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18

"일제 침략으로 우리나라가 예수 믿었다"는 말이 잘못된 이유 < 연재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일제 침략으로 우리나라가 예수 믿었다"는 말이 잘못된 이유 < 연재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일제 침략으로 우리나라가 예수 믿었다"는 말이 잘못된 이유
김양재 목사는 이렇게 선언했어야 했다
기자명 홍승표 기자
승인 2025.03.17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20여 년 전쯤의 일로 생각된다. 필자가 연세대학교 언더우드가(家)기념관 조교로 근무할 당시, 유명 탤런트 장로와 기업인 장로, 모 신학대 교수가 기독교 역사 유적 탐방 프로그램 촬영차 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나는 이들을 안내하며 언더우드 선교사의 생애와 업적 등에 대해 설명하고, 그분이 우리나라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위해 애쓰고 헌신한 부분에 대해 강조해 말씀드렸다.

방송 촬영이 끝난 후 잠시 차담회를 가졌는데, 내 설명을 감명 깊게 들었다는 유명 탤런트 장로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삶과 행적에 대해 들으니, 우리나라가 일본이 아니라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순간 나는 머리가 아득해지는 충격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곧 냉정을 되찾고, 우리 민족에 대한 애정과 헌신적 삶을 보여 준 선교사 '개인'과 미국이라는 '국가'를 동일시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며, 언더우드는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고 가르치셨는데, 도리어 우리 스스로가 미국의 식민지 운운하는 것은 그릇된 역사의식이며 이 땅에 빛과 자유를 전해 준 기독교 복음에도 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내 답변 이후 환담 시간은 무척 어색하게 흘러갔다.

그로부터 10년쯤 후인 지난 2014년에는 신임 국무총리 후보자 문창극 씨가 온누리교회 강연회에서 "일제 식민 지배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다. 문창극이 진술한 소위 '신앙적 민족 사관'은 철저히 강대국과 기득권, 힘 있는 자들의 편에 선 관점이었다. 그는 우리가 누리는 민족의 번영이 곧 하나님나라라는 그릇된 신정론(神正論, theodicy)으로 자본주의와 물질적 풍요에 대한 갈망을 신앙과 일치시키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오늘날 기승을 부리는 뉴라이트의 역사관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이즈음부터 일제의 식민지 근대화론과 식민 사관은 기독교의 고백적 진술과 신앙이라는 옷을 입고, 한국 사회와 교회에 교묘히, 그러나 매우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문창극 전 총리 후보자. KBS 9시 뉴스 갈무리
여전히 기승부리는 왜곡된 역사 인식


그로부터 또다시 10년쯤 지난 2023~2024년은 홍범도 장군 동상 이전 시도와 독재자 이승만 홍보 영화 '건국 전쟁' 논란, 뉴라이트 주요 인사들의 역사 관련 공공기관(독립기념관, 한국학중앙연구원, 동북아역사재단, 진실화해위원회 등) 요직 임용 등으로 사회적 논쟁과 갈등이 첨예화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12월 3일 우리는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라는 참담한 역사적 장면을 실시간으로 목도했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지만 국회와 민주 시민들의 헌신과 노력 속에서 간신히 계엄을 해제하고 급한 불을 껐다. 그러나 여전히 내란 상황은 지속 중이다. 지난 1·19 서부지방법원 폭동 사태와 전광훈·손현보 목사를 필두로 한 극우 개신교 세력의 준동 앞에서 우리 사회는 더욱 극심한 이념적·신앙적 대립과 위기에 봉착해 있다.

이렇게 혼돈과 불확실성 속에 가슴 졸이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우리들의 2025년은 역설적이게도 우리 민족이 일제 강점으로부터 해방된 지 8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제국주의 망령과 파시즘 광기의 역사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우리 사회와 교회의 제도와 문화, 의식과 사고 속에는 아직도 일본 제국주의의 강권 논리, 그리고 파시즘의 차별과 혐오, 폭력적 메커니즘이 강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이념과 신념을 위해서라면 물리적 폭력과 국가 체제 붕괴도 불사하겠다는 개신교 극우 세력의 준동을 보면서 우리 사회와 교회는 20세기 중반 한반도와 아시아를 신음하게 했던 파시즘의 그늘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진실과 위기감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이러한 비상한 때, 우리는 어김없이 찾아온 3·1절을 맞았다. '대한민(民)국'의 역사적 출발점이며, 우리 민족의 새로운 삶의 토대인 민주 공화제를 선언한 3·1운동 106주년을 우리는 혼란스러운 민주주의 위기와 탄핵 정국 한가운데 보내야 했다. 이 뜻깊은 시기에 우리들교회 김양재 목사의 설교가 또다시 논란을 일으켰다. 김 목사는 3월 2일 3·1절 기념 주일 설교를 통해 일제의 침략으로 우리나라가 예수 믿는 나라가 되었으며, 일제 덕분에 조선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으니 일본에 고마워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조선왕조라는 절대 독재에서 살던 이 나라에 갑자기 자유민주주의가 들어오면 감당이 되었겠는가. 하나님이 뿌리 깊은 붕당정치와 계급 타파를 위해 일제의 압제를 일정 기간 허락하지 않으면 절대로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길밖에 없었다"라고 말하며, 조선이라는 소위 '미개 국가'를 탈피하고 '근대국가'로 나아가기 위해 일제의 식민 지배는 불가피한 과정이요 기간이었다는 자신의 역사관을 드러냈다.

끝으로 김 목사는 일제의 침략이 고난이 되어 이 나라가 예수를 믿게 되었으므로, 일본의 지배 덕분에 예수 믿고 구원받게 되었으니 '한국을 위해 일본이 수고했다'고 말하는 것이 구속사라는 신앙적 결론에 도달했다. 이러한 그의 궤변은 지난 2014년 문창극 씨의 "일제 식민 지배는 하나님의 뜻" 발언을 거의 그대로 답습한 2025년 버전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들은 왜 이토록 변함없이 망언들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일까?
3·1 정신의 기독교적 이해와 식민 사관의 극복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마가복음 1:15)

예수의 부활 사건은 개인이 아닌 집단, 공동체의 경험이었다. 예수의 부활을 목격하고 경험한 이들은 이렇게 가슴속 뜨거워짐을 더불어 체험하고 공유(눅 24:32)했다. 이는 로마제국의 폭력과 강권으로도 제압할 수 없는 혁명적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부활의 체험은 세계 교회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다.

3·1 운동은 한반도의 온 겨레가 스러져 가던 민족의 운명 앞에서 새로운 부활과 소망을 집단으로 체험하고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거워진 사건이었다. 더 이상 왕의 백성, 천황의 신민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유일한 존재로서 나 자신이 이 땅의 주인이며, 역사의 주체라는 집단적 자각과 회개를 경험하는 사건이었다. '회개'의 본뜻은 메타노이아(μετανόια), 즉, 생각을 고쳐먹는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3·1 운동은 우리 민족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 역사관, 시대정신을 공동으로 품어 내고 당당히 선포한 집단적 회개 사건이며, 혁명 사건이었다.

한국 개신교의 극우 세력들이 신봉하는 뉴라이트 역사 인식과 식민지 근대화론에 경도한 왜곡된 신앙관은 천황 1인 독재 체제와 타락하고 굴절된 근대화를 맹목적으로 찬양하고 숭배한 나머지, 일제의 침략이 오늘의 번영과 교회의 부흥을 가능하게 해주었다는 기괴한 논리로 이어지게 되었다. 여전히 지속 중인 분단 현실 속에서 냉전 체제의 썩은 피를 빨아 연명하다 보니 반공과 반민주를 지향한 일제의 파시즘, 해방 이후의 독재 논리에 동류·편승한 것이다.

김양재 목사가 설교를 참칭해 늘어놓은 망언들은 일제의 파시즘과 독재, 물신주의와 군국주의를 하나님의 뜻으로 교묘히 합리화하는 사특한 시도에 불과하다. 그는 조선시대는 절대 독재국가였기에, 이 나라를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이행하기 위해 일제강점기를 일정 기간 허락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말했는데, 그의 설교 중에는 일제의 극단적인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더욱 강고하고 기괴한 독재성·폭력성은 생략·은폐되어 있다. 이는 일제의 천황 독재 체제를 미화하기 위해 이전의 우리 역사를 미개하고 야만적인 시대로 폄하·부정하려는 뉴라이트,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다. 필자는 김양재 목사가 이렇게 선언했어야 한다고 본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주체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수용했으며, 그 믿음을 통해 민족 공동체의 구원과 독립을 위해 희생하고, 일제의 침략과 파시즘, 천황 독재에 저항할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대한민국 헌법의 자유 민주적 기본 질서와 민주 공화제는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피땀으로 희생한 3·1 정신에서부터 비롯되었으며, 3·1 정신과 민주 공화제를 지키는 일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우선적이고 소중한 역사적 사명이요, 책임과 의무이다.



우리는 일제의 만행과 역사적 진실을 일본인들이 깨달아 알고, 이를 인류 앞에 고백하고 회개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안내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일본의 진정한 회개와 사과, 과거사 청산만이 진정한 화해와 아시아의 평화 공존을 위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일제의 침략 덕분에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은 신앙 선배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일제의 강권과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울 수 있었으며, 3·1 운동을 통해 비로소 기독교의 복음이 온 인류가 함께 기뻐하고 공유할 수 있는 빛나는 3·1 정신으로 새롭게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양재 목사의 설교는 본말이 전도되었으며, 일제 침략의 불의한 역사를 신앙의 이름으로 교묘히 정당화한 망언에 불과하다. "

김양재 목사. 우리들교회 유튜브 갈무리


3·1 정신의 유산은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평화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당부하신 예수의 마지막 명령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하나님나라를 땅끝까지 증언하는 것(행 1:8)이었다. 3·1 운동 당시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한 양심적이고 용기 있는 선교사들의 헌신과 행동이 있었기에 일제의 학살과 만행도 결국 멈출 수 있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수난과 용기를 바라보면서 일반 민중과 세계인들은 기독교의 본질을 새롭고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경기도 화성의 제암리교회와 수촌리교회 등을 취재하고 세계에 일제의 만행을 타전한 스코필드 선교사는 자신의 한국명 석호필(石虎弼)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돌과 같은 굳은 의지(石)로 강자에겐 호랑이처럼 엄격하고(虎) 약자들을 돕겠다(弼)는 뜻이 그것이다. 그는 자기가 서 있는 선교 현장에서 약자가 겪어야 하는 고난을 외면하지 않았다. 스코필드·언더우드·노블 선교사와 테일러 기자 등 고통의 현장을 직접 찾아 위로하고 이를 세상에 알린 푸른 눈의 그리스도인들은 강한 자에겐 호랑이처럼, 약한 자에겐 비둘기처럼 다가선 예수의 정신을 실천한 참된 '증언자'였고, '선한 사마리아인'이었다.

일제는 이러한 선교사들의 양심적 행동과 노력을 경계하며 다음과 같이 선교사들을 비난했다.


"한국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은 선교사들의 죄이다. 이번 봉기는 그들의 작품이다. (중략) 선교사들 중에서 편협된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다. 그들은 한국인들의 마음을 타락시키고 민주주의라는 씨앗을 뿌린다. 그리하여 30만 조선인 기독교인들 중 상당수는 일본과 한국의 통합을 좋아하지 않고 자유를 위한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1919년 일본군 기관지 <朝鮮新聞> 중)

일제 당국이 지적했듯, 기독교 선교와 3.1운동을 통해 이 땅에 자유와 평등의 가치, 그리고 민주주의의 씨앗이 뿌려졌다. 이는 천황을 정점으로 한 1인 독재 체제를 극복하고 모든 '민'(民)이 주인 되고, 역사의 주체가 되는 새로운 나라의 비전을 기독교를 통해 발견한 것이다.

탄핵 반대 집회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흔들고 있는 개신교인들. 뉴스앤조이 안디도

그러나 오늘날 한국 개신교는 3·1 정신의 본의(本意)를 망각하고, 오히려 역사의 퇴행과 배반을 자행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국민을 학살하고자 모의했던 내란 세력에 동조하고, 물리적 폭력까지도 불사하는 광기의 모리배가 되어 버렸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아차리고 통렬히 회개하고 돌아서야 한다. 출애굽 이후 이집트에서 먹던 고기를 그리워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그 어리석음을 지금 한국교회가 다시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냉정히 돌아볼 때다.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섞여 살던 무리들이 먹을 것 때문에 탐욕을 품으니, 이스라엘 자손들도 또다시 울며 불평하였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이집트에서 생선을 공짜로 먹던 것이 기억이 생생한데, 그 밖에도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눈에 선한데, 이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이 만나밖에 없으니, 입맛마저 떨어졌다.'" (민수기 11:4-6)

김양재 목사는 구속사(救贖史)적으로 일제강점기는 필요했고, 일본에 고마움과 수고했다는 격려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게는 일제가 한반도에 보여 준 강력한 무력과 물질적 풍요가 구원이 증거요 징표로 여겨지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의 궤변적 설교의 진의와 구속사적 논리도 한편으론 납득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영원한 구원 의지의 표현으로서 역사 속에서 일하신 증거를 3·1 운동에서 찾고자 한다면, 일제가 선보인 신기루와 같은 풍요와 번영의 유혹과 이웃과 친구들을 강권으로 짓밟는 폭력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 인권과 생명 존중의 가치를 마침내 온 인류에게 선포하고 선물한 3·1 정신에서 그 구속사의 푯대와 증거를 찾았어야 했다.
 
광장에 서신 하나님, 어디에 계실까


역설적이게도 광장은 민주주의가 구현된 산실이지만, 파시즘 광기 또한 광장에서 배태되었다. 현재 한국의 광장에 두 가지의 함성과 메시지가 울려 퍼지고 있다. 하나님은 지금 광장 어디에 서 계실까? 혐오와 차별의 언어가 난무하며, 민주 공화제와 시민사회의 토대를 위협하고 붕괴를 획책하는 광기의 자리일까? 아니면 민주주의와 평화를 사랑하며 유쾌하고 명랑하게 이 엄혹한 시절에 당당히 맞서는 깨어 있는 시민, 양심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자리일까?

106년 전 3·1 운동으로 온 겨레가 종교와 이념, 빈부와 성별, 신분과 계층의 모든 차이와 차별을 뛰어넘어 온전히 하나 되었듯이, 우리는 그 기억과 경험을 우리 시대에 새롭게 회복해야 할 것이다. 갈라지고 높게 드리워진 경계와 담장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무너뜨려야(엡 2:14) 할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 피스메이커(peacemaker)가 되는 것이 우리 시대 3·1 정신을 계승하는 첫 발걸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이들의 자리에 하나님도 함께 서 계실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마태복음 5:9)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이 평화를 누리도록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골로새서 3:15)

홍승표 / 아펜젤러인우교회 담임목사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