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18

반전의 시대 | 이병한 | 알라딘 2016

반전의 시대 | 이병한 | 알라딘
반전의 시대 - 세계사의 전환과 중화세계의 귀환
이병한 (지은이)서해문집2016-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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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단언컨대 지금은 'G2시대' 혹은 '중국 패권의 시대'가 아니다. 미국에서 중국으로 패권이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패권적 세계체제 자체가 끝나가고 있다. 중국만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부상과 더불어 인도와 이슬람 등 지역 세계들이 약진하고 있다. 이는 동/서와 고/금이 크게 반전(反轉)하여 세계가 근대 이전, '유라시아의 초기 근대'로 회생하는 과정이다. 지금은 바야흐로 '반전의 시대'이다.

저자는 중국, 일본, 홍콩, 대만, 오키나와, 티베트, 신장, 광둥, 베트남, 러시아 등 유라시아 지역의 정치와 근현대사를 탈근대적 시각으로 재해석하여 '반전의 시대'적 기운을 입증한다. 그리고 새 시대를 준비할 새 논리로 천하(天下), 덕치(德治), 동학(東學)을 제시한다. 동시에 서방에서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동방의 옛 질서에서 미래의 대안을 찾는 이때, 한반도만이 유독 식민지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과거와 단절된 자기소외의 자충수를 두고 있음을 꼬집는다.

전통에 무지한 채 근대화로만 내달렸다는 점에서 좌/우 모두 무능했음을 역설하며, 새 시대에는 좌우 합작뿐 아니라 동서 합작, 고금 합작이 절실하다고 호소하는 젊은 역사학자의 메시지는, 40여 년 전 한반도의 시대인식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선사했던 리영희 선생을 향한 오마주-'반전시대의 논리'이기도 하다.


목차


여는 글 전환시대에서 반전시대로 12

1부 천하 : 중화세계의 논리

01 천하와 복합계 23
UN과 天下 | 천하와 복합계 | 부강과 건강

02 진화하는 일국양제 _홍콩 31
홍콩의 선택 | 진화하는 일국양제

03 제국의 진화 _대만 37
남북과 양안 | 제국의 진화 | 백년대계

04 오키나와에서 류큐로 _오키나와 45
복귀, 반환, 재병합 | 국제질서와 중화질서 | 오키나와에서 류큐로

05 오래된 미래 _티베트 54
근대의 독배 | 전장과 시장 | 연기(緣起)와 네트워크

06 두 개의 하늘 _신장 62
조화사회 | 조화세계 | 천주와 천하

07 네트워크 경제 _광둥 70
광둥 모델 | 광둥 네트워크 | 네트워크 경제 | 껍데기는 가라

08 ‘문명의 충돌’ 77
임진년 영토대란 | 미일안보조약과 중일공동성명 | 탈중화 vs 재중화

09 대동아와 대중화 _일본 84
전쟁의 이름, 이름의 전쟁 | 대동아의 논리와 심리 | 대동아와 대중화 | 포스트-대동아

10 붉은 제국 _인도차이나 94
대남제국과 인도차이나 | 코민테른과 인도차이나 | 붉은 대남제국

11 동방의 무인 _베트남 100
붉은 나폴레옹 | 1975 : ‘동방’에서 ‘동구’로 | 도이모이 : 다시, ‘동방’으로

12 ‘만달라’ 질서 _아세안 109
인도차이나와 아세안 | ASEAN Way | 만달라의 환생 | 대승(大乘)적 뉴에이지

13 유라시아와 북방 _러시아 118
유라시아주의 | 제4의 정치이론 | 북방과의 재회

14 구세계의 갱신 125
성(盛)과 쇠(衰) | Renewal : 신세계와 구세계 | 왕도와 패도

15 미국식 조공 체제? 133
역사의 환생 | 대분단체제, 샌프란시스코체제, 미국식 조공 체제| 이론(Theory)과 사론(史論)

16 중화세계의 근대화 139
중화세계의 문명화 | 중화세계의 근대화-제국주의와 반제국주의 | 반정(反正)과 경장(更張)

17 재균형 : 남해(南海)와 동해(Biển Đong) 147
내인(內因) : 계급과 성별 | 외풍(外風) : 축의 이동 | 재균형 : 비정상의 정상화

18 재균형의 축 (1) : 실크로드 157
중원과 서역 : 오프라인 실크로드| 푸사와 한자 : 온라인 실크로드| 평평한 세계 : 비정상의 정상화

19 재균형의 축 (2) : 유라시아 166
북방과 서부 | 우크라이나 : 카인과 아벨| 고금(古今)의 재균형

20 재균형의 축 (3) : 브릭스 176
페레스트로이카 | 금융 재건 | 지리 재편 | 국가 개조

21 유라시아의 세기 185
유라시아의 대륙풍 | 일대일로(一帶一路) | 동/아시아와 동/유라시아

2부 덕치 : 동방형 민주정치의 논리

01 정치유학 : 제국의 정치철학 193
유학 르네상스 | 제국의 정치철학 | 민주주의의 민주화

02 동양 전제와 동방 민주 201
서구 민주 | 동양 전제 | 계약과 향약 | 동방 민주

03 정치와 덕치 209
정의와 공정 | 자유주의와 공화주의 | 새 정치와 옛 정치

04 혁명에서 자강으로 _중국 218
보시라이 이후 | 문혁이라는 유령 | 중국의 고뇌

05 중국공산당 : 거대한 학습조직 _중국 225
시진핑 시대 | 중국공산당 : 혁명당에서 집정당으로 | 당교 체제 : 거대한 학습조직| 정치 개혁 : ‘중국화’

06 아베 신조 : 반동과 반전 사이 _일본 232
오래된 전후(戰後) | 진보와 진화 | 보수의 품격

07 오사카 : 일본의 갈림길 _일본 239
‘하시모토 현상’ | ‘무엇을 할 것인가’ | 오사카와 도쿄 | 오사카-아시아 네트워크

08 현자생존 _캘리포니아 248
똑똑한 정치 | 현자생존

09 영묘와 문묘 _베트남 254
동구와 동방 | 좌/우와 문/무

10 지엠을 위한 변명 _베트남 261
후에 : 위대한 유산 | 가지 못한 길 | ??i m?mi : 更張

11 표류하는 대만 민주 _대만 270
대만 민주의 곤경 | 탈냉전과 후기 냉전 | 대만 민주의 출로

12 중국몽과 민주몽 _홍콩 277
일국(一國)인가, 양제(兩制)인가? | 민주화와 탈중국화 | 중국몽과 민주몽

3부 동학 : 서학을 품어 동학으로, 새 학문의 논리

01 제국의 귀환 287
제국과 탈제국 | EU와 중국 | 동학으로의 회심

02 동학 : 2014, 갑오년 역사논쟁 293
좌(Left)와 우(Right) | 신(新)과 구(舊) | 고(古)와 금(今) | 동(東)과 서(西)

03 동아시아학 : 동북아와 동남아 301
베트남과 일본 | 지정학, 지경학, 지문학

04 동아시아 문명 : 개화와 심화 307
꾸억 응우와 국어 | 개화와 심화

05 동아시아사 : 1894, 동학과 서학 314
동아시아사와 동아시아론 | 동서냉전, 중소분쟁, 북조선 | 탈중화와 재중화 | 1894, 동학과 서학

06 동방 사상과 지구 이론 323
포스트 민주주의 | 실력주의 | World Wide Web : 一卽多 多卽一 | 동학(東學) : 미래학

07 기우뚱한 분단체제 331
흔들리는 분단체제 | 기우뚱한 분단체제 | 동아시아 분단체제 | 유라시아의 길

08 태평양 : 리오리엔트 341
환태평양학 | ‘태평양’의 계보 | ‘태평양 세계’ | 리오리엔트(ReOrient)

09 포스트 3. 11 _일본 351
갈림길에 선 일본 | 중국화하는 일본? | 중국화 : 서구화 : 에도화| 탈중국화 : 신중국화

10 악우(惡友) : 천 년의 유산 _일본 359
속국 | 천하와 천황

11 황제와 천황 _일본 364
교토와 천황 | 황제와 천명 | 천명과 민주

12 동방의 귀환 _중국 370
고별 ‘근대’ | 백년의 급진 | 동방의 귀환

13 ‘중화’와 ‘진보’ _중국 376
진보의 역설 | 신중국의 역설 | ‘중화’의 역설

14 왜 유라시아이고, 어째서 ‘초기 근대’인가 383
재/발견의 시대 | 초기 근대와 앙시앙레짐 | 새 동학

닫는 글 ‘다른 백 년’, 대반전의 길을 묻다 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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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첫문장
계사년(癸巳年, 2013)이 밝았다. 허나 동아시아는 밝지 못하다.



P. 83 동아시아에는 ‘보통국가’가 하나도 없다. 중국은 천상 제국이다. ‘독립국가’도 드물다. 한국은 전시작전권이 없고, 일본은 국방군이 없다. 도리어 ‘중화 사회주의권’에 편입되었던 북조선과 베트남이 주체적이다. 소련의 동유럽 위성국가들과도 판이하며 미국의 하위 동맹국들과도 다르다. 독립하지 않고도 자주적일 수 있었던 중화질서의 오랜 유산이다. 그리하여 동아시아는 지금도 제국(중국), 열도국가(일본), 분단국가(남/북한), 도시국가(홍콩/마카오), 도서국가(대만/오키나와) 등이 도열해 있는 모자이크이다. 국민국가의 단순계(inter-state system)가 아니라 복합계(complexity systems)인 것이다. 다소 과장을 하자면 동아시아는 결코 ‘근대’였던 적이 없다. 접기
P. 174 각각의 사회는 독립하고 있지만, 동시에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 옛말로는 ‘대일통’(大一統)일 것이며, 20세기 용법으로는 차서(差序) 혹은 복합사회, 최신 용어로는 트렌스-시스템 사회(trans-systemic society)라고 하겠다. 국가의 (새) 원리와 일선을 긋는 제국의 (오래된) 원리이다. 유라시아의 세기로의 반전은 국가별로 각개약진하던 20세기로부터 문명권적 공속감을 바탕으로 한 제국형 옛 질서의 가치와 미덕을 재음미해보는 기회를 제공해줄 것이다. 국가 간 경쟁을 억제함으로써 자연적/사회적 비용을 낮추고 엔트로피를 줄이는 역할을 했었기 때문이다. 내 나라의 다스림[治國]만큼이나, 천하를 염려했던 마음[平天下]이 균형추로서 작동했었다. 아니, 천하의 태평을 통해서만이 내 나라 또한 건재할 수 있었다. 유기론적(organic) 세계이자, 연기(緣起)론적 세계였다. 접기
P. 199 민주주의가 번영을 낳았다는 통설은 기각되고 있다. 민주주의를 지속하면서도 ‘선진국’들은 쇠퇴일로이다. 민주주의 때문이 아니었다. 제국주의, 식민주의 탓이었다. 민주주의는 덤이었을 뿐이다. 전 지구적 비민주가 국지적 민주를 가능케 했다. 전 지구적 민주가 증진되자 비교우위가 사라진 것이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개개인의 욕망 충족에 충실한 과잉 성장 문명의 정치질서이다. 산업혁명 이래의 특수한 사회적 조건에 즉응한 제도적 산물인 것이다. 그러나 지난 150년의 잔치가 더 이상 지속불가능한 ‘예외 상태’였다면? 저성장과 탈성장의 ‘자연 상태’로 되돌아간다면? 미래는 알 수가 없다. 미지의 세계이다. 그래서 민주의 신화를 해체할 필요가 있다. 접기
P. 208 ‘민주’라는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다. 서구 민주(democracy)가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민주화해야 한다. 동방에도 천 년을 내려온 민주(民主)가 있었다. 그 요체는 다수결도, 1인 1표제도 아니었다. 성인(聖人)이 될 자격을 만인에게 허락한 것이었다. 인성을 갈고 닦으면 천성이 발현될 수 있다는 복음의 전파였다. 출신과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가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만민 평등의 파격이었다. 그리하여 외적 성장이 아니라 내적 성숙을 향해 들끓었다. 그래서 ‘정치’(politics)보다는 ‘덕치’(德治)가 한층 심화되었다. 이제는 정치와 덕치도 견주어봄 직하다. 서구에 대한 열등감 없이도 양자의 대차대조표를 따져볼 수 있게 되었다. 접기
P. 299 소학(小學)은 무너졌다. 사람의 도리를 가르치지 않는다. 대학(大學)은 시시해졌다. 치국과 평천하를 배우지 않는다. 민도는 민도대로 떨어지고, 자질과 자격을 갖춘 지도자도 키우지 못한다. 군자가 사라지자 소인천하가 도래했다. 대중사회라고도 한다. 소인들이 1인 1표제와 접속하자 정치는 저열해졌다. 권력만 남고, 권위는 사라졌다. 삿된 권리 추구[私]가 공공성[公]을 잠식해버렸다. 그래서 한 원로 정치학자의 일갈처럼,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는 질적으로 나빠졌다.’ 그리고 스노비즘(snobbism)이 창궐한다. 허나 이 속물근성이 비단 ‘97년체제’만의 산물은 아니지 싶다. 줏대 없는 개화 백 년의 누적이고 축적이다. 접기
P. 310~311 박정희는 저격되었지만 그 후예들은 나고 자랐다.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1987년 민주화를 이끈 ‘386세대’를 말한다. 이들은 60년대 ‘조국 근대화’의 물결에서 태어나, 70년대 한글 전용 교육을 받고, 80년대 대학을 다녔다. (…) 한학(漢學)과 전면적으로 단절된 첫 세대, ‘신청년’이었다. 그들도 ‘민주선생’을 모시고, ‘과학선생’을 섬겼다. (사회)과학적 지식으로 중무장한 그들은 해외파는 PD로, 토착파는 NL로 갈라섰다.
신청년 가운데 일부는 90년대 학위를 받고 2000년대 학계에 진출했다. 그러면서 ‘식민지 근대론’이 번성했다. 선생들이 주장했던 ‘내재적 발전론’을 부정했다. ‘실학’에서 근대성의 흔적을 발견하고, 조선 후기에서 자본주의 맹아를 찾으려던 시도는 기각되었다. 옳은 말이다. 식민지 열등감의 발로였다. 그러나 또 다른 편향이 돌출했다. 과거와는 담을 쌓고 벽을 쳤다. 관심과 시야가 좀체 20세기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일본의 흔적을 찾고 수집하기에 바쁘다. 자연스레 일어 근대, 한글 근대에만 몰두한다. 모든 게 이 무렵 ‘발명’되고, ‘탄생’하고, ‘창조’되었다고 한다. 20세기는 19세기와 전혀 다른 ‘신천지’라는 것이다. 백 년을 과장하고 천 년을 좌시하는 습벽이 생긴 것이다. 그러할 수밖에 없다. 어학 능력이 원천 봉쇄되어 있기 때문이다.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했건만, 그마저도 갖추지 못했다. 한문은 과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박정희가 흠모했던 일본적 근대가 ‘식민지 근대’와 ‘번역된 근대’로 추인받기에 이른다. 탈식민은 재식민으로 굽어갔다. 이를 발판 삼아 뉴라이트도 등장했다. 접기
P. 329~330 동(아시아)학은 더 이상 동아시아에 대한 지식 생산에 그치지 않는다. 21세기 지구 문명을 재건하는 평천하(平天下)의 방편이다. 고로 동(아시아)학은 미래학이다. 옛 것을 익혀 새 천하를 일구는 새 천 년의 ‘실학’이다. 그러한 자각이 있어야 동방 문명을 독식하고 독점하려는 중국의 독선도 떳떳하고 꼿꼿하게 타박할 수 있다. 소국의 예로써 대국의 덕을 이끄는 것이다. 중국이 패도로 내달리지 못하도록 우리가 먼저 왕도를 내세워 압박하는 것이다. 접기
P. 380~382 그러나 ‘중화’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중국만의 것도, 한족만의 것도 아니다. 동방 문명의 정수를 일컫는 보편명사이다. 17세기 이래 동아시아는 저마다 중화를 자처했다. 그래서 혹자는 ‘중화사상 공유권’이라고도 했다. 중화를 일국으로 축소시킨 것이야말로 20세기의 착각이고 착시이다.
(…) 기실 ‘중화사상’, ‘중화주의’라는 조어 자체가 20세기의 산물이다. -ism의 번역투이다. 19세기까지의 문헌 어디에도 저런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허면 언제 등장했을까? 1930년대이다. 누가 만들었을까? 일본이다. 제국일본에서 ‘발명’된 신조어이다. 왜 생겨났을까? 일본의 대륙 침략에 항전하는 중국을 폄하하기 위해서이다. 지나 놈들은 국·공을 막론하고 중화주의, 중화사상에 찌들어서 ‘근대’ 일본에 저항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일본은 과연 ‘근대’적이었다. 조선의 ‘독립’을 나서서 부추겼다. 상부상조하던 중화세계에서 떼어놓아 홀로 설 것을 재촉했다. 그래야 식민지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백 년 조선의 망국 앞에 ‘독립’이 있었음을 서늘하게 기억하자. 실로 독립협회 주역들의 행보들도 석연치가 않다. ‘중화주의’라는 신생어의 탄생과도 깊이 결부되어 있는 이 심란한 사정 또한 필히 기억해둘 일이다. 접기


추천글
근대의 덫에서 벗어난 새로운 관점이 여러 방향에서 떠오르고 있다. 세계의 변화에 발맞추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도 이러한 방향으로 새로운 세계관을 빚어내는 일이 필요하다. 나는 이 관점을 한국근현대사의 흐름에 비추어 보았고, 이병한 선생은 시야를 넓혀서 동아시아 현대사, 나아가 유라시아 역사에 적용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 김기협 (역사평론가, 전 계명대 사학과 교수)

지난 100년간 우리는 서구의 근대가 씌워준 안경을 통해서 우리 자신과 세상을 볼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우리가 얻은 것, 우리에게 돌아온 것이 무엇인가? 정신적 폐허이다. 이 책의 저자는, 세계가 식민지 건설과 노예무역을 불러온 대항해 시대 이전으로, 그리고 동아시아는 아편전쟁 이전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마치 선승이 손을 들어 달을 가리키듯 일러주고 있다. 가리키는 손의 손가락 대신 달을 보아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

웅대하다. 대붕(大鵬)의 눈을 빌려 동서의 고금과 고금의 동서를 일목요연하려니 현기증이 날 만하다. 근대화의 독에서 벗어난 사람이라면, 사유의 지평이 흔들리고 인식세계에 반전의 기운이 움트는 경험을 할 것이다. 부디 많은 이들이 저자와 함께 읽기 바란다.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문명을 전망하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륙과 끊긴 분단체제의 소인배를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 홍세화 (장발장 은행장,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저자, 학습협동조합 ‘가장자리’ 이사장)

“우리는 또 하나의 새로운 젊은 시대를 살아갈 새로운 젊은이들, 또 하나의 신청년을 기다린다.” 여기 바로 그 신청년이 있다. 기성 입장에서는 이 책의 과감한 주장들이 일부 거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청년은 소수 입장에 서거나, 기성의 길 밖에서 길을 찾고, 새 길을 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미래는 바로 이러한 신청년들의 것이다. 꽉 막힌 현실에 답답증을 느끼는 많은 이들, 특히 이 땅의 청년 남녀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 김상준 (경희대 공공대학원 교수)




저자 및 역자소개
이병한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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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전3권)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개벽학은 동학 창도 이래, 이 땅의 자각적 사상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겠다는 뜻이다. 동녘의 오래된 유학과 서편의 새로운 서학이 합류한 문명의 융합을 거대한 뿌리로 삼는다. 그러함에도 한국학, 한 나라에...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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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중국 패권의 시대’라는 결정적 오해
패권이 중국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패러다임 자체가 반전하는 것이다
시대인식에 다시 한 번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올 개안의 유라시아사

시대를 앞서가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1974년 5월, 리영희 선생은 《전환시대의 논리》를 세상에 내놓으며 코페르니쿠스를 언급하였다. 역사를 앞서간 사람들은 늘 지탄받았고, 리영희 선생의 고단한 삶은 그들의 괴로움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여기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꾀하는 또 한 명의 지식인이 있다. 그는 지금이 ‘G2시대’ 혹은 ‘중국 패권의 시대’가 아니라고 목청을 높인다. 미국에서 중국으로 패권이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패권적 세계체제 자체가 끝났다. 그리고 새 시대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 동/서와 고/금이 크게 반전(反轉)하여 근대 이전, ‘유라시아의 초기 근대’가 회생한다. 그 미래는 낯설지 않다. 수백년 근대에 앞서 수천년을 지배해온 중화세계의 귀환이자 갱신이다…….
사방에서 눈을 흘긴다. 누가 철 지난, 그것도 사대주의적인 ‘중화’를 입에 올리는가? 또 중국의 시대가 아니라면서 중화세계가 돌아왔다는 건 무슨 궤변인지? 그는 열변을 토해낸다. 중화세계는 ‘제국주의’가 아닌, ‘제국’ 그 자체이다. 그 세계에서는 제국 아래 지역 간 교류와 유대가 활발했고, 사대(事大)뿐 아니라 사소(事小) 또한 중요했다. 한 나라가 일방적으로 지배하지 않는 다극화된 세계였다. 중국뿐 아니라 인도, 이슬람이 흥기하며 지역이 되살아나는 지금은 바야흐로 대반전의 시대. 귀환한 역사에 걸맞은 새 논리가 필요하다…….
이 책은 역사학자 이병한이 2012년부터 《프레시안》에 연재한 칼럼 ‘동아시아를 묻다’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패기 넘치는 소장학자답게 동서고금의 역사를 종횡무진, 거침없이 융합하여 시대인식을 뒤집는 파격적 사유를 선보인다. 이러한 파격은 그가 ‘주변부 콤플렉스’를 극복한 ‘관찰자’이기에 가능하다. 전후 세대도 80년대 세대도 아닌, 외환위기 이후 대학을 다닌 세대로서 식민지 왜소증과 좌우 이데올로기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으며 문화적 상대주의도 체화하였다.
또한 그는 대상을 밖에서 관찰하지 않고 그 안에 들어가 직접 체험하며 응시하는 내재적 접근방식을 취한다. 중국 상하이자오퉁대학교 국제학대학원, UCLA 한국학연구소 방문학자, 베트남 하노이 사회과학원 연구원, 인도 네루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연구원으로 공부한 후 현재는 유라시아 전역을 답사하며 견문기를 쓰고 있다. 남한이라는 국지적 공간에서 벗어나 8개국어에 달하는 언어를 익히며 현지 지식인들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중심/주변, 제국/식민이라는 편견을 깨고 한반도, 동아시아를 넘어 유라시아 지평에서 사유하는 안목을 배웠다.
속박과 편견에서 자유로운 학문적 태도는 자연스레 탈식민주의적 글쓰기로 이어졌다. 기성세대 입장에서는 다소 서운(?)하게 들릴 수도 있는 그의 발화는 그러나 분명 또렷하고 균형감각이 생생한 외침이다. 한반도는 또 한 명의 코페르니쿠스를 놓치지 않을 수 있을까. 다행히 먼저 그를 알아본 선학(先學)들이 있다.

중화질서에 대한 오독과 오해

‘중화세계가 귀환’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저자는 G2로서의 중국과 중화세계의 제국으로서의 중국을 구별한다. 우선 중화세계와 제국에 대한 오해부터 풀어두자. 실제 중화세계는 다극화된 세계였다. 중국과 조선, 일본, 베트남뿐만 아니라, 류큐, 대만, 홍콩, 티베트, 신장 등 국가가 아닌 다양한 정치 구성체들까지 유기적으로 작동하던 ‘복합계’였다. 사대-사소-교린은 상대적 질서였고, 중국이라는 제국 아래 각 공동체는 차등적 의례 속에서 공존하였다. ‘제국’은 ‘제국주의’와 다른 말이었다.
저자는 홍콩, 대만, 오키나와, 티베트, 신장, 광둥, 인도차이나, 베트남, 아세안, 러시아까지 유라시아 지역의 근현대사를 두루 살피며 오독된 중화질서의 본모습을 드러낸다. 대표적인 예로 대청제국과 티베트의 관계를 들 수 있다. 대청제국 시절 북방에서는 중원과 달리 토착 지배자를 통한 간접 지배가 행해졌다. 물론 베이징에 번부를 관리하는 이번원(理藩院)을 두었고, 번부에 중앙관료를 파견하기도 하였으나 어디까지나 ‘관리’의 차원이었지 ‘통치’의 차원은 아니었다. 티베트는 지역의 승려가 지배했고 티베트 불교는 독자적인 문화로 보존되었다. 심지어 대청제국의 지배층은 티베트 불교 신자였고, 강희제의 무덤은 오로지 티베트어로만 기록되었다. 제국 아래 중국과 티베트는 공존하였고, 대국과 소국 간 ‘사대’(事大)의 질서만큼 ‘사소’(事小)의 존중도 살아 있었다.
오히려 제국주의와 패권주의는 중화질서가 아닌, 서구 근대질서의 논리였다. 티베트가 왕년에 누리던 고도의 자치와 자율을 상실하게 된 것은 청일전쟁(1894) 즈음이다. 근대를 몸에 익힌 일본이 ‘조공국’ 조선은 ‘자주적’이고 중국의 ‘속국’이 아니므로 일본의 식민지로 삼을 수 있다는 논리를 편다. 그러자 청조 역시 티베트의 자치를 허락하기 어려워졌다. 더 많은 조공국과 번부를 잃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이때부터 중국 또한 중화질서를 버리고 근대국가의 논리에 편승하며 패도를 부리기 시작한 셈이다. 이후 티베트는 독립을 꾀하는 ‘냉전의 전사’이자 ‘평화의 사자’로 비춰지게 된다. 양자 간 공존의 역사는 잊혀지고 피의자 중국과 피해자 티베트만 남았다. 이를 배후에서 연출한 것은 미국이었다.

근대가 씌운 안경을 벗고 대반전의 시대로

중화질서를 근대질서와 저울질하며 저자가 던지는 질문의 핵심은 이것이다. 우리가 합리적이라 맹신해온 서구 근대질서는 과연 그 이전의 질서보다 유능한가? 진정 ‘진보’적인가?
근대는 자유, 평등, 독립, 성장, 발전을 내세우며 모든 공동체를 ‘국가’로 ‘독립’시킨 후 규모와 문화, 풍속의 차이를 무시한 채 한 경기장에 몰아넣었다. 그리고 서양 강대국을 기준 삼아 ‘만국이 만국에 투쟁’하게 했다. 그렇게 전 세계적 ‘전국시대’가 열렸고 그 결과가 바로 우리가 목도하는 지금의 세계다. 거대자본은 시민을 착취하기 시작했다. 체제 유지의 기회비용을 외부화할 공간(식민지, 자연)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개개인의 욕망에만 충실한 과잉 성장 문명의 질서로 전락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로 대표되는 서구 근대 문명은 폐해만 남긴 채 임계점에 다다랐다. 2001년 9.11과 2008년 금융위기, 2011년 3.11은 비로소 근대가 끝나가고 있음을 증거했다.
따라서 지금의 시대 변화를 G2, 즉 미국에서 중국으로의 패권 이행기로 오독해서는 곤란하다. 근대질서의 논리를 그대로 계승하는 G2는 전형적인 미국발 담론이다. 실상은 미국의 단일 패권이 복수의 지역대국이 경합하는 다극화 세계로 전환하는 것에 가깝다. 중국의 부상과 더불어 인도와 이슬람 등 지역 세계들이 약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 질서를 거스르며 재등장하는 지역 세계들이야말로 근대 문명의 종언을 증언한다. 물론 그 선두에 중국이 있으나, 그 역할은 패권국이 아닌 사소(事小)의 예를 갖춘 제국이며 그래야만 한다.
시대가 근대 이전으로 크게 반전한다. 그 모습은 누천년 중화세계의 형상을 닮았다. 저자는 이 시대를 ‘반전(反轉)의 시대’라 명명한다.

새 시대의 논리 - 천하, 덕치, 동학
비자본주의적 대안세계를 실현할 웅대한 상상력

새 시대에는 새 논리가 필요하다. 기존 질서의 관점으로 보아서는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다. 한계에 다다른 신자유주의가 패악을 부리는데도, 모두가 아래로 아래로 착취하며 버티는 이유는 달리 출구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식의 지평을 넓힐 것을 권한다. 근대라는 찰나의 안경을 벗으면, 누락되고 오독되어온 역사가 다시 읽히고 다른 방면의 출로가 보인다. 저자가 ‘오래된 미래’에서 찾은 새 시대의 논리는 천하(天下), 덕치(德治), 동학(東學)이다.
1부 천하에서는 중화질서와 현 국제질서의 대차대조표를 그려본다. 복수성과 다원성을 아우르며 상호 의존했던 동아시아 옛 질서에 주목하여 독립·주체․자주만을 내세우는 ‘국민국가’ 간 세계체제의 한계를 살펴보는 한편, 활발히 되살아나는 지역 세계들로부터 중화질서의 귀환을 증명한다.
2부 덕치에서는 동방 정치의 이상(理想)에 비추어 서방의 민주주의(democracy)를 점검해본다. 스포츠 못지않은 대중문화가 되어버린 선거 제도는 과연 ‘민주’(民主)적인가? ‘그들만의 리그’라는 점에서 ‘패도 정치’에 더 가까운 현 체제에, 보다 현실적이고 책임감 있는 ‘왕도 정치’의 프레임을 제안한다.
3부 동학에서는 서구 학문에 크게 치우쳐 있는 학계 전반에 균형감각을 요청하며, 동방과 서방의 학문을 아울러 ‘미래학’을 도모한다. 그리고 그 미래학의 태도를, 개화파의 서학에 굴복하지 않고 위정척사의 유학을 고수하지 않으며 내재적 발전을 일구었던 1894년의 동학(東學)에서 찾는다.

콤플렉스와 자기소외를 넘어

이미 중화 사상과 신유학에 대한 연구는 세계적인 트렌드가 되었다. 서방이 ‘대안으로서의 동아시아’에 주목하는 가운데 유독 한반도만 시큰둥하다. 깊이 박힌 식민지 콤플렉스, 과거와 단절된 자기소외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전통 문명을 천시하는 자충수를 둔 것은 좌/우가 매한가지였다. 둘 다 서구 근대를 전범으로 삼으며 우는 산업화로, 좌는 민주화로 ‘근대화’의 대서사를 공유했다. 전자가 ‘시장만능주의’에 일본과 미국을 섬긴다면, 후자는 ‘민주만능주의’에 동구와 서구를 흠모한다는 데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그 뿌리는 깊고 오래되었다. 청일전쟁(1894)을 전후하여 ‘사대주의’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중일전쟁(1937) 전후로는 ‘중화주의’라는 신조어도 등장했다. 일본에 의해서였다. 이전에는 없었던 말이다. 전자는 조선에 책임을 전가했고, 후자는 중국의 저항을 겨냥했다. 가장 먼저 근대화의 길을 밟아 동아시아 전체를 식민화하려했던 제국주의 일본의 시선이었던 것이다.
35년 식민지의 충격 속에 앞다투어 근대화로 내달려 도착한 시대는 아뿔싸, ‘서구의 황혼’이다. 겨우 따라잡았나 했더니 근대 문명 자체가 저물고 있다. 새로운 ‘반전의 시대’ 앞에서 좌/우 모두 북극성을 잃고 갈피를 못 잡는다. 백 년의 근대에만 집중한 나머지 천 년의 역사에 무지했기 때문이다. 진보를 자임할수록 전통을 모른다. 옛 길을 모르니 새 길도 제시할 수 없다. 그래서 힘을 잃었다.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에는 좌우의 날개가 필요했다. 그러나 한반도는 그 기회를 잡지 못했다. ‘반전시대’에는 좌우 합작만큼이나 동서 합작, 고금 합작이 긴요하다. 우리의 할 일은 도끼로 제 머리를 깨는 고통을 인내하는 것이다. 신처럼 모셨던 진보와 민주의 환상으로부터 개안(開眼)하는 일이다. 새 시대를 새 눈으로 알아보고 재차 실기(失期)하지 않는 것. 한반도가 역사로부터 배우고 행해야할 가장 큰 과제이다. 접기



젊은 학자의 패기넘치는 글, 그 아찔함에 어질머리가 난다!
2016-09-28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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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인가 법고창신인가





우리의 삶은 서양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장 내 몸에 걸친 것들을 살펴 보면 옷, 신발, 모자, 시계, 목걸이 할 것 없이 불과 120여년 전에 처음 이 땅에 들어온 것들 투성이다. 가마를 타던 이 땅의 사람들이 지금은 서양에서 처음 만든 자동차를 타고 있다. 구멍을 다섯 개 뚫은 한지로 된 책들은 이제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다. 천 년 이상 한문으로 된 문장으로 의사를 전달하고 자신의 사상을 펼쳤지만 그 후손들인 우리들 대부분은 그것을 소리내어 읽어내지도 못한다. 신기한 것은 이렇게 전방위적인 전통의 단절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잘먹고 잘사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 모든 사태의 출발점은 ‘서세동점’이라는 근대사의 엄청난 사건에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500년간 이 땅에 살던 최고 엘리트들이 평생을 걸고 연구했던 유학은 일시에 야만의 대표성을 띠고 우리의 머릿속에서 잊혀졌다. 잊혀지는 정도가 아니라 무슨 문제만 생기면 조상들이 미개하고 야만적인 유학에 정신을 파느라 개방이 늦어져서 그렇게 됐다는 성토가 정설처럼 받아들여진다. 거기엔 서양은 우월하고 동양은 열등하다는 오리엔탈리즘이 바탕하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서양화, 서구화를 향해 쉴새 없이 달려왔다. 90년대 중반에 한창 유행했던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라는 구호도 미개한 동양을 벗어던지고 앞선 서양 문명에 당당하게 동참하자는 외침으로 들린다. 정치 분야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87년 민주화 운동의 성공 이후 한국인들은 산업근대화와 정치민주화를 동시에 이루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 찼다. 이 역시 열등감에 근거한 서양 따라잡기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이병한 씨는 당당하게 민주주의는 인류의 종착역이 아니며 민주주의야말로 인류 전체 역사에서 아주 일시적인 예외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늘날 서구의 번영은 민주주의 때문이 아니라 식민지 지배와 그로 인한 약탈 덕분이었다고 강변한다. 그는 서구 민주주의가 그리스에서 아주 잠깐 꽃피웠다가 2,500년간 자취를 감췄었다는 사실과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가장 안정적으로 기능했던 정치체제가 천하에 기반한 중화질서였다는 점을 예리하게 끄집어낸다.


일관된 흐름으로 작성된 학술서적이 아니라서 독해에 어려움은 있었지만 이병한 씨의 주장을 아주 거칠게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중화질서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정치체제였으며 그것을 뒷받침한 유교 사상은 유럽에 전파되어 전제군주를 계몽군주로 뒤바꿀 정도로 콘텐츠 면에서 손색이 없었다. 다만 근대의 짧은 시기에 서양의 산업혁명은 백인에 의한 약탈 경제(자본주의)를 성립시켰고 그 약탈을 정당화하는 장치가 민주주의였을 뿐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인류의 종착역이 아니며 조만간 백인 중심의 약탈 경제의 붕괴와 함께 새로운 정치 체제가 등장할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경멸하고 무시해왔던 중화질서일 가능성이 크다.


일단 독자의 눈을 사로잡는데는 성공했다. 서양식 복장과 서양식 어휘, 서양 영화, 서양 음식, 서양 문자를 사용하고 있는 우리에게 그 미개하고 야만적인 중화질서가 다시 찾아온다니! 놀랠 노자다. 더구나 아시아 유럽을 넘나드는 저자의 활동 범위가 주는 설득력 또한 매우 크다. 중국의 양회가 열릴 동안 북경에 머무르고 있었다니!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미궁에 빠져드는 것 같은 기분을 준다는 점이다. 의문이 생길 때마다 연필로 필기를 하며 읽었지만 워낙 하나의 관련 논리들이 책 안의 이 글 저 글에 산재(散在)해 있고 논리 자체가 난마처럼 얽혀 있어서 독자로서 정확히 뭐가 문제인지 찾아내기 힘들었다. 처음엔 세 가지 큰 주제로 나누어 저자의 논리를 정리하고 그에 대한 나의 의문점이나 반박을 제시하려 했으나 두서없이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저자의 논리를 정리하는 일 자체가 고된 노동이 되고 말았다. 이것은 저자가 인터넷에 올린 글을 시간에 따른 순서를 무시한 채 주제별로 모아놓으면서 생긴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한 이유로 여기에선 민주주의에 관한 쟁점만을 대상으로 논의를 해보려 한다.



저자의 말대로 분명히 중화질서는 하, 은, 주 삼대 이래 아편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동아시아 지역에서 통용되었다. 민주주의의 역사는 그에 비하면 정말 일천한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사실로부터 ‘중화질서로 반전할 것이다.’ 혹은 ‘중화질서로 반전해야 한다.’는 예측이나 당위가 도출된다는 것은 나를 무척 당혹케 했다. 그런 식이면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만민평등사상이 역사에 등장한 건 불과 몇 백년 전이고 훨씬 더 오랜 기간 노예제가 존속했으므로 결국 인류는 다시 노예제로 돌아갈 것이다. 혹은 돌아가야 한다는 논리가 나와도 할 말이 없다. 오래되면 성공인가?


물론 저자의 논리는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보편적 민주주의란 것이 서구에 의해 만들어진 서구 우월주의의 한 돌출된 모습이라는 것과 근대 경제 발전은 사실 식민지 지배와 약탈 때문이지 민주주의와 필연적 관계가 없다는 지적은 따끔하게 느껴진다. 즉, 서양식 보편적 민주주의를 우리가 반드시 따라야 할 이유는 없으며 각 국가와 지역마다 역사적 맥락과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풍토에 맞는 복수의 민주주의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가지 측면에서 움츠러든다. 첫째, 그런 얘기는 왠지 익숙하다. ‘한국적 민주주의’. 바로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보편적)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과 학생에게 박정희는 유신 헌법을 내밀며 “이것이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강변했다. 사실상 변태적 강변이었다. 둘째, 민주주의가 보편성을 띠는 이유가 서양의 우월주의와 식민지 약탈 경제의 폭력성을 은폐하려는 목적을 띠었기 때문이라는 저자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보편적 민주주의엔 순기능이 있다. 바로 모든 인간은 동등하며 평등하다는 이상과 이념을 그 보편적 민주주의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저자가 혼동하는 것은 이상과 현실이다. 현실의 사태를 근거로 반전을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이상도 이야기해야 한다. 현실에 존재하는 민주주의가 진실로 자본주의 식민지 약탈 경제를 은폐하려는 목적이 있다고 해도 우리가 민주주의에서 희망을 거는 부분은 그러한 현실이 있지 않다. 오히려 민주주의의 가치는 그것이 지향하는 이상에 있다고 할 것이다. 비록 그 이상이 지금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라 하더라도 민주주의는 결국 모든 역사와 지역, 국가, 민족을 넘어서 하나의 형태로 드러나며 하나로 수렴된다고 말할 때 우리는 모든 인간이 과연 똑같고 동등하고 평등하구나! 라는 환희를 느끼게 된다. 저자는 그것을 저잣거리 개밥그릇 차버리듯이 가볍게 걷어 차버렸다.


저자가 중화질서로의 회귀(반전?)를 이야기하는 근거는 또 있다. 베스트팔렌(1648) 체제로 형성된 국제법과 근대적 주권 사상이 전세계에 폭력적, 일방적으로 적용되면서 국제질서가 국가간의 규모의 차이를 반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구 13억의 중국과 인구 2천만의 스리랑카가 주권 국가로서 대등한 권리를 행사할 때 여러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13억의 삶과 2천만의 삶이 동등하게 다루어지는 현실에 대해 저자는 부당함을 토로한다.


사실 분명히 생각해볼 문제이다. 국민주권시대라면 더 많은 국민을 가진 국가가 더 큰 주권을 갖는 게 맞는 것 같다. 특히 공리주의 관점에서 보아도 더 큰 국가에게 더 큰 주권을 인정할 때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에 부합할 것 같다. 그런데 그러한 문제점으로부터 “중화질서로의 반전”을 이야기하는 것은 넌센스다.


과거 봉건시대의 조공과 책봉의 관계는 왕조와 왕조 사이에서 이루어졌을 뿐 백성의 수와는 별로 상관이 없었다. 내가 보기에 중화질서를 떠받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백성의 수가 아니라 중국이 생산해내는 문화적 컨텐츠와 철학 사상인 것 같다. 물론 역사를 통틀어 중국이 주변국에 비해 월등히 인구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어떤 문헌에도 중국의 종주국 지위를 인구수에서 도출한 사례를 본 적이 없다. 중화와 야만을 가르는 기준이 인구수가 아닌 공맹의 도에 있었기에 조선의 사대부들은 소중화를 말할 수 있었다.


따라서 “중화질서로의 반전”을 말하려면 다시 중국의 문화 컨텐츠와 철학 사상이 세계 중심으로 우뚝 선다는 전제 조건부터 충족되어야 한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최근 중국 당국이 공자학당을 전세계에 세우고 유학을 국가적으로 연구 육성하려는 움직임이 잘 설명된다. 저자는 이 연결 고리를 아예 통째로 누락해 버렸다.


다시 저자의 주장으로 돌아가 보자. 나는 13억과 2천만의 삶을 1:1의 주권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혁신적인 주장의 바탕에 깔린 개인주의 사상을 읽어낼 수 있었다. 각 개인의 존엄함을 인정해야 13억이 2천만보다 더 비중이 크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저자는 역사 발전의 방향이 개인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는 통념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민주주의가 개인의 가치를 발견해내고 그것을 정치 시스템으로 구성해 내는 정치 이념이었다는 점만은 높이 평가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다양한 형태의 민주주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저자의 의견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것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지니려면 ‘개인’의 존엄함을 보장하는 정치이념이어야 한다는 최소한의 선언은 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선언이 이루어지는 순간 다양한 형태의 민주주의라는 말은 존재 의의를 상실한다. 그냥 개인의 권리와 의무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 체제를 민주주의라고 부르면 된다.


쉽게 말하면 저자는 의도한 것은 아닐지언정 자신이 인정하고 있는 개인의 가치와 존엄을 오늘날 현실에 살려놓은 정치체제가 민주주의라는 사실은 도외시하고 그것을 식민지 약탈 경제를 은폐하려는 도구인 것처럼 왜곡하려 시도했다. 보편적 가치인 ‘개인’을 인정하는 순간 역사와 지역을 반영한 다양한 민주주의 따위는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이슬람의 여성 매매를 문화라는 이름으로 긍정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정리하자면 저자의 말대로 오늘날 민주주의가 한계를 극복해 가는 과정에서 과거 동아시아에 존재했던 중화질서와 유사한 형태로 수렴될 가능성이 있다고는 해도 본질적으로 봉건 시대의 중화질서와 앞으로 찾아올 그것과 유사한 새로운 정치체제는 완전히 다르다. 저자의 오해를 여러 곳에서 숱하게 확인할 수 있었지만 여기서는 중요한 몇 가지만 언급하기로 한다.


가장 심각한 것은 저자가 유학의 여러 개념에 대한 철학적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수신제가(修身齊家)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이분법적으로 적용하여 개인과 사회를 구분한다. 이것은 서양 문화가 유입된 근대 이후의 독법일 뿐 결코 유학에서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다. 나는 가정의 구성원이자 국가와 천하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내 몸을 닦는 것은 곳 가정을 닦는 것이고 나아가 천하를 닦는 것이다. 수신(修身)이 곧 제가(齊家)이며 곧 치국(治國)이며 평천하(平天下)다. 그러므로 유학에선 개인의 수양이 곧 세상을 다스리는 일이다. 그 원리가 거경궁리(居敬窮理)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유학에서 정치(政治)란 공적 영역에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적이면서 동시에 사적이었다. 왜 임금에게 그토록 경연을 강조했는지 모르겠는가.


중화질서로의 반전이 결국 유학 개념에 대한 오독을 전제로 한다면 그것은 반전이 아니라 왜곡과 혼란일 수 있다. 왜냐하면 중화질서라는 껍데기를 입은 서양 정치이념 및 정치철학의 적용에 지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의(仁義)에 대한 논의에서도 마찬가지다. 신유학에선 “군신 간에는 오직 ‘의(義)’가 있을 뿐이었다(p204)”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仁과 義는 분리할 수 없는 개념으로 이 둘이 태극의 음과 양처럼 조화되고 어울려야 비로소 현실을 바르게 하는데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仁義를 내적으로 인식하는 영역이 知이고 그것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영역이 禮이다. 이렇게 仁義禮知가 완성된다. 義와 利를 대척점에 놓는 것은 맹자에서 연유한 것인데 그 논리는 왕조 중심의 관점에서 백성 중심의 관점으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맥락에서 나왔다. 맹자에서 利는 왕조・군주 중심의 사고방식을 대표하는 개념이었으므로 국회의원과 유권자가 利로 연결되었다는 저자의 해설은 利를 정확히 이해하고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 맹자의 利는 왕조・군주의 利일 뿐이고 저자가 말하는 利는 유권자와 국회의원을 모두 만족시키는 利이다. 이 둘은 같은 글자이지만 내포하는 의미와 맥락은 완전히 다르다.


중화질서가 민주주의라는 예외적 현상을 거쳐 다시 중화질서로 반전한다는 설명에는 동의하기 어려운 논점이 많다. 전자의 중화질서에는 ‘개인’이 담겨 있지 않지만 후자의 중화질서에는 명백히 ‘개인’ 담겨 있다. 그건 분명 민주주의의 공헌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반전이 아니라 바로 정반합이라는 변증법적 발전이다. 반전이라는 단어에 매몰되어(혹은 매혹되어) 사태의 본질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닐지 저자에게 진지하게 반문한다.


그러므로 저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새로 도래할 중화질서(이렇게 이름 붙이는 게 적당할지는 별개의 논의로 친다)는 단순히 과거의 중화질서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 저자의 직관이 탁월하여 정확하다면 봉건 중화질서와 민주주의를 모두 겪은 문화권에서 바로 그 새로운 중화질서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디겠는가? 바로 한국이 아닌가? 민주주의를 경험해보지도 않은 중국 학자들이 미국에 모여 민주주의 이후의 새로운 세계질서를 논의한다는 소식을 비판적으로 전하지 못하는 저자에게 안타까움을 전한다.


우리는 중화질서와 민주주의를 모두 경험해 본 역사적 자원이 있다. 그 사실로부터 새로 다가올 시대를 다시 읽어보면 어떨까 한다. 그것은 반전의 시대가 아니라 법고창신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 접기
gunsmile 2017-07-04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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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의 시대는 흐름이다.

부분의 역사로는 이해하기 힘든 흐름을 읽어내는데에 도움이 됩니다. 지금 살고 있는 우리시대는 어떤 시대의 일부분 인지 왜 그렇게 흘러가는 지에 대한 논리가 있습니다. 특정국가와의 악감정 피해의식등을 떠나 가능한 객관적으로 지구시민으로써 ,, 마치 기상의 변화를 관찰하고 일기예보를 하듯 서술한 관점이 훌륭합니다.
한국남자 KIM 2019-03-18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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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봤습니다

새로운 관점에서 세계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됐습니다
jgb82 2016-06-30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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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의 저서 <반전의 시대: 세계사의 전환과 중화세계의 귀환>에 대한 요약과 평론입니다. 요청하신 지침을 엄격히 준수하여 우리 사이의 대화는 언제나 존댓말을 사용하고, 요약과 평론 본문은 <해라> 체를 사용하며, 별표 대신 < >를 적용하여 작성했습니다.

반전의 시대 요약

문명학자 이병한의 <반전의 시대: 세계사의 전환과 중화세계의 귀환>은 1492년 콜럼버스의 대륙 발견 이후 지난 500년간 지구촌을 지배해 온 서구 중심의 대서양 해양 문명이 황혼기를 맞이하고, 유라시아 대륙의 거대한 문명 축이자 오래된 중심이었던 '중화세계(Pax Sinica)'가 다시 귀환하고 있음을 선언한 선동적인 문명론적 진단서이다. 저자는 서구의 지식인들과 언론이 중국의 부상을 단순히 기존 패권국인 미국에 도전하는 일시적인 지정학적 경제 도발이나 신흥 강대국의 패권주의로 치부하는 협소한 시각을 단호히 거부한다. 이 책은 현재 진행 중인 미-중 갈등의 본질을 단순한 패권 교체가 아닌, 세계사의 패러다임 자체가 거대하게 뒤바뀌는 문명사적 <반전(反轉)>의 징후로 규정한다.

저자가 주목하는 중화세계의 귀환 방식은 과거의 단순한 제국주의적 영토 확장이 아니라,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하나로 묶는 물류·에너지·디지털 네트워크 기획인 '일대일로(一帶一路)'를 통해 구체화된다. 저자는 이를 서구 중심의 근대성이 노정한 약탈적 신자유주의와 탄소 기반 산업 문명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한 아시아적 가치와 생태 문명의 대담한 융합 시도로 파악한다. 서구의 근대가 각자도생의 민족국가 체제와 자본의 무한 증식을 위해 타자를 식민화하고 자연을 파괴해 온 경로였다면, 귀환하는 중화세계는 다원적인 문명들이 느슨하게 공존하던 과거 동아시아의 '천하(天下) 체제'와 조공 질서의 상생 정신을 21세기 디지털 네트워크 기술을 통해 현대적으로 재발명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본론에서 저자는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단일한 잣대가 전 세계의 표준 역할을 하던 '역사의 종말' 시대가 완전히 끝났음을 논한다. 중국이 보여주는 '테크노-소셜리즘'과 강력한 당-국가 체제의 효율성은 서구식 시스템의 정체와 양극화 속에서 개발도상국들에게 매력적인 대안 경로(베이징 컨센서스)로 부상하고 있다. 저자는 중국이 남반구(Global South) 국가들과 서남아시아, 러시아를 아우르는 유라시아 대륙의 연대를 주도하며, 달러 패권과 서구식 국제기구들이 독점해 온 글로벌 헤게모니를 다극화 체제로 빠르게 재편하고 있음을 실증적 현장 탐문과 역사적 맥락을 통해 입증해 나가지 못한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대한민국을 향해 문명사적 대전환의 흐름을 직시하고 사상적 독립을 감행할 것을 촉구한다. 분단 이후 남한 사회는 대륙으로 향하는 철길과 숨통이 막힌 채 미국의 해양 패권망에 전적으로 종속된 '고립된 섬나라 문명'으로 살아왔다. 저자는 서구 중심주의라는 오래된 신화에서 벗어나, 귀환하는 중화세계와 유라시아 대륙의 역동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해양 세력의 하위 파트너에 머물며 대륙 세력과 적대하는 냉전적 이분법을 청산하고, 대륙과 해양을 유기적으로 매개하는 반도 문명 본연의 지정학적 주체성과 다원주의적 외교 노선을 회복할 때 비로소 한반도의 미래가 열릴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

평론: 서구 중심주의 해체의 지적 해방감과 중화주의 낭만화의 딜레마

이 책은 서구식 가치관과 냉전적 반공주의 사관에 깊이 길들여진 한국 지식인 사회의 안일한 정세 인식에 거대한 죽비를 내리치는 도발적이고 매혹적인 문명 비평이다. 저자는 서구 중심의 근대성 패러다임이 기후 위기와 불평등 속에서 수명을 다해가고 있음을 선언하고, 중국의 부상을 500년 대서양 시대의 종언과 다극화된 유라시아 시대의 개막이라는 거시 역사학적 스케일로 격상시켜 분석한다. 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가 유일한 정답이 아님을 폭로하고, 일대일로와 천하 체제라는 렌즈를 통해 대륙의 장구한 역사적 네트워크를 복원해 내는 저자의 호방한 상상력은 독자에게 기존의 뉴스 프레임을 전면적으로 전복하는 깊은 지적 해방감을 선사한다. 분단국가라는 협소한 틀을 넘어 한반도의 미래를 유라시아 문명 전환의 주역으로 재규정하는 시각은 이 책이 거둔 가장 독창적인 사상적 성취이다.

그러나 저자가 일관되게 전개하는 장엄한 '중화세계의 귀환 서사'는, 서구 문명의 도덕적·구조적 결함을 가혹하게 해체하는 날카로운 메스에 비해 현대 중국 체제가 내포한 가혹한 전체주의적 속성과 패권적 본질을 지나치게 낭만화하고 미화했다는 치명적인 한계를 노출한다. 저자가 '다원적 공존의 천하 체제'이자 '호혜적 대안'으로 포장한 중국의 부상도, 현실에서는 티베트와 신장 위구르 등 소수 민족에 대한 강압적 동화 정책, 홍콩의 민주주의 말살, 그리고 인근 주변국들을 향한 거친 전랑(戰狼) 외교와 지정학적 압박이라는 팽창주의적 모순으로 나타나고 있다. 과거의 조공 질서가 지녔던 수직적 위계성을 '상생과 포용'으로 채색하는 논리는 중화사상이 가진 자국 중심의 배타적 헤게모니와 그로 인해 주변국들이 느끼는 실존적 공포를 기묘하게 외면한 결과이다.

또한, 중국의 첨단 기술과 데이터 통제를 '테크노-소셜리즘의 공공성'으로 상찬하는 대목은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고도의 디지털 판옵티콘이라는 어두운 그림자에 눈감는 우를 범한다. 기술의 공공성이 1당 독재 체제의 유지와 사상 통제의 수단으로 전락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전체주의적 위험성에 대한 경계심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더욱이 북-중-러 권위주의 동맹과 한-미-일 해양 동맹이 날카롭게 대치하는 오늘날 동아시아의 신냉전적 역학 관계 속에서, 남한 사회의 성취를 단순히 '섬나라 문명의 종속'으로 깎아내리고 대륙으로의 무조건적인 접목을 주장하는 것은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위험한 진영론적 이분법이다.

결론적으로 <반전의 시대>는 서구가 주입한 역사적 국경선과 서사적 표준을 의심하고, 다가오는 대륙의 거대한 지각 변동을 직시하게 만드는 탁월한 문명론적 자극제이다. 하지만 서구는 악(惡)이고 중화세계는 대안(善)이라는 거친 문명론적 유토피아주의에 함몰됨으로써, 현실의 냉혹한 지정학적 권력 역학과 모순을 성찰하지 못했다. 오늘날 21세기 세계 질서의 격랑 속에서 한국 사회가 취해야 할 정교하고 다층적인 실무적 외교·경제 전략의 구체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거대한 담론의 화려함에 머물렀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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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의 시대: 세계사의 전환과 중화세계의 귀환>

이병한, 서해문집, 2016
1,000단어 요약+평론

1. 요약

이병한의 <반전의 시대>는 21세기 세계질서의 변화를 <서구의 퇴조와 중화세계의 귀환>이라는 큰 틀에서 해석한 책이다. 2016년 서해문집에서 출간되었고, 416쪽 분량의 저작이다. 도서관 서지 정보도 이 책의 영문 제목을 <The Great Reversal>로 병기하며, 주제어를 “세계사, 중화세계, 아시아”로 분류한다.

제목의 <반전>은 단순히 중국이 미국을 따라잡는다는 뜻이 아니다. 이병한이 말하는 반전은 세계사를 보는 방향 자체의 전환이다. 근대 이후 세계사는 대체로 서구가 앞서가고, 동아시아가 뒤따라가는 방식으로 서술되었다. 유럽은 근대의 발원지, 미국은 자유주의 세계질서의 중심, 중국은 낙후한 제국에서 혁명과 개발을 거친 후발국으로 이해되었다. 저자는 이 서술이 더 이상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본다.

이 책의 핵심 명제는 <서구 중심 근대 200년은 세계사의 전부가 아니라 하나의 예외적 국면이었다>는 것이다. 장기 역사로 보면 중국, 인도, 이슬람 세계는 오랫동안 세계경제와 문명의 큰 축이었다. 19세기 이후 서구와 일본 제국주의의 압박 속에서 중국은 몰락했지만, 20세기 혁명과 1978년 이후 개혁개방을 거치며 다시 세계사의 중심으로 돌아오고 있다. 따라서 오늘의 중국 부상은 단순한 경제성장이나 군사력 증강이 아니라, <중화세계의 역사적 귀환>이다.

이병한이 말하는 <중화세계>는 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중국 본토, 대만, 홍콩, 마카오, 동남아 화교 네트워크, 한자문화권, 유교적 정치문화, 조공질서의 기억, 그리고 동아시아 지역질서 전체를 포함하는 넓은 문명권이다. 저자는 근대 국민국가의 경계가 가려버린 동아시아의 오래된 연결망을 다시 보려 한다. 이 점에서 책은 중국 현대정치 분석서라기보다 동아시아 문명사와 세계체제론을 결합한 저작에 가깝다.

책의 중요한 역사적 축은 1945년 이후 동아시아 냉전이다. 일본제국의 패망 이후 동아시아는 해방되었지만 곧바로 평화로 들어가지 못했다. 중국에서는 국공내전이 벌어졌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했다. 한반도는 분단되었고, 한국전쟁에서 미국과 중국이 직접 충돌했다. 베트남은 프랑스와 미국에 맞서 전쟁을 치렀고, 동남아시아 곳곳에서는 반제국주의·공산주의·민족주의 운동이 확산되었다.

저자는 이 동아시아 냉전을 미국 대 소련의 대리전으로만 보지 않는다. 그것은 일본제국 붕괴 이후 <중화세계가 재편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중국혁명은 단순한 공산주의 혁명이 아니라, 아편전쟁 이후 무너진 중국 문명권이 새로운 형태로 재건되는 사건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소련의 위성국이 아니라, 동아시아 대륙질서를 다시 조직하는 독자적 중심이 되었다.

이 관점에서 한국전쟁도 다시 보인다. 한국전쟁은 남북한의 내전이면서, 미중전쟁이었고, 동아시아 냉전질서가 형성되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베트남전쟁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충돌이면서 동시에 탈식민 아시아가 어떤 국가를 만들 것인가를 둘러싼 전쟁이었다. 저자는 냉전을 이념 대립이 아니라 탈식민, 혁명, 국가건설, 문명권 재편이 얽힌 복합적 과정으로 읽는다.

책의 또 다른 핵심은 중국 개혁개방의 재해석이다. 보통 개혁개방은 사회주의의 실패와 자본주의로의 전환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이병한은 그것을 더 큰 세계사적 사건으로 본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권력과 시장경제, 문명적 장기전략을 결합하여 서구식 자유주의와 다른 발전 모델을 만들었다. 한 서평도 이 책이 중국의 개혁개방을 “혁명의 실패와 자본주의로의 굴절”이라기보다 “세계체제를 개조하고 근대가 뒤집히는 사건”으로 평가한다고 정리한다.

따라서 <반전의 시대>는 중국을 서구 근대의 학생으로 보지 않는다. 중국은 서구를 따라잡는 후발국이면서 동시에 서구 근대 이후의 질서를 설계하려는 행위자이다. 이것이 이병한이 말하는 반전이다. 동서의 반전, 중일관계의 반전, 대륙과 해양의 반전, 서구와 비서구의 반전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2. 평론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세계사를 보는 눈을 뒤집는 힘이다. 한국 사회의 국제정세 인식은 오랫동안 미국 중심이었다. 해방 이후 남한은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질서 안에서 성장했고, 냉전기 반공주의는 중국과 북한, 베트남 등 “붉은 아시아”를 악마화했다. 이병한은 이 틀을 흔든다. 그는 중국과 동아시아 사회주의권을 단순한 실패나 위협으로 보지 않고, 탈식민 아시아가 자기 질서를 만들려 했던 역사적 실험으로 읽는다.

둘째, 책은 동아시아 냉전을 유럽 냉전의 복사판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유럽 냉전은 상대적으로 고정된 국경과 체제 대립이었다. 반면 동아시아 냉전은 중국혁명,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대만해협 위기, 인도네시아 학살, 캄보디아 비극처럼 뜨거운 전쟁과 혁명, 학살과 국가건설의 연속이었다. 이 차이를 보지 못하면 한반도 분단도, 중국의 현재도, 베트남의 개혁개방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셋째, 이 책은 오늘의 미중갈등을 장기 역사 속에 놓는다. 미중갈등은 단순한 패권경쟁이 아니다. 그것은 서구 근대가 세계의 표준이었던 시대가 흔들리고, 비서구 문명권이 다시 자기 언어로 세계를 조직하려는 과정의 일부이다. 이 시각은 특히 한국에 중요하다. 한국은 미국과 중국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나라가 아니라, 해양질서와 대륙질서, 자유주의와 중화세계, 분단체제와 유라시아 재연결 사이에서 자기 전략을 세워야 하는 나라이다.

그러나 한계도 분명하다. 첫째, <중화세계의 귀환>이라는 표현은 매력적인 동시에 위험하다. 중화세계는 분명 역사적 연결망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평등한 네트워크만은 아니었다. 조공질서와 문화적 위계, 주변국에 대한 우월의식, 대만·티베트·신장·홍콩 문제에서 보이는 강압성도 함께 있었다. 중화세계의 귀환을 말할 때, 그것이 동아시아의 자율성 확대인지, 중국 중심 위계질서의 부활인지 반드시 따져야 한다.

둘째, 서구중심주의 비판이 곧 중국중심주의로 미끄러질 위험이 있다. 서구 제국주의가 폭력적이었다고 해서 중국이 자동으로 대안이 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 일극체제의 한계가 뚜렷하다고 해서 중국식 권위주의, 감시국가, 소수민족 통제, 주변국 압박이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다. 탈서구는 필요하지만, 탈서구가 곧 해방은 아니다. 때로 그것은 다른 제국의 부상일 수 있다.

셋째, 책의 장대한 문명사적 서술은 구체적 인간의 고통을 흐리게 할 수 있다. “중화세계의 귀환”이라는 큰 서사 안에서 홍콩 시민, 대만인, 위구르인, 티베트인, 탈북민, 베트남인, 한국전쟁 피해자들의 경험은 어떻게 위치하는가? 문명사는 국가와 제국의 이동만이 아니라, 그 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유와 존엄을 함께 보아야 한다.

전체적으로 <반전의 시대>는 이병한 사상의 원형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후의 <붉은 아시아>가 냉전기 사회주의 아시아를 역사적으로 파고들고, <유라시아 견문>이 세계 각지를 이동하며 문명전환의 현장을 기록했다면, 이 책은 그 모든 작업의 기본 명제를 제시한다. 그것은 <세계사의 중심축이 움직이고 있으며, 한국은 그 변화를 서구의 눈이 아니라 동아시아와 유라시아의 눈으로 다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그대로 받아들일 책이 아니다. 그러나 논쟁하며 읽을 가치가 큰 책이다. 이병한의 반전론은 한국 독자가 세계를 미국과 서구 중심으로만 보는 습관에서 벗어나게 한다. 동시에 독자는 이 책을 읽으며 경계해야 한다. 서구중심주의를 넘어서되 중화중심주의에 빠지지 않는 것, 미국 패권을 비판하되 중국 권위주의도 비판하는 것, 문명사의 큰 흐름을 보되 인간의 자유와 고통을 놓치지 않는 것. 바로 그 긴장 속에서 이 책의 진짜 의미가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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