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세 사회로의 여행을 읽고
역사교육 2000070011 석정경
1.서론
<<중국 중세 사회로의 여행>>은 라이샤워 교수가 일본인 승려 엔닌의 여행일
지인 <입당구법순례행기>를 읽게 쉽게 쓴 책이다. <입당구법순례행기>를 9항
목으로 분류한 이 책은 한국과 일본의 자료에서 보충하여 당시 중국의 다양한 생
활 양식을 재현하고 역사적으로 규명할 수 있는 여러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제시한 9항목을 살펴보면 1장은 엔닌의 일기에 대한 작가의
피력, 2장은 엔닌의 생애를, 3장은 견당사에 대한 내용, 4장은 엔닌이 본 중국관
리를 통한 중국 관료주의, 5장은 당나라 생활이라는 제목으로 엔닌이 본 당나라
사회의 모습을, 6장은 중국 불교에 대한 설명, 7장은 도교를 숭상하는 황제로 인
한 불교 탄압, 8장은 당시 중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신라인들의 모습을, 마지
막으로 9장에서 엔닌의 귀국으로 마무리하게 된다. 그럼, 작가가 동아시아 역사
에서 최초의 위대한 일기 혹은 중국에서의 생활에 관해 외국인이 저술한 최초의
기록이라고 한 <입당구법순례행기>는 어떠한 내용인지 알아보기로 하자.
2.본론
이 책에서 1,2장은 엔닌의 일기가 아닌 라이샤워가 보충해서 쓴 글이다. 여기에
는 엔닌의 일기에 관한 작가의 생각과 엔닌의 생애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먼저
1장을 살펴보면 엔닌의 일기를 베니스의 상인인 마르코 폴로가 지은 <동방견문
록>과 비교를 하면서 그 성격을 규명하고 있다. 사실 마르코 폴로의 견문록은 세
계에 널리 알려져 있으나 엔닌의 일기는 그가 살았던 동아시아에서도 존재를 모
르고 있었다. 그것은 <동방견문록>이 중국이라는 대륙이 이민족인 "원"이라는
나라에 의해 지배받던, 마르코 폴로같은 이민족이 보기에 아주 흥미로운 시기를
서술해 놓았기 때문이다. 사실 엔닌이 다녀갔던 9세기의 중국은 사회 경제적으
로는 아주 변화의 시기였으나 정치적으로 그렇게 극적인 시대는 아니었다. 그렇
문학관교회
중국 중세 사회로의 여행을 읽고 (엔닌스님의 입당구법순
례행기)
기 때문에 당의 사실적인 모습을 그대로 서술하고 있으나 그 동안 사람들에게 읽
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의 역사적 가치를 무시할 수는
없다. 사실적인 그의 서술로 인해 그 시대에 대한 사실을 더욱 자세히 알 수 있
다. 작가는 그런 엔닌의 일기를 통해 중국의 중세를 엿보려 하는 것이다. 2장은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엔닌의 생애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라이샤워는 주로 그
의 일기와 후세 사람들이 적은 전기를 통해 그의 생애를 비추고 있다. 그의 생애
를 간단히 언급하자면 그는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9
살부터 고우치라는 승려에게 맡겨지면서 불자의 길을 걷는다. 그 후 15세때 일본
에 천태종을 전했던 위대한 승려인 사이죠의 제자가 된다. 그 후 그는 점점 매진
하여 834년 중국으로 건너가는 사절단으로 임명된다. 그 후의 생애는 그의 일기
에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귀국 후에 일본 불가의 대부로 불리게 된다. 간단하게
그의 생애를 서술해 보았다.
자세한 것은 그의 일기 내용을 보며 알아보도록 하자. 3장부터 엔닌의 일기에 대
한 내용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3장에는 견당사에 대한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고
대 중국인들은 그들의 나라를 "네 가지의 이적"으로 둘러싸인 유일한 문명의 땅
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주변민족은 중국에 공물을 바치는 관계에 있어야 한
다고 간주하였다. 일본이 이런 조공무역을 하게 된 것은 57년으로 알려지고 있
다. 그 후로 7세기 초반부터 일본사절단을 더욱 대규모이고 항구적인 계획을 갖
추었다. 그러나 엔닌이 참가한 사절단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사절단을 파견하지
않았다. 그럼 마지막이 된 견당사는 어떤 경로로 갔을까? 이 사절단은 세차례의
시도로 해서 자연적인 재해와 싸우며 겨우 양쯔강을 통해 당나라로 가게 된다.
사실 엔닌은 견당사의 임무도 중요하지만 천태산을 순례하기 위한 목적이 더 컸
었다. 그러나 그러한 엔닌의 소망과는 달리 당 조정에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견당사의 귀국에 또다시 배의 난파로 인해 엔닌은 신라인의 도움으로 당
에 남게 된다. 이 후 이것으로 인해 엔닌이 겪게 되는 고충은 당나라의 관리들이
어떠한가를 알려주게 된다. 이것은 4장에서 엔닌이 언급한 관리들의 모습에서
나타나게 된다.
엔닌이 본 당나라 관리들은 대체로 엄격하고 조직적이다. 엔닌이 천태종의 이름
이 비롯된 천태산을 순례하기 위해 당 조정에 허가를 요청했을 때 당에서는 그것
을 허락하지 않는데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당에 남아 있을 때 그가 받은 심문은
당 관리의 엄격함과 조직적인 성격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험으로 인해 엔
닌은 그 후에 당하는 심문처럼 당의 관리를 대하는 자리에서 능숙하게 그들을 대
하게 된다. 이런 능숙함은 후에 통행증 발부 신청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5장에 나타나는 내용은 당나라의 생활에 대한 서술인데 이는 당에서 이루어진
민간의 행사나 국가적 의례 외에도 엔닌이 당에서 보고 생각한 것에 대해 나타난
다. 0 0
여기에는 엔닌이 여행 중에 필요한 음식이나 숙박시설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는
데 그 당시의 여관은 주로 무료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엔닌의 기록에서 숙박
비를 받은 것에 대한 불만이 있는데 그것은 이러한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
밖에도 승려로서 거기에 관련된 생활 양식도 상세히 적혀 있다. 당은 여러 종교
를 수용하였으나 주로 불교를 숭상하는 황제를 보더라도 불교는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장에서도 이러한 배경을 통한 중국
불교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가 불교자인 입장을 충분히 살린 사원에 관한 것이
나 그가 순례한 오대산과 문수보살에 대한 얘기도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중국을 떠난 이유중의 하나인 불교 탄압으로 인한 불교의 쇠퇴에 대해서도 언급
하고 있다.
이런 불교 쇠퇴는 불교 탄압이라는 외부적인 배경 외에도 내부적으로 신앙의 불
꽃을 냉각시키기고 지적 활발함을 둔화시키는 어떤 요인이 있었음을 주장하기도
한다. 겉으로는 불교가 화려한 성장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 이미 안에서부터 위협
을 받기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교는 쇠퇴의 징후를 보였다는 것이다. 7장에
는 이런 불교의 쇠퇴를 바탕으로 하는 불교 탄압이라는 소재를 직접적으로 언급
하고 있다. 중국에서 네 가지의 불교 탄압이 있었는데 첫 번째는 북위 무종의 치
하에서 446년에 이루어졌고 두 번째는 574년에 역시 이민족 왕족인 북조의 무종
의 치하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다음은 엔닌이 당하였던 탄압으로 당나라 무종의
치하에서 이루어졌다. 마지막으로는 955년, 단명한 후주 세종의 치하에서 이루
어졌다. 그러나 엔닌이 장안에 있던 845년에 절정에 이르렀던 탄압은 규모 면에
서 다른 세 번의 경우보다도 매우 심각해서 그들을 하나로 부르는 것은 한편을
과소평가하든지 다른 편을 과대평가하게 된다. 이런 탄압은 도교를 숭상하였던
무왕이었지만 유교의 입장에서 정당화하기도 했다. 이런 탄압으로 중국의 많은
승려들은 환속을 하여 의무 납세자가 되어야 했고 외국의 승려들은 강압적으로
추방되기도 하였다. 그것으로 인해 엔닌 또한 추방되어 고국으로 돌아가게 된
다.
엔닌이 쓴 일기에는 신라인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있었는데 주로 중국에서 활약
했던 신라인에 대한 기록이다. 여기에는 장보고에 대한 기록도 아주 상세한데 이
는 그가 장보고에게 친절을 받은 것도 있지만 그 당시 중국에서 활약했던 신라인
들에게는 장보고의 존재가 아주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중국에서 활
발하게 활동했던 무역상인에 대한 기록도 아주 상세하다. 이는 그 자신이 신라인
의 도움으로 오대산 순례나 장안에서의 연구를 할 수 있었다는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 기록에는 신라인을 긍정적인 관점에서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
지막 제 9장에서는 엔닌이 일본으로 귀국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엔닌이 중
국 불교에 대한 동경으로 그곳을 순례하기는 하였으나 무왕의 불교 탄압으로 잔
뜩 겁을 먹고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을 염려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추방 명
령이 떨어지고 그는 그것을 다행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당으로 갈 때와 마
찬가지로 위험한 항해를 해야 했고 그것은 신라인의 도움으로 겨우 이루어졌다.
이상이 이 책이 이루어진 체제를 통한 내용이다.
3.결론
위의 내용을 통해 그 당시의 당의 사회적 모습 뿐 아니라 신라와 일본 그리고 당
의 관계에 관해서도 알 수 있었다. 사실 여러 서적을 통해서 9세기의 당과 신라
의 모습을 알 수 있었으나 그 모습은 제국이 쇠퇴하여 가는 아주 어려운 시기라
고 인식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글을 읽고 나서 당이나 신라는 그리 간단히 쇠퇴
기를 가진 것이 아니라 선진국의 체제를 잃지 않고 그 모습을 유지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엔닌이 언급한 당의 관료체제에서도 알 수 있다. 당의 관리들은
사회적 혼란을 겪었으나 뇌물을 받지 않고 조직적 체계를 잃지 않고 있었다. 마
찬가지로 신라는 당에서 활동한 사람들을 통해 아직까지 쇠퇴의 조짐을 가진 나
라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대외 관계에서 당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것
처럼 이런 엔닌의 일기는 우리가 자세히 알지 못한 9세기 당 뿐 아니라 신라와
일본의 사회까지 상세히 알 수 있게 한다. 이것으로 보아 작가가 주장하듯이 마
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보다 더욱 역사적 가치를 지님을 알 수 있다. 엔닌은
불교의 승려로서 사실 당의 방문은 그의 종교적 염원때문이었다. 그러나 불행한
사건의 연속으로 그는 주로 일기형식으로 쓴 이 글에서 여행일지로써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그에게는 안타까운 일일지 모르나 후세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다
행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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