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18

무신과 문신 | 에드워드 슐츠 | Generals and Scholars in Medieval Korea

무신과 문신 | 에드워드 슐츠 | 알라딘

무신과 문신 - 한국 중세의 무신 정권
에드워드 슐츠 (지은이),김범 (옮긴이)글항아리2014-11-17원제 : Generals And Scholars: Military Rule In Medieval Korea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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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고려의 무신 집권기를 다룬 책으로, 해외 한국학의 권위자인 에드워드 슐츠 교수의 저작이다. 최충헌의 무신정권을 집중 연구한 저자는 1966년 한국을 처음 방문해 박정희 정권을 보면서 무신정권과의 연결점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 그 궁리는 연구로 이어졌다.

저자는 박정희와 최충헌 모두 쿠데타를 일으킨 장본인이지만 경제와 문화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이뤄냈고, 또한 군사력으로 정권을 잡은 한계 속에서 문치文治를 중시한 것 역시 공통점으로 꼽는다. 저자는 무신 정권에 대한 기존의 부정적인 평가들과 달리, 이를 통해 한국 사회가 정치.사회.제도적으로 어떠한 발전을 이루었는가에 초점을 맞춰 역사 해석의 한 관점을 제시한다.


목차


한국어판 서문 / 들어가며 / 머리말

1장 무신의 난
무신의 역할 | 의종의 치세: 왕실과 궁중 | 제도화된 간쟁 | 의종의 지지자들 | 인간 의종 | 무신의 불만 | 정변 이후

2장 명종의 치세
무신의 통치 | 왕조의 구조 | 무신 내부의 투쟁 | 최충헌의 시각: 1170~1196 | 이의민과 최충헌의 대두 | 정변 이후

3장 최씨 정권의 무반 기구
관군 | 최씨의 사병들 | 도방과 야별초 | 문객 | 권력의 분산

4장 문반 구조와 주요 인물들 - 최충헌과 최우
최충헌 | 최우 | 유학

5장 문반 구조와 인사 - 최항과 최의
최항 | 최의 | 새로운 합의

6장 농민과 천민
농민 | 천민 | 최씨 정권의 사회 정책

7장 무신 집권기의 불교
고려 전기의 불교 | 불교와 무신의 난 | 불교와 최씨 정권의 흥기 | 선종의 부흥 | 최씨 집권기의 불교 | 불교와 학문 | 불교의 융성

8장 토지와 그 밖의 경제적 쟁점
최씨 정권의 재정 정책: 토지 | 최씨 정권의 재정 정책: 식읍 | 최씨 정권의 재정 정책: 사찰·노비·무역 | 최씨 정권의 재정 정책: 조세 구조 | 재정적 과도기

9장 최씨 정권의 난제
국왕 | 최씨 정권의 합법성 | 문신 | 문객 | 사회적·경제적 모순 | 최씨 정권의 지위 | 최씨 정권의 몰락 | 최씨 정권의 유산

부록 / 주註 / 참고문헌 / 옮긴이의 글 /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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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정변은 이전부터 시작되어 의종 때 격화된 정치적•사회적 갈등의 산물이었다. 독립하려는 의종의 모색은 역설적으로 그를 몰락시켰다. 그는 강력한 정적들을 괴롭혔다. 조정 관원•환관•내시의 방탕과 오만을 용인한 그의 방임은 문신과 무신의 분노를 불러왔다. 국왕과 그의 동생•모후 사이에 형성된 분열은 당시의 정치를 더욱 일그러뜨렸다. 견제할 수 있는 왕조의 정치 기구는 없었으며, 언론 기관의 간쟁—정치적 음모에 따라 고무되고 과도한 압력을 부과한 것이 분명한—은 무시되었다. 긴장이 커지면서 무신 지도자들의 불만과 문신 학자들의 환멸은 1170년의 무신의 난으로 융합되었다. 52) 접기 - nana35
고려 사회는 12세기 말엽 천천히 해체되었다. 새 무신 지도자들은 중방에 권력을 통합하고 문반 구조를 운영해 행정적 일관성을 지닌 외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중앙 조정은 통제력을 잃었다.
...
유학자들에게서 노비의 아들로 비판된 이의민이 1184년(명종 14)에 집권했을 때 모든 제한은 사라졌고 약탈과 절도는 당시의 기준이 되었다. 65-6) 접기 - nana35
최씨 정권의 약점 중 하나는 지도자 개인을 향한 충성을 정권 전체에 대한 헌신으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지도자마다 그 자신의 추종자 집단으로 둘러싸인 상황은 전체 구조에서 하위 집단끼리 권력을 다툴 가능성을 높였다. 최우는 이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군사적 적대 세력을 재빨리 배제시켰으며, 아버지의 충성스러운 부하를 유배 보내고 자신의 추종자들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197) 접기 - nana35
고려 귀족은 여러 이유에서 사찰을 후원했다. 진정한 독실함도 한 요인이었지만, 지배층은 상당한 경제적 이익도 얻었다. 그들은 불교의 한 종파에 가족 구성원을 출가시켜 승려는 일정한 의무에서 면제된다는 고려의 세법을 이용했다. 국가의 토지와 녹봉제도에서 승려에게 수익을 할당해주는 다른 조항 또한 이 가문들에 이익을 주었다.
...
후한 기부의 수혜자로서 교종은 점차 나라에서 가장 넓은 토지 소유자 중 하나가 되었다. 207) 접기 - nana35
사찰은 학교를 대신해 학습의 중심이 되었다. 이제현이 지적했듯이 젊은 유생들은 승려 문하에서 배우려고 사찰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상호 연구로 불교와 유교의 차이는 줄어들었다.
...
최씨 정권은 유학자와 선종의 활동을 후원해 이런 만남을 발전시켰고, 그 결과 13세기 후반 한국이 신유학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예비했다. 224-5) 접기 - nana35
유교 사상은 왕조질서를 정당화했지만 최씨 정권의 다른 절반인 최씨의 사적 기구에는 아무런 존재 이유도 제공하지 않았다. 국왕과 문신이 포함되어 있는 왕조의 구조적 체제를 지지한 것과 마찬가지로, 최충헌이 유교를 지지한 것은 결국 그의 체제를 약화시켰다. 자신의 혁신에 어떤 형태의 이념적 지지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의 체제에서 결정적 약점이었다. 264) 접기 - nana35


추천글
슐츠 교수는 매우 논쟁적 시기인 고려 중기 무신정권을 철저하고 종합적으로 연구했다. 이 책에서 그는 널리 받아들여진 몇 가지 해석을 뒤집고 이 시기의 발전이 그 뒤 한국 정치·사회·제도사 발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를 이해하는 데 신선한 관점을 제시한다.
- 존 B. 던컨 (미국 UCLA 한국학연구소장)

슐츠 교수의 책은 한국사의 중요한 발전이 일어난 1170년부터 한 세기에 걸친 무신정권의 수립 과정에 대한 매우 소중한 해석을 제공한다. 이 기간은 12세기 후반 일본 가마쿠라 막부와 일부 닮았지만, 고려에서 무신은 중앙에서 권력을 장악해 국왕을 무력화시킨 반면 문신은 그대로 관직에 두었다. 이런 무신정권 시대는 한국이 저항하는 세력에 맞서 중국 방식의 문신 통치를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어려웠으며, 고려왕조의 관습과 제도가 문신이 통치하며 왕권이 강화되고 유교 규범이 지배한 조선과 어떻게 달랐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은 고려 역사의 이런 중요한 시기를 연구하는 데 획기적인 업적이다.
- 제임스 B. 팔레 (워싱턴대 교수)




저자 및 역자소개
에드워드 슐츠 (Edward J. Shultz)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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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하와이대학교 박사학위 취득
1977-2013년 하와이대학교 교수, 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장, 태평양아시아학과 학과장 역임
2014년 서강대학교 초빙교수

[저서]
중세 한국의 장군과 학자들(Generals and Scholars in Medieval Korea), 하와이대학교 출판부 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번역본 편집 및 감수
삼국사기 신라본기 공역(Hugh H.W. Kang)

Edward J. Shultz is professor emeritus at the University of Hawaii at Manoa, and was a visiting professor at Sogang University in 2014 in Seoul where he taught Korean history. His major area of research is Koryo history with a special interest in social, institutional, and political history. His recent publications include Generals and Scholars in Medieval Korea,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and he edited and helped translate the The Koguryo Annals of the Samguk sagi and with Hugh H.W. Kang translated The Silla Annals of the Samguk sa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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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주한 미 평화봉사단과 한국학의 길>,<Koryosa choryo 2 b>,<Koryosa choryo 2> … 총 8종 (모두보기)

김범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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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서울 출생.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이다. 고려대 한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조선전기 정치사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저서에 『사화와 반정의 시대』 『연산군: 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사람과 그의 글』 『민음 한국사: 15세기』(공저), 번역서에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 유형원과 조선후기』(제임스 팔레), 『조선 왕조의 기원』(존 던컨), 『무신과 문신』(에드워드 슐츠), 『조선의 변방과 반란, 1812년 홍경래 난』(김선주), 『동아시아 세계질서의 종막』(김기혁), 『한국전쟁의 기원』 1·2(브루스 커밍스), 『일본의 조선 강점』(힐러리 콘로이)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사람과 그의 글>,<조선의 왕비 기록으로 만나다>,<사화와 반정의 시대> … 총 27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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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밤과 책>,<팔레스타인 번역가의 이중생활>,<있는 곳이 집>등 총 805종
대표분야 : 역사 9위 (브랜드 지수 387,612점), 철학 일반 15위 (브랜드 지수 46,244점), 고전 28위 (브랜드 지수 85,827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변칙의 역사라는 통설을 거부하고
무신정권 100년사에서 문무공생의 고리를 연구해
고려사를 새롭게 쓰다

한국사의 가장 찬란하고 성숙했던 12세기 고려 역사를 독창적으로 읽다

슐츠 교수는 매우 논쟁적 시기인 고려 중기 무신정권을 철저하고 종합적으로 연구했다. 이 책에서 그는 널리 받아들여진 몇 가지 해석을 뒤집고 이 시기의 발전이 그 뒤 한국 정치·사회·제도사 발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를 이해하는 데 신선한 관점을 제시한다. _존 던컨·UCLA 교수

슐츠 교수의 책은 한국사의 중요한 발전이 일어난 1170년부터 한 세기에 걸친 무신정권의 수립 과정에 대한 매우 소중한 해석을 제공한다. 이 기간은 12세기 후반 일본 가마쿠라 막부와 일부 닮았지만, 고려에서 무신은 중앙에서 권력을 장악해 국왕을 무력화시킨 반면 문신은 그대로 관직에 두었다. 이런 무신정권 시대는 한국이 저항하는 세력에 맞서 중국 방식의 문신 통치를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어려웠으며, 고려왕조의 관습과 제도가 문신이 통치하며 왕권이 강화되고 유교 규범이 지배한 조선과 어떻게 달랐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은 고려 역사의 이런 중요한 시기를 연구하는 데 획기적인 업적이다. _제임스 팔레·워싱턴대 교수

고려 무신 집권기 100년 본격 조명
12세기 무렵 고려는 세계에서 가장 성숙한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그럼에도 한국사에서 고려시대, 그중에서도 특히 무신 집권기는 다른 시대에 비해 제대로 된 조명을 받지 못했다. 결코 짧지 않은 무신정권 100여 년의 시간은 역사 속에서 변칙과 예외로 취급되어 잊혔으며, 이에 대한 해석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그러나 무신 집권기는 가장 찬란했던 문화기의 한 시기로 주목할 만하다. 무신 집권기는 한국사에서 독특한 시기로, 문신 통치가 무신 지배에 길을 내준 고려의 과도기였다. 정중부가 일으킨 무신의 난을 시작으로 열린 무신의 시대는 왕을 허수아비로 전락시켰으며, 권력은 왕실과 무신정권으로 양분됐고 대부분의 결정권은 무신정권의 수중에 있었다. 여러 차례 농민과 천민의 봉기가 일어났고, 무신 내부의 살육이 횡행했던 투쟁의 시기를 거쳐 최충헌에 의해 자리잡은 60여 년의 최씨 정권은 안정을 구가하다가 결국 최의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린다.
고려의 무신 집권기를 다룬 이 책은 해외 한국학의 권위자인 에드워드 슐츠 교수의 저작이다. 최충헌의 무신정권을 집중 연구한 저자는 1966년 한국을 처음 방문해 박정희 정권을 보면서 무신정권과의 연결점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 그 궁리는 연구로 이어졌다. 저자는 박정희와 최충헌 모두 쿠데타를 일으킨 장본인이지만 경제와 문화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이뤄냈고, 또한 군사력으로 정권을 잡은 한계 속에서 문치文治를 중시한 것 역시 공통점으로 꼽는다. 저자는 무신 정권에 대한 기존의 부정적인 평가들과 달리, 이를 통해 한국 사회가 정치·사회·제도적으로 어떠한 발전을 이루었는가에 초점을 맞춰 역사 해석의 한 관점을 제시한다.

무신들의 반란으로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리다
1170년(의종 24) 음력 8월, 거대한 무력이 결국 폭발했다. 의종이 사찰을 방문하고 있을 때 상장군이었던 정중부는 이의방, 이고와 함께 정변을 일으켜 의종을 폐위시키고 권력을 휘두르던 다수의 문신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무신의 난이다. 고려왕조는 줄곧 문신 위주의 정책을 펼쳤고 무신에 대한 차별은 계속 존재했다. 오래전부터 무신들은 문신 우위의 정책에 불만을 품었으며, 이는 1014년의 정변으로 드러나기도 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지속적인 차별로 인해 무신들은 경제·사회·정치 모든 분야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당대 의종(재위 1146~1170)의 통치에도 문제가 있었다. 의종은 환관, 내시 그리고 그에게 아첨하는 몇몇 문신 등 측근들에 둘러싸여 향락에 빠져 있었다. 그는 대단치 않은 배경의 내시를 선발함으로써 자신을 전적으로 도울 인물들을 조정에 배치했다. 국무를 저버리고 쾌락에만 빠져 있는 의종의 모습은 왕실 호위부대인 건룡군에 속해 있던 무신들의 불만을 가중시켰다. 그 결과 정중부가 이끄는 무신 세력이 반란을 일으켜 100여 년간 이어지는 무신 집권기의 시작을 알린다.
정변에 성공한 무신들은 의종에 비판적이었던 문신들의 협력을 이끌어냈다. 무신 지도자들은 의종 주위에 모여 나라를 그르치고 무신을 모욕한 인물들을 권력에서 대거 축출하고 숙청했다. 하지만 그들이 모든 문신을 가차 없이 학살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무신들의 최고위 기구였던 중방重房의 도움을 받아 숙청 대상을 아주 신중하게 선별했다. 정변 이후 즉위한 명종(재위 1170~1197)은 최충헌이 정권을 잡고 그를 퇴위시킬 때까지 왕위에 머물렀다. 명종의 치세는 고려 역사에서 가장 불안했던 시기 가운데 하나로 사회·정치적으로 여러 면에서 혼란스러웠다. 가장 큰 문제는 무신 내부의 갈등이었다. 이고는 반란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을 비판한 무신 지도자 몇몇을 죽였고, 이어 이의방이 이고를 죽였다. 이의방과 정중부는 우호 조약을 맺어 지내오다가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 1174년 이의방을 암살하면서 끝이 났다.
이후 경대승이 정중부를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짧은 집권에서 그는 처음으로 ‘도방都房’이라 불리는 특별 호위부대, 즉 사병私兵을 조직했고, 경대승에 이어 등장한 이의민은 나라의 통치권을 장악했다. 노비의 아들이었던 이의민은 무예 실력으로 왕의 총애를 받아 높은 벼슬을 받았고 장군이 되었다. 한없이 오만해진 이의민은 1173년 의종을 살해하고, 이후 최고 무신 품계까지 승진한다. 그와 그의 아들들은 1184~1196년까지 나라를 약탈했다. 최충헌은 이의민의 행패를 참을 수 없었다. 무신 집안에서 자란 최충헌이 보기에 이의민은 고려 사회의 하위 계층을 대표했고, 그의 행동은 고려의 엄격한 사회질서를 방해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의민은 나라를 좀먹고 있었다. 1196년 최충헌은 그를 암살하면서 실권을 장악하고 이로써 60년에 걸친 최씨 정권 시대가 도래한다.

최충헌과 최우, 권력의 정점
최충헌은 명종 때의 비극을 되돌아보며 폐정의 시정과 왕의 반성을 촉구하는 「봉사십조」를 올린다. 그는 10가지 조항을 통해 중앙 조정, 유력 가문, 고위 승려 등과 더불어 나라를 몰락으로 끌고 간 무능한 정책을 비판하고, 농민 반란으로 야기된 혼란과 승려들의 폐단 등을 언급했다. 최충헌은 집권 이후 중방 지도자의 절반 이상을 숙청하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인물들로 교체했으며, 명종을 퇴위시키고 신종(재위 1197~1204)을 왕으로 추대했다. 이후 최충헌은 17년간 집권하면서 희종·강종·고종까지 총 다섯 왕의 재위를 지켜보았다. 최충헌은 대체로 문반 출신에게 너그러웠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구축하는 데 문신의 능력을 이용하려는 목적에서 그들을 대우했다. 행정 능력과 경험을 지닌 문신 없이 조정을 이끌어가는 일이 쉽지 않음을 알았던 것이다.
최충헌은 자신의 체제를 탄탄히 하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이러한 통치 방법은 아들 최우 및 최항, 최의로 이어지는 후계자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집권 당시 경제는 불안정했고 왕실 재정은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 그는 여러 재정 정책을 폈는데 주로 토지, 식읍(토지 대신 가호 숫자에 따라 수조권을 분급하는 제도), 사찰·노비·무역, 조세 구조를 통해 이익을 확보했다. 그는 왕조의 무장 병력인 이군과 육위가 자신의 체제를 지원하도록 했으며, 관군을 지원하는 동시에 그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사병을 늘려나갔다. 그 규모는 몇 리에 걸칠 정도였다고 하며 1216년 최씨 정권의 사병은 1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최충헌은 사병들을 후하게 대우해주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추가적 조직인 도방(마별초 포함)과 야별초가 있었는데, 도방 역시 최씨 정권을 보호하기 위한 특별 사병이었고, 야별초는 도적을 막고 반란을 진압하거나 몽골에 대항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파견되었다. 이렇게 최씨 정권은 자신들의 경호 부대를 확대해나갔다.
주요 기구로는 입법·행정·사법기구인 교정도감, 인사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정방, 문객 학자로 구성된 서방 등이 있었다. 특히 정방과 서방은 최우의 지시로 만들어진 기관으로 최씨 정권의 권력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최충헌과 최우는 사람을 잘 관리하고 넓은 범위의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했다. 최충헌은 자신은 물론 자식들도 왕실이나 좋은 가문과 맺어주는 전략적 혼인관계를 구축해나갔다.
또한 최씨 정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제도는 ‘문객’이다. 최씨 사병에 소속된 사람들 중 다수가 문객이라 불렸는데, 이는 한마디로 추종자다. 문객에는 다수의 문신이 포함되었는데, 특히 측근으로는 무신보다 문신을 더 많이 두었다. 최충헌의 경우 문신의 비중이 전체의 54퍼센트로 절반이 넘었고, 최우는 이보다 더 높은 71퍼센트, 최항 역시 74퍼센트로 갈수록 높아지는 추세를 보인다. 그런데 문객 제도는 지도자가 바뀔 때마다 문제를 드러냈다. 문객들은 주로 최씨 개인 체제와 국가 체제 양쪽에 배치되어 이중 관직으로 일을 겸임하곤 했는데, 그 과정에서 최씨 정권과 왕권은 각자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했다. 왕에 대한 충성은 곧 나라에 대한 것이므로 함부로 어길 수 없었지만, 최씨 정권에 대한 충성은 개인에 대한 것이었다. 문객들은 최충헌, 최우 등 각 개인에게 충성을 약속한 것이지 최씨 가문 자체에 충성을 맹세한 것이 아니었고 충성심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대가 바뀌면 그 구성원은 그대로 이어지지 못했고, 이전 세대의 문객들을 죽이거나 내보내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자들로 새롭게 배치했다.
문객 제도는 일본 가마쿠라 막부의 주군/가신 관계와 비슷한 듯하면서도 달랐다. 고려는 무신 정권이 중앙에서 국왕을 통제하고 정책을 결정하면서 다스렸지만 일본에서는 권력이 좀더 분산되어 있었다. 가마쿠라 막부는 천황이 거주한 교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천황에게 완전히 의지하지 않는 통치 체제를 수립했다. 또한 일본의 사무라이는 점차 사회적인 지위를 확보했지만 문객은 그런 위상을 누리지 못했다.

무신정권의 몰락, 잃은 것과 얻은 것
최충헌과 최우에 이어 집권한 최항과 최의는 뛰어난 정치적 능력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이미 최항 집정기에 몰락의 기미가 나타났다. 그는 권력에 굶주려 최씨 정권을 지탱하는 무신과 문신의 합의를 이뤄내지 못했다. 존경받는 학자들을 제거했고 문신적 전통을 훼손했으며 명망 있는 무신들을 소외시켰다. 서자라는 최항의 낮은 사회적 신분은 고려 사회에서 그의 지위와 신뢰를 더욱 손상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최항이 8년 만에 사망하자 최항의 서자였던 최의가 1257년 그를 계승한다. 하지만 최의는 최항보다도 더 서툴렀다. 이런 상황에서 최의가 배척했던, 유경으로 대표되는 유학자와 혜택을 받지 못한 신흥 무신들이 김준의 지휘 아래 모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준과 유경은 정변을 일으켜 최의와 그의 측근, 삼촌 등 모든 무리를 암살했다. 이로써 최씨 정권은 끝이 났다. 김준 역시 정권을 잘 다스리지 못했고 몇 차례의 정변이 더 일어난 뒤 1270년 무신 집권기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
최씨 정권은 결국 몰락했지만 많은 유산을 남기기도 했다. 그들은 새로운 정치적·군사적 체제를 만들었고, 사병과 사적 통치 기구를 발달시키는 등 제도적 개혁을 이루었다. 예술후원자를 자처해 고려 예술이 발전하는 데 이바지하기도 했고, 문반 구조를 다시 활성화시켰다. 불교, 특히 선종을 지원하면서 동시에 유학에 대한 중요성도 놓치지 않았고 과거를 자주 치러 유교 교육의 위상을 드높였다. 더불어 문학이 발전하고 학문도 융성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순수한 의도에서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최씨 정권은 체제를 확고히 해 권력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한 명분이 필요했다. 그런 면에서 이는 상당히 정치적인 의도와 떼려야 뗄 수 없다. 물론 내·외부적으로 어려움도 많았다. 농민과 노비의 생활이 힘들어지면서 최충헌 집정 시기 동안 반란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존 보장을 요구했고, 이의민과 같은 천민 출신의 지위 상승에 분노하기도 하고 희망을 품기도 했다. 최씨 정권이 몰락한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가장 분명한 것은 몽골의 침략이다. 최충헌 사망 몇 년 뒤인 1225년 몽골과의 첫 갈등이 불거진 이래 1231년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고려는 용감하게 방어했고 몽골은 40년 넘게 한반도를 거듭 침략했지만 최씨 정권은 항복을 몰랐다. 그러나 최항 정권 때 와서 무너지기 시작했는데, 거듭된 침공은 많은 희생자를 낳았고 조정은 파산 위치에 처했다. 또한 최씨 정권 자체의 결함, 즉 문객 제도에도 몰락의 원인이 있었다.
고려사에서 무신 집권기는 한 세기에 걸쳐 지속됐다. 하지만 역사 속 무신 집권기는 변칙으로 치부되어 부정적인 시각으로 해석되고 낮게 평가됐다. 저자는 무조건 적인 배척이나 비판보다는 새로운 시각으로 최충헌의 무신정권을 볼 것을 주문한다. 접기







외국학자가 다룬 한국사연구에 대한 좋은 번역.
펭귄 2014-12-17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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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헌의 60년 정권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문치 위주의 한국사에서 독특했던 시대가 바로 고려 무인 시대가 아닌가 싶다.

일본과는 다르게 한 번도 무인이 정권을 잡은 적이 없었는데 유독 고려 후반에 무인 정권이 탄생했고 몽골의 침략과 함께 사라졌다.

무인 정권을 과연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에 관한 외국인 학자의 저술이라 더욱 흥미롭게 읽었다.

어떤 책에서는 무인 정권이야 말로 천민이 사회 진출을 하고 외세의 침략에 대항했던 역동적인 발전의 시대였다는 평가도 있었고 고 반대로 무질서하고 백성들이 착취당한 혼란의 시대였다는 평가도 있었다.

이 책은 단순하게 선악의 문제로 당시 시대를 보지 않고 무인 정권 중에서도 특히 최씨 정권이 어떻게 60년 동안 안정적으로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간단히 말해 최충헌은 기존의 문신 기구를 잘 통제하여 자신의 권력 기구에 포섭했기 때문에 나름 고려 사회를 안정적으로 다스릴 수 있었다.

그 전의 권력자들처럼 무력만 휘둘렀다면 또다른 야심가에게 곧바로 무너졌을 것이고 사회는 더욱 혼란에 처했을 것이다.

최충헌은 자신이 직접 문신의 고위직을 겸임했고 과거를 통해 유능한 문신들을 등용해 행정을 맡겼으며 본인은 많은 사전과 식읍을 얻었으면서도 그 외 지방 세입은 국고로 귀속시켜 나라의 재원으로 사용해 재정을 안정시켰다.

정권 초기에는 농민 반란이 잦았으나 조세 경감 등을 통해 지방을 안정시켰고 이런 바탕 위에서 몽골 항쟁 40년도 가능했다는 것이다.

반면 그는 천민들의 사회 진출은 엄금하여 신분제도가 흔들리는 것을 막았다.

자신에게 충성하는 극소수의 천민에게는 관직을 허용했으나 이것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였고 간단히 말해 최충헌은 기존 고려 사회의 질서를 그대로 사수하고 그 안정적인 토대 위해서 본인이 권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60년 정권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최충헌은 이성계처럼 새 나라를 열 시대정신은 전혀 없었던 것 같다.

몽골이라는 거대한 외세의 침략이 없었다면 최씨 정권은 일본의 막부처럼 계속 권세를 이어갔을까?

최충헌과 그 아들 최우의 놀라운 장악 능력과는 달리 뒤를 이은 후계자들 최항과 최이의 부족한 자질 때문에 결국은 무너지고 기존의 왕정으로 돌아왔을 것이라고 본다.

최충헌이 자신의 왕조를 세우기에는 고려가 중국이라는 거대한 배후에 사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가능했다는 점도 지적한다.

한반도에 새 왕조가 생기는 시기는 모두 중국의 혼란기였다.

역시 외국 학자라 민족을 떠나 객관적인 눈으로 판세를 본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흥미로운 주제이고 무신 정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알게 돼서 유익한 시간이었다

다만 번역투의 어색한 문장 때문에 가독성이 다소 떨어지는 게 아쉽다.







<오류>

259p

명종, 신종의 외가인 정안 임씨와 희종, 강종의 외가인 강릉 김씨는 무신 집권기 동안 잠재력을 지녔다.

-> 명종, 신종의 외가 즉 어머니 공예왕후 임씨는 정안(장흥) 임씨가 맞지만, 그 아들들인 명종과 신종의 처가는 강릉 김씨가 아니라 왕족인 강릉공 왕온의 딸들이다. 김씨라고 칭한 것은 족내혼임을 숨기기 위해 모계의 성을 따랐다고 되어 있다. 강릉 김씨를 정안 임씨와 같은 수준에서 볼 수 없을 것 같다.

314p

이의방은 전주 이씨 출신이며 그의 형제 이준의는 뒤에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직계 조상이다.

-> 위키백과에 따르면 이준의가 아니라 다른 형제인 이린이 이성계의 6대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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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19-11-29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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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과 문신 / 에드워드 슐츠

일본의 막부 체제는 천황과 물리적인 거리를 두고 천황제를 상징적인 권위로 활용한 반면, 고려의 무신 정권은 중앙 집권적 군주제를 존속시킨 채 거기서 자신들의 안락을 추구했다. 왕권과 실권(實權)이 공존한 이 이중 통치는 문반(文班) 기구의 행정력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권력 독점이 새로운 체제 수립의 기틀로 작용하지 못했다.

무신 정권의 특징은 왕과 최고 권력자의 불편한 동거, 유교의 충(忠) 이념과 역성혁명의 내면 갈등, 권력 유지의 방편이었던 토지 개혁과 자신들의 재산 증식욕, 개인 숭배가 야기한 후계자의 숙청 작업 등 모순의 연속이었다. 그들은 여러 겹으로 체제 안정화를 시도했지만, 권력자의 혜안이 흐려지는 순간 모든 것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정변은 이전부터 시작되어 의종 때 격화된 정치적•사회적 갈등의 산물이었다. 독립하려는 의종의 모색은 역설적으로 그를 몰락시켰다. 그는 강력한 정적들을 괴롭혔다. 조정 관원•환관•내시의 방탕과 오만을 용인한 그의 방임은 문신과 무신의 분노를 불러왔다. 국왕과 그의 동생•모후 사이에 형성된 분열은 당시의 정치를 더욱 일그러뜨렸다. 견제할 수 있는 왕조의 정치 기구는 없었으며, 언론 기관의 간쟁—정치적 음모에 따라 고무되고 과도한 압력을 부과한 것이 분명한—은 무시되었다. 긴장이 커지면서 무신 지도자들의 불만과 문신 학자들의 환멸은 1170년의 무신의 난으로 융합되었다. 52)



고려 사회는 12세기 말엽 천천히 해체되었다. 새 무신 지도자들은 중방에 권력을 통합하고 문반 구조를 운영해 행정적 일관성을 지닌 외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중앙 조정은 통제력을 잃었다.
...
유학자들에게서 노비의 아들로 비판된 이의민이 1184년(명종 14)에 집권했을 때 모든 제한은 사라졌고 약탈과 절도는 당시의 기준이 되었다. 65-6)



최씨 정권의 약점 중 하나는 지도자 개인을 향한 충성을 정권 전체에 대한 헌신으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지도자마다 그 자신의 추종자 집단으로 둘러싸인 상황은 전체 구조에서 하위 집단끼리 권력을 다툴 가능성을 높였다. 최우는 이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군사적 적대 세력을 재빨리 배제시켰으며, 아버지의 충성스러운 부하를 유배 보내고 자신의 추종자들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197)



고려 귀족은 여러 이유에서 사찰을 후원했다. 진정한 독실함도 한 요인이었지만, 지배층은 상당한 경제적 이익도 얻었다. 그들은 불교의 한 종파에 가족 구성원을 출가시켜 승려는 일정한 의무에서 면제된다는 고려의 세법을 이용했다. 국가의 토지와 녹봉제도에서 승려에게 수익을 할당해주는 다른 조항 또한 이 가문들에 이익을 주었다.
...
후한 기부의 수혜자로서 교종은 점차 나라에서 가장 넓은 토지 소유자 중 하나가 되었다. 207)



사찰은 학교를 대신해 학습의 중심이 되었다. 이제현이 지적했듯이 젊은 유생들은 승려 문하에서 배우려고 사찰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상호 연구로 불교와 유교의 차이는 줄어들었다.
...
최씨 정권은 유학자와 선종의 활동을 후원해 이런 만남을 발전시켰고, 그 결과 13세기 후반 한국이 신유학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예비했다. 224-5)



유교 사상은 왕조질서를 정당화했지만 최씨 정권의 다른 절반인 최씨의 사적 기구에는 아무런 존재 이유도 제공하지 않았다. 국왕과 문신이 포함되어 있는 왕조의 구조적 체제를 지지한 것과 마찬가지로, 최충헌이 유교를 지지한 것은 결국 그의 체제를 약화시켰다. 자신의 혁신에 어떤 형태의 이념적 지지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의 체제에서 결정적 약점이었다. 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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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a35 2015-06-15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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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권력‘에 대하여 - [무신과 문신]

'이중 권력'에 대하여
- [무신과 문신](2000), 에드워드 슐츠, 김범 옮김, <글항아리>, 2014.




"최씨 정권의 치명적 결함은 문신과 유교를 육성했지만 자신의 체제를 위한 새로운 이념적 기반을 마련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이었다. 문신의 지도력은 점차 구조에 대한 통제력을 다시 확립했고 무신의 이상을 무시했다. 그들의 유교적 신념-정통성은 국왕에게 있다는 생각을 포함해-은 지속적인 최씨 지배에 관련된 반감이 거스를 수 없이 급속해지는 현상에 반영되었다. 몽골의 존재 여부와는 상관 없이, 최씨 정권과 무신 정권은 고려의 문치적 전통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 [무신과 문신], <9장. 최씨 정권의 난제>, 에드워드 슐츠, 2000.


고려 개국 후 과거시험을 통해 출사한 '문신(文臣)'이 왕조의 지배관료였다. 우리가 '장군'으로 알고 있는 윤관이나 강감찬은 모두 '문신'이었다. 여진이나 거란과 전투를 치른 건 '무신(武臣)'인 군인들이었으나 이 전쟁을 지휘한 것은 '문신'이었다.
고려 지배층 또한 '문반'과 '무반'의 '양반'이었으나 '문치시대'를 연 고려에서 '무신'은 상대적으로 차별받았다. 고려의 과거시험도 문신관료를 선발하는 '문과(명경/제술과)'와 승려를 뽑는 '승과', 기술직 '잡과'는 있었으나 '무과'는 출세의 길로 인정받지 못했다. 고려는 초기부터 '문신'과 '무신'의 대립과 갈등을 줄곧 뿌리고 있었다. 그나마 무과에서조차 차별받던 서경(평양)에서 일어난 묘청의 난을 진압한 것도 [삼국사기]를 쓴 '문신' 김부식이었다. 12세기에 고려의 '문신'은 완전히 승리했다.


한국사를 전공한 하와이대학 에드워드 슐츠(Edward J. Schultz) 교수는 1970년대에 한국에서 공부하던 중, 당시 박정희 군부독재정권을 보고 본인의 전공인 한국 중세사에서 '무신정권'을 연구하기로 한다.
한국사에서 고려시대(918~1392)는 삼국시대와 조선을 잇는 시기로 학문적 대상 외에는 상대적으로 큰 관심을 못 받았으나 조선말까지 1천 년간 '문치시대'의 짧지 않은 전통을 지녔다. 1170년부터 1세기 동안 존속한 '무신정권'은 일종의 '변칙'으로 여겨졌다. 역사적 의미는 없이 살인과 학살로 이어진 야만의 시대로 인식되던 중 1980년대 김당택 교수 등의 연구로 본격화되었고 미국의 한국사학자인 슐츠는 [무신과 문신(Generals and Scholars)]이라는 연구서를 냈다.

고려 의종은 집권 초반에 문반을 견제하기 위해 '견룡군'이라는 왕실 친위대를 각별히 대했으나 환관내시가 득세하면서 견룡군 또한 홀대를 받는다. 1170년 '무신의 난'은 그 동안 누적된 문무 차별에 대한 반란이었으나 이를 이끈 정중부는 오래된 무신집안 출신이었기에 가능했다. 한참이 지난 후 조선왕조 전주 이씨의 오랜 방계조상이 된 이의방이나 출신이 낮은 이고는 같은 견룡군의 상장군이었던 정중부를 앞세워야 뿌리깊은 문치주의 속에서 반대파 문신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무신의 난 직후 무차별적 문신숙청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문신권력에 붙어 무신들을 박해한 문신들은 제거되었으나 중서문하성과 추밀원(이하 재추)으로 대표되는 문신관료기구를 제끼고 권력의 최고 합의기구가 된 중방에는 다수 문신도 참여했다. 이후 경주의 노비 출신이었던 이의민은 철저하게 사리사욕을 중심으로 정국을 주도하다가 무신집안 출신 최충헌 장군에게 암살되지만 무신의 난은 권력운용에는 미흡했어도 문신과 무신이 동등하게 정권에 참여한 중요한 계기를 만든다.
무신집안 출신이었고 음서를 통해 문신으로 첫 관료생활을 시작한 장군 최충헌이 60년간 '최씨 정권'을 세웠을 때는 엄밀히 따지면 '무신정권'은 아니었다.

정중부와 경대승, 최충헌 등은 문신과 무신의 균형을 통해 고려를 지배하려 했고, 이의방과 이고, 이의민 등은 무신의 우세와 무력을 통한 지배를 지향했다고 볼 수 있는데, 당시 귀족정치의 배경에서 한미한 가문은 문신들의 지지를 얻기 힘들었던 상황도 있었을 것이다.
의종을 결국 시해한 이의민은 오로지 무예 실력으로 출세한 자였고 국가의 '공공성' 자체를 모른 채 국가를 사익 추구의 도구로만 여겼다. 대기업 사장님 출신 대통령 이명박과 같다. 야차와 같은 이의민을 제거한 최충헌과 최충수 형제는 거사 직후 바로 고려왕에게 보고하며 고려의 합법성과 정통성에 의지하고 심지어 무신 최충헌 장군은 고려를 개혁할 '봉사10조'까지 제출한다. 고려태조 왕건의 '훈요10조'를 상기시킴은 물론 신라 문신 최치원과 고려 문신 최승로를 따랐다. 물론, 고려의 토지개혁과 불교개혁 등의 심오한 내용을 망라했던 최충헌의 '봉사10조' 또한 사문서에 지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최충헌 정권은 문신을 우대했고 유학과 문학을 장려했으며 과거시험을 통한 문신관료 배출을 확대했다.
고려 최고의 천재라는 [동국이상국집]과 [동명왕편]의 이규보도 최씨 정권이 키운 문신이었으며, '단군'을 시조로 기록한 일연 국사의 [삼국유사]가 지어진 때도 바로 이 시기였다.


"보수적 인물인 최충헌은 문반 지배층을 행정에 복귀시키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유교 이념을 후원해 왕정을 계속 인정하겠다는 생각을 확인했다. 그는 정치적으로 합의제 기구에 계속 의존하고 사회적 해방을 제한해 사회질서를 동결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최충헌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공적/사적 기구를 모두 활용하는 혁신적인 '이중 조직'을 발전시켰다. 최씨 정권이 고려를 통치한 기간에 전통에서 벗어난 사례는 여럿 있었다. 무신 집정에게 충성하는 사병은 곧 관군을 대체해 권력을 주도적으로 결정하는 세력이 되었다. 최충헌과 그의 가족은 이런 새 질서를 지배했다. 최씨 집정에게 충성을 맹세한 인물들은 문객(門客)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비슷한 충성관계가 그 밖의 군사와 지도자 사이에서도 발전했다."
- [무신과 문신], <머리말>, 에드워드 슐츠.


최충헌이 세운 60년 '최씨 정권'의 몰락은 그 자체의 모순으로 잠재해 있었다. 기본적으로 스스로 왕이 될 수 없었던 중국과의 대외정세를 배경으로 '왕권'의 '공적기구'를 인정하면서 '최씨'의 '사적기구'를 병립시킨 '이중적 행정(슐츠, 같은책)'과 그로 인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괴리가 근본 문제였다.

'무신정변'의 혼란을 진압한 최충헌은 문/무반의 균형을 통해 비교적 안정적 국정운영을 한 것으로 슐츠 교수는 평가하고 있다. 최충헌 본인은 허수아비 왕들을 갈아치우면서 '교정도감'과 '도방', '정방', '야별초' 등의 사적 기구를 통해 권력을 이어갔고 그의 아들 최우 또한 아버지가 닦아놓은 기반 위에서 어느 정도 안정된 집정을 했다. 최항과 최의 등 최우의 후계자들에 이르러 최씨 정권은 본격적으로 무너지는데, 공적으로는 토지개혁을 하고 사적으로는 진주와 전라지역의 곡창지대, 강화도 등의 대토지 소유 확대한 '이중성', 이의민 같은 천민노비 출신의 사회진출을 억압하고 만적의 난 등 노비반란을 잔인하게 탄압한 반면 본인에게 충성하는 천민은 승진시키는 '이중성', 불교종파 교종을 억압하면서 선종을 지원했지만 불교의 부정부패를 키운 '이중성' 등이 더욱 역동적으로 기능한다. 최씨가 무너진 후 무신정변 마지막 집정 김준은 노비 출신이었다.
결국, 최씨 정권이 앞에 내세우기는 했으나 그들의 '사적 권력'으로 억압되고 무력화된 '공적 권력', 즉 고려왕조는 몽골에 복속되면서 다시는 '공적 권력'이 되지 못하고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한편, 최씨 정권은 강화도로 천도하면서까지 25년 간 몽골에게 저항했는데, 이 역시 '항몽투쟁'이라기 보다는 '사적 권력'을 지키려는 '생존투쟁'에 가깝다.'공적 권력'인 고려왕조는 한반도 지배를 위해 존속시킬 필요가 있었지만 '사적 권력' 최씨 집안은 멸족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고, 삼별초 항쟁 또한 그시작은 '사적 권력'에 대한 충성이었을 수도 있다. 당시 몽골의 '제국'적 실력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정미7적', '을사5적' 따위 등 우리 근대사의 친일 지배계급 보다 낫다고 볼 수는 있겠다.

'안정된' 권력자였던 최충헌과 최우가 왕이 되기를 포기한 이유를 슐츠는 중국과의 대외정세로 본다. 한반도의 왕조교체는 당시 중국에 강력한 통일정권이 있을 때는 불가능했다는 것인데, 고려 개국 시 중국은 5대10국이었고, 조선은 원-명 교체기였기에 가능했다. 아마도 금나라가 강대하지 않았다면 고려와 조선 사이에 '최씨 왕국'이 잠시 존재했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최충헌과 최우에게는 불교 선종 외에 지배이념이 약했다. 고려의 개국이념이 후삼국 혼란기에 불교를 기반한 풍수지리설이었다면 조선의 개국이념은 당시에는 진보적이었던 성리학적 '민본사상'이었다.
최충헌의 선종은 정치이념이 될 수 없었고, 그들의 유학사상은 결국 최고집정자 1인이 사라지면 함께 흩어지면서 결국 고려왕조의 '공적 권력'을 찾아갈 수 밖에 없는 문신의 지배사상이었다.


오래전 '왕조시대'에서 '공공성(公共性)'을 담보하는 유일하고 이상적인 정치체제는 '군주제'였다. 근대에 들어서야 '공화제'가 정치개념으로 정립되고 왕을 단두대에 세우지만, 우리 역사만 해도 20세기에 들어서야 '왕이 없는 세상'을 알게 되었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옥중수고]에서 '현대의 군주'로 대중적 (진보)정치정당을 호명했지만 지금의 '군주'는 단연 대다수 '민중'이다. 이 다수가 지도하는 '공화국'이야말로 '공공성'을 실현하는 최고의 정치권력이다. 공익이 아닌 사익에 기반한 '포퓰리즘'을 경계해야 하는 지점이 바로 '공공성'이다.

1917년 러시아 소비에트 혁명의 배경에도 최충헌 시대처럼 '이중 권력'이 있었으나, 세상을 바꾼 것은 노쇠하거나 쇠약해진 소수의 '국가'가 아니라 '공공성'을 담보한 다수 대중의 소비에트였다.
무신정변기 '이중 권력' 중 '최씨 정권'은 '공공성'과 거리가 매우 먼 '사익추구집단'에 불과했으며, 이의민과의 차이는 개인이 다 해 먹느냐 집안이 다 해 먹으냐는 규모의 차이였다.

예나 지금이나, '공공성'을 둘러싼 국가권력과 시민사회 간 '이중 권력'의 투쟁이 되어야 사회가 변한다.


***

- [무신과 문신(Generals and Scholars : Military Rule in Medieval Korea)](2000), Edward J. Schultz, 김범 옮김, <글항아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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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trice1007 2021-03-19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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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한국의 무신과 문신 요약 및 평론

<중세 한국의 무신과 문신>(원제: Generals and Scholars in Medieval Korea)은 서구 학계의 대표적인 한국 중세사학자 에드워드 슐츠(Edward J. Shultz)가 고려 시대 무신정권(1170~1270)의 성격과 구조를 새로운 시각으로 분석한 기념비적 저작이다. 저자는 무신정변을 단순한 <야만적 폭동>이나 <체제의 완전한 단절>로 보던 기존의 지배적 담론에 의문을 제기한다. 대신 무신정권이 기존 문신 관료제의 제도적 틀을 어떻게 계승하고 활용했는지, 그리고 이 역동적인 상호작용이 어떻게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의 가교 역할을 했는지 추적한다.

1. 요약: 단절이 아닌 연속성의 정치학

무신정변의 배경과 발발

고려 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문치주의를 지향하며 문신을 우대하고 무신을 차별했다. 무신들은 고위 관직 승진에서 배제되었고, 군사 지휘권마저 문신들에게 빼앗겼다. 이러한 구조적 모순과 의종의 실정, 문신들의 안하무인 격인 태도는 무신들의 분노를 극에 달하게 만들었다. 결국 1170년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이 주도한 무신정변이 발발하며 고려의 지배 구조는 통두리째 뒤흔들린다. 수많은 문신이 학살당했고, 의종은 폐위되었다.

무신의 집권과 정권의 진화

정변 초기에는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등 무장들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이 이어졌다. 정치는 불안정했고 하층민의 반란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1196년 최충헌이 권력을 잡으면서 무신정권은 안정기에 접어든다. 최충헌은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독재 권력을 공고히 했고, 그의 아들 최우는 정방과 서방을 신설하여 인사권과 행정력을 장악했다. 최씨 정권은 단순한 군사 독재를 넘어 고도의 제도화된 통치 기구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문신과의 공존과 제도적 연속성

슐츠가 이 책에서 가장 강조하는 핵심 논지는 무신들이 문신을 완전히 절멸시키거나 관료제를 폐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권을 잡은 무신들에게는 복잡한 국가 행정과 외교 문서를 처리할 행정적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따라서 최충헌과 최우는 이규보와 같은 신진 문인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여 정권의 브레인으로 삼았다.

무신 집권자들은 왕조의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 국왕을 폐하지 않고 허수아비로 존속시켰으며, 과거 제도를 지속적으로 시행하여 관료를 충원했다. 즉, 권력의 정점은 무신이 차지했으나, 국가를 운영하는 하부 구조와 제도적 틀은 여전히 고려 전통의 문신 관료제를 기반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사회 변동과 조선으로의 이행

무신정권기는 지배층의 대대적인 세대교체를 가져왔다. 문벌 귀족이 몰락한 자리에 지방의 향리 출신이나 능력 있는 신진 사대부들이 대거 중앙 정계로 진출할 기회가 열렸다. 이 시기에 성장한 신진 문인들은 훗날 공민왕 대를 거쳐 조선 성리학 정권의 물적, 지적 토대가 된다. 슐츠는 무신정권이 초래한 지배층의 유동성이 역설적으로 고려 사회의 역동성을 증명하며, 이 변화가 조선 왕조 개창의 장기적 원동력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2. 평론: 변혁의 시대에 대한 균형 잡힌 외재적 시각

구조적 연속성의 발견이라는 성과

슐츠의 <중세 한국의 무신과 문신>이 지닌 가장 큰 학문적 성취는 한국사 학계에 오랫동안 군림해 온 <단절론>을 극복하고 <연속성>의 관점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과거 한국의 민족주의 사학이나 전통 사관은 무신정권기를 문화적 암흑기이자 하극상의 정치적 비극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저자는 거시적인 거버넌스(governance)의 관점에서 무신정권을 재해석한다. 무신들이 칼의 힘으로 권력을 잡았을지언정, 통치의 정당성과 효율성을 확보하기 위해 결국 문(文)의 체제에 굴복하거나 이를 흡수할 수밖에 없었던 권력의 속성을 날카롭게 포착했다.

특히 최씨 정권의 문신 포섭 정책을 단순한 회유책이 아니라 국가 제도 개혁의 일환으로 분석한 대목은 탁월하다. 이는 고려가 지닌 제도적 복원력이 얼마나 강고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서구 학자로서의 객관성과 방법론적 한계

이 책은 외부자의 시선이 지닌 객관적 장점을 십분 발휘한다.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관이나 민족주의적 도덕주의에 휘둘리지 않고, 권력의 획득과 유지라는 철저한 정치공학적 메커니즘으로 무신정권을 해부한다. 이규보와 최우의 관계를 주종 관계를 넘어선 정치적 파트너십으로 해석한 시각 등은 매우 신선하다.

그러나 이러한 행정적, 제도적 연속성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당시 기저에서 끓어오르던 사회적 모순과 민중의 고통을 다소 소홀히 다루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무신정권기에는 망이·망소이의 난, 만적의 난 등 신분제 질서를 뒤흔든 대규모 민중 봉기가 빈발했다. 저자가 강조한 <체제의 안정과 연속성>은 실상 피지배층에 대한 가혹한 수탈과 군사적 억압 위에서 간신히 유지된 측면이 크다. 거시적 제도사 분석에 치우쳐 미시적인 사회사적 역동성과 민중의 목소리를 과소평가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총평: 한국 중세사를 바라보는 필수적 지평

결론적으로 <중세 한국의 무신과 문신>은 고려 무신정권기를 한국사 내부의 고립된 돌발 사태가 아닌, 왕조 체제의 진화 과정이라는 연속적 흐름 속에서 파악한 수작이다. 슐츠는 무신과 문신이라는 이질적인 두 집단이 갈등과 타협을 거치며 어떻게 중세 한국 사회의 구조를 재편해 나갔는지 명징하게 논증했다. 비록 민중사의 관점을 포섭하는 데는 한계를 보였으나, 고려 정치사의 구조적 역동성을 이해하고 조선으로의 이행기를 설명하는 데 있어 결코 우회할 수 없는 이정표를 제시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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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슐츠, <무신과 문신: 중세 고려의 장군과 학자>

<Generals and Scholars in Medieval Korea> 요약+평론

에드워드 슐츠의 <무신과 문신: 중세 고려의 장군과 학자>는 고려 중기 무신정권을 단순한 “군인들의 난”이나 “문신 정치의 붕괴”로 보지 않고, 고려 국가 구조 안에서 문신과 무신이 어떻게 서로 경쟁하고 타협하며 권력을 구성했는지를 분석한 연구다. 이 책의 핵심 문제의식은 분명하다. 고려 사회에서 무신정권은 왜 발생했으며, 그것은 기존 귀족정치 질서와 얼마나 단절되었고 또 얼마나 연속되었는가 하는 질문이다.

일반적으로 고려 무신정변은 1170년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이 의종을 폐위하고 명종을 세운 사건으로 설명된다. 기존 서술에서는 이를 문신 중심 귀족사회에 억눌려 있던 무신들의 폭발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즉 문신은 권력과 명예를 독점하고, 무신은 실질적 군사 기능을 담당하면서도 정치적으로 차별받았다는 것이다. 슐츠도 이러한 배경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이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무신정권은 단순히 문신을 몰아내고 군인들이 국가를 장악한 사건이 아니라, 고려 지배층 내부의 권력 배분 방식이 바뀐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책은 먼저 고려 전기의 정치 구조를 살핀다. 고려는 문벌귀족 사회였고, 과거와 음서, 혼인관계, 관직 독점을 통해 특정 가문들이 정치적 지위를 세습했다. 이 구조에서 문신은 이념과 제도, 행정과 문화의 중심에 있었다. 유교적 정치 질서는 문신 관료의 권위를 높였고, 군사력은 국가 운영의 필수 조건이면서도 문치 이념 아래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았다. 무신들은 전쟁과 국방을 담당했지만, 조정 안에서는 문신보다 낮은 위상에 놓였다. 이 불균형이 장기적으로 불만을 축적했다.

그러나 슐츠가 강조하는 것은 고려 무신들이 단순한 하층 군인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이미 관료제 내부에 자리 잡은 지배층의 일부였다. 따라서 무신정변은 사회 하층민의 혁명이라기보다, 기존 지배 엘리트 내부의 권력 재편이었다. 무신들은 문신을 폭력적으로 제거했지만, 고려 왕조 자체를 폐지하지 않았다. 왕은 계속 존재했고, 국가 관료제도 유지되었다. 이는 무신정권이 제도 밖의 반란이 아니라 제도 안의 권력 장악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책의 중요한 부분은 무신정권 내부의 변화다. 정중부, 이의방,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으로 이어지는 권력 변동은 무신정권이 하나의 안정된 군사정부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초기 무신정권은 폭력적이고 불안정했다. 권력자들은 서로 제거했고, 왕권은 허약했으며, 지방에서는 민란과 저항이 일어났다. 특히 망이·망소이의 난, 김사미·효심의 난, 만적의 난 같은 사건은 무신정권기의 사회적 긴장이 단순히 중앙 정치 문제만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무신정권은 지배층 내부의 권력 이동이었지만, 그 충격은 지방민, 노비, 농민, 사원세력까지 넓게 확산되었다.

최충헌의 등장은 이 책에서 중요한 전환점이다. 그는 단순한 군사 권력자가 아니라, 무신정권을 제도화한 인물로 그려진다. 최씨 정권은 사병 조직, 교정도감, 도방 등을 통해 권력을 안정시켰다. 특히 최충헌 이후 최우, 최항, 최의로 이어지는 최씨 무신정권은 왕을 폐하지 않고도 실질적 통치를 장악하는 독특한 체제를 만들었다. 왕은 상징적 권위를 유지했고, 최씨 집권자는 실권을 행사했다. 이중 권력 구조는 고려 정치의 유연성과 동시에 취약성을 보여준다.

슐츠의 분석에서 흥미로운 점은 무신정권이 문신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무신들이 정권을 잡았지만, 행정과 외교, 문서 작성, 국가 의례, 유교적 정당화에는 여전히 문신이 필요했다. 그래서 무신정권은 문신을 탄압하면서도 다시 등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이 책 제목 <Generals and Scholars>의 핵심이다. 고려 중세 정치는 장군과 학자의 대립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장군은 학자를 필요로 했고, 학자는 새로운 권력 질서 안에서 생존해야 했다. 무신정권은 문신정치의 파괴이면서 동시에 문신 관료제의 활용이었다.

몽골 침입과 강화 천도 역시 책의 중요한 주제다. 최씨 정권은 몽골과의 전쟁 속에서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장기 항전을 선택했다. 이것은 민족적 저항으로 기억되기도 하지만, 슐츠의 시각에서는 권력 보존의 논리도 함께 작동했다. 강화도 조정은 육지 백성들이 전쟁 피해를 입는 동안 상대적으로 안전한 공간에서 정권을 유지했다. 따라서 대몽항쟁은 영웅적 저항과 지배층의 자기보존이라는 두 얼굴을 가진다. 이 균형 잡힌 시각은 고려사를 민족주의적 미화나 단순한 비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이 책의 장점은 첫째, 무신정권을 도덕적 평가가 아니라 구조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무신정변은 “나쁜 군인들이 좋은 문신을 죽인 사건”도 아니고, “억압받던 무신의 정당한 복수”만도 아니다. 그것은 고려 지배체제 내부의 누적된 모순이 폭력적으로 드러난 사건이다. 슐츠는 문신과 무신의 관계를 계급투쟁식으로 단순화하지 않고, 관료제·군사제도·왕권·귀족가문·지방사회가 얽힌 복합 구조로 해석한다.

둘째, 이 책은 고려 무신정권을 동아시아 정치사의 넓은 맥락에서 보게 한다. 중국 송대의 문치주의, 일본 가마쿠라 막부의 무가정권, 고려의 무신정권은 서로 다르지만, 모두 문치와 무력의 관계라는 문제를 공유한다. 고려는 일본처럼 무사가 독자적 봉건 지배층으로 제도화된 것은 아니었고, 중국처럼 문신 관료제가 군사 권력을 완전히 통제한 것도 아니었다. 고려의 무신정권은 그 중간에 있다. 군사 권력자가 실권을 잡았지만, 왕조와 관료제는 유지되었다. 이 애매한 구조가 고려사의 독특함이다.

셋째, 슐츠는 무신정권기의 문화와 지식인 문제도 중요하게 다룬다. 흔히 무신정권은 문화적 암흑기로 이해되지만, 실제로는 이규보 같은 문인이 활동했고, 문학과 역사 서술도 계속되었다. 물론 문신들의 지위는 약화되었지만, 그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새로운 권력자에게 봉사하거나, 현실을 비판하거나, 자기 생존의 언어를 만들어야 했다. 이 점에서 무신정권기는 문학과 지식인의 역할이 재조정된 시기이기도 하다.

다만 이 책에도 한계는 있다. 첫째, 정치 엘리트 분석이 중심이기 때문에 민중의 경험은 상대적으로 부차적으로 다루어진다. 무신정권기의 민란과 노비 저항은 매우 중요한 사건들이지만, 책의 주된 관심은 여전히 중앙 권력 구조에 있다. 물론 슐츠의 연구 목적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지만, 사회사적 관점에서는 더 많은 보완이 필요하다.

둘째, 무신정권의 폭력성과 착취 구조가 때로는 제도 분석 속에서 다소 중화되어 보일 수 있다. 무신정권은 권력 재편이었지만, 동시에 많은 문신 학살, 지방 수탈, 사병 확대, 농민 부담 증가를 동반했다. 구조적 분석은 필요하지만, 그 구조가 실제 사람들의 삶에 어떤 고통을 주었는지도 함께 보아야 한다.

셋째, 고려의 문신과 무신 관계를 설명할 때, 유교 이념의 역할을 좀 더 깊이 파고들 여지가 있다. 문신 우위는 단순한 관직 배분 문제가 아니라, 지식·문자·의례·도덕적 정당성의 독점과 관련되어 있었다. 무신들이 권력을 장악한 뒤에도 문신을 필요로 한 이유는 바로 이 상징 권력 때문이다. 이 부분은 더 철학적·문화사적으로 확장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무신과 문신>은 고려 무신정권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책이다. 이 책의 핵심 메시지는 무신정권이 고려사의 예외적 일탈이 아니라, 고려 정치 구조 안에서 발생한 필연적 균열이었다는 것이다. 문신 중심의 질서는 무신을 필요로 하면서도 낮게 평가했고, 무신은 국가를 지키는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치적 존중을 받지 못했다. 그 불균형이 결국 폭력으로 폭발했다. 그러나 무신이 정권을 잡은 뒤에도 문신의 지식과 제도는 필요했다. 그러므로 고려 중세정치는 문신과 무신의 단순 대립이 아니라, 서로를 배제하면서도 의존하는 모순적 관계였다.

이 책을 오늘의 관점에서 읽으면, 국가 권력에서 지식과 폭력의 관계라는 더 큰 문제가 보인다. 어떤 국가도 행정과 이념만으로 유지되지 않고, 어떤 국가도 군사력만으로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문신은 질서를 말하지만 힘 없이는 통치할 수 없고, 무신은 힘을 갖지만 정당화 없이는 통치할 수 없다. 고려 무신정권은 바로 이 진실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한 고려사 연구가 아니라, 권력 일반에 대한 분석으로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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