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세기 중국의 생활상 - 엔닌, 일기 형식의 동방 여행기를 남기다
견당사의 일원으로 파견된 일본의 승려 엔닌은 당나라의 크고 작은 도시와
촌락, 민중들의 구체적 생활 모습을 일기 형식으로 생생하게 기록했다. 엔닌에
의하면, 당 말기 관료 조직은 정연했으며 훌륭한 도로와 수로, 여행자를 위한 편
의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무제의 불교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으로 수많
은 사원과 불상이 파괴되었다.
그때 우리나라에서
는
819년 : 통일신라, 전국 각지에서 농민항쟁 시작
822년 : 통일신라, 김헌창의 난 일어남
846년 : 장보고, 청해진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염장에게
피살
목차
엔닌의 순례기, 상세한 내용이 돋보이는 동방 여행기
엔닌, 견당사의 일원으로 중국 순례에 나서다
엔닌의 일기에서 신라인이 등장하다
당 말기, 고도의 관료행정조직을 유지하다
훌륭한 도로와 수로, 여행자를 위한 숙박시설이 존재하다
승려 엔닌, 불교탄압을 목격하다
엔닌의 귀향, 9년 3개월 만에 돌아가다
엔닌의 순례기, 상세한 내용이 돋보이는 동방 여행기
중국사
9세기 중국의 생활상 - 엔닌, 일기 형식의 동방 여행기를
남기다
운경 이양자
2017. 2. 8.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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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통해 본 중국사
25. 3. 19. 오후 3:01 9세기 중국의 생활상 - 엔닌, 일기 형식의 동방 여행기를 남기다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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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동방 여행기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현장의 《대당서역기》, 엔
닌의 《입당구법 순례행기》를 꼽는다. 《대당서역기》는 7세기 인도, 그리고 《입당
구법 순례행기》와 《동방견문록》은 9세기와 13세기의 중국의 역사에 대한 귀중
한 자료이다. 이들 여행기는 엄정한 역사기록물은 아니지만 당시의 생생한 인간
의 숨결을 전해줌으로써 색다른 감흥을 안겨준다.
현장 삼장인도의 구법승으로 《서유기》의 모티프가 되기도 했다.
《동방견문록》은 서양세계에 중국을 처음으로 소개한 서적으로 당시의 유럽 사
회에 커다란 파문을 던졌지만 너무나 이질적인 문화권에서 온 상인 마르코 폴로
의 눈에 불교는 '우상숭배' 정도로 간단히 치부되기도 하였다. 게다가 이 기록은
그가 여행을 마친 지 수년이 경과한 다음에 어렴풋한 기억에 의존하여 씌어졌다.
이에 비해 일본 승려 엔닌(圓仁)의 순례기는 놀랄 만큼 상세하고 그려낸 듯 정확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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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불교와 한자문화를 공유한 동아시아 문화권의 일원이었기에 예리한 관찰력
으로 그때그때 일기형식으로 기록을 남김으로써 여행기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
다.
현장 삼장인도의 구법승으로서 풍모가 그림에 잘 표현되어 있다.
엔닌, 견당사의 일원으로 중국 순례에 나서다
838년 그는 46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견당사의 일원으로 중국 순례의 길에 나섰
다. 일본은 쇼토쿠 태자가 통일국가 체제를 정비해 나가던 7세기 이후부터 견당
사(遣唐使)를 파견하기 시작하여 총 13회 파견하였다. 견당사는 중국의 문물을
직수입하는 주요한 통로였기 때문에 조공 형식으로 파견된 이 대규모 사절단에
는 많은 지식인들이 승선하고 있었다.
견당사일본이 13회에 걸쳐 조공 형식으로 중국에 파견한 대규모 사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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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당사의 파견은 국가적 대사였으나 조난이 우려되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더
구나 당시 일본은 신라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신라의 공해상을 직접 통
과하는 위험한 항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엔닌 일행이 세 차례의 시도 끝에
어렵게 중국에 도착했을 때, 4척의 배에 651명으로 출발했던 사절단 중 391명만
이 생존하고 있었다.
엔닌의 일기에서 신라인이 등장하다
엔닌은 당나라에 발을 디딘 후 최초로 목도한 거대 도시 양주로부터 수도 장안에
이르러 당나라 황제를 알현하기까지 거쳤던 크고 작은 도시와 촌락, 관료와 민중
들의 구체적인 생활모습들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사절도장회태자 묘 벽화 일부인 사절도.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의 일기에 등장하는 신라인의 존재다. 그의 일기에서 일
본인들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나 신라인들은 중국인과 비등하게 자
주 나타나고 있다. 신라인들은 당나라에 머무는 여러 외국인 중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신라인은 견당사절의 배에 탑승했던 신라 통역 김정남인데,
그는 사절단의 통관절차를 보다 용이하게 하는 역할을 했으며 사절단의 귀행에
서도 선박을 보충하고 수리하거나, 우수한 신라 선원의 탑승 등을 주선했다.
당 말기, 고도의 관료행정조직을 유지하다
흔히 당 말기에 중국의 관료조직이 크게 흐트러졌을 것으로 추론하는데, 엔닌의
증언에 의하면 당 말에는 한 말 같은 혼란은 보이지 않았다. 9세기에도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정연한 고도의 관료행정조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엔닌이 양주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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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사로 있던 거물 정치인 이덕유에게 천태산 행의 허가를 요청하자, 그는 정중하
지만 확고하게 이를 거절했다.
이밖에도 그가 만났던 관리들은 규정에 따라 모든 것을 문서로 남겨놓으려는
획일적이고 융통성 없는 태도를 보이며 복잡한 절차로 엔닌의 여행을 지연시키
기는 했으나, 뇌물을 받고 직권을 남용하는 부정한 방법은 거의 통용되지 않았
다.
훌륭한 도로와 수로, 여행자를 위한 숙박시설이 존재하다
엔닌 일행은 여행하는 동안 도로나 거리의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하여 불편을 느
낀 적은 좀처럼 없었다. 당시 중국은 수도 장안에서 변방의 국경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도로와 수로가 방사선 상으로 그물눈처럼 연결되어 있었으며, 5리마다
표식을 세우고 10리마다 다시 하나의 표지를 세워 이를 '리격주'라 불렀는데, 표
지는 흙을 사각으로 쌓아올려 위를 뾰족하게 하고 아래를 넓힌 모양이었다.
엔닌일본의 승려로 중국의 다양한 모습을 기록으로 남겼다.
식량이나 숙박의 문제로도 거의 고생을 하지 않았다. 중국은 주요도로를 따라 공
식적인 여행자들의 편의를 위해 역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는 육로 통행에서는
'매 역마다 나귀를 빌려 문서 보따리를 운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통행증을 지
닌 여행자들은 주변에 딸린 점이나 관으로 불리는 관영, 혹은 민영의 숙박시설에
머물 수 있었다. 또한 승려였던 그는 절을 발견하면 그곳에 머물렀으며, 불교신
자들에게 개인적인 후원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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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 엔닌, 불교탄압을 목격하다
불교는 당시 널리 민간에 유행하였다. 도교가 황실의 비호로 성행하였으나 도관
의 수는 사원의 1/3에 불과했다. 절은 변두리 마을이나 산지에서도 흔히 발견되
었으며 불교신앙은 사회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한유 등 새로이
등장하는 신유학 관료들 중에서 외국 종교인 불교를 규탄하는 움직임이 시작되
더니, 무종 대에 불교에 대한 전면적이고 폭압적인 탄압이 자행되었다.
엔닌은 장안에서 이를 직접 목격했다. 842년 시작된 불교 탄압은 경제적인 이유
에서 비롯되었다. 종래에도 사원의 면세토지의 증가나 면역이 되는 승려 수의 증
가는 종종 국가의 제한조처를 불러왔었다. 사원 재산의 몰수나 젊은 승려의 환속
등 조처가 있었고, 사원 내의 불상이나 종 등의 쇠붙이가 거두어져 농기구나 동
전으로 주조되었다.
그러나 무종이 도교를 광신하게 되면서 845년 회창폐불(會昌廢佛)이라 불리는
불교계의 비극이 닥쳤다. 북위 도무제, 북주 무제, 후주 세종 대의 불교탄압과 함
께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큰 절 4600개와 작은 절 4만여 개가 모두 폐쇄되고 26
만 명의 승려가 환속되었다.
엔닌은 귀국의 도정에서 참담히 파괴된 무수한 사원을 만났으며, 그중에는 적산
법화원도 예외가 아니었다. 엔닌은 다시 신라 친구들을 만났고 그들의 보호 속에
그동안 모아온 귀중한 불경이나 만다라를 보존할 수 있었다. 마침내 846년 무종
이 도교의 불로장생의 약을 잘못 먹어 죽음에 이른 연후에야 불교 탄압은 막을
내렸다.
엔닌의 귀향, 9년 3개월 만에 돌아가다
847년 9월 2일 정오, 엔닌 일행은 신라인 김진의 배를 타고 산동의 적산포를 출
발하여 귀국 행로에 올랐다. 남해안을 돌고 규슈를 거쳐 9월 17일 엔닌의 출발지
였던 하카다 만에 도착했다. 9년 3개월 만의 귀향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9세기 중국의 생활상 - 엔닌, 일기 형식의 동방 여행기를 남기
다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2012. 3. 23., 가람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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