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5.15 13:43ㅣ최종 업데이트 18.06.19 14:30
"사람들 남겨놓고 떠날 수 없어서 남았다"
18년 전 그랬던 그가 광주로 온다, 뼈를 묻으러
[5.18 광주항쟁 숨은 의인 헌틀리 목사를 기리며] 부인 마샤 헌틀리 여사, 15일 유해 들고 입국
설갑수(kse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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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광주항쟁 당시에 광주기독병원의 원목이었던 찰스 베츠 헌틀리 목사(Charles Betts Huntly 한국명: 허철선, 이하 허철선)의 부인 마샤 헌틀리가 15일 광주에 온다. 허 목사는 지난해 6월 82세로 타계했다. 부인 마샤 헌틀리(Martha Huntley)의 방문은 유해 일부를 광주에 묻어달라는 허 목사의 유언에 따라 5.18 기념재단의 초청으로 이뤄졌다. 또한 같은 초청으로, 2015년 9월에 70세로 영면한 아놀드 피터슨의 부인 바바라 피터슨도 광주에 온다.
광주 항쟁 중 목격한 계엄군 헬기 사격에 대한 증언을 회고록에 남긴 피터슨 목사의 공헌은 널리 알려진 것에 비해, 광주 항쟁의 또다른 의로운 목자인 허 목사의 이야기는 그렇지 못하다. 이 불균형을 바로잡고자 하는 마음으로, 지난 겨울 5.18 재단 소식지 <주먹밥>에 기고한 허 목사 추모글을 다듬어 싣는다. - 필자 주

▲1980년 5월 광주항쟁 참상을 전세계에 알린, 당시 광주기독병원의 원목 찰스 베츠 헌틀리 목사(Charles Betts Huntly 한국명: 허철선, 오른쪽)와 그의 부인 마샤 헌틀리(Martha Huntley). ⓒ 촬스 베츠 헌틀리관련사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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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월 당시 허철선 목사는 학살과 항쟁이 오가는 광야의 한 가운데에서 길잃은 시민들을 끝까지 부여잡고 있었던 참된 목자였다. 또한 5월 이후, 엄혹한 전두환 치하에서 광주의 참상을 세상에 조용히 알리며, 항쟁 부상자와 유가족들을 도운 숨은 의인이었다.
80년 5월의 역사를 어지간히 공부한 사람이라면, 허 목사와 그의 아내 마샤 헌틀리의 존재와 한 번은 조우한다. 나 역시 1995년부터 <죽음을 넘어 시대를 어둠을 넘어> (1985년 풀빛 출간. 2017년 창작과 비평 재발간)을 영문 번역하면서 두 사람의 이름을 적잖은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었으나, 따로 연락을 취하거나 만날 시도는 하지 않았다.
내가 허 목사를 찾아보는 계기가 된 것은 언론의 오보였다. 지난해 4월 4일,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의 초청으로 광주항쟁 관련 미국 정부 기밀문서를 분석하기 위해 광주에 온 탐사전문기자 팀 셔록(Tim Shorrock)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당시 기자회견을 보도한 언론에 따르면, 팀은 광주항쟁 당시 광주기독병원에서 근무했던 허 목사를 1981년에 미국에서 만나 취재했다. 허 목사로부터 "헬리콥터 총상 부상자의 수술을 맡았고, 부상자들의 몸 속에서 나온 총알의 끝부분이 부드럽게 처리되어 체내에 들어가 크게 폭발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말을 들었다고 팀은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2017년 4월 4일자 <뉴스1> 보도).
나는 기사를 읽으면서 눈이 번쩍 뜨였다. 당시 첨예하게 떠오른 헬기 사격에 대한 증언과 더불어 탄환의 증언이 동시에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장 팀에게 확인하니, 헬기 사격 부분은 (언론의) 오보이고, 총알에 대한 묘사는 (통역 과정에서) 다소 오역의 소지가 있으나 사실이라고 확인해줬다. 팀에게 그 총알이 끝이 푹 파인 HP탄(Hollow Point弾)이냐고 물으니,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HP탄은 끝이 움푹 파여, 탄환이 인체를 관통하지 않고 박히는 즉시 납작하게 펴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금속체가 납작하게 펴지기 때문에 매우 치명적이고, 어느 부위를 맞더라도 피해자는 즉시 무력해진다. 살아남더라도 납작하게 펴진 총알제거 수술이 불가능해 피해자는 어떤 부위를 맞던 평생 제거 못한 탄환을 몸에 품은 채 불구자로 살아야 한다.
HP탄은1868년 성 페트로브르그 선언(St. Petersburg Declaration of 1868)에 의해 군사적 사용 금지가 국제적으로 합의됐으나, 그 치명성으로 말미암아 특수부대나 게릴라에 의해 암암리에 사용되고 있다. 사냥용으로는 여전히 판매되고 있고, 미국의 몇몇 주에서 경찰이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대인 제압용으로 권총용 소구경 HP탄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내가 허 목사요(I am Huh Moksa)"
사정이 이러하니, 만약 계엄군이 M16에 HP탄을 장전했다면 국제조약을 어기면서 흉측한 탄환을 민간인에게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허 목사를 찾아내 직접 이 문제를 묻기로 했다. 미국에서도 나이와 이름 정도만 안다면 다소간의 노력만 기울여도 대부분의 사람을 찾아낼 수 있다. 더군다나 허 목사처럼 목회를 오래 한 사람을 찾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
지난해 4월 5일 플로리다에서의 목회를 끝으로 고향인 노스 캐롤라이나로 은퇴한 허 목사를 찾아, 간단한 내 소개와 더불어 탄환과 헬기 사격에 대해 묻는 이메일을 보냈다. 이메일을 보낸 지 반나절만에, "I am Huh Moksa(내가 허 목사요)"라고 시작하는 장문의 답장을 받았다.
허 목사는 우선, 계엄군이 사용한 탄환이 HP탄이 아니라, FMJ(Full Metal Jacket) 탄이었다고 설명했다. FMJ탄은 탄환 끝이 약한 금속으로 되어있어, 인체에 맞으면 탄환 끝이 깨지면서 탄환 안에 담겨있는 연성금속, 주로 납이 피해자의 몸에 작은 파편으로 퍼지게 만들어져 있다. 수술을 해서 수많은 납 파편을 완전하게 제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나, 탄환 자체는 제거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HP탄보다는 그나마 '인도주의적'이라고 여겨지는 탄환이다. 그러나 몸 안에 퍼진 작은 납 파편의 후유증은 생존자를 평생 괴롭히는 잔인한 탄환이다. 항쟁 당시 총상 부상자들 대다수가 지금까지 고통을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허 목사는 HP탄과 FMJ탄환의 차이점을 매우 자세히 설명했고, 간직하고 있었던, FMJ 탄환이 신체 내부에서 터져 수많은 파편이 박힌 피해자의 X-ray 사진을 내게 보내줬다. 또한 헬기 사격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으나, 그가 근무했던 광주기독병원에 헬기 사격 부상으로 추정되는 부상자는 없는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5월 광주항쟁 당시, 광주기독병원의 원목 찰스 베츠 헌틀리 목사가 그동안 간직하고 있었던, FMJ 탄환이 신체 내부에서 터져 수많은 파편이 박힌 피해자의 X-ray 사진. FMJ탄은 탄환 끝이 약한 금속으로 되어있어, 인체에 맞으면 탄환 끝이 깨지면서, 탄환 안에 담겨있는 연성금속, 주로 납이 피해자의 몸에 작은 파편으로 퍼지도록 만들어져 있다. ⓒ 찰스 베츠 헌들리관련사진보기
나는 기사를 읽으면서 눈이 번쩍 뜨였다. 당시 첨예하게 떠오른 헬기 사격에 대한 증언과 더불어 탄환의 증언이 동시에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장 팀에게 확인하니, 헬기 사격 부분은 (언론의) 오보이고, 총알에 대한 묘사는 (통역 과정에서) 다소 오역의 소지가 있으나 사실이라고 확인해줬다. 팀에게 그 총알이 끝이 푹 파인 HP탄(Hollow Point弾)이냐고 물으니,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HP탄은 끝이 움푹 파여, 탄환이 인체를 관통하지 않고 박히는 즉시 납작하게 펴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금속체가 납작하게 펴지기 때문에 매우 치명적이고, 어느 부위를 맞더라도 피해자는 즉시 무력해진다. 살아남더라도 납작하게 펴진 총알제거 수술이 불가능해 피해자는 어떤 부위를 맞던 평생 제거 못한 탄환을 몸에 품은 채 불구자로 살아야 한다.
HP탄은1868년 성 페트로브르그 선언(St. Petersburg Declaration of 1868)에 의해 군사적 사용 금지가 국제적으로 합의됐으나, 그 치명성으로 말미암아 특수부대나 게릴라에 의해 암암리에 사용되고 있다. 사냥용으로는 여전히 판매되고 있고, 미국의 몇몇 주에서 경찰이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대인 제압용으로 권총용 소구경 HP탄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내가 허 목사요(I am Huh Moksa)"
사정이 이러하니, 만약 계엄군이 M16에 HP탄을 장전했다면 국제조약을 어기면서 흉측한 탄환을 민간인에게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허 목사를 찾아내 직접 이 문제를 묻기로 했다. 미국에서도 나이와 이름 정도만 안다면 다소간의 노력만 기울여도 대부분의 사람을 찾아낼 수 있다. 더군다나 허 목사처럼 목회를 오래 한 사람을 찾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
지난해 4월 5일 플로리다에서의 목회를 끝으로 고향인 노스 캐롤라이나로 은퇴한 허 목사를 찾아, 간단한 내 소개와 더불어 탄환과 헬기 사격에 대해 묻는 이메일을 보냈다. 이메일을 보낸 지 반나절만에, "I am Huh Moksa(내가 허 목사요)"라고 시작하는 장문의 답장을 받았다.
허 목사는 우선, 계엄군이 사용한 탄환이 HP탄이 아니라, FMJ(Full Metal Jacket) 탄이었다고 설명했다. FMJ탄은 탄환 끝이 약한 금속으로 되어있어, 인체에 맞으면 탄환 끝이 깨지면서 탄환 안에 담겨있는 연성금속, 주로 납이 피해자의 몸에 작은 파편으로 퍼지게 만들어져 있다. 수술을 해서 수많은 납 파편을 완전하게 제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나, 탄환 자체는 제거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HP탄보다는 그나마 '인도주의적'이라고 여겨지는 탄환이다. 그러나 몸 안에 퍼진 작은 납 파편의 후유증은 생존자를 평생 괴롭히는 잔인한 탄환이다. 항쟁 당시 총상 부상자들 대다수가 지금까지 고통을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허 목사는 HP탄과 FMJ탄환의 차이점을 매우 자세히 설명했고, 간직하고 있었던, FMJ 탄환이 신체 내부에서 터져 수많은 파편이 박힌 피해자의 X-ray 사진을 내게 보내줬다. 또한 헬기 사격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으나, 그가 근무했던 광주기독병원에 헬기 사격 부상으로 추정되는 부상자는 없는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5월 광주항쟁 당시, 광주기독병원의 원목 찰스 베츠 헌틀리 목사가 그동안 간직하고 있었던, FMJ 탄환이 신체 내부에서 터져 수많은 파편이 박힌 피해자의 X-ray 사진. FMJ탄은 탄환 끝이 약한 금속으로 되어있어, 인체에 맞으면 탄환 끝이 깨지면서, 탄환 안에 담겨있는 연성금속, 주로 납이 피해자의 몸에 작은 파편으로 퍼지도록 만들어져 있다. ⓒ 찰스 베츠 헌들리관련사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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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답신에서 허 목사가 항쟁 당시 목격한 것을 가지런히 정리한 것을 넘어서 깊게 연구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허 목사는 계엄군의 탄환이 당시 국군이 널리 사용한 풍산 금속의 FMJ 라는 점과, 부상자와 사망자들의 총상 부위가 항쟁이 격화함에 따라 상부 몸통에서 두개골 정밀 타격으로 옮겨간 점을 지적했다.
최초 발포 명령자를 아직 찾아내지 못한 안타까운 현실 속에서, 허목사가 지적한 계엄군 집단 발포의 패턴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전문적 분석이 더 필요하겠지만, 보통 비무장 군중 진압용 실탄 사격은 사망자를 줄이기 위해 몇 차례 경고 후 하반신 아래를 겨냥하는 게 국제적 규범이다.
초기 총상이 시위대의 상체에 집중됐다면, 계엄군은 애초부터 해산이나 진압이 아닌 살상을 위해 방아쇠를 당긴 셈이다. 또한 이후에 두부 총상은 살상이 보다 정교하고 조직화됐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말하자면, 계엄군의 실탄 사격은 진압이나 해산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닌 애초부터 살상을 목적으로 시작했고, 그 후 살상을 위해 정교화 됐다는 것을 가늠할 수 있었다.
"군인들이 물러나자, 폭력이 끝났다"
그렇게 첫 이메일이 오간 이후, 허 목사와 나는 그 후 한 달여 기간 동안 1주일에 서너 차례 이메일을 주고 받았다. 허 목사도 궁금한 게 너무 많았고, 나도 묻고 싶은 질문이 차고 넘쳤다.
허 목사는 촛불혁명 이후 한국 상황에 대해 궁금해했다. 나는 허 목사가 던지는 질문에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간단히 설명하고, 도움이 될 수 있는 영문 기사나 동영상 링크를 보냈다. 허 목사는 문재인 대통령의 5.18 기념 연설 영상을 보면서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대조적으로 허 목사는 나의 간단한 질문에도 언제나 매우 장문의 답변을 주곤 했다. 글의 내용이나 깊이로 봤을 때 자서전 삼아 정리한 원고에서 내가 하는 질문에 맞춰 그때그때 정리해서 글을 보내는듯 했다.
허 목사는 광주항쟁을 둘러싼 '논란 아닌 논란' 몇 가지에 대해서는 묻기도 전에 선제적으로 답변하기도 했다. 광주항쟁이 북한과 무관하며, 항쟁 기간 중 시민군이 북한 간첩 용의자를 체포하여 계엄군에 넘긴 사건도 증언했다. 과격 시위가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당시 신군부의 해명에는 여전히 조용한 분노를 삭이고 있는듯 했다. 사학도이자 문학도이기도 한 허 목사는 열흘 간의 항쟁을 다음의 한 마디로 깔끔하게 정리했다.
"군인들이 광주에서 물러나자, 모든 폭력이 종식됐다."
"떠날 수 없어 남았다"
외국인 선교사라는 지위 덕에 계엄군의 직접적 폭력을 피할 수 있었으나, 허 목사를 비롯한 외국인 선교사들과 그들의 자녀들 모두는 항쟁 이후 외상후장애(PTSD)를 겪었다. 성직자로서 엄청난 폭력을 목도한 탓이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이 광주라는 비극 앞에서 단순한 관객으로 머물지 않았다. 헬기 사격을 증언한 피터슨 목사는 AP통신 테리 앤더슨의 통역을 맡아 광주를 누비고 다녔고, 독일어에 능통한 허 목사는 영화 <택시 운전사>의 실존인물인 독일인 TV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를 그의 집에 머물게 하기도 했다.
가족들이 희생자를 매장하는 한 산기슭으로 힌츠페터를 데리고 간 것도 허목사 부부였다. 마샤에 따르면, 그날 26명의 청년들을 땅에 묻었는데 호남 신학대생 1명을 포함한 3~4명의 희생자는 평소 허 목사 부부가 알고 지내던 교회 청년들이었다.
계엄군의 광주 재점령을 앞두고, 미군은 헬기까지 동원해 선교사와 가족들을 송정리 미공군 기지로 이동시키려고 계획했지만, 피터슨 목사와 허 목사, 그리고 그의 가족들은 광주 시내에 남기로 결심했다.
어린 자녀가 있으니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게다가 5일간 지속된 밑도 끝도 없는 참상을 목격한 직후였다. 계엄군이 다시 올 경우 무고한 광주 시민은 커녕 성직자의 지위나 미국 국적인 그들의 안전조차 보장하기 어렵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허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18년 동안 섬겼던 도시와 사람들을 남겨놓고 그냥 떠날 수가 없어서 남기로 했다."
그날, 떠날 수 없어서 최후까지 남았던 사람들은, 도청 밖에도 있었던 셈이다.
사진과 증언
5월 항쟁 당시 광주에 있던 외국 선교사들 대부분이 각자 나름의 기록을 남겼다. 잘 알려진 대로 피터슨 목사는 그의 회고록에서 헬기 사격에 대해 기술했고, 언더우드 목사 부부도 일부 출간된 비망록을 남겼다. 허 목사는 항쟁 내내 거리에서, 그리고 광주기독병원에서 수많은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을 사택 지하실의 암실에서 현상했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사망자와 부상자 사진의 대부분은 허목사가 찍었다고 봐도 큰 무리가 아닐 것이다.
허 목사는 사진 일부를 힌츠페터를 통해 처음 세상에 내놨다. 허 목사는 자신이 찍은 항쟁의 참상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것 같다. 목자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항쟁 이후 기독병원으로 부상자를 위문하러 온 극동방송 사장 김장환 목사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조언을 구했다. 그런데 한국인 목사 김장환은 외국인 허 목사가 항쟁의 사진을 갖고 있다고 전두환 정부에 전했다.
이를 우연히 전해들은 허 목사는 경찰의 압수 수색에 대비했다. 중요하지 않은 사진은 찾기 쉬운 장소에 갖다 놓고, 중요한 사진은 깊숙이 숨겼다. 다행히 경찰 조사도 수색도 없었다. 외국인 선교사 사저를 뒤져서 항쟁 유혈 진압 이후 가뜩이나 험악해진 국제 여론을 악화하고 싶지 않다는 게 전두환 일당의 속셈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사진은 광주 천주교계로 전달됐고, 허 목사의 독일 교단본부를 통해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
탄환 파편을 들고 미 대사관을 찾아가다
5월 항쟁의 유혈 진압 직후, 허 목사는 부상자들 몸에서 제거한 탄환 파편을 들고 서울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찾아가 미국 정부가 전두환의 학살을 비난해달라고 청원했다. 그러나 한국 내부 문제에 개입할 수 없다는 게 미 대사관 직원의 답변이었다. 허 목사가 더 자세히 밝히진 않았지만, 당시 허 목사의 청원이 상당히 거셌던 것 같다. 그 후 허 목사는 '광주의 장로교 선교사들을 더이상 존경할 수 없다'는 미 대사관 직원의 말을 전해들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미국 정부가 광주항쟁에 대해 자체 조사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허 목사는 1980년 6월 미 대사관을 통해 광주에 온 미 국무성 조사관을 만나 장시간 인터뷰도 했다. 1980년 6월 19일의 미 대사관 전문은 허 목사의 표현을 빌어 광주항쟁을 미국 독립전쟁의 발단이 됐던 보스턴 차 사건에 비견했다. 허 목사는 또 미 CIA 조사관과도 장시간 인터뷰했다고 한다. 하지만 허 목사의 증언이 반영된 CIA 보고서는 아직 공개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허 목사는 1981년 독일 장로교단에서 파견된 조사관과도 만나서 항쟁의 진상을 설명했고, 조사관이 건넨 미화 5000불을 갖고 부상자와 가족들을 도왔다. 미국에서 안식년을 지냈던 1982년에도 인권운동가와 정치인들을 꾸준히 접촉해 광주항쟁을 알렸다. 그 일은 1984년 미국으로 영구 귀국 할 때까지 계속됐다.
▲1980년 5.18 당시 시민들과 계엄군들이 금남로에서 대치하고 있다. ⓒ 5.18 기념재단관련사진보기
기억과 기록
그 후 은퇴할 때까지 허 목사는 당신이 갖고 있는 광주의 기억과 기록을 차분히 정리했던 것 같다. 잘 준비되고 정리된 허 목사의 이메일 마디마디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기억과 기록을 한국 정부와 한 번도 나눠본 적이 없다는 점을 늘 안타까워했다. 김영삼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에 이르는 15년의 진상규명 기간 동안, 한국정부는 한 번도 그와 접촉하지 않았다. 진상규명 차원에서도 그렇고, 인간적으로도 그렇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답장 없는 마지막 이메일
내가 마지막으로 허 목사에게 이메일을 보낸 날짜는 2017년 6월 27일, 나름 분주한 5월을 보낸 한 달 후였다. 하루 전 허 목사가 영면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나는 장문의 답장을 기대하며 허 목사에게 또다시 끝없는 질문을 하고 있었다.
내 장문의 질문은, 광주항쟁의 발포 명령자를 추적하는 광주 MBC 특별취재팀이 입수한, 당시 카터 행정부의 국제안보담당 부차관보인 니콜라스 플랫의 수기 메모에 대한 것이었다. 수기 메모는 1980년 5월 22일 신군부의 유혈 진압을 사실상 지지하기로 한 백악관 안보회의에서 작성한 것인데,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인 위컴과 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이 광주에서 60여 명이 죽었고 400여 명이 부상했다고 보고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전두환의 공수부대가 저지른 무자비한 폭력에 대항하여 생존을 위해 시민들이 스스로 무장하여 도청을 마침내 점거한 날이 1980년 5월 22일이다. 공식 피해 통계는 엄두도 낼 수 없었던 그 날에 미국 대사관과 군부는 피해 상황을 집계했고 백악관 회의에 보고도 한 것이다.
그 숫자의 정확도는 별개로 치더라도, 집계 계통을 추적하면 미국이 광주의 참상에 대해 얼마나 알았고 어떻게 개입했는지에 대한 의문의 실마리를 풀 수 있을거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장문의 이메일에서 허 목사에게 물었다. 혹시 그 시기에 기독병원의 피해자 숫자를 미국 공관이나 군부에서 취합한 적이 있냐고.
역사의 강자를 따뜻하게 맞이하자
허 목사는 혼수상태를 몇번 겪으면서 1주일 정도 앓다가 영면했다고 한다. 언젠가 이메일에서 허 목사는 다음날 간단한 심장 수술을 하니 기도 해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나는 그 청을 거부하면서 '기도 같은 것은 할 줄도 모르고 하지도 않는다, 쾌유하리라 믿는다'라는 답장을 보냈다. 허 목사의 영면 소식을 마샤로부터 온 이메일에서 확인한 순간, 나의 밑도 끝도 없는 시건방짐이 떠올라 가슴이 서늘해졌다.
광주 이야기를 털어놓는 장문의 이메일 말미에 가끔 허 목사는 전두환을 용서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할 때마다 나는 기독교에서도 회개하지 않은 자는 용서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전두환을 용서할 수 없다고 대들곤 했다. 허 목사는 열심히 기도를 하면 누구든지 용서할 수 있다고 차분하게 답변하곤 했다.
세상은 흔히 용서를 강자의 특권이라고 말한다. 나름 맞는 말이다. 그러나 떠날 수도, 외면할 수도 있었던 학살의 도시에서 약자와 함께 하며 끝까지 버틴 목자, 찰스 베츠 헌틀리, 허철선을 누가 약자라 말할 수 있겠는가.
역사는 그를 학살자 전두환도 용서할 수 있는 강자로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광주는, 그리고 촛불혁명의 대한민국은, 5월에 찾아오는 의인의 유족과 유해를 따뜻하게 맞이했으면 한다.
<5.18 민중항쟁 당시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 활동 관련 반론보도문>
본 인터넷신문은 지난 5월 15일 자 민족·국제면에 게재된 <"사람들 남겨놓고 떠날 수 없어서 남았다" 18년 전 그랬던 그가 광주로 온다, 뼈를 묻으러>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5.18 민중항쟁의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린 외국인 허철선 목사가 항쟁의 사진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극동방송 사장 김장환 목사가 전두환 정부에 전했다고 보도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김장환 목사는 "허 목사가 소지한 항쟁 관련 사진 자료 등을 가지고 전두환 정부와 접촉하거나 관련 사실을 전한 사실이 없다."고 알려왔습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설갑수씨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최초의 기록물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황석영 기록, 1985)의 영문 번역서 <광주일지>(Kwangju Diary: Beyond Death, Beyond the Darkness of the Age, 1999)를 썼다.
#찰스 베츠 헌틀리 목사#5.18 광주민중항쟁#5.18민주화운동#허철선#5.18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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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방송 김장환과 광주 목사님들에 대한 추억* (긴글이 될 수도 있음. 재밌으면 공유 해요)
광주항쟁 당시, 베츠 헌틀리 목사는 광주기독병원 교목이었다. 목사는 손재주도 좋고, 사진찍기를 즐겨 사택에 사진현상용 암실이 있을 정도였다. 광주 항쟁 10일 동안 목사는 직접 사진을 찍어 참상을 기록했고, 그가 속한 사진동우회 회원들에게도 사진찍어 오라 부탁해, 항쟁을 수많은 필름에 남길 수 있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볼 수 있는 항재 사망자 시신 얼굴 사진 대부분을 헌틀리 목사가 촬영했다.
2917년 초, 이러저러한 기회로, 헌틀리 목사 부부와 수많은 이메일, 가끔 통화했다. 10개월 남짓 지난후 그가 소천했을 때, 간단한 추모의 글을 5.18 재단의 간행지 "주먹밥"에 기고했다.
2018년 목사의 사택을 보존하시던 분들과 5.18 재단 그리고 광주시에서 헌틀리 목사의 광주 이장을 지원했다. 이장은 5월로 예정됐었다. 마침 그해 5.18 재단의 초청으로 기념주간 동안, 광주에 가게된 나는 추모의 글을 다시 정리해서 오마이 뉴스에 보냈고, 오마이 뉴스는 헌틀리 가족 입국 날짜에 들을 실어줬다. 고마웠다.
추모의 글(링크)에서 극동방송 김장환(이하 빌리킴)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미출간된 헌틀리 목사의 자서전을 기반하고 있는데, 내용인 즉슨, 빌리킴이 항쟁 말미에 광주에 와서 기독병원 환자들을 위문했고, 헌틀리 목사는 빌리킴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광주 실상에 대해 토로했다는 것이다. 빌리킴의 자서전에서 빌리킴이 전두환의 부탁으로 광주에 간 것까지는 확인할 수 있었다.
헌틀리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그후 빌리킴이 광주 항쟁 사진을 헌틀리 목사가 보관하고 있다는 것을 한국정부에 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압수수색을 염려한 나머지, 가벼운 사진은 찾기 쉬운 곳에, 중요한 사진은 어려운 곳에 숨겼다고 증언했다.
기사가 나가고, 헌틀리 사모와 가족을 만나 반갑게 지내고, 광주기독병원의 추모식과 이장식에 참여했다. 엄숙하고 가족적인 행사에 광주의 거의 모든 KNCC 목사들이 나오신것 같았다.
식을 모두 마치고, 호남 신학교에서 헌틀리 사모, 그리고 같이 초청했던 피터슨 사모와 지역 목사들과 즉석 간담회가 있었다. 나는 졸지에 통역으로 앉아있게 됐다. 간담회 중간에 한 목사가 헌틀리 목사님과 빌리킴의 사진 이야기를 꺼내자, 목사 서너명이 그 이야기 안다고 동조했다. 헌틀리 사모님는 망연자실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피터슨 사모님 "빌리킴 나쁜 사람"이라고 얼굴을 붉히셨다. 피터슨 사모님 나름대로 무슨 사연이 있는듯 했으나, 따로 여쭙지는 않았다.
그러는 와중, 극동방송의 누군가(여성인데 이름, 직책 기억 안 남)에서 연락이 왔다. 사진 부분은 사실이 아니니 삭제하고 사과하지 않으면 고소한다고 말했다. 대판 싸웠다.
그렇게 미국에 와서 고민에 빠졌다. 소송을 하면 성패와 무관하게 영세업체 오마이가 치뤄야할 금전적 부담이 미안스러웠다. 그렇다고 남편 이장하고, 사뭇 뜻깊은 시간을 광주에서 보낸 헌틀리 사모님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도 괴로운 일이었다.
그래서 광주 교회 사정을 잘 알고, 추모식을 주도하신 분께 연락하여, 간담회 때 사진 사건을 안다고 말씀하신 목사들로부터 사진에 대한 서신 한 통만 부탁한다고 말씀드렸다. 며칠 후 온 그 분의 회신인즉슨, 목사들 모두가 내 오마이 기사를 통해 사진 이야기를 알게되어 서신을 써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내 기사가 거의 바이럴이었네라고 씁쓸히 웃으며, 결국 헌틀리 사모님에게 서신을 부탁했고, 사모는 팔순의 노구를 이끌며, 막내 딸집에 가서 서신을 스캔하여 이멜로 보내고, 우체국 가서 익스프레스로 보냈다.
덕분에, 사태는 언론중재위의 반론기제 지시로 끝났다.
여하튼 기분 더러운 경험이었다.
요즘 90넘어 발톱손톱 다 빠진 빌리킴에 대한 압색과 조사가 화제다. 근데 다들 조금 비겁하게 보인다. 한심하게도 보인다.
빌리킴은 애시당초, 적어도 5공 이후에는, 제껴야 될 인물이었다. 그가 그후 40여년 동안 승승장구한 이유에는 다른 목사들의 안일함도 있었다. 나는 그것을 2018년에 볼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헌틀리 목사의 영면을 기원한다. 비기독교인 내가 신앙 갖고 건방을 떨어도 온화하게 받아주시고, 토론하려 하셨다. 더 오래 사셨다면, 내가 교회 다시 나갈뻔 했다.
여하튼, 전두환 평전이나 빌리킴 평전은 한 번 쓰고 싶은데... 어느 하세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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