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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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낙랑군이 의연히 존재했던 시기는 420여 년이나 된다. 이 시기 동안 평양을 중심으로 한 낙랑군은 한반도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또 가장 선진적인 지역이었으며, 주변에 정치・군사・경제적 영향력을 가장 많이 끼쳤던 곳이기도 하다.
313년경 낙랑군이 한반도에서 최종 소멸한 뒤에도 그 지역에 남아있던 많은 지식인들은 주변 지역으로 흩어져 여러 정치체에 귀속됨으로써 고구려・백제・신라와 같은 국가들이 선진 문서 행정 방식을 비롯해 농경에 종사하는 정주민을 장악하고 수취하는 데 필요한 중앙집권적인 통치 시스템을 갖추는 과정, 그리고 중국과의 대외 교섭 과정 등에서 적지 않은 기여를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연구 논저가 아직 많다고는 할 수 없으나, 낙랑군의 역사에 대한 상당한 접근이 이루어졌고, 그것이 학계 연구자들 내에서는 널리 공유되고 있는 상황이다. 낙랑군의 의의는 단순히 한반도의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을 직접 지배했다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낙랑군이 주도한 한반도 남부와 왜의 남부 지역에 이르는 사행교역(使行交易)의 실체에 대해서도 그 구체적인 실체에 접근하고 있는 중이다.
한나라는 낙랑군을 중심으로 한반도와 왜 지역까지 이어지는 서해-남해 해로를 따라 이른바 사행 교역을 진행했는데, 낙랑군이 주도한 대선단(大船團)이 이동하면서 삼한과 왜에 이르는 지역의 각국 사신들을 군현으로, 또 수도(장안)로도 이동시키며 식량, 안전까지 지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는 곧 한나라 황제의 대외적인 역량을 선전하는 하나의 수단이기도 했던 것이다.
낙랑군을 출발해 서해안과 남해안을 거쳐 일본 규슈 지역까지 이르는 항로를 이용한 공식 교역 체계는 겉으로는 소국들의 한나라에 대한 사신 파견의 모습을 띠었지만, 실제로는 이 지역에 분포한 여러 소국들에게 특산품과 한의 선진 물품을 교역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제공했다. 당연히 한과의 교역을 주도할 수 있는 소국들이 주변국들보다 상대적으로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고, 이에 사행교역의 항로가 있는 서해, 남해안 지역의 해안, 수로 지역을 따라서 3세기대까지 주요 소국들이 성립, 분포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한반도 지역은 바다를 끼고 있어서 해산물과 소금이 풍부했고, 또 산지가 많아서 짐승의 가죽(모피)과 질 좋은 목재를 얻을 수 있었다. 이에 한반도의 각국은 사행로를 통해 낙랑군에 베, 명주, 낙랑단궁(樂浪檀弓)이라 불리는 활, 그리고 물범가죽, 표범 가죽, 해산물, 짐승 모피 등을 공물(특산물)로 바쳤다. 또한 낙랑군은 이렇게 남쪽의 삼한(三韓)과 예(穢) 등과 교역을 통해 모은 특산물을 한나라 내지에 되파는 역할을 하였다.
낙랑군의 지배층은 이러한 한-한반도의 교역을 중계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쌓은 재부를 통해 중국 내지에서 나는 칠기와 청동거울, 각종 공예품 등 사치품들을 사들였고, 화려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그것이 낙랑군 주변의 지배층 무덤에서 상당히 화려한 부장품들이 많이 출토되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고 본다. 지금도 국립중앙박물관 지하 수장고에는 상당한 양의 낙랑 시기 무덤 출토품들이 쌓여있다. 단지 여러가지 이유로 전시되지 못하고 있을 뿐.
이러한 정치적・경제적 이득은 낙랑군의 지배층이 420여년 간 낙랑군을 안정적으로 이끌어간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 본래 낙랑군의 지배층은 고조선 때부터 살았던 토착민>과 <군현 설치 이전에 중국땅에서 들어온 이주민>, <낙랑군 설치 이후에 들어온 한인(漢人)> 등 여러 계통으로 구성되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낙랑군 지역에 기반을 둔 가운데 ‘낙랑’이라는 정체성을 지닌 하나의 집단이 되었다. 그들의 경제적 부와 정치적 권위의 중요한 전제는 바로 낙랑군의 정상적인 운영이었기에, 그들은 끝내 낙랑군의 성쇠와 운명을 같이하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낙랑군의 내부에는 다수의 피지배층이 있었고, 이들 중에는 중국식 교육을 받지 못한 채, 본래의 전통과 습속을 향유하는 원주민 집단도 있었다.
여하튼 낙랑군은 전한 시기에 상당한 번영을 누려서 기원 전후 당시 25개 현의 전체 인구수는 40만이 넘었으며, 기원전 45년부터 전한말까지의 연평균 인구 증가율은 0.7% 이상에 달했다. 또 낙랑군은 삼한과 예 등 한반도의 여러 소국들을 대상으로 대외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처럼 학계 내에서 낙랑군의 역사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접근이 이루어지고, 연구자들 내에서 이에 대한 공유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낙랑군의 역사에 대해서 문외한인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 심지어 어떤 이들은 낙랑군이 절대 한반도에 있을 리 없다며 단지 그 위치 문제만을 물고 늘어지는 등 처절한 이념 논쟁을 벌이는 게 현실이다.
- 낙랑군이 요동・요서에 두어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낙랑군 연구에 대해 식민사학자들의 ‘거짓말’, ‘은폐’라는 식으로 비난하는데 급급할 뿐,
- 낙랑군과 관련한 어떠한 서사나 역사상도 제시한 적이 없다.
낙랑군이 이처럼 대중에게 알려지지 못한 배경은
- 근대 이래 민족주의 사학을 기반으로 연구했던 이들이 지닌 학술적인 미숙함,
- 그리고 민족주의를 이념과 헤게모니 장악의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자신들의 민족 ‘서사’에 배치되는 모든 다른 서사들을 배척하는 이들의 편협한 활동,
- 또 그것을 수용하여 검인정체제의 역사교과서를 비롯해 박물관 등의 전시・교육에 철저하게 배제해 온 국가의 무능한 행정에 있다.
세상에 영원불변의 역사 ‘서사’가 어디있는가. 학술로서의 역사 연구가 기반이 되어 새로운 사실들을 찾아내고, 그렇게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내고, 그러한 서사가 이전의 낡은 서사를 대체하는 선순환이 이루어져야 함에도, 한국 사회의 역사관과 그들의 ‘민족’ 서사는 신채호 이래의 120년간의 틀에 갇혀서 다양한 서사를 만들어내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기존의 서사를 끌어안고 이를 원형 그대로 지키는 것만을 신념으로 삼는 형국이다.
누구나 역사는 사실에 근거해야 된다고 말하지만, 정작 자신의 이념 ‘서사’에 대해 역사적으로 다른 해석이나 상반된 팩트를 제시하는 데 대해 무조건 방어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사람들, 역사를 그저 자신들의 이념 투쟁의 수단으로만 인식하는 인간들이 다수 아닌가. 사람들이 단순한 진영 논리 속에서만 역사를 바라보는 데 익숙해지니, 고대 낙랑군의 역사 얘기가 나와도, ‘저거 혹시 뉴라이트냐?’, ‘친일, 친중 아니야?’하는 식의 아메바 같은 반응들이 튀어나오는 판국이다.
누구나 역사는 사실에 근거해야 된다고 말하지만, 정작 자신의 이념 ‘서사’에 대해 역사적으로 다른 해석이나 상반된 팩트를 제시하는 데 대해 무조건 방어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사람들, 역사를 그저 자신들의 이념 투쟁의 수단으로만 인식하는 인간들이 다수 아닌가. 사람들이 단순한 진영 논리 속에서만 역사를 바라보는 데 익숙해지니, 고대 낙랑군의 역사 얘기가 나와도, ‘저거 혹시 뉴라이트냐?’, ‘친일, 친중 아니야?’하는 식의 아메바 같은 반응들이 튀어나오는 판국이다.
최근에는 앞다퉈 근대 역사와 관련된 다큐를 만들어서 자신들의 서사를 공고히 하려는 모습도 보게 된다. 역사 다큐라는 걸 만드는 건 좋은데, 어딘가 '진실'에 대한 탐구라기보다는, 자기 '신념'에 대한 수호의 의지만 강하게 내비치는 작품들이 더러 눈에 띈다. 다시 말하지만, 본인들의 역사 서사는 남한테 그렇게 ‘강요’하는 거 아니다. 또 혹시라도 낡은 역사 서사를 이용해서 사람들을 한데 모으고 스스로 뭔가 편취하려고 한다면, 옛날에 목숨 걸면서 독립 운동의 일환으로 역사 연구하셨던 분들한테도 큰 죄를 짓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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