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22

고영복 - 위키백과, 36년간 간첩으로 암약

고영복 - 위키백과

고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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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복
출생 1928년
경남 함양
사망 2011년 2월 24일
삼성서울병원
성별 남성
국적 대한민국
학력 경성공립공업학교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 및 동 대학원. 문학박사
경력 현대사회연구소장, 한국문화정책개발원장
직업 교수, 사회학자
배우자 이연희

고영복(高永復, 1928년 ~ 2011년 2월 24일)은 대한민국 사회학자다. 1928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나 1954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졸업하고 1961년 이화여대, 1966년부터 1993년 정년퇴임 시까지 서울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사회학회장, 한국문화정책개발원장 등을 지내며 사회학계 권위자로 인정받았다. 1981년 ~ 1982년 현대사회연구소 소장과 1994년 한국문화정책개발원(차관급) 초대원장을 지냈다. 하지만 이화여대 강사로 재직하던 1961년부터 퇴임 이후인 1996년까지 북한 공작원과 수차례 접촉하고 은신처를 제공한 혐의로 1997년 구속기소되면서 파장이 일었다.

고영복 고정 간첩 사건
 이 부분의 본문은 고영복 고정 간첩 사건입니다.
1961년부터 1996년까지 수차례 공작원을 접촉하고 은신처를 제공한 혐의로 1997년 11월 간첩방조, 기밀누설, 회합통신으로 구속기소되어 서울지방법원에서 기밀누설을 무죄로 하여 징역7년이 선고되었으나 항소하여 서울고등법원에서 간첩방조가 무죄가 되어 징역2년으로 감형되었고 이는 대법원에서 확정되어 국가보안법 회합,통신죄만이 인정되어 교도소에서 1년 3개월 복역하다가 1999년 2월 형집행 정지로 석방되었다.

이후 자신이 설립한 사회문화연구소에서 연구와 집필 활동에 전념하다가, 2010년 9월 담도암 판정을 받아 투병 중 2011년 2월 24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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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간 간첩으로 암약한 서울대 교수 고영복
기자명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 원장
입력 2024.11.16 
https://weekly.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38259
36년간 북한의 고정간첩으로 암약해온 고영복 전 서울대 명예교수가 1997년 첫 공판을 받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photo 연합

1997년 11월 1일 오전 고영복 교수(전 서울대 사회학과)는 모르는 사람한테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지금 위급상황이니 급히 북경으로 출국하여 북한 대사관으로 들어가라”라는 급한 목소리였다. 고영복은 자신이 며칠 전에 만났던 북한 공작원이 지령한 메모지와 자신이 작성한 보고서 초안을 찢어 휴지통에 버리고 도주하려다 안기부(현 국정원) 대공수사관에게 체포되었다. 고영복의 정체는 1997년 10월 27일 검거된 최정남·강연정 부부간첩(본지 2823호, ‘음독까지 감행한 울산부부간첩’ 참조)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서울대 교수가 36년간 암약해온 고정간첩이라는 놀라운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남북회담 남한 측 대표로 참석

고영복은 1928년 경남 함양읍에서 출생하여 1953년 서울대 사회학과, 1956년 서울대 대학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 강사와 이화여대 조교수를 거쳐 1966년부터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1993년 정년퇴직을 한 그는 사회학개론 등 22권의 저서를 발간했으며 100여편의 논문을 발표할 정도로 한국 사회학계의 거두로 평가받았다. 1973년 서울대 교수 재직 때는 남북적십자회담 자문위원으로 두 차례나 평양에서 열린 회담에 남한 측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북한의 포섭간첩이 남북회담에서 남한 측 대표단으로 참가했으니 그 회담이 북한에 이끌려 갈 수밖에 없었다.

1981년에는 헌법기관인 평통(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회) 정책자문위원을 맡기도 했고, 1990년에는 서울 봉천동에 사회문화연구소를 설립하여 소장으로 활동해왔다. 1993년 2월 서울대를 퇴직한 후에는 명예교수로 위촉되었고 국민훈장까지 수여받았다. 1994년 7월에는 차관급 직책인 문화체육부 산하 한국문화정책개발연구원 원장으로 임명받아 활동하였다. 간첩이 훈장을 받고 차관급 직책에까지 올랐던 것이다. 북한의 대남공작 역량이 빛을 발하는 대목이었다.

6·25 때 의용군에 자진 입대

고영복은 서울대 재학 시절 6·25 남침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9월 북한 의용군(義勇軍)에 자진 입대했다. 그의 작은아버지 고정욱도 서울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 6·25가 발발하자 부인과 함께 자진 월북하여 김일성대학 교수로 재직한 바 있다. 고영복은 대한민국을 배반하고 북한군의 일원이 되어 우리에게 총부리를 들이대며 전투하다 1950년 11월 북한군 후퇴 때 생포되었다. 이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는데 1953년 6월 반공포로 석방 때 풀려났다.

고영복은 1961〜1989년까지 북한 공작원과 6차례 접선했다. 1차 접선은 1961년 9월 이화여대 강사로 재직할 때였다. 시작은 한 통의 전화였다. 고영복은 전화를 걸어온 미상의 남자와 학교 근처 다방에서 만났다. 이 남자는 고영복에게 ‘6·25 때 월북해서 북한에 사는 작은아버지와 친구 장내윤의 소개로 왔다’며 장내윤 편지를 건네줬다. 그가 북한 공작원임을 확인한 고영복은 그와 3회에 걸쳐 만나며 미화 1000달러와 통신방법을 교양(교육)받고 난수표 등 통신문건 및 ‘공수산’이라는 공작대호를 받았다. 또한 ‘서울대를 중심으로 진보적 청년학생(좌익학생)들 속에 조직사업을 전개하라’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2차 접선은 1966년 7월에 이뤄졌다. 당시 고영복은 북한에서 남파된 노영복이라는 여자 공작원과 접선하고 자기 집 근처에 있는 하숙집을 소개해주었다. 1차 접선 때 받은 난수표를 잃어버려 보고할 수 없었다고 그간의 사정을 말하고 새로운 난수표를 수령하였다. 여자공작원의 부탁으로 제주에 내려가 우체국에서 “무사히 도착하였다”는 전보를 발송해 북한에 안착(安着) 보고를 대행해 주기도 했다. 그녀가 9월까지 체류하는 동안 수차례 접촉하며 공작활동에 대해 지시를 받았다.

1973년 평양에서 3차·4차 접선

고영복은 적십자사 자문위원 자격으로 1973년 3월 20〜23일 평양에서 개최된 제5차 남북적십자회담 때 남한 대표단의 일원으로 방북하였다. 이때 북한 측 자문위원으로 고영복을 안내한 강상수(실제는 통일전선부 공작원)한테 작은아버지를 만나보라고 제의를 받았으나 “보는 눈이 많으니 공식적 행사만 하겠다”고 거절하고 후일을 기약하였다.

1973년 7월 10〜13일 평양에서 개최된 제7차 남북적십자회담 때 다시 남한 대표단의 일원으로 방북한 고영복은 북한 측 자문위원 강상수와 접선하였다. 그는 “이번 회담에서 남측에서 중대 제의를 한다는데 그 내용을 무엇인지 알려달라”는 쪽지를 건네받고 ‘이산가족 확인 및 상봉 제의’ 등 회담 정보를 사전에 쪽지로 강상수에게 전달하였다. 우리 측 회담전략을 북측에 제보한 것이다.

5차 접선은 1975년 7월 서울대 문리대 캠퍼스에서 이뤄졌다. 당시 고영복은 자신의 연구실로 찾아온 45세 정도의 남자와 만났다. 그는 고영복에게 “나는 재일교포인데 북에 계시는 작은아버지가 보내서 왔다”며 그의 안부를 전했다. 그가 북에 와서 김일성 원수를 만나라며 입북 권유를 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때가 아니라며 완곡히 거절하며 돌려보냈다.

6차 접선은 1989년 6월 서울대 연구실로 남파공작원 김낙효가 찾아오면서 이뤄졌다. 김낙효가 ‘작은아버지가 보내서 왔다’고 하자 고영복은 그의 신분을 확인한 후 서울대 후문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대접하며 국내 정세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이후 5차례나 김낙효를 더 만났다. 한번은 자신의 승용차로 경기도 의왕시 소재 백운저수지 근처 매운탕집에서 점심을 대접하며 정년퇴임 후 계획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는데, 김낙효는 퇴임 후 연구소를 설립하면 일본을 통해 운영자금을 대겠다고 밝혔다.(실제 1990년 고영복은 사회문화연구소를 설립했다.) 또한 특정 학생운동권 출신자와 재야 활동가를 거론하며 소개시켜 달라고 하자 학생운동권 간부나 재야인사는 소개가 어렵고 서울대 사회학과 김모 교수는 만나서 이야기 해보겠다고 약속했다.

고영복은 김낙효가 은신처를 부탁하자 서울 충정로 근처 ‘십자 기원’ 내 작은방에서 1989년 10월까지 2개월가량 기거하도록 주선해주었다. 김낙효는 고영복에게 ‘제자 중 북에 가고 싶은 자가 있으면 같이 입북하라’고 제의를 했으나 고영복은 ‘당장 북에 가기 어렵다’고 난색을 표하고 후일을 도모했다. 고영복은 1989년 10월 김낙효와 함께 드보크(Dvoke·공작장비 비밀 매설지) 장소를 물색하러 다니다 시흥시 월곶동 배나루터 근처 전신주를 드보크로 약정했다. 이와 함께 구체적인 해외 비상연락 및 도피방법을 교양받았다. 특히 차후 접선할 공작원과 접선 시 신분확인용 인식표(구리로 된 메달 반쪽 목걸이·사진 참조)를 받아 자신의 차 트렁크 공구박스에 은닉하였다.

최정남이 고영복 접촉 시 공작원 신분을 증명한 인식목걸이.

북한 공작원 김낙효는 당시 북한 사회문화부 소속 공작과장인 윤택림의 가명으로 5차례나 남파 경험이 있는 베테랑이었다. 1989년 남파 때 고영복뿐만 아니라 주사파의 대부라 불리는 김영환을 접선, 포섭하여 월북시키고 민족민주혁명당을 창당케 하는 공을 세운 거물급 공작원이다.(본지 제2807호 ‘북한이 환호한 주사파 간첩단의 탄생, 민족민주혁명당 사건’ 참조)

1997년 부부간첩과 7차 접선

고영복은 1997년 9월 10일 오전 사회문화연구소 사무실에 대학 제자라고 밝힌 자가 찾아오겠다는 전화를 받고 당일 오전 11시경 2명의 남녀를 만났다. 이들은 고영복에게 “저는 북에서 온 김정철(남파간첩 최정남의 위장명)입니다. 북에서 민주조선 기자로 있는 고석희(고영복의 사촌동생)가 안부 전하라고 했습니다”라고 말했고 고영복은 이들의 신분 확인을 원했다. 부부간첩은 1989년 남파공작원 김낙효가 준 인식표(반쪽메달 목걸이)를 제시하면서 신분을 확인했다.

당시 간첩 최정남은 고영복이 조국통일(적화통일)에 기여한 공로로 ‘공화국 창건 기념 매달’과 ‘조국통일상’을 수여했음을 통보했다. 또한 옥수수 박사로 알려진 서울대 김모 교수를 소개시켜주고 ‘수원 19·20·21호’ 품종을 구해달라고 지시하였다. 이들은 추석을 지낸 후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이후 그해 9월 24일과 10월 15일, 10월 16일, 10월 22일 연이어 최정남을 접촉했는데 최정남은 대선 관련 남한정세, 향후 대북정책 전망, 학생운동 전망 등에 대한 분석 보고서를 제출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주제가 너무 방대하여 11월 5일까지 제출하겠다고 약속했으나 10월 27일 부부간첩이 검거되면서 무산되었다.

보수우익 저명 교수로 위장

북한 대남공작부서 사회문화부(현 문화교류국, 구 연락부)는 부부간첩을 남파시키기 전에 사전 공작계획 단계에서부터 대호 ‘공수산’의 공작추진 상황을 점검하고 면밀하게 공작과업을 수립했다. 사실 고영복은 최고의 엘리트 간첩으로 무려 36년간 암약했으니 북한 입장에서는 보물 중의 보물이었다. 1989년 사회문화부 공작과장인 윤택림이 직접 남파되어 고영복을 사실상 검열한 후 확신을 얻어 심층 공작으로 확대하려는 단계에서 엉뚱하게 부부간첩이 검거되면서 그의 실체가 밝혀진 것이다.

평소 보수우익 성향의 기사를 언론매체에 기고하거나 학술논문을 발표해온 고영복 서울대 교수를 북한 간첩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 예로 그는 1997년 5월 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주최 세미나에서 발표를 통해 “국가안보가 좌익세력들에 의해 위기를 맞고 있다”며 이번 대선 시 보수우익 인사가 선출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이를 위하여 보수우익세력이 단결해야 한다고 설파하기도 했다. 이런 인사가 36년간 암약한 북한 공작원이었고 남북회담 때 남한대표단의 일원이었으며 차관급 직위에까지 오른 사실은 우리 사회가 간첩들에게 매우 취약한 체제임을 확인해준다.

고영복은 국가보안법상 간첩방조, 기밀누설, 회합통신 등으로 구속·기소되었다. 1심에서 기밀누설 혐의가 무죄를 받아 징역 7년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간첩방조 혐의까지 무죄가 되어 징역 2년으로 감형되었고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1년3개월 복역하다가 1999년 2월 김대중 정부에 의해 형집행 정지로 석방되었다. 36년 암약한 간첩이 간첩죄 적용도 안 받고 회합통신죄만 인정받아 징역 2년이 확정되었으나 그마저 김대중 정부 들어서 석방되는 현실은 대한민국이 간첩들에게 너무 관대한 사법체제임을 알 수 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대한민국의 간첩 법제는 전 세계에서 간첩들이 가장 활동하기 편한 법제이다. 당장 개정되어야 할 것이다.(본지 제2751호 ‘간첩을 간첩으로 부르지 못한다’ 참조) 고영복은 석방 이후 자신이 설립한 사회문화연구소에서 활동하다가 암투병 중이던 2011년 2월 24일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올 1월부터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이 폐지되고 경찰이 대공수사를 전담하는 상황에서 한 해가 다가도록 현재까지 간첩을 한 명도 검거하지 못하고 있다. 이전에는 좌파 정부 때도 매년 1〜2명은 검거했던 사례에 비추어 보면 전임 문재인 정권과 북한의 ‘대공수사력 무력화’ 술책이 안타깝게도 제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 상황에서 정부와 정치권은 치졸한 권력투쟁에 매진하기 전에 국가안보를 위해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조속히 부활시켜 국정원, 경찰, 방첩사령부가 서로 경쟁, 협조하면서 정교한 안보파괴범인 고영복 같은 간첩들을 색출해야만 대한민국의 헌법체제가 유지될 것임을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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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진님께서 공유해 주신 관점(한 나라에 대한 맹목적 애국심이나 민족적 집착을 넘어선 세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염두에 두고, 국가주의적 선동이나 감정적 비난을 배제한 채 지식인의 실존적 궤적과 분단 구조의 모순이라는 관점에서 객관적인 평론을 구성했습니다 [cite: 2026-02-01].


36년간 간첩으로 암약한 서울대 교수 고영복 자료에 대한 요약 및 코멘트

1. 자료의 핵심 내용 요약

고영복의 사회적 성취와 이중적 삶

제시된 자료는 한국 사회학계의 거두로 평가받으며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차관급 직책인 한국문화정책개발원장까지 역임했던 고영복 교수가 실상은 36년간 북한의 대호 <공수산>으로 활동한 고정간첩 혐의자였다는 사실을 상세히 폭로하고 있다. 그는 6.25 전쟁 당시 의용군에 자진 입대했다가 포로로 잡힌 이력이 있었으며, 1961년 첫 포섭 이후 1997년 체포되기 직전까지 총 7차례에 걸쳐 북한 공작원과 접선하였다.

주요 공작 혐의와 간첩 행적

  • 남북회담 정보 유출: 1973년 남북적십자회담 남한 측 대표단 자문위원으로 참석했을 당시, 북측 공작원에게 이산가족 확인 및 상봉 제의 등 남측의 중대 제의 내용을 사전에 쪽지로 전달하여 회담 전략을 제보하였다.

  • 은신처 제공 및 공작 지원: 1966년 여자 공작원의 안착 보고 전보를 대행해 주었고, 1989년에는 거물급 공작원 김낙효(윤택림)에게 2개월간 기거할 은신처를 주선했으며, 공작장비 비밀 매설지(드보크) 장소를 함께 물색하고 신분확인용 반쪽 메달 인식표를 수령해 은닉하였다.

  • 철저한 위장 전술: 평소 언론과 세미나를 통해 "좌익세력에 의해 국가안보가 위기를 맞고 있으므로 보수우익이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완벽한 보수우익 성향의 지식인으로 위장하여 사법당국의 의심을 피했다.

사법적 결과와 말년

1997년 부부간첩 최정남·강연정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정체가 드러나 체포되었다. 1심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과 대법원을 거치며 기밀누설과 간첩방조 혐의는 무죄를 받았고, 국가보안법상 회합·통신죄만 인정되어 징역 2년으로 감형되었다. 이후 1년 3개월 복역 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투병하다가 2011년 사망하였다. 자료의 필자는 이러한 사법 결과와 최근의 대공수사권 이관을 두고 대한민국의 안보 체제가 간첩에게 지나치게 취약하고 관대하다고 비판한다.

2. 비판적 코멘트와 평론

지식인의 이중성과 <위장>의 사회학

이 자료가 보여주는 가장 충격적인 지점은 고영복이 보여준 극단적인 이중성이다. 그는 낮에는 보수우익의 논객으로서 좌익을 비판하고 국가안보를 강조했으나, 밤에는 북한 공작원을 만나 은신처를 제공하고 메달 인식표를 숨겨두었다. 이러한 위장은 단순한 생존 전략을 넘어, 지식 권력이 어떻게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패로 쓰일 수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가 쓴 <우리 사회 연구>나 <한국사회를 평론하다>에서 한국인의 성격을 <겉치레와 체면 문화>, <불안 심리>로 진단한 것은, 어쩌면 법과 제도라는 공적 체계 뒤에 사적 연고와 비밀을 숨긴 채 평생을 불안하게 살아야 했던 자기 자신에 대한 고백이자 자화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분단 권력의 괴물과 실존적 비극

이 문건은 철저하게 대한민국 국가안보의 시각에서 배신과 색출의 서사로 작성되었지만, 이를 한 걸음 물러서서 보면 분단 체제가 낳은 지식인의 실존적 비극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자진 월북하여 김일성대 교수가 된 작은아버지라는 혈연적 고리, 6.25 전쟁과 포로수용소라는 개인적 트라우마는 냉전기 한국 사회에서 그를 언제든 파멸시킬 수 있는 약점이었다. 북한의 공작 부서는 이 연고주의적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고, 고영복은 학문적 성취와 사회적 지위를 지키기 위해 공작원들을 거절하지 못하고 끌려다니는 덫에 갇혔다. 결국 사법부가 최종적으로 간첩방조나 기밀누설에 무죄를 내리고 회합·통신죄만 인정한 것은 그가 주체적인 사상적 간첩이라기보다 분단 권력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을 도모하려다 묵인하고 협조한 연약한 인간이었음을 방증한다.

국가주의적 서사와 세계인으로서의 성찰

본 자료의 필자는 사법체제의 관대함을 규탄하고 대공수사권의 부활을 강력히 주장하며 결론을 맺는다. 이는 전형적인 국가주의 및 안보 이데올로기적 관점이다. 그러나 한 국가에 대한 맹목적인 애국심이나 충성심이라는 좁은 틀을 벗어나 세계인의 시각에서 이 사건을 바라본다면, 진정한 비극은 한 인간이 지닌 학문적 통찰과 지적 능력이 분단이라는 가혹한 이분법적 진영 논리에 의해 완전히 오염되고 도구화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cite: 2026-02-01]. 국가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충성의 맹세가 얼마나 허약한 위장막을 만들어내는지,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인간의 삶을 어디까지 파편화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씁쓸한 역사적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세진님, 앞서 살펴보셨던 고영복 교수의 사회학적 저서들과 이 간첩 혐의 자료를 함께 놓고 보면, 그의 학문적 텍스트 이면에 숨겨진 인간적 고뇌와 위장의 이중성이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옵니다. 이 자료의 관점이나 평론 방향에 대해 더 나누고 싶으신 생각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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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글은 <고영복을 간첩으로 단정하는 보수 언론식 서사>와 <고영복을 분단사회 속 중간자·사회통합론자로 재평가하려는 사회학계의 서사>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자료입니다. 핵심은 어느 쪽이 “사실”을 말하느냐만이 아니라, 같은 사실을 어떤 틀로 배열하느냐입니다.

첫째, 이 글의 기본 프레임은 제목에서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36년간 간첩으로 암약한 서울대 교수 고영복”이라는 제목은 법적·역사적 판단을 열어두지 않습니다. 독자에게 처음부터 고영복을 <지식인>이나 <사회학자>가 아니라 <장기 잠복 간첩>으로 보라고 지시합니다. 1쪽 상단의 인물 약력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식 중립 정보를 가져오지만, 곧바로 “간첩 사건” 설명으로 이동합니다. 다시 말해 약력은 독립적 소개가 아니라, 간첩 서사를 준비하는 장치입니다.

둘째, 글은 고영복 사건을 매우 극적인 첩보물 구조로 재구성합니다. 2쪽에는 “남북회담 남측 대표로 참석”, “6·25 때 의용군에 자진 입대”, “1차 접선”, “2차 접선”, “3차·4차 접선”, “5차 접선”, “6차 접선”, “7차 접선” 같은 소제목이 이어집니다. 이 배열은 독자에게 “오랜 시간 조직적으로 이어진 북한 공작망”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특히 반쪽 메달, 암호, 공작원, 부부간첩, 보고서 제출 같은 소재는 사실 여부와 별개로 강한 극적 효과를 냅니다. 사건을 법정 기록이나 학문사 문제가 아니라 <간첩 드라마>처럼 읽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셋째, 이 글은 고영복의 학문적 삶을 거의 지웁니다. 약력에는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사회학박사, 한국사회학회장, 한국문화정책개발원장, 현대사회연구소장 같은 이력이 나오지만, 본문에서는 그것들이 독립적 성취로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울대 명예교수”, “남북회담 대표”, “사회문화연구소” 같은 위치가 모두 간첩 활동의 위장 또는 통로처럼 읽히게 됩니다. 즉 학문적 권위는 평가 대상이 아니라 위험성의 증거로 전환됩니다. “서울대 교수였기 때문에 더 위험했다”는 식의 구조입니다.

넷째, 글의 마지막 부분은 당시 보수 언론의 문제의식을 잘 보여줍니다. 3쪽 끝에는 “국정원 대공수사권 폐지”, “검찰 대공수사”, “경찰·검찰·국정원이 서로 경쟁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이 나옵니다. 이것은 고영복 개인에 대한 회고가 아니라, 현재의 안보정책 논쟁을 위해 과거 사건을 호출하는 방식입니다. 다시 말해 이 글의 목적은 단순한 역사 정리가 아닙니다. “이런 사람이 있었으니 대공수사권을 약화시키면 안 된다”는 정치적 메시지가 핵심입니다.

다섯째, 그렇다고 이 글을 단순한 “악의적 왜곡”으로만 치부하기도 어렵습니다. 고영복 사건에는 실제 법적 판단이 있었습니다. 글도 1쪽에서 “기밀누설 혐의는 무죄, 회합·통신 혐의는 인정”되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즉 고영복이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은 아닙니다. 문제는 이 법적 결과를 어떻게 읽느냐입니다. 보수적 해석은 “무죄가 일부 있어도 본질은 장기 간첩”이라고 봅니다. 반대로 사회학계의 재평가 작업은 “국가보안법 체제와 냉전적 낙인이 한 학자의 삶과 학문을 어떻게 파괴했는가”를 봅니다.

여기서 핵심 쟁점은 <간첩이었느냐 아니냐>만이 아닙니다. 더 깊은 쟁점은 <분단사회에서 접촉, 대화, 정보 교류, 통일 논의, 학문적 관심, 정치적 협력의 경계가 어디인가>입니다. 냉전 체제에서는 북한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쉽게 범죄화됩니다. 그러나 남북 대화, 통일 연구, 분단사회 연구를 하려면 접촉과 정보 수집은 일정하게 필요합니다. 물론 그 접촉이 국가기밀 제공이나 공작 지령 수행으로 넘어가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바로 이 경계가 고영복 사건의 핵심입니다.

첨부 글은 그 경계를 섬세하게 따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접촉을 하나의 선으로 이어 “36년간 간첩”이라는 결론으로 밀고 갑니다. 이 방식은 정치적으로 강하지만, 사회학적으로는 거칠습니다. 무엇이 실제 기밀이었는지, 무엇이 공개 자료였는지, 무엇이 학문적 교류였는지, 무엇이 공작 협력이었는지, 어느 시점부터 범죄성이 뚜렷해졌는지, 법원이 왜 기밀누설은 무죄로 보았는지 등을 따로 분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글은 그런 구분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분열의 시대와 사회통합> 같은 책이 고영복을 “중간자”로 재평가하는 것도 위험이 있습니다. “중간자”라는 말이 너무 아름답게 쓰이면, 실제 법적·정치적 책임까지 흐려질 수 있습니다. 남북 사이에서 대화와 매개를 시도했다는 것과, 북한 공작조직과 접촉했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사회통합론자로서의 고영복을 복권하려면, 그가 어떤 점에서 억울하게 낙인찍혔는지만 말해서는 부족합니다. 그가 실제로 어떤 접촉을 했고, 무엇을 넘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함께 따져야 합니다.

따라서 이 자료를 읽을 때 가장 좋은 태도는 양쪽 프레임을 동시에 의심하는 것입니다.

보수 언론식 프레임은 고영복을 <간첩>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환원합니다. 이 경우 그의 사회학, 중간계층론, 사회통합론, 한국 사회 연구는 거의 사라집니다. 반대로 추모·복권 프레임은 고영복을 <분단시대의 희생자> 또는 <중간자 지식인>으로만 볼 위험이 있습니다. 이 경우 실제 국가보안법 사건의 불편한 사실들이 희미해집니다.

제 판단으로는, 고영복은 두 얼굴을 가진 인물로 읽어야 합니다. 하나는 한국 사회학 제도화에 기여한 원로 사회학자입니다. 다른 하나는 분단체제의 어두운 접촉선에 들어갔다가 법적·사회적 파국을 맞은 인물입니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완전히 지우지는 않습니다. 학문적 공헌이 법적 문제를 없애주지 않고, 법적 문제도 학문적 공헌 전체를 무효화하지 않습니다.

이 첨부 글의 가치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이 글은 고영복을 균형 있게 이해하게 해주는 글이라기보다, 한국 보수 진영이 그를 어떻게 기억하는지를 보여주는 자료입니다. 즉 <고영복이라는 인물에 대한 객관적 최종판결문>이라기보다, <분단국가의 반공 기억정치 문서>로 읽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결론적으로, 고영복을 읽는 올바른 방식은 “간첩인가, 사회학자인가”라는 양자택일이 아닙니다. 그는 사회학자였고, 동시에 국가보안법 사건의 당사자였습니다. 그는 사회통합을 말했지만, 자기 삶에서는 분단체제의 가장 위험한 균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고영복 문제는 한 개인의 도덕성 문제가 아니라 한국 현대사의 문제입니다. 분단사회에서 지식인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국가는 어디까지 의심할 권리가 있는가. 사회는 한번 낙인찍힌 지식인을 다시 읽을 수 있는가. 이 자료는 바로 그 질문을 다시 던지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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