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16

가와사키 에이코 - 나무위키

가와사키 에이코 - 나무위키  川崎栄子




가와사키 에이코
최근 수정 시각: 2026-05-28

분류1942년 출생
재일교포 북송
간사이 출신 인물
북한이탈주민
납북자
일본의 인권운동가
가와사키 에이코
川崎 栄子

출생
1942년 7월 11일 (83세)
국적
 일본(1942 ~ 1960, 2004~)[1]
학력
조선학교
북한 소재 지방대학[2]
북한명
불명[3]
가족
부모[4]
남편(~2002?)[5]
남동생
자녀 5명[6]
현직
NGO 모두 모이자 대표

1. 개요[편집]

경상남도 창원시 출신 아버지와 전라남도 목포시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재일교포 북송 사업으로 북한1960년부터 43년가량 체류하다가 2004년 중국을 통해 탈북했다.

2. 일생[편집]

일본에서 초, 중학교를 다녔으며,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진학하기 어려운 형편이라[7] 야간고등학교를 다닐지 일을 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할지 고민하다가 북한의 레이더망에 걸려들었다.

이후 학비가 없다는 사실에 조총련계 고등학교를 입학하고 북한이 지상낙원이라는 선전에 속아 1960년 17세의 나이로 재일교포 북송선에 오르게 된다. 배가 입항했을 때 환영인파 사이에서 1년 먼저 입북한 학교 선배가 일본어로 그 배에서 내리지마! 일본으로 돌아가!(船から降りるな! その船で日本に帰れ!)라고 외쳤지만, 다시 돌아갈 수 없었으며 배 안에 숨어있으면 무조건 찾아내어서 내리게 했다고 한다.[8]

그러나 북한에 내리자마자 충격을 받고, 점점 북한 사회에 대한 환멸감을 가진다. 처음에 에이코가 먼저 입북하고 1년 뒤에 가족 모두가 북송선에 탈 계획이었다. 그러나 북한의 현실을 잘 알고 있는 에이코는 편지를 통해 북한의 실상을 전달하여 가족을 일본에 남게 할 수 있었다.[9]

에이코가 입북한 지 3년 뒤 에이코 어머니의 친구가 가족들[10]과 같이 북송선을 타고 왔다. 이때 대학교 기숙사에서 친구분과 만났는데, 서로 껴안으면서 대성통곡을 했다. 어머니의 친구로부터 편지로 인해서 일본에 남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제서야 안도했다.

이후 지방대에 진학하였다.[11] 이때 남편을 만나게 되었는데 같은 대학 선배로써 처음에는 감시 목적으로 붙었다. 그리고 중매를 통하여 결혼을 했다.[12] 남편의 토대가 매우 좋았는데, 시외삼촌[13]김일성 측근인 서철이었다. 북한에서 재일교포는 제일 낮은 계급이었기에 남편이 결혼을 하려면 좋은 토대를 버릴 수밖에 없었으나, 남편은 토대를 버리고 사랑을 택하게 되었다.[14]


행복하게 살면서 5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남편이 급성 간염으로 12년간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다. 병원에서조차 시한부 판정을 할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다고 한다. 간염 전문 병원이 집에서 걸어가면 2시간 반이 걸리는 깊은 산골짜기에 있었는데, 남편을 살리는 방법이 혈장 치료 밖에 없어서 수혈소[15]와 병원을 이틀에 한 번씩 12년을 오가며 간병을 했다. 마시는 물도 집에서 가져오고, 밥도 직접 해서 먹일 정도로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16]

완치 후 남편이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되었다. 남편이 출장을 가게 되었는데 그 날따라 쎄한 기분이 들어서 꼭 가야 한다면 직원을 보내라 하였으나 결국 아침 인사가 마지막이 되었다.

1986년 27년 만에 부모님을 북한에서 만나게 되었다. 1970년~1980년대 북한은 이들의 절실한 마음을 이용한 인질 비즈니스를 벌여서 거액의 현금을 내는 조건으로 재일교포 가족 상봉을 허락했다. 때문에 기부금을 내고 2주 체류할 수 있게 되었다.[17] 그 중 가정 방문은 2박 3일밖에 없었는데 아버지께서 현실을 보시고선 왜 자살하지 않고 버텼느냐며 울었다고 한다. 부모님은 추가금을 내고 에이코와 금강산 여행을 다녀왔다.

3. 탈북[편집]

남편이 사망한 이후 부모님이 일본에서 보내준 옷과 신발, 악세서리를 북한 내에 유통했고 식당까지 운영했다. 5남매를 장가, 시집을 보내고 혼자가 되자 자신이 북한에서 할 수 있는 건 다했다고 생각해 2003년탈북을 결심하게 되었다. 혼자 탈북하게 되면 자녀들이 위험해질 수 있어 탈북 브로커를 만나기 위해 양강도 혜산으로 이동했다. 혜산에 도착해서 일본에서 보내온 명품[18], 악세서리를 온 몸에 두르고 장마당을 돌아다니니 브로커가 붙어 3번째 만난 젊은 여성 브로커와 함께 대낮에 탈북했다. 두만강 상류여서 강폭이 좁고 물살이 세지 않아 탈북까지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부모님이 일본에 거주했기에 한국이 아닌 일본으로 가고자 했다. 처음에는 중국 가짜 신분을 산 뒤 일본으로 이동해서 탈북자라고 밝힐 계획이었다. 동생에게 연락하여 탈북에 필요한 금액[19]인 30만 엔보다 더 많은 50만 엔을 즉시 입금했다. 그러나 브로커는 50만 엔을 꿀꺽하고 탈북 비용을 직접 벌라며 일자리를 소개시켜주었다. 본의 아니게 일본어 교사가 되었다.

며칠 후 일본 영사관에 전화를 걸어 신분을 보증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는 물음에 가족이 있다고 답하니 일본 국적을 회복하게 되었다.
[20] 남동생이 전화가 와서 아버지의 임종으로 보기 힘들 것 같다는 소식을 듣고 영사에게 직접 편지까지 작성한 덕분에 빠른 시일 내로 귀국할 수 있게 되었다.[21]

2004년 8월 18일 이륙 10분 전에 극적으로 비행기를 탔음에도 다롄에 착륙했는데, 당시 일본에 태풍[22]이 통과하는 중이라 오후 4시에 도착할 비행기가 오후 11시가 되어서야 간사이 국제공항에 도착하게 되었다. 다행히 임종 전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으며 아버지는 귀국 후 3일 뒤 사망했다.

2008년에 막내 딸 이소라가 탈북하여 일본에서 같이 거주하고 있다.

4. 인권 활동[편집]

2014년 2월 7일 UN 북한인권보고서를 접한 계기로 동년 11월 14일 NGO단체인 "모두 모이자"를 결성했다.

일본 국내ㆍ외 많은 사람들에게 북송사업의 부당성과 그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의 어려운 처지를 알리고, 구제를 위한 협력을 호소, 요청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날씨에 상관없이 조총련 도쿄 본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며, 김정은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게 되며 알려지게 되었다.[23]

5. 여담[편집]

  • 입북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탈북한 3명이 재북송되어 당하는 수모를 보고 탈북 마음을 접고 아무렇게 행동하지 않으며, 북한 당국에 협력할 수 없다고 다짐하며 보고 들은 모든 것을 발설하지 않았다. 때문에 북한에서 생활할 때 말수가 적었다.
  • 남편이 같은 공학계열 출신이고 설계사업소 설계 심사원이라는 증언으로 보아, 공대를 전공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 북한 내에서 가난을 겪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일본의 가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24] 다만 남편의 사망과 북한 내에서 부모님과 상봉한 이후로 물건 등으로 지원을 받았다.
  • 2명의 딸이 자녀 건강 상 문제, 아들은 아버지의 묘를 지키기 위해 탈북을 하지 못하고 있다.
  • 자녀들이 모두 탈북하면 따뜻한 밥 한끼 먹이는 것이 소원이다.

6. 관련 링크[편집]

7. 관련 문서[편집]

[1] 후술할 북송으로 인해 2004년에 일본 국적을 다시 취득하였다. 북송 당시 북한에서 공민으로 인정한지는 불명이다.[2] 김일성종합대학에 높은 점수로 합격했으나, 그 당시 김정일이 입학하면서 재일교포와는 같이 교육시킬 수 없다는 이유로 입학하지 못했다.[3] 북한에서의 삶을 기억하고 싶지 않고 북한에 남아있는 자녀들의 신변보호를 위해 공개하지 않는다고 한다.[4] 아버지는 2004년 8월 22일 사망했다.[5] 북한 공대 출신으로, 설계사업소 설계 심사원이었다. 외삼촌이 김일성 최측근인 서철이었다. 탈북 직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하며 그 당시 60세가 되었다고 한다. 만 나이로 추정된다.[6] 자녀 모두 북한 출생으로, 딸 1명만 탈북하였다.[7] 당시만 해도 여성이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은 부자가 아니라면 불가능에 가까웠다.[8] 이때 하선을 격하게 거부했던 사람은 그 이후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9] 재일교포의 편지는 검열을 했기에 아주 은유적으로 편지를 작성했다고 한다. 북한에 올 때 먼지 한 톨도 남김없이 가져오라, 바늘과 실을 가져오라, 구멍난 냄비를 가져오라 등 겉으로는 북한에 오라는 내용이었지만 쓸모없는 것까지 가져오라고 시키게 하여 북한의 현실을 일깨우는 내용이었다.[10] 시어머니까지 데리고 올 만큼 가족 전부에 해당한다.[11] 이마저도 조선학교를 나오지 않았다면 대학 진학 자체를 못 했다.[12] 부모님에게 소개 시킬 수 있을 정도로 좋은지 오랜 고민을 했다고 한다.[13] 가와사키 에이코의 시어머니 동생[14] 북한에서 재일교포는 결혼을 하지 않으면 스파이로 의심했기에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15] 당시 수혈소 당비서가 말하기를 당신은 남편을 살려야 한다는 입장, 나는 보건 일꾼의 한 사람으로서 인간의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입장에서 같이 힘을 합해봅시다라고 말하며 혈장을 제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16] 의사조차 병원이 살린 게 아니라 아내가 살린 것이라며 지극정성에 대한 극찬을 하였다.[17] 공식적인 기록은 아니지만 증언에 따르면 기부금이 약 2천에서 3천만 원에 달했다. 그 당시 사업에 성공한 재일사업가는 약 1억 엔을 기부했다고 한다. 당시 북한은 일본을 오가는 만경봉호 한 척 왕복에 20억에서 30억원의 이익을 얻었다.[18] 사계절, 색깔이 다 다른 샤넬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19] 가짜 신분과 비행기값[20] 동생이 일본 외무성과 교섭하며 신분회복을 도왔다. 일본 정부가 재일교포 북송사업 북송선 탑승자 명단이 있어서 탑승자 본인 또는 자손이 확인되면 입국이 가능했다고 한다.[21] 당시 항공사에 전화를 걸어 내일 일본가는 비행기가 있으나, 만석이라는 답을 듣고 운임에 500위안을 붙여서 지불할 테니 자리를 만들어달라는 말을 한 이후 15분 만에 다른 손님의 예약을 취소하고 발권해 주었다.[22] 메기로 추정된다.[23] 에이코를 포함한 5명의 북송 교포 탈북자들이 한 사람당 1억 엔을 손해배상을 하라는 소송을 제기하게 했으나, 기각되었다. 에이코가 제기하지 않은 다른 소송에서 법원이 북한의 허위 선전에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24] 실제로 아직 북한에 남은 재일교포들은 일본의 가족들에게 돈을 송금받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 과정에서 북한 정부에 떼이는 돈도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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