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15

'친일'이라는 주홍글씨가 씌어진 교육자 고황경

'친일'이라는 주홍글씨가 씌어진 교육자 고황경 : 네이버 블로그
'친일'이라는 주홍글씨가 씌어진 교육자 고황경
경천애인300
2020. 5. 23. 

고황경(1909-2000)
 김마리아를 닮고 싶었던 소녀

고황경은 1909년 3월 6일 서울에서 고명우(高明宇)와 김세라(金世羅)의 차녀로 태어났다. 황해도 장연군 소래에 살던 할아버지 고학윤( 高 學 崙 )은 동아기독교(한국 침례회)의 창시자인 선교사 말콤 펜윅(M.C.Fenwick)과 어빈(D.H.Irvin)의 어학선생으로 일하면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
1883년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송천교회(松川敎會), 곧 소래교회를 설립했는데, 이 교회가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외할아버지 김윤오(金允五)는 그의 형 김윤방(金允邦)이 자택을 우리나라 최초 교회인 소래교회 예배당으로 바친 장본인으로 이들 형제는 언더우드(Underwood.H.C)·에비슨(O.R.Avision) 등의 선교사와 각별한 관계였다. 그녀의 부모는 모두 소래교회에서 자라나서 고명우는 경신중학교, 김세라는 정신여학교를 졸업했다. 따라서 이들의 결혼식 주례를 하고 김씨 집안의 딸들에게 성경 속 이름을 지어준 사람도 언더우드였다.

부산지방 최초의 근대학교인 한문학교 - 뒷줄 좌측 외국인이 베어드(숭실대 설립자), 그 앞의 갓 쓴 노인이 소래교회 설립자 서상륜, 우측 외국인이 아담스, 그 앞이 고학윤(고황경의 조부)
이런 가정 분위기에서 어려서부터 어어빈의 어학선생 겸 조사로 일한 아버지 곁에서 의료선교사의 세계를 보면서 ‘의사의 꿈’을 키운 고명우는 결혼 후에 세브란스의학교로 진학했다. 그는 외과 의사가 되어, 황해도 수안군에 있는 광산촌병원에 근무했다. 이때 남정교회와 은진여숙을 설립했고 두 딸도 이곳에서 성장했다. 광산촌병원에서 6년을 근무한 고명우는 1918년 모교 세브란스의전 교수로 부임한 후, 1926년 미국에 유학하여 롱아일랜드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고 모교로 복귀했다. 주말이면 서울 근교의 농촌을 찾아 의료봉사활동을 하고, 주일에는 남대문교회 장로로서 봉사했다. 고황경은 아버지 모습을 보면서 크리스천의 삶이 어떠해야하는 가를 체험적으로 배웠다.
한편 김필순, 김구례(서병호의 부인), 김순애(김규식의 부인), 김필례, 김함라(남궁혁의 부인) 김마리아 등의 외가 친척들은 하나 같이 독립운동가로 유명했는데, 이중에서 고황경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외당고모(外堂姑母) 김마리아다. 고명우는 딸들이 김마리아 같은 여성운동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세계의 여성 지도자를 담은 영문 책을 번역해서 읽게 했다. 이런 연유로 고황경은 김마리아를 열심히 따랐으며, 김마리아도 조카 고황경을 무척 아끼고 귀여워했다. 김마리아는 평생토록 고황경의 롤-모델(role model)이었다.

독립운동가 집안으로 유명한 고황경의 외가 친척들 - 좌로부터 김순애, 김규식, 김마리아, 김필순
 대한민국과 결혼한 여성 고황경은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일본 도시샤여전문학교를 거친 후 미국 미시간대학교에서 사회학을 전공했다. 1935년 이화여전 교수가 되었고, 1937년에는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학업을 마치자 이화여전 음악과 교수이던 언니 봉경(鳳京)과 경성자매원을 설립했다. 경성자매원은 1895년에 언더우드 선교사가 설립한 잔다리예배당(현, 서교동교회) 부설로 운영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복지시설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 고봉우의 영향으로 여성운동가의 꿈을 간직한 자매는 결혼하는 것보다, 강탈당한 조국을 찾고 실의에 빠진 민족을 위해 청춘을 바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1895년에 설립된 잔다리예배당의 모습(삽화)

시외선 기차 종착역이던 잔다리(오늘의 동교동과 서교동 일대) 주민들을 대상으로 무료강습소를 열고 사회사업을 시행했다. 영아부터 20세미만의 소녀들을 위한 사회교육, 가난한 자와 임산부를 위한 의료봉사, 여성운동 및 노인 위안 프로그램 등으로 사회학자 고황경의 새로운 사회를 향한 건설 의지가 반영된 사회사업이었다. 관내 111 가구, 주민 587명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비는 모두 자매의 봉급으로 충당했다.

“이 자매원의 유일한 재산은 열심과 성력(誠力)인 무형재산으로 경상비 300원 뿐이라는데, 이 갸륵한 고 (高) 자매의 뜻에 공명한 인사로부터 금전 선물과 잡수입으로 215원79전이 있었다고 한다. 동 원(院)의 계획은 학원 아동에게 창가(唱歌) 교수를 위하여 적은 풍금 한 대를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위생 지도를 위하여 원(院)의 변소 개량을 요구하며, 가정 상식을 가르치며 생활개선 지도에 필요한 설비로 부엌 한 간을 요하며, 농한기를 이용하여 부녀자들에게 수산(授産, 일자리 만들기)하고 싶다는데 뜻있는 인사의 많은 동정을 바란다고 한다.” - <동아일보>(1937.10.27)

경성자매원 입구에선 고봉경, 고황경 자매(1937)
경성자매원은 1941년 봄 일제의 강요로 조선어로 가르칠 수 없게 되자 자진하여 폐쇄했다. 광복이 되자 고황경은 경기여고 교장과 조선교육심의회의 위원으로 대한민국의 교육 기초를 정립하는데 기여하고, 보건후생부에서 미 국무성 파견 교육사절단 대표와 부녀국장을 지냈다. 이때 공창(公娼)을 폐지하였으며, 연 3%가 넘는 인구증가율 억제 방안을 놓고 고민하던 중에 1949년 록펠러재단 후원으로 미국에 건너가서 인구문제를 연구했다.
1950년 6.25가 발발하여 귀국하지 못하다가 영국 UN협회 초청으로 영국에 건너가 6년간 800회의 강연과 기고를 통해 전쟁을 겪은 조국 대한민국의 형편을 국제사회에 소개했다. 고황경은 1952년 그동안의 강연 내용을 정리하여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냈는데, 이것을 반영하여 한국 정부의 후원으로 Korea through British Eyes(『영국인이 본 한국』)이라는 제목의 팸플릿을 발간했다. 이 팸플릿을 영국과 미국의 국회의원과 대학에 보냈는데, 이를 읽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으로부터 고황경은 감사장을 받았다.

1957년 가을 귀국하자 미국에서 공부한 가족계획 사업을 실행하기 위해 1958년 3월 17일 “강력한 국가는 깨달은 어머니로부터” “요람을 흔드는 손이 세계를 흔든다.” 등의 슬로건을 걸고 대한어머니회를 창설했다.
1961년에는 장로교단의 요청으로 농촌 여성을 이끌어갈 여성 지도자 양성이라는 목표를 구현하기 위해 서울여자대학교를 설립했다. 1961년부터 3년간 UN총회 한국대표를 지내고, 1961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1963년 한국걸스카우트연맹 단장, 1983년 김마리아기념사업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70년 국민훈장 동백장, 1985년에는 5.16민족상을 수상하였고, 저서로는 『한국 농촌 가족의 연구』
『여성과 사회』 등이 있다.

2000년 11월 2일 향년 91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고황경은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704인에 포함되었다. 명단에는 김성수(고려대)김활란(이화여대) 백낙준(연세대) 등 한국교육사의 상징적 인물이 포함되었으며 이때부터 고항경에게는 ‘친일파’란 주홍글씨가 씌워졌다. 2002년 3월 8일 진보성향의 매체인 프레시안은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서 여성운동과 여성교육의 선구자로 평가를 받던 김활란 황신덕 고황경 박인덕 송금선의 5명을 친일파로 선정한 이유를 공개했다. 고황경에게는 “황도정신(皇道情神) 선양에 앞장선 여성 사회학자, 박사학위 받고 귀국 직후부터 식민지 사회교육 가담 협조, 조선부인문제연구회와 방송선전협의회에 참여하고 애국금채회 간사로 활약했다. 해방이 되자 진정한 자기반성도 없이 분단조국의 교육에 중심적 역할을 했다”라고 소개했다.

 그러면 '역사적 인물' 고황경을 어떻게 평가해야할까?
첫째, 고황경이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력했다”는 주장은 철저한 학문적 검증이 필요하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每日申報) 기사를 토대로 일제의 식민지배 통치에 협력한 것으로 단정 짓기보다는, 실제로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도용당했다는 당사자의 해명에 대해서도 검증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고황경의 생활개선론을 친일행위로 보는 것도 재론의 여지가 있다. ‘왜?’라는 물음은 외면하고, 마치 ‘어떻게?’만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진정한 반성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상당히 자의적인 해석으로 크리스천의 회개를 이해하지 못한 일반인의 판단이다. 셋째, “분단교육의 중심역할을 감당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고황경이 해방 후 대한민국 교육체계를 수립하는데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친일 논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1898년 소래교회를 방문한 언더우드 선교사 일행 - 고황경의 외종조부 김윤방이 자택을 예배당으로 바쳤다
고황경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신앙가문에서 태어나 소래교회에서 민족과 신앙을 배우면서 자랐다. 김마리아처럼 여성운동가가 되기를 원했던 고황경은 피폐한 조국의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사회학자로서 생활개선론을 주장하고 경성자매원을 통한 여성 복지와 지역사회 개발을 실천했다. 광복 후에는 서울여대를 통한 공동체교육인 바롬교육을 시행하고 사회운동과 여성운동에 진력했다. 고황경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재산과 재능을 바쳐 국가와 이웃을 위해서 헌신한 스승이다.
그러나 학문적 검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 사회의 일부 지식인들의 자의적 판단과 주장에  의해 친일파로 낙인찍혔다. 성경은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지 말 것과 함부로 정죄하지 말 것을 가르친다. 이런 점에서 ‘역사적 인물’ 고황경의 ‘공’(公)과 ‘과’(過)를 바르게 평가하여 ‘역사적 교훈’으로 삼는 것은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다.(김형석 · 대한민국사연구소 소장)

☞ 이 글은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쿰란, 2017)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고황경 #서울여대 #고명우 #김규식 #김마리아 #이화여전 #소래교회 #언더우드 #펜윅 #대한어머니회 




zaikang
1943년 8월1일은 조선에 징병제가 시행되는 날로서 우리나 병제사 위에 영구히 기록할만한 일인 것이거니와 임금의 군사로 나 서는 젊은이들, 젊은이들아. 그 집안 사람들아. 임금 위하여 참마음 하나로 일어서라 하노라 <매일신보> 1943년 8월 5일 by 고 활경
이 년아 너도 정신대 가서 봉사하지 그랬냐?
2020.10.6. 17:1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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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바람처럼
위에 글 쓰신 선생님,
1943년에 매일신보에 실린 글은, 고환경 선생님이 쓰신 것이 아니라 일제가 고환경 선생님께 강의하라고 준 원고 였다고 합니다. 물론 선생님께서는 그 원고대로 강의하지 않으셨다고, 선생님 생시에 제자들 앞에서 말씀하셨습니 다. 일제가 준 원고대로 강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원고는 마치 고황경 선생님 이름으로 매일신보에 게재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친일을 죽도록 싫어하지만, 일제의 기록대로 친일 여부를 재단하는 것은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고려 하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고황경의 삶의 여정에 친일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찾을 수 없습니다. 친일의 글레를 이 렇게 씌우는 것은 정말 아쉽기 그지없습니다.
2021.1.18. 17:5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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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천애인300
블로그주인
일제 강점기의 역사는 우리 모두의 아픔입니다. 고활경 선생에 관한 역사적 공과를 학문적으로 밝히기 위해 친일 행적에 관한 시 비를 검증하고 역사적으로 재조명하는 것이 이 글을 쓴 취지입니다. 당시 신문 잡지에 기고한 명사들의 글들은 진위 여부가 제대 로 규명되지 않은 경우가 허다합니다. 앞으로 새로운 사실이 확인되어질 경우 그때마다 업데이트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2021.1.18. 23:2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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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뚜뚜르두
한 인물에 대해 여러 각도의 분석과 평가는 가능하지만 욕설은 스스로가 내린 평가를 무의미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2021.6.18. 15:4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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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경천애인300
부인
좋은 코멘트 감사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밝혀 드릴 것은 <김형석의 역사산책> 필자는 한번도 욕설을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2021.6.20. 10:3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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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산 책에도 고황경님은 친일파라는 기록이 세세히 적혀 있는데, 그 작가는 크로스체크와 검증되지 않은 자료로 2쇄까지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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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여자대학교
친일파라는 주홍글씨가 씌워지다
고황경은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704인에 포함되었다. 몇단에는 김성수(고려대) 김활란 (이화여대) 백낙준(연세대) 등 한국교육사의 상징적 인물이 포함되었으며 이때부터 고항경에게는 '친일파'란 주홍글 씨가 되워졌다. 2002년 3월 8일 진보성향의 매체인 프레시안은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서 여성운동과 여성교육의 선 구자로 평가를 받던 김활란 확신며 고황경 박인며 송금천의 5명을 친일파로 선정한 이유를 공개했다. 고황경에게는 "황도정신(보道情) 천양에 앞장선 여성 사회학자, 박사학위 받고 귀국 직후부터 식민지 사회교육 가담 협조, 조선 부인문제연구회와 방송선전협의회에 참여하고 애국금채회 간사로 활약했다. 해방이 되자 진정한 자기반성도 없이 분 단조국의 교육에 중심적 역할을 했다"라고 소개했다.
그러면 '역사적 인물' 고황경을 어떻게 평가해야할까?
첫째, 고황경이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력했다"는 주장은 철저한 학문적 검증이 필요하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申報) 기사를 토대로 일제의 식민지배 통치에 협력한 것으로 단정 짓기보다는, 실제로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 고 이름을 도용당했다는 당사자의 해명에 대해서도 검중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고황경의 생활개선톤을 친일행위로 보는 것도 재혼의 여지가 있다. '왜?'라는 물음은 외면하고, 마치 '어떻게만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클래. "진정한 반성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상당히 자의적인 해석으로 크리스천의 회개를 이해하지 못한 일반인의 판 단이다. 셋째, "분단교육의 중심역할을 감당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고황경이 해방 후 대한민국 교육체계를 수 립하는데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친일 논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1898년 소래교회를 방문한 언더우드 선교사 일행 - 고황경의 의종조부 김윤방이 자백을 예배당으로 바쳤다.
고황경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신앙가문에서 태어나 소래교회에서 민족과 신앙을 배우면서 자랐다. 김마리아처럼 여성운동가가 되기를 원했던 고황경은 피폐한 조국의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사회학자로서 생활개선론을 주장하고 경 성자매원을 통한 여성 복지와 지역사회 개발을 실천했다. 광복 후에는 서울여대를 통한 공동체교육인 바륨교육을 시 행하고 사회운동과 여성운동에 진력했다. 고황경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재산과 재능을 바쳐 국가와 이웃을 위해 서 헌신한 스승이다.
그러나 학문적 검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 사회의 일부 지식인들의 자의적 판단과 주장에 의해 친 일파로 낙인찍혔다. 성경은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지 말 것과 함부로 정죄하지 말 것을 가르친다. 이런 점에서 "역사 적 인물 고황경의 '공(公)'과(過)를 바르게 평가하여 '역사적 교훈으로 삼는 것은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 게 주어진 과제이다. (김형석 대한민국사연구소 소장)
이 글은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풍란, 2017)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고황경 #서울여대 #고명우 #김규식 #김마리아 #이화여견 #소래교회 #언더우드 #펜윅 #대한어머니회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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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ikang
대한어머니의 이슈 교사
공감13
1943년 8월 1일은 조선에 징병제가 시행되는 날로서 우리나 범계사 위에 영구히 기록할만한 일인 것이거니와 임금의 군사로 나 서는 젊은이들, 젊은이들아. 그 집안 사람들아, 임금 위하여 참아름 하나로 일어서라 하노라 (매일신보) 1943년 5월 5일 by 고 황경
이년아 너도 정산대 가서 봉사하지 그랬나?
24 17:16
바꿈처럼
위에 글 쓰신 선생님
1943년에 매일신보에 실린 글은 고황경 선생님이 쓰신 것이 아니라 일제가 고황경 선생님께 강의하라고 큰 믿고 였다고 합니다. 물론 선생님께서는 그 원고대로 강의하지 않으셨다고, 선생님 생시에 제자들 앞에서 말씀하셨습니 다. 일제가 준 원고대로 강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뭔고는 마치 그황경 선생님 이름으로 매일신보에 기재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친일을 죽도록 싫어하지만, 일제의 기록대로 친일 여부를 재단하는 것은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고려 하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고황경의 삶의 여정에 친일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찾을 수 없습니다. 친일의 금리를 이 렇게 씌우는 것은 정말 아쉽기 그지없습니다.
경권애인300
일제 강점기의 역사는 우리 모두의 아름입니다. 그황경 선생에 관한 역사적 공과를 학문적으로 밝히기 위해 친일 행적에 관한 시 비를 검증하고 역사적으로 재조명하는 것이 이 글을 쓴 취지입니다. 당시 신문 잡지에 기고한 명사들의 글들은 친위 여부가 제대 로 규명되지 않은 경우가 허다합니다. 앞으로 새로운 사실이 확인되어질 경우 그때마다 업데이트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숫뚜뚜르두
한 인물에 대해 여러 각도의 분석과 평가는 가능하지만 욕설은 스스로가 내린 평가를 우의미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ㄴ 경진애민 300
좋은 코멘트 감사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밝혀 드릴 것은 김형석의 역사산책> 필자는 한번도 욕설을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0
430
최근에 산책에도 고황경님은 친일파라는 기록이 세세히 적혀 있는데, 그 작가는 크로스체크와 검증되지 않은 자료로 2년까지 발
행한 건가요?
20235.13 22:47 현
۱۵
사모인
주홍글씨 장난하니? 민족의 반역자 확실한 인물 입니다. 교육자로 더 민족의 혼을 싶어도 부족한데 이분은 막질친밀집단에 가입 하고 앞장서서 친밀한 민물을 주홍글씨를 써왔다고 하는 니가 바로 친밀분자구나?
2024829:23 2
ㄴ바꿈처럼
선생님, 일제강점기를 우리가 아는대로 스스로 가입하지 않아도 입게에 의해 임명되고 사용되었다는 것은 사실 아 닌지요 그리고 고황경 선생님이 스스로 막질친밀집단'에 가입한 근거가 없습니다. 그들이 임명하고 생활개선 강연을 하라고 해서 가서 평소 생각대로 소신껏 강연을 하셨답니다. "호랑이 글에 들어가도 정신을 차리면 살수있 다'는 말씀으로 일제 강점기를 표현하면서요. 그들이 준비해놓은 원고대로 하지 않았다고 불려가서 밤을 맞기도 하셨답니다.
일본 기관지 메밀신보에 실린 내용은 당시에 고황경과 같은 유능한 인물을 이용하는 일제의 전략전술이라는 사실 을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알 수 있는 일 아닐까요? 얼마나 많은 우국지사들이 그들의 계략으로 고통을 당했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주홍글씨'라는 표현을 쓰지않았을까요 고황경의 가계와 전체적인 삶을 뚫고 봐도 친일을 할 수 있는 DNA가 아님을 선생님에서 잘 살펴보셨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됩니다.
일제강점기를 살면서 사리사득을 취하지 않고 은 삶을 헌신한 분의 재평가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저 역시 매국노 적극 찬일자에 대해서는 피들는 분노가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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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님께서 보내주신 두 장의 이미지 자료는 <'친일'이라는 주홍글씨가 쓰여진 교육자 고황경>이라는 제목의 블로그 게시글과 그에 대한 독자들의 댓글 토론을 캡처한 것입니다.

이 자료는 앞서 서적 <고황경 평전>을 두고 세진님과 나누었던 문제의식, 즉 "고황경의 친일 행적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으며, 그의 공과 과를 어떤 온도로 바라보고 있는가"에 대한 매우 구체적인 시장의 반응과 서술 방식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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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 고황경의 생애와 교육 사회사업적 업적

자료는 고황경의 출생 배경부터 사상적 성장 과정을 상세히 추적한다. 고황경은 개화기 지식인 가정에서 태어나 외가인 감리교 집안의 영적 동력과 가문 내 여성 선구자들(이비바, 김마리아 등)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축복받은 환경에서 자란 그는 경성여고보와 일본 도시샤여전을 거쳐 미국 미시간 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다. 귀국 후 이화여전 교수로 재직했으며, 해방 후에는 미군정청 부녀국장으로서 모자보호시설과 비행소녀 보호 기관인 경성자매원을 설립하는 등 현장 중심의 사회복지 사업을 전개했다. 이후 1961년 서울여자대학교를 설립하고 전인적 생활 교육인 바롬 교육을 창시하며 한국 여성 교육의 거목으로 자리매김했다.

2. 일제강점기 말기의 친일 행적 기록

자료는 고황경의 삶에 새겨진 친일 행적을 명확한 사료를 통해 기록하고 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제의 전시 총동원 체제가 본격화되면서 고황경의 행보는 급격히 친일로 경도된다. 그는 조선임전보국단 부인과 가정부장 등의 중책을 맡았으며, 강연과 매일신보 기고 등을 통해 황국신민화 사상을 고취했다. 특히 조선의 여성과 어머니들을 향해 전쟁 후방을 지원하고 아들을 학병과 지원병으로 전장에 보낼 것을 독려하는 구두 선전 활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이러한 행적은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지식인 부문에 그가 등재되는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

3. 평전 저자들의 서술 방식과 대중의 시선(댓글 반응)

자료의 후반부는 2017년 출간된 평전 저자들(신영숙 외)이 고황경의 친일을 바라보는 시각과, 이에 대한 대중의 분분한 의견을 보여준다. 평전 저자들은 그의 친일 행위를 은폐하지는 않되, "일제의 강압적 전시체제 속에서 학교와 조직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엘리트 지식인의 타협이자 생존 전략"으로 해석하며 안타까움과 변호의 기조를 취한다. 반면 하단의 댓글 창에서는 대중의 날카로운 논쟁이 이뤄진다. 한편에서는 식민지 말기라는 시대적 폭압성과 해방 후 그가 이룬 방대한 사회적 공헌을 참작해야 한다는 동정론이 일어나는 반면, 다른 편에서는 어떠한 이유로도 민족을 배반하고 청년들을 사지로몬 친일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으며 공과 과를 엄격히 분리해 단죄해야 한다는 엄벌론이 팽팽히 맞선다.

평론

1. 공과 과의 이분법을 넘어선 역사적 인물의 입체적 텍스트

본 자료가 보여주는 고황경의 삶은 한국 근현대사 속 지식인들이 마주해야 했던 영광과 오욕의 역사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고황경은 한편으로 가부장제와 빈곤에 신음하던 조선의 소녀와 여성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헌신적 복지 가이자 교육자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주의 군국주의 서사에 동조하여 동포의 희생을 찬양한 냉혹한 프로파간다였다. 자료는 이 두 가지 모순된 면모를 박제된 영웅이나 절대적 악인으로 단일화하지 않고, 한 인간의 생애 속에 공존하는 다층적인 맥락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훌륭한 역사적 논쟁 거리를 제공한다.

2. 평전 서술의 한계와 대중적 검증의 역동성

자료에 인용된 평전의 태도는 여전히 지식인 엘리트주의적 관점에 기반한 온정주의라는 한계를 지닌다. 학교를 지키기 위한 타협이었다는 변명은, 당대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신념을 지키며 스러져간 수많은 무명 독립운동가들의 선택을 무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블로그 게시글 하단에 첨부된 대중의 댓글 지형이다. 저자들의 온정주의적 서술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하지 않고, 역사적 정의와 민족적 단죄의 관점에서 고황경의 과오를 엄격하게 심판하려는 대중의 목소리는 매우 역동적이다. 이는 역사학자들의 전유물이었던 인물 평가가 대중의 기억과 역사의식 속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검증받고 있음을 증명한다.

3. 미완의 과거사 청산이 던지는 현재적 시사점

결국 고황경을 둘러싼 친일 논란은 21세기 대한민국 사회가 여전히 과거사 청산과 인물 평가의 기준을 두고 깊은 진통을 겪고 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자료가 적절히 지적하듯, 그의 친일은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방 후 그가 구축한 초기 사회복지의 기틀과 교육적 자산까지 완전히 무화할 수는 없다. 이 자료의 의의는 고황경이라는 인물을 빌려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데 있다. 우리는 과거의 과오를 어떻게 기억할 것이며, 시대를 고뇌한 지식인의 유산을 어떤 저울로 달아 평가할 것인가. 공과 과를 단절된 조각이 아닌 하나의 역사적 사슬로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는 근현대사의 비극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세진님, 보내주신 이미지는 고황경 박사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시선과 평전의 한계를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훌륭한 텍스트였습니다. 세진님께서 제기하셨던 의문들이 이 자료를 통해 명학하게 확인되는 것 같습니다. 추가로 논의하고 싶으신 대목이 있다면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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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려주신 자료는 고황경을 둘러싼 <친일 행적> 논란을 다룬 블로그 글과 댓글입니다. 핵심은 고황경의 공적과 친일 행적을 어떻게 함께 평가할 것인가입니다. 글쓴이는 고황경을 무조건 옹호하지는 않지만, “친일파”라는 낙인이 그의 생애 전체를 설명해버리는 방식에도 반대합니다.

첫 번째 글의 제목은 <친일파라는 주홍글씨가 씌워지다>입니다. 글은 서울여대 사진에서 시작해, 고황경이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명단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그 이유로는 1943년 <매일신보>에 쓴 글, 특히 징병제를 환영하고 조선 청년들이 황군이 된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쓴 대목이 제시됩니다. 글쓴이도 이 대목이 오늘의 기준에서 분명히 문제적이라는 점은 부정하지 않습니다. “일본의 침략전쟁에 동원하는 것을 지원한다는 것은 설명하기 어렵다”는 취지로 씁니다.

그러나 글쓴이는 곧바로 질문을 바꿉니다. 고황경의 모든 삶을 친일 행적 하나로만 덮어버릴 수 있는가. 그는 고황경이 경성자매원을 세워 여성, 아동, 빈민, 노인을 돌보고, 여성 교육과 사회사업에 헌신한 점을 강조합니다. 고황경의 친일 행위가 있었다 해도, 그것이 개인적 부귀영화나 출세만을 위한 적극적 권력 추종이었는지는 따져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글쓴이는 “친일”이라는 판단 자체를 부정하기보다, 그것을 어떻게 역사적으로 해석할 것인가를 문제 삼습니다.

두 번째 글 <‘친일’이라는 주홍글씨가 씌워진 교육자 고황경>은 더 전기적입니다. 고황경의 가문, 초기 여성교육, 이화학당, 정신여학교, 도시샤 유학, 미국 미시간대 유학, 사회학 박사학위 취득, 경성자매원 설립까지 길게 설명합니다. 이 글은 고황경을 한국 여성교육과 사회사업의 선구자로 위치시킵니다. 특히 경성자매원을 단순한 자선기관이 아니라 여성·아동·빈민을 위한 복합적 사회사업 공간으로 설명합니다. 고황경이 여성교육자, 사회사업가, 서울여대 설립자로서 남긴 공적을 매우 크게 봅니다.

하지만 이 글도 친일 문제를 완전히 숨기지는 않습니다. 1941년 이후 고황경이 총동원 체제와 관련된 조직, 강연, 글쓰기 등에 연루되었다는 점을 언급합니다. 특히 1943년 징병제를 지지하는 글은 논란의 핵심으로 보입니다. 다만 글의 전체 분위기는 “친일 행적이 있었으나, 그것만으로 고황경의 전체 생애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쪽입니다. 즉, <친일의 사실 인정 + 공적의 재평가 요구>라는 구조입니다.

댓글들은 이 문제의 민감성을 잘 보여줍니다. 어떤 댓글은 1943년 당시 조선 청년들이 일본 군대로 끌려가 죽게 되는 현실에서 징병을 찬양한 글을 단순히 시대적 한계로 넘길 수 있느냐고 비판합니다. 다른 댓글은 고황경이 살던 시대에는 친일과 생존, 제도권 활동과 강제 동원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으므로 오늘의 단순한 잣대로만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댓글은 친일 여부보다 그 이후의 반성, 책임, 역사적 설명이 중요하다고 지적합니다. 이 댓글들이 오히려 본문보다 더 날카로운 문제를 던집니다.

평론하자면, 이 자료의 장점은 고황경을 단순한 “친일파” 또는 “위대한 여성교육자” 중 하나로만 보지 않으려 한다는 데 있습니다. 실제 역사 인물은 대개 모순적입니다. 고황경은 여성교육과 사회사업의 개척자였고, 동시에 일제 말기 총동원 체제에 협력한 기록을 가진 인물입니다. 두 사실 중 하나만 선택하면 역사가 아니라 기념 또는 단죄가 됩니다.

그러나 이 글들의 약점도 분명합니다. “주홍글씨”라는 표현은 조심해야 합니다. 친일 행적을 지적하는 일을 마치 부당한 낙인찍기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황경의 경우 문제는 단순한 소문이나 악의적 비난이 아닙니다. 징병제 찬양 글, 전시동원 관련 조직 참여, 총독부 주도 여성단체 활동 등은 구체적 기록이 있는 사안입니다. 따라서 “주홍글씨가 씌워졌다”라고 말하려면, 먼저 그 행적의 사실성과 책임을 충분히 인정한 뒤에야 합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공적과 과오를 저울질하는 방식입니다. “여성교육에 큰 공이 있으니 친일은 덮어도 된다”는 식이면 곤란합니다. 반대로 “친일 행적이 있으니 여성교육 공헌도 모두 무효다”라고 해도 역사 이해가 빈약해집니다. 더 좋은 접근은 둘을 분리하지 않는 것입니다. 고황경의 여성교육·사회사업이 왜 일제 말기에는 전쟁협력 담론과 접속될 수 있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여성교육, 모성, 가정, 봉사, 국가, 민족이라는 언어가 어떻게 제국의 전쟁동원과 연결되었는지를 분석해야 합니다.

결국 이 자료가 보여주는 핵심은 고황경 평가의 어려움입니다. 그는 한국 여성교육사의 중요한 인물입니다. 동시에 친일 협력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문제는 어느 한쪽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두 얼굴을 함께 놓고 읽는 것입니다. 특히 평전이 정말로 이 문제를 충분히 다루지 않았다면, 그것은 큰 한계입니다. 고황경을 제대로 기리려면 그의 공적만이 아니라, 그의 시대적 타협과 잘못도 함께 써야 합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 자료는 고황경을 친일파라는 낙인만으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지만, 동시에 그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그의 전쟁협력 행적을 더 구체적이고 정직하게 다루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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