のみならず物資や傷病者の担送、現地自活、現地住民との接触でも大きな力となり、戦病死者の割合が正規軍よりも多かったといわれている。しかし各種の事情により、戦後の補償は十分に行われていない。詳しくは高砂義勇隊の項を参照。

太平洋戦争の激化により1944年9月には台湾人にも兵役義務が課せられた。日本の敗戦までに日本兵として軍務に従事した台湾人は8万人を越え、軍属として志願・徴用された者を含むと合計約21万人の台湾人が日本軍と共に戦った。その内3万名以上の台湾人が戦死または戦病死している。台湾から戦地に赴いた その約21万人中[1]、約6千人が高砂族だった。

国民党は戦争が終わって台湾人元日本兵が復帰してくると、彼らを強制的に徴用した。国民党軍には海軍がなく、日本から接収した戦利艦を操縦する技術を持った兵士がほとんど居なかったため、復員してきた台湾兵を強制徴用した[2]

残虐性

中国語を話すことのできる台湾人は通訳が任された。彼らはその権限から侵略先の中国人に対し金品を強請り、日本人兵からあくどさが言及されている。台湾人兵の残虐性は同じ植民地人である朝鮮人兵も記録があり、二級市民として下に見られていた彼らは残虐な行為によって自分の優秀さを見せつけたいと記録されている。特に捕虜、市民への暴力のB級戦犯となった日本兵の内10%が台湾人兵士であった[3]

経過

当時の徴兵スローガン

日本と中国の間に日中戦争が勃発した当初は、日本の外地であった朝鮮台湾では徴兵制が施行されていなかったが、戦争の長期化により1938年2月に朝鮮人に対して陸軍特別志願兵令が施行され、朝鮮人も志願兵となることが可能になった(朝鮮人日本兵)。

台湾人に対する陸軍特別志願兵制度中国語版1942年に実施されたが、1937年には台湾総督府が部隊内で雑役に従事する軍夫の募集を開始している。また中国戦線の拡大により翻訳の必要から多くの軍属が募集され福建語広東語北京語の通訳に当たった。戦時中は台湾の軍夫及び通訳の人数は軍事機密とされ、一般史料の中では明らかにされていない。

陸軍特別志願兵制度が施行されると多くの台湾人志願者が殺到し、1942年の第1回の応募には1,000名の定員に対し425,961名(当時の台湾青年の14%に相当)の志願者が応募し、第2回には同じく1,000名の定員に対し601,147名が応募している。海軍特別志願兵制度中国語版1943年5月12日[4]に発表され、朝鮮と同時に実施された。第1回は3,000名の訓練生定員に対し316,097人が応募している。その後徴兵制の施行に伴い海軍志願兵制度は1944年に、陸軍志願兵制度は1945年に廃止されたが、それまでに陸軍志願兵約5,500人,海軍志願兵約11,000人が日本軍に従軍している。 その後戦局の悪化により1944年9月から開始された徴兵制度は、1945年に全面実施となっている。

1990年厚生省が発表した統計によれば、1937年から1945年までに台湾総督府が徴用した軍属は126,750名、1942年から1945年までに従軍した軍人は80,433名の合計207,183名が日本軍に従軍し、その内15%にあたる30,306名が戦死または戦病死している。3万人余りの台湾人戦死者のうち、26,000人は東京の靖国神社に合祀されている。また台湾の新竹県北埔郷にある済化宮には33,000人の台湾人日本兵(行方不明者を含む)を祀っている。この中には元中華民国総統李登輝(日本名:岩里政男)の兄・李登欽(日本名:岩里武則)も含まれている。李登輝自身も日本陸軍の少尉として従軍している。

台湾人日本兵としては李光輝(日本名:中村輝夫)が有名である。李は1943年に志願兵としてインドネシアのモロタイ島に派遣され、終戦を知らずにジャングルの中で31年間生活し、1974年12月になってようやく発見された(終戦時の階級は一等兵だった)[5]

李の発見をきっかけに給与が未払で補償がないことに関する世論の批判も起こり、1987年9月に議員立法で台湾人戦没者遺族等への補償が決定され、日本政府は1990年代に戦病死者及び重傷者を対象に一人200万円(台湾ドルで約43万ドル)の弔慰金を支払った。しかし日本人戦死者遺族が受給する軍人恩給とは大きな差があり、台湾ではこれに反発する声もある[6]。死亡者や重傷者に弔慰金とよばれるお見舞い金があったのみで、給与は現在でも未払である(以下の柳本の文献参照)。また、当時強制的に軍事郵便貯金とされた給与も引き出せなかったが、これは120倍にして返却することが決まり1995年に支払いが開始され一部の元隊員は受け取った。しかし平均1000円ほどの残高を所持し、当時としては大金だったのに120倍で引き出しても12万円にしかならない。これに抗議して、1996年6月に、日本大使館に相当する台北の交流協会事務所を元隊員が襲撃する事件が起こった [7][8][9]

2005年4月4日、台湾の台湾独立派台湾団結連盟党首・蘇進強は、台湾人日本兵が合祀されている靖国神社を参拝し台湾内で論議をよんだ(台湾団結連盟靖国神社参拝事件参照)。

台湾では親日的傾向の強い独立派と、反独立派の政争が先鋭化しており、独立派の「参拝は台湾人の自由」との主張に対し、反独立派は「日本に媚を売っている」などと批判している[10]

統計

死亡統計

表1 各地域別人員 死者等
地域分類
動員復員不明又
戦没
不明又
戦没率
朝鮮[11]全体
242,341人220,159人22,182人9.2%
軍人
116,294人110,116人6,178人5.3%
軍属
126,047人
110,043人
16,004人
12.7%
台湾全体207,183人176,879人30,304人14.6%
軍人80,433人78,287人2,146人2.7%
軍属126,750人
98,590人28,160人22.2%
日本本土全体7,814,000人5,514,000人2,300,000人29.43%

BC級戦犯

表2. BC級戦犯
地域有罪死刑
朝鮮129人14人[12]
台湾173人26人
日本本土5369人922人

特別志願情況

陸軍特別志願兵の年度別志願者数及び入所者数(台湾人)[13]
年度志願者入所者数選抜率志願倍率
1942年425,961人1,020人0.2%417.6倍

賠償金

表4 弔慰金等給付内容
対象 名目金額給付者
戦没者遺族特定弔慰金(一時金)200万円遺族
重度戦傷病者特定弔慰金(一時金)200万円本人・遺族

戦争体験

日本人兵士と同じく台湾人の兵士も過酷な戦争体験をしている。

ニューギニア島で従軍したイリシガイはオーストラリア兵の死体を蕃刀で肉を削ぎ食した。この時人間の肉ではない動物の肉であると言い聞かせ顔を見ないように解体したと証言している[14]

ルデラン・ラマカウの証言「戦闘で死亡し倒れたオーストラリア兵めがけ日本兵が銃剣で肉を削り食べた。呆然とした私に日本兵はお前にはやらんと怒鳴った。首刈りは原住民で行われたが殺害した人間の肉を食べた話は聞いたことがない」[15]

歴史学者の菊池一隆が取材した高砂義勇兵によると「日本人兵士は自決したが僕たち原住民はそんな事する必要がないだろうと自決しなかった」と答えている。日本人として従軍しても最後の時は本来の原住民に戻ったと菊池は本に書いている[16]

脚注・参考文献

  1.  鄭春河(ていしゅんか)著『台湾人元志願兵と大東亜戦争』展転社
  2.  酒井充子監督「台湾人生」
  3.  Book review: Taiwanese as second-class imperialists”. 台北時報. 2024年8月14日閲覧。
  4.  週報 第365号
  5.  河崎真澄、『還ってきた台湾人日本兵』、文藝春秋、2003年、ISBN 4166603086
  6.  権田, 猛資 (2020年11月28日). 台湾人元日本兵の戦後補償問題――積み残された人々の願いに真の「解決」を”. nippon.com. 公益財団法人ニッポンドットコム. 2021年1月19日閲覧。
  7.  台湾現住民族と日本
  8.  yama.htm 烏來―高砂義勇兵の記念碑にて
  9.  捨てられた皇軍兵士達
  10.  アーカイブされたコピー”. 2006年6月19日時点のオリジナルよりアーカイブ。2007年7月19日閲覧。
  11.  1990年厚生省
  12.  軍人軍属。 他説、23人
  13.  朝鮮及台湾ノ現状/1 朝鮮及台湾ノ現況 1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Ref.B02031284700 
  14.  「これは人間の肉じゃないぞ。猪の肉だぞ」と自分に言い聞かせ…“日本軍”になった台湾原住民と太平洋戦争の「人肉食」”. 文春. 2022年8月25日閲覧。
  15.  「ニューギニアに軍隊があまりに多すぎた」”. 文春. 2022年8月25日閲覧。
  16.  「高砂族の義勇兵」はジャングルでは日本人よりタフで強かった”. 2022年8月25日閲覧。

関連項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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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인 일본병

출처 : 무료 백과 사전 "Wikipedia (Wikipedia)"
대만인 일본병 통계 :
군속(1937년-1945년)126,750명
군인(1942-1945년)80,433명
총수207,183명
전사자 수30306명(15%)
일본 후생 노동성 원호국 자료(1990년 발표분)
대만인 일본병

대만인 일본병 (타이완진니혼헤이)은 일본이 대만 을 영유하고 있던 시대 에, 일본군 의 군무에 옷을 입은 대만인 .

개요

1944년 4월 이후에 지원병으로서 군무에 종사한 자는 특히 대만 특별지원병 이라고도 불린다. 이와는 별도로 대만 원주민 등의 지원자로 구성된 다카사의 용대 도 존재했고, 동대원의 신분은 군속 이었고 군인이 아니었다. 타카사의 용대는 병수나 토목 공사를 본래의 임무로 했지만 전투 에도 투입되어, 남방의 정글 에 익숙하지 않은 일본군에 있어서 전투뿐만 아니라 물자나 상병자의 담송, 현지 자활, 현지 주민과의 접촉에서도 큰 힘이 되어, 전병 사자의 비율이 정규군보다 많았다고. 그러나 각종 사정으로 전후 보상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세한 것은 타카사의 용대 의 항을 참조.

태평양전쟁 의 격화에 의해 1944년 9월에는 대만인에게도 병역의무 가 부과되었다. 일본의 패전까지 일본병으로서 군무에 종사한 대만인은 8만명을 넘어, 군속으로서 지원·징용된 사람을 포함하면 합계 약 21만명의 대만인이 일본군과 함께 싸웠다. 그 중 3만명 이상의 대만인이 전사 또는 전병사하고 있다. 대만에서 전지로 향한 그 약 21만명 중 [ 1 ] , 약 6천명이 고사족이었다.

국민당은 전쟁이 끝나 대만인 전 일본병이 복귀해 오자 그들을 강제적으로 징용했다. 국민당군에는 해군이 없고, 일본에서 접수한 전리함 을 조종하는 기술을 가진 병사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복원해 온 대만병을 강제징용했다 [ 2 ] .

잔학성

중국어를 할 수 있는 대만인은 통역이 맡겼다. 이들은 그 권한으로부터 침략처의 중국인에게 금품을 강청해 일본인병으로부터 아쿠도사가 언급되고 있다. 대만인병의 잔학성은 같은 식민지인인 조선인병도 기록이 있어, 2급 시민으로서 아래에 보이던 그들은 잔학한 행위에 의해 자신의 우수성을 보여주고 싶다고 기록되고 있다. 특히 포로, 시민에의 폭력의 B급 전범이 된 일본병 중 10%가 대만인 병사였다 [ 3 ] .

경과

당시 징병 슬로건

일본과 중국 사이에 일중전쟁이 발발한 당초는 일본의 외지였던 조선대만 에서는 징병제가 시행되지 않았지만, 전쟁의 장기화에 의해 1938년 2월에 조선인에 대하여 육군특별지원병령이 시행되어 조선인도 지원병이 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인 일본병 ).

대만인에 대한 육군특별지원병제도 ( 중국어판 )1942년 에 실시되었지만, 1937년 에는 대만총독부가 부대내에서 잡역에 종사하는 군부의 모집을 개시하고 있다. 또 중국 전선의 확대에 의해 번역 의 필요로부터 많은 군속이 모집되어 복건어 , 광동어 , 베이징어 통역에 해당했다. 전시중에는 대만의 군부 및 통역의 인원수는 군사 기밀로 되어 일반사료 중에서는 밝혀지지 않았다.

육군특별지원병제도가 시행되면 많은 대만인 지원자가 쇄도하고, 1942년 제1회 응모에는 1,000명의 정원에 대해 425,961명(당시 대만청년의 14%에 상당)의 지원자가 응모하고, 제2회에는 동일 1,000명. 해군특별지원병제도 ( 중국어판 )1943년 5월 12일 [ 4 ] 에 발표되어 조선과 동시에 실시되었다. 제1회는 3,000명의 훈련생 정원에 대해 316,097명이 응모하고 있다. 그 후 징병제의 시행에 따라 해군지원병제도는 1944년에, 육군지원병제도는 1945년에 폐지되었지만, 그때까지 육군지원병 약 5,500명, 해군지원병 약 11,000명이 일본군에 종군하고 있다. 그 후 전국의 악화에 의해 1944년 9월부터 개시된 징병 제도는 1945년에 전면 실시가 되고 있다.

1990년 후생성 이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 1937년 부터 1945년 까지 대만 총독부가 징용한 군속은 126,750명,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종군한 군인은 80,433명의 합계 207,183명이 일본군에 종군하고, 그 중 15%에 해당하는 30,306명이 전사. 3만여명의 대만인 전사자 중 26,000명은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 에 합사되고 있다. 또 대만의 신죽현 북양향 에 있는 제화궁에는 33,000명의 대만인 일본병(행방불명자 포함)을 모시고 있다. 이 중에는 전 중화민국 총통 이등휘 (일본명: 이와리 마사오)의 형·이 등기 (일본명: 이와리 무칙)도 포함되어 있다. 이등휘 자신도 일본 육군 의 소위로 종군하고 있다.

대만인 일본병으로는 이광휘(일본명: 나카무라 아키오 )가 유명하다. 리는 1943년 에 지원병으로서 인도네시아 의 모로타이 섬에 파견되어 종전을 모르고 정글 속에서 31년간 생활해, 1974년 12월이 되어 드디어 발견되었다(종전시의 계급은 일등병 이었다) [ 5 ] .

이의 발견을 계기로 급여가 미지급으로 보상이 없는 것에 관한 여론의 비판도 일어나, 1987년 9월에 의원입법으로 대만인 전몰자 유족등에의 보상이 결정되어, 일본 정부는 1990년대 에 전병 사자 및 중상자를 대상으로 1인 200만엔( 대만 달러 )으로 약 43만 달러를 지불. 그러나 일본인 전사자 유족이 수급하는 군인 은급과는 큰 차이가 있고, 대만에서는 이에 반발하는 목소리도 있다 [ 6 ] . 사망자나 중상자에게 조위금이라고 불리는 편견이 있었을 뿐, 급여는 현재도 미지급이다(이하의 야나기모토의 문헌 참조). 또 당시 강제적으로 군사우편저금으로 된 급여도 인출할 수 없었으나 이는 120배로 반환하는 것이 결정되어 1995년 지불이 시작되어 일부 전대원들은 받았다. 그러나 평균 1000엔 정도의 잔고를 소지하고, 당시로서는 대금이었는데 120배로 인출해도 12만엔에 불과하다. 이에 항의하여 1996년 6월에 일본 대사관에 상당하는 타이베이의 교류협회 사무소를 전 대원이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 7 ] [ 8 ] [ 9 ] .

2005년 4월 4일 , 대만의 대만 독립파대만 단결 연맹 당수· 소진강 은, 대만인 일본병이 합사되고 있는 야스쿠니 신사 를 참배해 대만내에서 논의를 했다( 대만 단결 연맹 야스쿠니 신사 참배 사건 참조).

대만에서는 친일적 경향이 강한 독립파와 반독립파의 정쟁이 첨예화되고 있어 독립파의 ‘참배는 대만인의 자유’라는 주장에 대해 반독립파는 ‘일본에 미를 팔고 있다’ 등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 10 ] .

통계

사망 통계

표 1 각 지역별 인원 사망자 등
지역분류
동원복원알 수없는
전몰
알 수없는
전몰률
조선 [ 11 ]전체
242,341명220,159명22,182명9.2%
군인
116,294명110,116명6,178명5.3%
군속
126,047명
110,043명
16,004명
12.7%
대만전체207,183명176,879명30,304명14.6%
군인80,433명78,287명2,146명2.7%
군속126,750명
98,590명28,160명22.2%
일본 본토전체7,814,000명5,514,000명2,300,000명29.43%

BC급 전범

표 2. BC급 전범
지역유죄사형
조선129명14명 [ 12 ]
대만173명26명
일본 본토5369명922명

특별 지원 상황

육군특별지원병의 연도별 지원자수 및 입소자수(대만인) [ 13 ]
연도지원자입소자 수선발률지원 배율
1942년425,961명1,020명0.2%417.6배

배상금

표 4 조위금 등 급부 내용
대상 명목금액혜택자
전몰자 유족특정 弔慰金 (일시 금)200만엔유족
심한 전상병자특정 弔慰金 (일시 금)200만엔본인·유족

전쟁 체험

일본인 병사와 마찬가지로 대만인 병사도 가혹한 전쟁 체험을 하고 있다.

뉴기니 섬에서 종군한 일리시가이는 호주병의 시체를 장검으로 고기를 깎아 먹었다. 이때 인간의 고기가 아닌 동물의 고기라고 들려 얼굴을 보지 않도록 해체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 14 ] .

루델란 라마카우의 증언 “전투로 사망하고 쓰러진 호주 병사가 일본군이 총검 으로 고기를 깎아 먹었다 .

역사학자인 기쿠치 이치타카 가 취재한 다카사와 용용병에 따르면 “일본인 병사는 자결했지만 우리 원주민은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자결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일본인으로서 종군해도 마지막 때는 본래의 원주민으로 돌아왔다고 키쿠치는 책에 쓰고 있다 [ 16 ] .

각주・참고문헌

  1.  정춘하의 '대만인 전지원병과 대동아전쟁' 전전사
  2.  사카이 미츠코 감독 「대만 인생」
  3.  Book review: Taiwanese as second-class imperialists ”. 타이베이 시보. 2024년 8월 14일 열람.
  4.  주보 제365호
  5.  가와사키 마스미 , 「돌아온 대만인 일본병」, 문예춘추 , 2003년, ISBN 4166603086
  6.  권다, 맹자 (2020년 11월 28일). 대만인 전 일본병의 전후 보상 문제―― 쌓여 남은 사람들의 소원에 진정한 ‘해결’을 ”. nippon.com . 공익재단법인 닛폰닷컴. 2021년 1월 19일 열람.
  7.  대만 현주민족과 일본
  8.  yama.htm 카라스 - 다카사와 용사의 기념물에서
  9.  버려진 황군 병사들
  10.  아카이브된 카피 ”. 2006년 6월 19일 시점의 오리지널 보다 아카이브. 2007년 7월 19일에 확인함.
  11.  1990년 후생성
  12.  군인 군속. 타설, 23명
  13.  " 조선급 대만 노현 상황 / 1 조선급 대만 노 현황 1 " 아시아 역사 자료 센터 Ref.B02031284700  
  14.  " "이것은 인간의 고기가 아니야. 멧돼지의 고기야"라고 자신에게 묻자..."일본군"이 된 대만 원주민과 태평양 전쟁의 "인육식" .. 문춘. 2022년 8월 25일 열람.
  15.  “뉴기니에 군대가 너무 많았다 ””. 분춘. 2022년 8월 25일 열람.
  16.  “타카사족의 의용병”은 정글에서는 일본인보다 힘들고 강했다 ”. 2022년 8월 25일 열람.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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