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19

고노 요헤이 - 위키백과, 河野 洋平

고노 요헤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고노 요헤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고노 요헤이
河野 洋平
출생1937년 1월 15일
일본 제국 가나가와현 히라쓰카시
사망2026년 6월 8일(89세)
성별남성 위키데이터에서 편집하기
국적일본
학력와세다 대학
정당자유민주당신자유클럽→자유민주당

고노 요헤이(일본어: 河野 洋平こうの ようへい, 1937년 1월 15일 ~ 2026년 6월 8일)는 14선 중의원 의원을 지낸 일본정치인이다.

생애

출생과 학창 시절

1937년 1월 15일에 가나가와현 히라쓰카시에서 정치인 고노 이치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55년에 와세다 대학 고등학원을 거쳐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생 때 육상부에서 활약했다. 1959년에 졸업하여 마루베니이다(지금의 마루베니)에 입사하여 재무부·식량부, 도쿄지사 사탕식료품부에서 근무했다.

마루베니이다에 다니면서 후지 스피드웨이 건설에 관여했으며 후지 스피드웨이의 경영을 담당한 니혼 나스카의 부사장을 맡은 적이 있다. 이후 후지 스피드웨이의 경영권이 미쓰비시지쇼에 양도되자 물러났다.

그후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을 갔다.

정계 입문

1965년에 아버지가 죽자 지지 기반을 물려받아 1967년 총선에 출마해 당선됐다. 소속 정당은 자유민주당이었고 파벌은 신정동지회였는데 자민당은 아버지의 소속 정당이었고 신정동지회는 아버지의 파벌인 춘추회의 후신격이었다. 1970년 총재 선거사토 에이사쿠가 4선에 도전하자 신정동지회는 이에 찬성했는데 고노는 파벌의 노선에 반대하며 사토의 4선을 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

1972년 12월에 출범한 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에서 문부정무차관으로 재임했다.

소장파 의원 시절의 고노는 자민당의 프린스로 불렸으며 초파벌적 공부모임인 정치공학연구소(정공연)를 주재했다. 정공연은 당내에서 좌파적 성향으로 분류되는 중진과 소장파 의원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다나카 가쿠에이가 1974년에 총재에서 물러나자 총재 선거가 열릴 것을 예상하고 정공연을 중심으로 고노 옹립 운동이 전개됐다. 하지만 다나카의 금맥 문제와 각복 전쟁의 여파로 부총재 시나 에쓰사부로가 이른바 시나 재정을 통해 미키 다케오를 후임 총재로 추대하면서 옹립 운동은 좌절됐다. 미키 내각이 출범하자 고노는 환경청 장관으로 입각할 예정이었지만 당내 좌파들의 반발로 무산됐다.

신자유클럽

과학기술청 장관으로 재직할 때의 공식 초상화(1985년).

정공연 멤버인 다가와 세이이치, 니시오카 다케오, 야마구치 도시오, 고바야시 마사미, 아리타 가즈히사 등과 함께 1976년에 자민당을 탈당한 뒤 신자유클럽을 창당하고 고노가 대표에 취임했다. 창당 직후 진행된 총선에서 신자유클럽은 도시를 중심으로 하여 17석을 획득하는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1979년 총선에서 니시오카가 신자유클럽을 탈당한 뒤 자민당에 복당한 데다가 의석수도 4석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총선 참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고노는 대표에서 물러났다. 총선 직후 자민당 내에선 오히라 마사요시의 총리대신 재선 여부를 놓고 40일 항쟁이라 불리는 내분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오히라는 신자유클럽에 연립을 제안했지만 자민당 내에서 반대가 많아 없던 일이 되었다.

고노의 정치 스승격인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1982년에 총리대신에 취임하자 다시 연립 얘기가 부상했다. 그리고 1983년 총선에서 자민당이 다시 한 번 과반수 의석을 상실하자 연립이 성사되었다. 1984년에 고노는 신자유클럽 대표에 복귀했고 1985년에 출범한 제2차 나카소네 내각 (제2차 개조)에 과학기술청 장관 겸 원자력위원장에 취임했다. 이로써 정계에 입문한 지 18년 만에 첫 입각을 이루었다.

1986년에 고노는 신자유클럽의 해산을 선언한 뒤 자민당에 복당했다.

자민당 복당 후

소장파 의원 시절 고노는 신정동지회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자민당에 복당한 이후에는 나카소네의 매파적 체질을 우려해 평소 존경하던 미야자와 기이치가 이끌던 굉지회에 들어갔다.[2] 이후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삼가다가[2] 1991년에 미야자와가 총재로 당선되는 데 공헌하여 1992년에 출범한 미야자와 내각 (개조)에 내각관방장관으로 입각했다. 또한 국무상을 겸해 여성 문제를 종합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행정 각부의 소관 사무를 조정하는 역할을 맡았다.[3] 고노는 국무상의 일은 문부상 모리야마 마유미가 맡는 게 더 적절하다며 난색을 표했지만 미야자와는 "자네는 그런 식이니까 안되는 거야. 여성 문제는 여성이 맡아야 한다는 발상은 대체로 잘못됐어. 관방장관 자리는 그런 자리니까 자네가 하도록 해."라며 고노에게 맡겼다.[4]

1993년에 대한민국의 대통령 노태우정의기억연대가 주장한 위안부 강제 연행의 사실 여부에 대한 진상 규명을 지시했다. 일본 정부는 한국을 배려하여 관방장관이던 고노가 국회에 출석했을 때 "문서를 찾는 조사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부분이 있어 관계자 분들의 얘기도 듣고자 생각하고 있다"라고 답변한 뒤[5] 한국인 전쟁유족회가 소개한 16명의 위안부들을 만났다.[6] 그리고 그때까지 인정하고 있지 않던 위안부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위안부 관계 조사결과 발표에 관한 고노 내각관방장관 담화(고노 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는 "대체로 당사자의 의사에 반하여 이루어졌다", "모집·이송·관리 등의 전체 과정에서 볼 때 감언·강압과 같은 방법을 통한 강제성이 있었다"라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7] 다만 일본 내에서는 담화가 사전에 한국 정부와 조정이 있었단 이유로 담화를 부정하는 세력이 있다.[8][9] 1993년 총선 이후 비자민·비공산 연립 정권 수립이 확실시되자 당시 자민당 내각은 실적을 남기기 위해 조사를 급히 진행했다는 비판도 있다.[10](담화가 발표된 다음 날 미야자와 내각은 총사퇴했다)

1993년에 오자와 이치로를 비롯해 자민당 탈당자가 속출했고 곧이어 치러진 총선에서 자민당은 과반 의석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오자와가 이끄는 야당 연합에게 정권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자민당 창당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고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미야자와는 총재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후 진행된 총재 선거에서 고토다 마사하루가 유력 후보로 부상했으나 당사자가 고사하면서 불발됐다. 결과적으로 고노와 와타나베 미치오가 입후보해 고노가 당선됐다. 고노는 총재 선거에서 자신을 지지해준 청화회모리 요시로를 간사장으로 기용했으며 "야당은 총재가 당무를 관장하니 다른 당과 정책 협의를 하는 정조회장이 간사장보다 더 중요하다."라는 마쓰노 라이조의 조언을 받아들여 하시모토 류타로를 정조회장에 앉혔다. 와타나베는 고노에게 "자네와는 사상이 다르다."라고 한 적이 있었기에 고노는 와타나베의 파벌인 정책과학연구소(옛 신정동지회)의 인사를 기용하는 것에 신중했지만 아버지의 비서를 지냈던 기베 요시아키를 총무회장으로 삼았다.[11]

외무상으로 재직할 때의 공식 초상화(1999년).

호소카와 내각이 제출한 정치개혁법률안이 참의원에서 부결되자 고노는 총리대신 호소카와 모리히로와 당수회담를 진행했다. 그리고 법률안 수정에 합의하여 이를 성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1994년 6월 연립 여당이 오자와와 일본사회당의 갈등으로 붕괴하자 고노는 여당에 복귀하기 위해 사회당 위원장 무라야마 도미이치에게 총리대신 자리를 양보했다. 이로써 자사사 연립 정권이 출범했다. 고노는 무라야마 내각에서 부총리 겸 외무상으로 입각했다.

1995년 참원선에서 여당이 패배하자 무라야마는 1당 대표가 총리대신이 되는 게 맞다며 고노에게 총리대신 자리를 양보하려 했다. 하지만 자민당의 오부치 게이조는 자민당 총재 선거 후에 정권 교체가 있어야 한다며 강경하게 반대하여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이후 진행된 총재 선거에서 고노는 간사장을 모리에서 미쓰즈카 히로시로 바꾸는 등 재선 전략을 전개했지만 같은 굉지회의 실력자인 가토 고이치가 고노의 청을 무시하고 하시모토 지지를 선언하자 결국 고노는 출마를 포기했다.

고노는 오부치와 하시모토의 파벌인 경세회와 싸울 것도 생각했지만 아내가 병으로 죽고 자신도 건강이 예전같지 못해 불출마를 선택했다고 훗날 회고했다.[12] 이로써 고노는 자민당 역사상 처음으로 총리대신이 되지 못한 총재로 남게 되었다. 한편 고노는 자민당 총재를 역임한 뒤 중의원 의장이 된 유일한 사례이기도 하다.

대용회 결성

외무상으로서 러시아을 방문한 고노(2000년). 악수하고 있는 사람은 러시아의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이다.

1998년 12월부터 누가 미야자와의 뒤를 이어 굉지회를 물려받을지를 놓고 고노와 가토의 대립이 격화됐다. 한때 고노가 자민당을 탈당한 적이 있어 파벌 내에서 고노의 지지 세력은 열세였고 결국 가토가 후계자로 선정됐다. 고노는 이에 불복해 자신을 따르는 가스야 시게루, 아소 다로, 아이자와 히데유키, 에토 세이시로, 모리 에이스케 등과 함께 굉지회를 탈퇴한 뒤 대용회(고노 그룹)를 결성하고 회장에 취임했다.

1998년 총재 선거 때 미야자와와 가토가 오부치 게이조를 지지하자 이에 반발해 가스야, 아소 등과 함께 가지야마 세이로쿠를 지지했지만 오부치가 승리했다. 하지만 오부치가 재선을 위해 1999년 총재 선거에 출범했을 때 가토가 출사표를 던지자 두 사람의 관계를 냉랭해졌고 재선에 성공하여 오부치 내각 (제2차 개조)이 출범했을 때 고노는 외무상으로 입각했다.

오부치의 뒤를 이어 모리 요시로가 2000년에 총리대신이 된 뒤에도 외무상으로 유임돼 7월에 열린 제26회 G8 정상회담 때 의장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쌀 지원과 전 중화민국의 총통 리덩후이의 방일을 둘러싼 대응 과정에서 비판도 받았다. 유엔이 북한을 위한 쌀 지원을 요청하자 고노는 야마사키 다쿠와 함께 최대한으로 지원할 것을 주장하며 50만 톤 지원을 결정했다.[13] 하지만 납치 의혹이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유엔이 요청한 19만 5천 톤보다 훨씬 많은 50만 톤 지원을 결정한 근거와 과정을 공개하라며 비판을 받았다.[14][15] 또 리덩후이가 방일을 추진하자 중화인민공화국의 강하게 반대했고 고노는 사임까지 불사하며 사증 발행에 반대했다.[16] 결국 총리대신 모리가 사증 발행을 지시했고 고노는 사임하지 않았지만 완고한 친중적 자세와 정부에 혼란을 초래했다 하여 비판을 받아야 했다.[13][17]

모리의 지지율이 저하하면서 모리의 사임 얘기가 커지자 후임 총재 물망에 올랐다. 고노의 라이벌이던 가토가 가토의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해 실각했기에 고노의 총재 당선 가능성이 더 높아졌지만[18] 결국 2001년 총재 선거에 고노는 불출마하고 아소의 입후보를 지지했다.

중의원 의장

G8 하원의장회의에 참석한 고노(가장 왼쪽, 2006년).
G8 정상들과 회담하는 고노(2006년).

2003년 총선 이후 열린 국회에서 일본 중의원 의장으로 선출됐다. 이는 1993년에 야당으로 전락했다가 정권을 탈환하는 데 공헌했고 사실상 총리대신이 될 수 없어진 고노에 대한 배려도 겸하여 모리가 제안한 것이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취임 이후 이라크 전쟁에 대해 의문점은 있지만 어쩔 수 없는 결단을 내린다며 무력 행사를 지지했다.[19]

2005년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추진하는 우정민영화 법률안이 중의원에서 가부동수가 될 우려가 있자 고노가 캐스팅보트를 행사해야 한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5표 차이로 가까스로 가결되었다. 하지만 참의원에서 민영화 법안이 부결되자 고이즈미는 기다렸다는 듯이 중의원 해산 카드를 꺼내들었다. 중의원이 해산되자 고노도 의장직에서 내려왔지만 총선 직후 구성된 국회에서 직전 임기가 짧았다는 이유로 의장에 재선될 수 있었다.

의장에 재선됐고 파벌 활동에 사실상 관여하고 있지 않았던 것도 더해 아소에게 회장직을 넘겨줬다. 이후 아소는 대용회를 해체했다가 위공회로 재편했다. 2007년에 국립국회도서관장으로 정보공학자 나가오 마코토를 기용했다. 일반적으로 국회사무총장 출신이 취임하는 것이 관례였기에 이례적인 인사라는 평을 받았다.

2008년 자민당이 가솔린세 등의 장점세율을 연장한 것을 주장하자 민주당이 반발했다. 국회가 소란해지자 고노는 참의원 의장 에다 사쓰키와 함께 예산안과 세입 법안을 철저하게 심의할 것을 조건으로 연내에 결론을 내자고 절충안을 내서 여야가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합의에 실패했고 결국 자민당은 예산안은 강행 돌파를 시도해 통과시켰고 세입 법안은 중의원에서 통과했다가 참의원에서 부결된 뒤 중의원에서 재가결시켰다.

9월 18일에 차기 총선에 불출마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자신의 지역구는 자민당에서 활동하던 정치인인 마키시마 가렌에게 물려줬다. 7월 21일에 중의원이 해산되자 의장에서 물러났고 동시에 국회의원 생활도 끝냈다. 고노의 의장 재임 기록은 2,029일로 이는 당시 헌정사상 최장 재임 기록이었다.[20] 이는 나중에 오시마 다다모리의 2,336일에 의해 깨지게 된다.

정계 은퇴 이후

2011년 가을에 동화대수장을 수훈했다.[21]

2023년 7월에 중국을 방문해 외교부장 왕이와 회담했다.[22]

이야깃거리

C형 간염

신자유클럽을 결성한 1976년 무렵부터 고노는 지나친 피로를 느껴 병원을 찾아가니 C형 간염 진단을 받았다. 또한 1997년에 미국에서 생검을 받았을 땐 간경화증이 왔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후 인터페론 치료를 받았지만 개선되지 않았고 2000년에는 황달이 출현하고 간성 뇌증에 의한 의식장애까지 생겼다.[23]

2002년 아들인 고노 다로의 권유를 받아들여 장기 이식 수슬을 받았다. 간을 제공한 사람은 아들인 다로.[23]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끝내 어디서 C형 간염이 전염되었는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가족 관계

아버지는 11선 중의원 의원을 지낸 고노 이치로이며 장남은 9선 중의원 의원인 고노 다로다. 할아버지는 고노 지헤이가나가와현의회 의장을 지낸 실업가 출신 정치인이며 숙부도 정치인으로 5선 참의원 의원을 지냈다.

같이 보기

역대 선거 기록

실시년도선거대수직책선거구정당득표수득표율순위당락비고
1967년총선거31회중의원 의원가나가와현 제3구자유민주당106,827표
17.24%
1위중선거구제
1969년총선거32회중의원 의원가나가와현 제3구자유민주당100,216표
14.88%
1위중선거구제
1972년총선거33회중의원 의원가나가와현 제3구자유민주당141,448표
16.86%
1위중선거구제
1976년총선거34회중의원 의원가나가와현 제5구신자유클럽161,081표
37.12%
1위중선거구제
1979년총선거35회중의원 의원가나가와현 제5구신자유클럽101,177표
25.34%
1위중선거구제
1980년총선거36회중의원 의원가나가와현 제5구신자유클럽110,268표
23.26%
2위중선거구제
1983년총선거37회중의원 의원가나가와현 제5구신자유클럽114,839표
24.64%
2위중선거구제
1986년총선거38회중의원 의원가나가와현 제5구신자유클럽125,043표
24.99%
2위중선거구제
1990년총선거39회중의원 의원가나가와현 제5구자유민주당135,957표
24.91%
2위중선거구제
1993년총선거40회중의원 의원가나가와현 제5구자유민주당163,505표
30.5%
1위중선거구제
1996년총선거41회중의원 의원가나가와현 제17구자유민주당105,282표
44.75%
1위소선거구제
2000년총선거42회중의원 의원가나가와현 제17구자유민주당140,236표
56.44%
1위소선거구제
2003년총선거43회중의원 의원가나가와현 제17구자유민주당135,206표
57.34%
1위소선거구제
2005년총선거44회중의원 의원가나가와현 제17구자유민주당169,825표
60.69%
1위소선거구제

각주

  1. スジ論で親分突き上げ 河野二世ら造反『朝日新聞』1970年(昭和45年)10月1日朝刊 12版 2面
  2.  [時代の証言者]保守・ハト派 河野洋平(14)「消費税反対」の誤解 読売新聞 2012年10月4日
  3. 内閣府 男女共同参画局
  4. 自民脱党で新自由クラブ 街宣車の天井で刺されて - ニュースソクラ
  5. 第 126 回国会参議院予算委員会会議録第 7 号 平成 5 年 3 月 23 日 pp.4-5
  6. 平成5年8月4日 内閣官房内閣外政審議室 調査の経緯. いわゆる従軍慰安婦問題について
  7. 朝日新聞1997年3月31日付
  8. 首相官邸 (2014년 6월 20일). 河野談話作成過程に関する検証作業について (일본어). 2024년 6월 29일에 확인함.
  9. 河野談話作成過程等に関する検討チーム (2014년 6월 20일). 慰安婦問題を巡る日韓間のやりとりの経緯~河野談話作成からアジア女性基金まで~ (PDF) (일본어). 2024년 6월 29일에 확인함.
  10. 秦郁彦『慰安婦と戦場の性』(新潮選書)新潮社、1999
  11. 読売新聞2012年10月18日、時代の証言者、保守・ハト派、河野洋平⑱
  12. 自民党総裁選、現職の出馬断念は菅首相が5人目 政界Zoom (일본어). 日本経済新聞. 2024년 6월 29일에 확인함.
  13.  河野洋平論 (일본어). 公益社団法人國民會館. 2024년 6월 29일에 확인함.
  14. 日本財団図書館(電子図書館) 私はこう考える【北朝鮮について】 (일본어). nippon.zaidan.info. 2024년 6월 29일에 확인함.
  15. 塩崎やすひさ 前衆議院議員 (일본어). 塩崎やすひさ 前衆議院議員. 2024년 6월 29일에 확인함.
  16. 李氏ビザ問題で政府動揺/早急結論を強調する首相 (일본어). 東奥日報. 2001년 4월 18일. 2011년 3월 2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에 확인함.
  17. 李登輝訪日巡り外務省内部に不協和音:Foresight | 記事 | 新潮社 Foresight(フォーサイト) | 会員制国際情報サイト (일본어). 新潮社 Foresight(フォーサイト). 2024년 6월 29일에 확인함.
  18. 小林吉弥「加藤大乱、そして河野か小泉か」『政界』2001年1月号(政界出版社)
  19. 2003年3月17日放送のNHK「NHKニュース9」
  20. 大島衆院議長、在職最長に 「国会の機能果たす」 - 時事通信、2020年12月12日
  21. 平成23年秋の叙勲 桐花大綬章受章者 (PDF) (일본어). 内閣府. 2011년 11월. 1쪽. 2016년 4월 4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24년 6월 29일에 확인함.
  22. 보관된 사본. 2023년 12월 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4년 6월 29일에 확인함.
  23.  太郎との共著『決断』を参照

참고 문헌

  • 佐藤朝泰 『豪閥 地方豪族のネットワーク』 立風書房 2001年 334頁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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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野洋平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河野 洋平
こうの ようへい
生年月日1937年1月15日
出生地日本の旗 日本 神奈川県平塚市
没年月日2026年6月8日(89歳没)
死没地日本の旗 日本 東京都
出身校早稲田大学政治経済学部経済学科卒業
前職丸紅飯田社員
ニチリョウ代表取締役社長
日本陸上競技連盟会長
所属政党自由民主党中曾根派→)
新自由クラブ→)
(自由民主党宮澤派河野G→)
無所属[注釈 1]
称号 桐花大綬章
衆議院永年在職議員
経済学士(早稲田大学・1959年
子女長男・河野太郎
親族祖父・河野治平
父・河野一郎
叔父・河野謙三
従兄・田川誠一
公式サイト河野洋平WEB(2008年10月8日時点のアーカイブ)
日本の旗 第71-72代 衆議院議長
在任期間2003年11月19日 - 2009年7月21日
天皇上皇(明仁)
日本の旗 第118・123-125代 外務大臣
内閣村山内閣
村山改造内閣
小渕第2次改造内閣
第1次森内閣
第2次森内閣
第2次森改造内閣
省庁再編前再編後
在任期間1994年6月30日 - 1996年1月11日
1999年10月5日 - 2001年4月26日
内閣村山内閣
村山改造内閣
在任期間1994年6月30日 - 1995年10月2日
内閣宮澤改造内閣
在任期間1992年12月12日 - 1993年8月9日
内閣第2次中曽根第2次改造内閣
在任期間1985年12月28日 - 1986年7月22日
その他の職歴
日本の旗 衆議院議員
旧神奈川3区→)
旧神奈川5区→)
神奈川17区
当選回数 14回
1967年1月29日 - 2009年7月21日
 第16代 自由民主党総裁
1993年7月30日 - 1995年9月30日
 初・第3代 新自由クラブ代表
1976年6月 - 1980年2月)
1984年6月 - 1986年8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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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野 洋平(こうの ようへい、1937年昭和12年〉1月15日 - 2026年令和8年〉6月8日[1][2])は、日本政治家

衆議院議長(第71・72代)、副総理村山内閣村山改造内閣)、外務大臣(第118123-125代)、内閣官房長官第55代)、科学技術庁長官第39代)、原子力委員会委員長第39代)、衆議院議員(14期)、自由民主党総裁(第16代)、新自由クラブ代表(初代・第3代)、稲門体育会会長を歴任[3]

自民党ハト派の代表格であり従軍慰安婦について述べた「河野談話」を発表したことで知られ[4]2003年平成15年)から2009年(平成21年)まで日本憲政史上最長(当時)の期間にわたって衆議院議長を務めた[4]。また、自由民主党では初となる、総裁に就任したものの内閣総理大臣首相)を経験できなかった人物で、結党から2026年令和8年)6月18日現在までこの事例となった人物は河野と谷垣禎一の2名。

父は副総理兼国務大臣東京五輪担当)、農林大臣建設大臣、衆議院議員を務めた河野一郎、叔父は参議院議長を務めた河野謙三、衆議院議員の河野太郎は長男[5]

来歴・人物

生い立ち

1937年(昭和12年)、神奈川県平塚市衆議院議員河野一郎とその妻・照子の次男として生まれる。1955年(昭和30年)、早稲田大学高等学院を経て、早稲田大学政治経済学部経済学科に入学(同級生に福田康夫)。在学中は競走部に所属した。1959年(昭和34年)に大学を卒業し、丸紅飯田(1972年(昭和47年)に社名変更して丸紅となる)に入社した。大阪本社財務部、食糧部、東京支社砂糖食料品部に勤務。

丸紅飯田在籍中には富士スピードウェイの建設にも関わっており、富士スピードウェイの運営会社として設立された「日本ナスカー株式会社」の副社長も務めていたことがある。ただしその後、同社の経営権が三菱地所に事実上譲渡されたことに伴い、サーキットのオープンを待たずに経営陣から退いている。

後、米国スタンフォード大学留学、ニチリョウ社長を務めた。1965年(昭和40年)、父、一郎が死去。

若手議員時代

1967年(昭和42年)1月、父の地盤を継承して第31回衆議院議員総選挙自民党公認で初出馬、トップ当選を果たす(当選同期に山下元利増岡博之加藤六月塩川正十郎中尾栄一藤波孝生武藤嘉文坂本三十次塩谷一夫水野清など)。自民党では父が率いた河野派の流れをくむ中曽根派に入会。 しかし1970年佐藤首相の四選をめぐる党内の議論では、派閥の現実路線に反して四選阻止を訴えるなどスジ論を主張した[6]

1972年(昭和47年)、第2次田中角栄内閣文部政務次官に就任。

若手時代は「自民党のプリンス」と呼ばれ、勉強会「政治工学研究所」(政工研)を主宰。超派閥的に党内左派の中堅・若手議員を従える立場にあった。1974年(昭和49年)の田中角栄内閣の総辞職に伴う後継総理・総裁選出に際しては、公選が行われることを見越しての河野擁立運動が政工研を中心に展開された。しかし、話し合いによる後継者決定(椎名裁定)が当時の実力者の間で既定路線となっていたこともあり、擁立運動は挫折した。また、三木内閣発足時には環境庁長官への起用が予定されていたが、党内左派の反発で流れた。

新自由クラブ時代

第2次中曽根再改造内閣での科学技術庁長官時の肖像写真(1985年)

1976年(昭和51年)に政工研のメンバーだった田川誠一西岡武夫山口敏夫小林正巳有田一寿らと自民党を離党、新自由クラブを結成し代表に就任。結党直後の第34回衆議院議員総選挙では都市部を中心に一挙に17人の当選者を出す躍進を遂げた。なお、同年の新自由クラブ立ち上げ当時に、ニッポン放送の深夜放送『オールナイトニッポン』のパーソナリティを務めた経験(1976年7月30日放送)がある。

1979年(昭和54年)、かねてより党運営を巡って対立していた西岡の離党・自民党復党によって党は打撃を受けた。同年の第35回衆議院議員総選挙では惨敗を喫し、河野は党代表を辞任した。また、自民党が総選挙で過半数割れした後の四十日抗争の際に当時の大平正芳首相から連立政権樹立の申し出があったが、自民党内の反対で立ち消えになった(連立政権では田川が文部大臣に就任する予定だった)。なお、1981年(昭和56年)には映画『ええじゃないか』に原市之進役で出演したこともある。

1982年(昭和57年)、河野の政界の師匠である中曽根康弘内閣総理大臣となると、連立政権案が浮上。1983年(昭和58年)、新自由クラブは第37回衆議院議員総選挙で過半数割れした自民党の呼びかけに応じ、連立政権に参加した。1984年(昭和59年)に新自由クラブ代表に復帰。1985年(昭和60年)には第2次中曽根再改造内閣科学技術庁長官に就任し、政界入りから18年目で初入閣。

1986年(昭和61年)の衆参同日選挙直後に新自由クラブは解党し、河野も自民党に復党する。

自民党復党・首相を兼任しない党総裁就任

復党したことにより、かつて所属した中曽根派から「帰ってこい」と言われたが、中曽根のタカ派体質が馴染めず断り[7]、尊敬する宮澤喜一が領袖を務める宏池会に入る(当時は宮澤派) [7]。1989年の予算案採決の際には単独強行採決に反対の意思のため採決に加わらず棄権している。この際の行動が首相だった竹下登との間の関係において後々まで影響を与えた。しばらく活動を抑えていたが[7]1991年(平成3年)には宮澤総裁実現に貢献し、1992年(平成4年)、宮澤改造内閣内閣官房長官に就任し、また、国務大臣として『婦人問題を総合的に推進するため行政各部の所管する事務の調整』も担当した[8]。河野は「ちょっと待ってください。内閣には森山眞弓さんという文部大臣がおられるから、森山さんにお願いされたらどうですか」と固辞したが、宮澤首相に「君、そういうことをいうからダメなんだ。女性の問題は女性がやればいいという発想が大体間違っている。官房長官のポストはそういうポストだから、君がやれ」と怒られ、婦人問題担当にすることになった[9]

1993年(平成5年)、第40回衆議院議員総選挙で過半数を割った宮澤内閣が総辞職すると、新党さきがけを結成した武村正義らを懐柔する目的で、後継総裁候補に後藤田正晴が浮上。しかし後藤田が固辞したため、自民党総裁選挙に立候補し、渡辺美智雄を破って自民党総裁に就任[4]。党総裁としては初めて首相の所信表明演説に対して代表質問を行った。総裁選で支持を受けた三塚派から森喜朗幹事長橋本龍太郎に「野党は総裁が党務をするから、他党と政策協議にあたる政調会長が幹事長以上に重要だ」と松野頼三の助言を伝え政調会長を受けてもらい、渡辺美智雄から「君とは思想が合わないから」と渡辺派で党役員を出すことを慎重だったが、父・一郎の最後の秘書で河野が信頼していた木部佳昭総務会長に推薦した[10]

小渕第2次改造内閣での外務大臣時の肖像写真(1999年)

1994年(平成6年)に政府提出案であった政治改革関連法案参議院で否決された際、細川護煕首相との党首会談で法案修正で合意した上で成立させた[4]。また羽田内閣総辞職後の政権構想では自分の首相就任を断念して、日本社会党村山富市を首班に擁立して自社さ連立政権村山内閣)を成立させ、自民党の政権復帰を実現した。河野は同内閣で副総理外務大臣に就任した。

1995年(平成7年)7月の第17回参議院議員通常選挙与党が敗北すると村山は自民党総裁である河野に政権禅譲を提案。しかし、小渕派会長の小渕恵三副総裁総裁選前の交代を強硬に反対したために実現しなかった。河野は9月の総裁選で三塚派を総裁選で味方につけるべく幹事長を建設大臣として入閣が決まった三塚派の森喜朗から三塚派会長の三塚博に交代させるなどして、総裁再選のための多数派工作を展開した。ところが、同じ宮澤派の実力者である加藤紘一政調会長が既に派内の多くを小渕派の橋本龍太郎支持で固めていた。これにより河野は推薦人を確保できる目処が立たなくなり出馬辞退に追い込まれた。後継の総裁となった橋本が、閣内で通商産業大臣だったこともあり、副総理も橋本に明け渡している(外務大臣職は、内閣総辞職まで続投)。河野は「私の履歴書」で「『平成研(小渕派)と戦って潔く散るか』。こんな意地もないではなかった」と振り返りつつ、直前に妻を病気で亡くし、自身も体調が優れず「気力も体力も残ってはいなかった」と不出馬を決めた理由をつづった[11]。史上初の内閣総理大臣に就任していない自民党総裁となった。また、自民党総裁経験者で、衆議院議長になったのも河野だけである。

河野グループ結成

2000年、外務大臣としてのロシア訪問時。ロシア連邦大統領ウラジーミル・プーチンと握手する河野。

1998年(平成10年)12月には、宮澤派の後継を巡って加藤との対立を鮮明にするが、派内の河野支持者の劣勢に加え、河野本人が当時宮澤派を離れ無派閥であったことも影響し、加藤が後継者に決定した。翌1999年(平成11年)1月、河野を支持し、加藤派への移行に反発して宮澤派を離脱した粕谷茂麻生太郎相澤英之衛藤征士郎森英介らと「大勇会」(河野グループ)を結成し、会長に就任[4]

1998年(平成10年)の自民党総裁選挙では宮澤、加藤らの小渕恵三支持に反して粕谷、麻生らと共に梶山静六を支持した。1999年(平成11年)には小渕第2次改造内閣で外務大臣に就任。これは自民党総裁選挙に強行出馬し惨敗した加藤に対する小渕による報復人事の一環であった。続く森喜朗内閣でも続投し、2000年(平成12年)7月の九州・沖縄サミットではG8外相会議の議長を務めた。しかし在任中は北朝鮮へのコメ支援や台湾の李登輝訪日を巡る対応で批判を浴びることも多かった(後述)。森政権においては有力な後継候補の一人とみなされ、加藤の乱でライバルの加藤紘一が失脚してからは筆頭と見る向きも多かったが[12]2001年総裁選では自らは出馬せず、派閥からは麻生が出馬した。

2002年(平成14年)、肝硬変治療のため、長男の太郎から生体肝移植を受け、その時の体験を記した『決断』を出版[4]

衆議院議長

G8下院議長会議に出席する河野(左、2006年)
ウラジーミル・プーチン大統領及びG8首脳らと会談する河野(2006年)

2003年(平成15年)に行われた第43回衆議院議員総選挙後の衆議院議長候補選任に際して、自民党総裁として政権奪還の悲願を果たした功労者でありながら、内閣総理大臣に就任出来なかった河野の境遇を見かねた森喜朗に打診されて衆議院議長に就任。イラク戦争については疑問を呈しながらも「やむをえない決断」として武力行使を支持した[13]

2005年(平成17年)7月の郵政国会で郵政法案に造反が出て5票差の僅差で可決された時には、可否同数になった際の議長決裁も想定していた。2005年(平成17年)8月に衆議院解散で議長を失職するが、総選挙後の9月には議長期間が短かったこともあり特別国会で議長に再選された。

2006年(平成18年)、衆議院議長在任のため派閥活動に関与していなかったこともあって、派閥会長の座を麻生に譲ることを決意。この際、河野派から麻生派への移行では麻生に都合が悪いとして、12月15日に大勇会を正式に解散し、その上で麻生が新たに派閥を結成する形式をとった。

2007年(平成19年)には国会事務総長経験者が就任することが慣例化していた国立国会図書館長人事について、衆議院議長の強い意向として情報工学者の長尾真を起用した。

2008年(平成20年)、ガソリン国会でのガソリン税等暫定税率延長問題に絡み、与党が提出した「つなぎ法案」に対し野党が反発し、国会が混乱した際、江田五月参議院議長と連名で、予算案と歳入法案の徹底審議を行って年度内に一定の結論を得ることで、つなぎ法案を取り下げるものとした斡旋案を提示した。与野党は両院議長の斡旋案に合意した。その後予算案は結局強行採決され、歳入関連法案は衆議院でみなし否決をした上で再可決された。

2008年(平成20年)9月17日、次期衆院選に立候補せず政界を引退する意向であると報じられる。翌9月18日、正式に表明し、牧島かれんを後継とする意向も示した。同年11月20日、衆議院議長としての在任日数が1786日となり明治から大正にかけて議長を務めた大岡育造の記録を抜き、当時の憲政史上最長となった。

2009年(平成21年)7月21日、衆議院は解散され、解散詔書を読み上げるとともに2029日務めた議長の任と議員生活を終えた。この2029日は当時の憲政史上最長記録であり、2020年12月12日大島理森の在任日数が2030日となり、抜かれるまで10年以上にわたって1位であった[14][4]

政界引退後

また、その後行われた第45回衆議院議員総選挙で河野の前任の議長を務めていた綿貫民輔が落選したため、次期特別国会の召集時には一時的に議長経験者が不在となった。

2011年(平成23年)秋の叙勲において桐花大綬章を受章する[15]

2022年4月には笹川平和財団のインタビューに答えている[16]

2023年7月、中華人民共和国を訪問し、前外交部長の王毅と会談しており[17]、その後も2025年6月に訪中し、王毅や首相の李強などと会談を持っていた[18]

死去

最晩年も日本国際貿易促進協会会長として積極的に活動していたが、2026年6月8日東京都内の病院で膵臓がんのため死去した。89歳没。訃報は2日後の10日夕方以降メディアで相次いで報道され、同月11日、長男の河野太郎の事務所により正式に死去が公表された。その時点で葬儀は既に近親者で執り行われており、後日にお別れの会を実施することも合わせて発表された[19]

河野の訃報は韓国や中国でも相次いで報道された[20]。約半月後には日本国際貿易促進協会の代表団として訪中する予定で、中国側の要人との会談も調整されていたが[21][22][23][4]、河野の死去を受け習近平指導部との面会が困難になったと中国側からの一報を受け訪中予定が延期されるなど影響も出た[24]

エピソード

上記陸連会長として、資金を不正運用した上に巨額損失を出している、東京マラソンに関する協賛金を計上しない、人事を身内で固め陸上と無縁な人物を入会させる、等の行為を内部告発されている(週刊新潮2009年3月18日発売号より)。

また、競走馬オーナーブリーダーとしても知られ、父・一郎から引き継いだ那須野牧場のオーナーとしてナスノコトブキ1966年菊花賞)、ナスノカオリ1971年桜花賞)、ナスノチグサ1973年優駿牝馬)を輩出した。その関係もあり、没するまで日本軽種馬協会会長を務めていた。なお、那須野牧場は河野の次男である河野二郎が社長を務めている。

出身地・選出選挙区ともに首都圏であるが、自民党総裁としては初代の鳩山一郎以来である(河野以後では小泉純一郎がいる)。

C型肝炎

河野は新自由クラブを結成した1976年(昭和51年)頃より異常な疲れを感じるようになっており、直後に重度の肝機能障害を指摘された[25]。これは後にC型肝炎と診断され、さらに1997年(平成9年)にアメリカ合衆国で受けた肝臓生検の結果、肝硬変に近い状態まで進行していることが判明した。これに対してインターフェロンによる治療を受けたものの改善無く、2000年(平成12年)には黄疸が出現、また肝性脳症による意識障害も生じるようになっていたという[25]

2002年(平成14年)、息子らの勧めによって、肝臓移植手術を受けることを決定、同年4月16日から翌未明にかけて、信州大学医学部附属病院において生体肝移植を受けた。肝臓のドナーは、息子の太郎であった[25]。手術は成功したが、河野は自身のC型肝炎感染経路については不明としている。

主な関係団体

政治姿勢

1994年9月、国連総会での演説の様子

安全保障

2023年1月7日の報道特集に出演し、「70数年前に日本は決心したじゃないかと。尊い命を犠牲にして、我々今ここに繁栄を得ているのです。決して忘れません、決してあの過ちは繰り返しません。何十年も言い続けて、その結果がこの政策転換というのは、私はあり得ないと、そう思っているのです」と述べた上で、「安倍政治というものに非常に大きな問題があったと思います」とし、更に「現状の倍の国防力負担を国民にさせようという状況なら、どれだけその前に外交的努力が行われたのかを問わなければいけないと思います」「米中関係というものが今や最大の課題だと思っているアメリカにとってみれば、最も中国に近い最前線の日本を自分の味方に完全に取り込んで。その証拠を示すために、あれだけの金額を日本が使えますということを、これだけあからさまにしたというのは、やはりアメリカは大喜びでしょう」「反撃能力というのは威嚇ですよね。明らかに武力による威嚇。武力を予算化しようとしている。どう説明をなさるのか、私にはわかりません。戦わないために何をするかということを、深刻に考えるべきだと思います」と警鐘を鳴らした。[26]

朝鮮総連

河野は1980年に朝鮮総連25周年行事に参加して、

尊敬する韓徳銖先生(当時の朝鮮総連議長)。この席にお集まりの幹部の皆様、私は皆様方が敬愛する金日成主席の指導の下、いくつもの難しい局面や困難を乗り越え、(朝鮮総連)結成25周年を迎えられたことに、心からお祝いの言葉を述べさせていただきます。

この25年間、皆様は着実な歩みで、在日同胞をまとめあげ、日本の広範にわたる人々の理解を得るため努力をされてきており、今日、保守的だといわれる新自由クラブを代表する私が、この席にご招待いただいたことをみても、皆様方の運動の正当性の一端を窺う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 朝鮮問題についてはさまざまな意見がございますが、今日、日本の近隣国家である朝鮮半島自主的平和統一を積極的に支持するという意見が大多数であることは疑いの無い事実となっております。このような良い状況というのは黙って座っていれば自然に整うというものではなく、皆様方が、苦難に満ちた道のりをご自身の力で開拓してきたことから勝ち得た結果です。私はこれについて深い敬意を表します。皆様たちは、この25年間絶え間なく、着実に努力を重ね、固い団結を守り、運動を確固たる形へと発展させてきました。皆様の運動なくしては在日同胞の生活や安全、反映は考えられず、彼らを守り育ててきたことは、やはり、皆様方の努力によるものだと思います。

新自由クラブは立党以来、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に正式代表団を送り、真剣な意見交換を行ってきたことを始めとし、世界平和のために、力を注いできました。まだ未熟な点もございますが、私たちは、力で問題を解決できるなどとは、決して思っておりません。平和を願う心と心の対話、そういった誠意を結集させた大きな政治的な判断が、朝鮮を自主的平和統一へと導くでしょう。もう一度、新自由クラブを代表し、結成25周年を祝し、これからも皆様方が強い団結と、敬愛する金日成主席の指導の下、理想達成のため、続けて献身されるであることを願い、それらの運動に、私たちがともに肩を並べて歩み、行動していくことを約束し、お祝いの言葉といたします

と祝辞を送っている[27]

「河野談話」(慰安婦に関する談話)

1993年(平成5年)、韓国盧泰愚大統領は従軍慰安婦問題で韓国挺身隊問題対策協議会らが主張する「強制連行」の有無について真相究明を求め、日本政府は「強制連行」となる証拠が発見できずに対応に苦慮していた。韓国への外交的な配慮をするため、河野は「文書を探す調査だけでは十分でないという部分もございますから、関係された方々のお話もお聞きをするということを考えております」と国会で答弁し[28]、7月26日から30日にかけて韓国の太平洋戦争遺族会から紹介された16人の慰安婦に対して聞き取り調査を行った[29]。宮澤喜一改造内閣の官房長官として、それまで認めていなかった慰安婦の強制性を認め謝罪する「慰安婦関係調査結果発表に関する河野内閣官房長官談話」(「河野談話」)を発表した。河野は談話中で、「総じて本人たちの意思に反して行われた」「募集・移送・管理等の過程全体としてみれば甘言・強圧という方法により強制があった」という趣旨の発言を行った[30] が、事前に韓国政府と談話の内容を調整していたことや慰安婦の証言の裏付け調査をしていなかったことが明らかにされている[31][32]

1997年に平林博内閣官房内閣外政審議室長が「従軍慰安婦に関する限りは強制連行を直接示すような政府資料というものは発見されませんでした」と国会で答弁しており[33]、当時官房副長官であった石原信雄も、当時の日本政府の調査では、軍など日本側当局が慰安婦を強制連行したという資料は確認されなかったと述べている[34]

調査期間が短かった理由については、第40回衆議院議員総選挙非自民党の連立政権が発足されることが確実になったため、政権としての実績を残したい焦りがあったためと指摘されている[35]。(談話が発表された翌日に宮澤内閣は総辞職している。)

2012年8月24日、河野談話について、慰安婦の強制連行について証拠がないにもかかわらず、慰安婦の強制性を認めたことについて、石原慎太郎は「訳分からず認めた河野洋平という馬鹿が日韓関係を駄目にした」、橋下徹は「証拠に基づかない内容で最悪だ。日韓関係をこじらせる最大の元凶だ」と相次いで批判し[36]松原仁国家公安委員会委員長安倍晋三元首相(当時)も河野談話を問題視する発言を行っている[37] また、野田佳彦元 首相も、2011年の参議院予算委員会で河野談話について「強制連行したという事実を文書では確認できなかった」と発言している[38]。河野は「『昔はどこの国でも(慰安婦は)いたんだよ』と発言するのは卑怯です。スピード違反で捕まった人が、『ほかの人もやっているじゃないか』と自分の罪を認めず、開き直る態度に似ている。」と批判し、「河野談話以降の日韓関係は非常に良好だったじゃないですか」と河野談話が日韓関係を改善させたと主張している[39]

河野談話は証拠に拠るものではなく、河野の個人的な政治信念に基づくものであることは、本人により認められている[40]。『朝鮮日報』(2012年8月30日付)の取材に対して「私は信念を持って談話を発表した」「(慰安婦の徴集命令を裏付ける証拠資料がないとする批判には)処分されたと推定できる」と述べている。河野は韓国の太平洋戦争遺族会から紹介された16人の慰安婦からの証言(非公開)を「証言は被害者でなければ語り得ない経験である」と判断したことが慰安婦の強制連行を信じる根拠となったと発言していた[41] が、現在は、インドネシアでオランダ人女性が日本軍に強制連行された白馬事件を根拠としている[42]

慰安婦募集の強制性(強制連行)について、河野は「紙の証拠がない」と証言しており[43][44]、また、「背後に強大な、圧倒的な権力を持った者がいて、甘言、あるいはだまして(女性を)連れていった」「これはもう結果として断ることができない、本人の意志に反して連れて行かれたということは、言ってみれば強制だった」という見解を述べている[45]

朝日新聞の強制連行記事取り消しと談話検証、見直しの動き

河野談話は当初から強制連行を示す証拠がないにも拘らず強制性がみられると述べている点が問題視されることがあったが、2014年8月5日および6日に、談話の発火点ともされる[46]朝日新聞植村隆元記者の書いた慰安婦強制連行を肯定する記事が朝日新聞自身の検証により資料の「誤用」とし強制連行については取り消したことを受け、日本政府は談話の再検証を実施、8月20日に検証結果の報告書を公表した。報告書は、

  1. 談話作成時に韓国側と文言調整していた。
  2. 元慰安婦とされた女性への聞き取り調査では、事後の裏付け調査を行わなかった。
  3. 日韓両政府が文言調整の事実を対外的に非公表とする取り決めがあった。

ことを明らかにしている[47]

翌21日、自民党政調会議では「正しい史実に基づき、日本の名誉を回復したい。国際社会に正しい情報を積極的に発信すべきだ」として、河野談話に代わる新たな官房長官談話を出すよう政府に要請することを決定した[48]

また、外国の報道や教科書に慰安婦に関する事実誤認があるとして、自民党が日本政府に訂正の働きかけを求める提言をまとめたことについて、河野はオランダ下院慰安婦問題謝罪要求決議を持ち出して「強制連行があったことは、否定することのできない事実だ」と反論。「なぜ『申し訳ありませんでした』とできないのか。」と不快感を示した[49]

遺棄化学兵器に関する取り決め

外務大臣在任中、日本が批准していた「化学兵器の開発,生産,貯蔵及び使用の禁止並びに廃棄に関する条約」の発効に伴い、同条約4条から要請される、中国国内に遺棄された旧日本軍毒ガス弾の処理において、中国やソ連のもすべて日本が全負担する取り決めを中国と交わした[50]。 なお、同条約および附属文書では、遺棄化学兵器の廃棄に必要な資金技術人員施設等すべての必要なものを遺棄した締約国(つまり中国における旧日本軍の遺棄化学兵器については日本)の責任で用意することを求めており、また、遺棄化学兵器の廃棄を発効後10年間(2007年まで)に終了することを求めている。

外国人教員任用法の成立に尽力

在日韓国人の徐龍達が推進していた公立の大学における外国人教員の任用等に関する特別措置法成立のため、藤波孝生森喜朗らと尽力をした[51]

北朝鮮へのコメ支援

2000年(平成12年)に外務大臣として国連からの要請は19万5千トンで山崎拓と共に北朝鮮からの食糧要請は最大限すべきであり、拉致疑惑のせいで支援出来ないのは議論の余地があるとして北朝鮮への50万トンのコメ支援を決定した[50]。しかし拉致問題などが進展しない中で国連の要請を遥かに超える支援には、その算定根拠や決定過程の不透明さも相まって批判が多かった[52][53]

台湾への対応

1995年(平成7年)にタイ王国の首都バンコクで行われた東南アジア諸国連合外相会議に議員として出席した際、搭乗した飛行機が機体不良で台湾に緊急着陸した後に、中華人民共和国外交部長(外務大臣)だった喬冠華に会った際に「私は台湾の空港で一歩も外に出ませんでした」と述べた[50]

李登輝訪日への反対

2001年(平成13年)の台湾李登輝総統訪日に中華人民共和国からの強い抗議を受けて、自らの外務大臣辞任をほのめかしてまで入国ビザ発行に反対した[54]。最終的には森喜朗首相の指示によりビザが交付され、河野は辞任しなかったものの、頑なな親中姿勢や政府内に混乱を招いたことで批判を浴びた[50][55]

戦没者追悼式における発言

2006年(平成18年)8月15日全国戦没者追悼式衆議院議長追悼の辞で、当時の天皇明仁皇后美智子が出席する中、「戦争を主導した当時の指導者たちの責任をあいまいにしてはならない」と戦争責任論に言及し、2007年(平成19年)8月15日全国戦没者追悼式の衆議院議長追悼の辞においては、「日本軍の一部による非人道的な行為によって人権を侵害され、心身に深い傷を負い、今もなお苦しんでおられる方々に、心からなる謝罪とお見舞いの気持ちを申し上げたいと思います 」と天皇皇后と戦没者遺族が出席している中で述べた[50]

靖国神社に関する発言

安倍総理大臣が靖国神社に参拝したことについて「まったく評価しない。今やるべきでないことをやっている」と批判している[56]

安倍政権の政権運営

2015年、安倍政権の政権運営をめぐり「自民党がこれ以上『右』に行かないようにしてほしい。今は保守政治と言うより右翼政治のような気がする」との懸念を示した[57]

2016年12月の安倍首相の真珠湾への慰霊訪問に対しての朝日新聞社からのインタビューで「中国人・韓国人に日本への怒りが相当あるのは当然だ」と述べた。さらに朝日新聞記者が「首相に対し、中国・韓国への配慮も暗に求めた」と補足したことに産経新聞社説で両者を『理解不能』、『激しく戦ったアメリカとの歴史的な和解のための訪問で、中韓にどう配慮しろというのか。そもそも日本は韓国と戦争していない。』と強く批判した。河野を芥川龍之介侏儒の言葉での政治家への皮肉を引用して『中途半端で要領を得ない知識・見識を振りかざす政治家より、国民の肌感覚の方がはるかにまともである。』と批判した[58]

2017年5月の講演において、「自民党は改憲党ではない」「中国の嫌がることばかりやっている」などと語った[59][60][61]

麻生太郎との関係

このように安倍政権に対して度々批判的な発言を行ってきた河野だが、安倍と盟友関係にあり政権を一貫して支え続けた麻生太郎は自らの派閥の継承者でもあり、深い信頼関係があるとされる。麻生は河野にとって、総裁時代、自らの孤独を癒やしてくれる精神安定剤のような存在だったという[62]

拉致問題

河野の「外務省が表に出て第一線で当たるのに大事なことが二つある。一つは、力ずくではダメ、話し合いでやらなければいけない、ということ」という主張について、荒木和博は「相手は国家体制自体が拉致犯なのですから、いざというときには実力で奪還するというオプションを持っていなければ話し合いによる解決もできない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最優先されるのは被拉致者の安全ですから、最後には色々な手段が考えられます。安明進氏が『片手に棍棒を持って交渉すべきだ』と言ったように、北朝鮮には強硬策を持って臨んだほうが成果は上がるものと思います。『強硬なことを言うと「戦争をする気か」と言われる』と言った人がいましたが、数十人の日本人が長期に亙って拉致されているというのはすでに私たちが戦争の中にいるということの証明です。」と述べている[63]

クリントン米政権時の2000年(平成12年)10月、オルブライト国務長官(当時)訪朝前に、アメリカ政府北朝鮮に対するテロ支援国家指定解除を検討しており、解除に極めて近い状況であったが、日本政府(河野は当時外務大臣)が拉致問題等を理由に指定解除阻止を図っていたことが分かっている。

その他

2011年(平成23年)3月19日に始まった北大西洋条約機構(NATO)による対リビア空爆作戦を日本政府が支持したことについて、自身がコメンテーターとして出演していたTBSの報道番組『サンデーモーニング』内にて、当時中国政府がリビア空爆に反対していたにもかかわらず、菅内閣 (第2次改造)がNATO軍の空爆を安易に支持表明をしてしまったことにより、今後の日中関係に悪影響を与えると批判した。

南京事件については認めつつ、中国政府が犠牲者を30万人としていることについては、「若干、われわれの意見と食い違うものもある」と反論している。

  • 2021年7月1日の中国共産党の結党100周年記念に対し、祝電を送った[64]

著作

著作の一部はデジタル化されており、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などで公開されている。

単著
  • 『子が語る 父・河野一郎』(恒文社、1966年、非売品)
  • 『孤独の“実力者”わが父・河野一郎』(自費<河野一郎顕彰会>、1969年)
  • 『馬と私と(スポーツ新書)』(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1966年)
  • 『若手が考えるこれからの政治 (討論集会シリーズ ; no.9)』(尾崎幸雄記念財団、1972年)
  • 『拍手はいらない : 新しい政治を求めて』(PHP研究所、1976年)doi:10.11501/11924098
  • 『外交問題発言集』(自費、1991年、国立国会図書館所蔵 請求記号Y181-R11)国立国会図書館書誌ID:034425029
  • 『私の履歴書』(日本経済新聞、2004年12月1日から31日まで連載)
  • 『日本外交への直言 : 回想と提言』(岩波書店、2015年)ISBN 978-4-00-061056-8
  • 『我眼中的中国』(靳成 訳、外文出版社、2019年、中国語で出版)ISBN 9787119116105
  • 『第71代・72代衆議院議長河野洋平 : 正副議長経験者に対するオーラル・ヒストリー事業』(河野洋平 述、衆議院事務局 編、2023年)ISBN 978-4-911228-00-5
共著
論壇雑誌等への寄稿(一部)
  • 大宅壮一, 大村襄治, 河野洋平, 増岡博之, 水野清, 山口敏夫 (1969) 自民党新総裁への爆弾発言. 月刊現代, 3巻1号, pp.92-101. doi:10.11501/3367264
  • 山下徳夫, 河野洋平, 石井一, 加藤六月, 阿部文男 (1970) 政治座談会 政権交代は必要か 佐藤四選是か非か. 再建, 24巻8号, pp.9-28. doi:10.11501/1408842
  • 西岡武夫, 河野洋平, 山口敏夫 浜田幸一, 石井一, 森喜朗 (1971) ヤングパワーは語る(自民党若手代議士座談会)―政治にエネルギーを. 政界往来, 37巻3号, pp.72-82. doi:10.11501/2740498
  • 安里積千代, 麻生良方, 河野洋平, 松島栄一, 村上兵衛 (1973) 座談会 危機の歴史と政治―これからの日本. 政治公論, 22巻1号, pp.72-93. ISSN 0488-1052 doi:10.11501/1385689
  • 河野洋平, 田英夫 (1979) われらが中期展望--何をなしうるか 何をなすべきか (政権交替への過程<特集>). 世界, 通算409号, pp.57-72. doi:10.11501/3366965
  • 河野洋平 (1980) 「政治家・金大中」と私 (金大中氏の生死<特集>). 世界, 通算421号, pp.58-64. doi:10.11501/3366977
  • 安江良介, 河野洋平 (1986) 政治姿勢を変えることはない--新自由クラブ10年の体験を経て(エディターズ・インタヴュー). 世界, 通算494号, pp.126-142. ISSN 0582-4532 doi:10.11501/3367051
  • 河野洋平, 国弘正雄 (1990) 日米関係は日本の内政問題だ (安保30年目のジレンマ<特集>). 世界, 通算543号, pp.88-101. ISSN 0582-4532 doi:10.11501/3367100
  • 河野洋平 (1993) 特集テレビ政治の功罪 <聞き手 田勢康弘>. 中央公論, 108巻12号, pp.30-55. ISSN 0529-6838 doi:10.11501/3366117
  • 村山富市, 河野洋平, 伊吹文明 (2013) 座談会 政界ご意見番、揺らぐ首相の歴史認識を一喝! 「談話」の精神を殺すな (特集 7.21参院選 安倍政権は磐石か). 中央公論, 128巻8号, pp.22-33. ISSN 0529-6838
  • 河野洋平 (2013) 自民党よ、謙虚であれ 日本の政治は何をしてはいけないか. 世界, 通算846号, pp.37-43. ISSN 0582-4532
  • 河野洋平 (2014) インタビュー 平和への決意を再確認せよ (特集 集団的自衛権を問う). 世界, 通算856号, pp.62-69. ISSN 0582-4532
  • 村山富市, 河野洋平 (2015) 対談 日本の歴史認識とアジア外交の未来. 世界, 通算870号, pp.36-44. ISSN 0582-4532
  • 河野洋平 (2016) インタビュー いまこそ軍縮の理念を語れ : 武器を輸出しない国というプライド (特集 死の商人国家になりたいか). 世界, 通算883号, pp.72-78. ISSN 0582-4532
  • 倉重篤郎, 河野洋平 (2017) サンデー時評 拡大版 戦後日本のクライシス 安倍改憲?ちょっと待った! 首相本人の都合だけで何の根拠もない : 政治の最大の目的は戦争をしないことだ 元衆院議長 河野洋平が喝!. サンデー毎日, 96巻33号, pp.38-41.
  • 河野洋平 (2017) インタビュー 東アジアの危機をどう克服するか (特集 韓国新政権と東アジアの未来 : 北朝鮮危機の中で). 世界, 通算897号, pp.89-95. ISSN 0582-4532
  • 河野洋平, 篠原文也 (2021) 河野洋平「太郎は力がなかった」. 文藝春秋, 99巻12号, pp.146-153.
  • 河野洋平 (2022) インタビュー 外交の知恵を尽くせ : 国交正常化五〇年の節目を前に (特集 中国とどう向き合うか). 世界, 通算955号, pp.124-131. ISSN 0582-4532
  • 河野洋平 (2023) 倉重篤郎のニュース最前線 戦後ニッポン「最大の曲がり角」 岸田軍拡 もう黙って見ていられない : 東アジアの非戦を貫く方策がある 太郎の父/保守の良心 河野洋平(86)元衆院議長 緊急直言!. サンデー毎日, 102巻15号, pp.12-15. ISSN 0039-5234
  • 河野洋平, 菅沼栄一郎 (2024) 企業団体献金の禁止は決まっていた : 河野洋平元衆院議長インタビュー (岸田政権とは何だったのか 特別編(7)). 週刊金曜日, 32缶32号, pp.30-33.

ほか各種雑誌に多数。Cinii Research国立国会図書館サーチも参照のこと。

略歴

家族・親族

河野家

神奈川県平塚市

親戚

略系図

 
 
田川平三郎
 
 
 
 
 
河野治平
 
 
 
伊藤忠兵衛
 
 
 
 
 
 
 
 
 
 
 
 
 
 
 
 
 
 
 
 
 
 
 
 
 
 
 
 
 
 
 
 
 
 
 
 
 
 
田川誠治
 
照子
 
河野一郎
 
河野謙三
 
伊藤恭一
 
 
 
 
 
 
 
 
 
 
 
 
 
 
 
 
 
 
 
 
 
 
 
 
田川誠一
 
 
 
河野洋平
 
 
 
 
 
 
 
武子
 
 
 
 
 
 
 
 
 
 
 
 
 
 
 
 
 
 
 
 
 
 
 
 
 
 
 
 
 
 
 
 
 
 
 
 
 
 
 
河野太郎
 
 
 
 
 

総裁選歴

当落選挙日付年齢1回目
得票順位
1993年自由民主党総裁選挙1993年7月30日56208(56.7%)1/2
1993年9月自由民主党総裁選挙1993年9月30日56無投票再選

選挙歴

当落選挙執行日年齢選挙区政党得票数得票率定数得票順位
/候補者数
第31回衆議院議員総選挙1967年1月29日30旧神奈川3区自由民主党10万6827票17.2%51/9
第32回衆議院議員総選挙1969年12月27日32旧神奈川3区自由民主党10万0216票14.9%51/10
第33回衆議院議員総選挙1972年12月10日35旧神奈川3区自由民主党14万1448票16.9%51/9
第34回衆議院議員総選挙1976年12月5日39旧神奈川5区新自由クラブ16万1081票37.1%31/5
第35回衆議院議員総選挙1979年10月7日42旧神奈川5区新自由クラブ10万1177票25.3%31/5
第36回衆議院議員総選挙1980年6月22日43旧神奈川5区新自由クラブ11万0268票23.3%32/5
第37回衆議院議員総選挙1983年12月18日46旧神奈川5区新自由クラブ11万4839票24.6%32/5
第38回衆議院議員総選挙1986年7月6日49旧神奈川5区新自由クラブ12万5043票25.0%32/5
第39回衆議院議員総選挙1990年2月18日53旧神奈川5区自由民主党13万5957票24.9%32/5
第40回衆議院議員総選挙1993年7月18日56旧神奈川5区自由民主党16万3505票30.5%31/5
第41回衆議院議員総選挙1996年10月20日59神奈川17区自由民主党10万5282票44.7%11/4
第42回衆議院議員総選挙2000年6月25日63神奈川17区自由民主党14万0236票56.4%11/3
第43回衆議院議員総選挙2003年11月9日66神奈川17区自由民主党13万5206票57.3%11/3
第44回衆議院議員総選挙2005年9月11日68神奈川17区自由民主党16万9825票60.7%11/3

脚注

注釈

  1.  衆議院議長就任に伴う慣例により、派閥(グループ)と自民党籍を離脱。議長在職中に自身を除く全グループメンバーが麻生派所属となった。

出典

  1.  日本放送協会 (2026年6月10日). 河野洋平 元衆議院議長が死去 89歳”. NHKニュース. 2026年6月10日閲覧。
  2.  JNN (2026年6月10日). 河野洋平・元衆議院議長が今月8日に死去 89歳 自民党総裁や外務大臣など歴任 93年には「河野談話」発表”. TBS NEWS DIG. 2026年6月10日閲覧。
  3.  https://www.wasedajg.ed.jp/blog/10053/
  4.  “河野洋平氏が死去、89歳 自民党総裁や衆院議長など務める”. 朝日新聞 (ニュースサイト). (2026年6月10日) 2026年6月11日閲覧。
  5.  デジタル庁”. 2022年8月10日閲覧。
  6.  スジ論で親分突き上げ 河野二世ら造反『朝日新聞』1970年(昭和45年)10月1日朝刊 12版 2面
  7.  [時代の証言者]保守・ハト派 河野洋平(14)「消費税反対」の誤解 読売新聞 2012年10月4日
  8.  内閣府 男女共同参画局
  9.  自民脱党で新自由クラブ 街宣車の天井で刺されて - ニュースソクラ
  10.  読売新聞2012年10月18日、時代の証言者、保守・ハト派、河野洋平⑱
  11.  自民党総裁選、現職の出馬断念は菅首相が5人目 政界Zoom”. 日本経済新聞. 2021年9月17日閲覧。
  12.  小林吉弥「加藤大乱、そして河野か小泉か」『政界』2001年1月号(政界出版社)
  13.  2003年3月17日放送のNHK「NHKニュース9
  14.  大島衆院議長、在職最長に 「国会の機能果たす」 - 時事通信、2020年12月12日
  15.  平成23年秋の叙勲 桐花大綬章受章者 (PDF). 内閣府. p. 1 (2011年11月). 2016年4月4日時点のオリジナルよりアーカイブ。2023年2月12日閲覧。
  16.  https://www.nippon.com/ja/japan-topics/c05811/
  17.  中国・王毅氏 河野洋平元衆院議長と会談 日本が台湾問題に関与しないようくぎ刺す - TBS NEWS DIG 2023年7月6日
  18.  王毅氏、日本国際貿易促進協会の河野洋平会長と会見 - 新華社 2025年6月5日
  19.  河野洋平元衆院議長の死去発表 長男太郎氏 - NEWSjp(共同通信)2026年6月11日
  20.  “中韓メディアが河野氏の死去報道 聯合「よく知られた人物だ」”. 共同通信社. (2026年6月10日) 2026年6月12日閲覧。
  21.  河野洋平元衆院議長が死去、89歳 自民総裁や外相歴任 慰安婦に関する「河野談話」発表”. 産経新聞:産経ニュース (2026年6月10日). 2026年6月10日閲覧。
  22.  河野洋平氏死去 今月下旬に訪中予定、要人との会談も調整の中”. 毎日新聞 (2026年6月10日). 2026年6月10日閲覧。
  23.  自民党の“プリンス”から“ハト派の重鎮”に 河野洋平元衆院議長(89)死去”. テレ朝ニュース、2026年6月10日配信 (2026年6月10日). 2026年6月10日閲覧。
  24.  “河野氏トップの代表団が訪中延期 習指導部と面会難しく”. 共同通信社. (2026年6月10日) 2026年6月12日閲覧。
  25.  太郎との共著『決断』を参照
  26.  https://newsdig.tbs.co.jp/articles/-/265298?page=2
  27.  朝鮮新報 1980年5月28日
  28.  第 126 回国会参議院予算委員会会議録第 7 号 平成 5 年 3 月 23 日 pp.4-5
  29.  平成5年8月4日 内閣官房内閣外政審議室 調査の経緯. いわゆる従軍慰安婦問題について
  30.  朝日新聞1997年3月31日
  31.  首相官邸 (2014年6月20日). “河野談話作成過程に関する検証作業について” 2014年9月13日閲覧。
  32.  河野談話作成過程等に関する検討チーム (2014年6月20日). “慰安婦問題を巡る日韓間のやりとりの経緯~河野談話作成からアジア女性基金まで~” 2014年9月13日閲覧。
  33.  第140回国会参議院予算委員会会議録第8号 平成9年3月12日 p.12.
  34.  産経新聞1997年3月9日
  35.  秦郁彦『慰安婦と戦場の性』(新潮選書)新潮社、1999
  36.  産経新聞 2012.8.25 石原知事『河野談話が日韓関係ダメに』 橋下市長も『最大の元凶』」
  37.  <日韓関係>慰安婦問題に飛び火…専門家から自制求める声も[リンク切れ]
  38.  第180回国会参議院予算委員会会議録第 25 号 平成 24 年 8月 27日
  39.  河野洋平氏講演にテキサス親父「敵を間違えてはならない…」 慰安婦めぐり隣の会場で火花 産経新聞 2014年6月21日[リンク切れ]
  40.  車学峰 (2012年8月30日). 慰安婦:河野洋平氏「私の立場に変わりはない」”. 朝鮮日報. 2012年8月31日時点のオリジナルよりアーカイブ。2023年2月19日閲覧。[リンク切れ]
  41.  「従軍慰安婦、消せない事実 政府や軍の深い関与明白」『朝日新聞』1997.3.31
  42.  朝鮮日報日本語版 2015.11.18 河野洋平氏「慰安婦動員の強制性、否定できない事実」
  43.  夕刊フジ (2013年12月2日). “河野洋平氏、説明責任を果たす意思示さず 「慰安婦談話」公開質問状への回答”. 夕刊フジ 2013年12月2日閲覧。
  44.  夕刊フジ (2013年12月2日). “河野洋平氏、説明責任を果たす意思示さず 「慰安婦談話」公開質問状への回答 (2/2ページ)”. 夕刊フジ 2013年12月2日閲覧。
  45.  河野氏「断ることができない強制性あった」 日テレNEWS24 2015年12月12日(12月13日閲覧)
  46.  YOMIURIONLINE 2014年8月5日
  47.  http://www.jiji.com/jc/graphics?p=ve_pol_seisaku-gaikou20140620j-04-w500
  48.  https://web.archive.org/web/20140821113230/http://sankei.jp.msn.com/politics/news/140821/stt14082119160009-n1.htm
  49.  朝日新聞 2015年7月30日00時10分 河野氏「強制連行あった」 自民の慰安婦提言を批判
  50.  河野洋平論”. 公益社団法人國民會館. 2016年12月25日閲覧。
  51.  <随筆>◇外国人教授任用と藤波孝生先生◇ 桃山学院大学 徐 龍達 名誉教授
  52.  日本財団図書館(電子図書館) 私はこう考える【北朝鮮について】”. nippon.zaidan.info. 2024年3月28日閲覧。
  53.  塩崎やすひさ 前衆議院議員”. 塩崎やすひさ 前衆議院議員. 2024年3月28日閲覧。
  54.  “李氏ビザ問題で政府動揺/早急結論を強調する首相”. 東奥日報. (2001年4月18日) 2015年6月29日閲覧。
  55.  李登輝訪日巡り外務省内部に不協和音:Foresight | 記事 | 新潮社 Foresight(フォーサイト) | 会員制国際情報サイト”. 新潮社 Foresight(フォーサイト). 2024年3月28日閲覧。
  56.  河野元衆院議長:第二次大戦への日本の反省は不十分-インタビュー ブルームバーグ 2014年7月24日
  57.  河野洋平元衆院議長「今は保守と言うより右翼政治」、村山談話踏襲求める!」
  58.  何を見聞きしても中韓への贖罪意識にとらわれるのか”. 産経新聞社. 2016年12月25日閲覧。
  59.  「安倍という不思議な政権」 河野洋平元衆院議長が首相を呼び捨て猛批判 外交も「中国の嫌がることばかり」「9条は触るべきではない」 講演詳報”. 産経新聞 (2017年5月31日). 2017年5月31日閲覧。
  60.  “「自民が一貫して改憲政党というのは誤り」河野氏が講演”. 朝日新聞 / 朝日新聞デジタル (株式会社朝日新聞社). (2017年5月31日). オリジナルの2020年11月12日時点におけるアーカイブ。 2022年7月24日閲覧。
  61.  松井望美 (2017年5月31日). “河野氏、安倍首相を批判「憲法9条はさわるべきでない」”. 朝日新聞 / 朝日新聞デジタル (株式会社朝日新聞社). オリジナルの2021年5月6日時点におけるアーカイブ。 2022年7月24日閲覧。
  62.  「どす黒い孤独」と菅人事 そして記者は補佐官になった:朝日新聞デジタル”. 朝日新聞デジタル. 2020年10月14日閲覧。
  63.  http://www.sukuukai.jp/houkoku/log/200001/00-01-03.htm
  64.  中国共産党に祝電 二階氏は恥を知らぬのか産経新聞
  65.  https://www.asas.or.jp/jst/general/voice/data1.php
  66.  https://www.nippon-tanshi.com/company/greeting/
  67.  人事興信録45版こ139
  68.  人事興信録45版こ139
  69.  https://www.dailyshincho.jp/article/2023/11131056/?all=1

参考文献

  • 佐藤朝泰 『豪閥 地方豪族のネットワーク』 立風書房 2001年 334頁

関連項目

外部リン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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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ōhei Kō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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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ōhei Kōno
河野 洋平
Official portrait, 1999
Speaker of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In office
19 November 2003 – 21 July 2009
MonarchAkihito
DeputyKansei Nakano
Takahiro Yokomichi
Preceded byTamisuke Watanuki
Succeeded byTakahiro Yokomichi
Minister of Foreign Affairs
In office
5 October 1999 – 26 April 2001
Prime MinisterKeizo Obuchi
Yoshiro Mori
Preceded byMasahiko Kōmura
Succeeded byMakiko Tanaka
In office
30 June 1994 – 11 January 1996
Prime MinisterTomiichi Murayama
Preceded byKoji Kakizawa
Succeeded byYukihiko Ikeda
Deputy Prime Minister of Japan
In office
30 June 1994 – 2 October 1995
Prime MinisterTomiichi Murayama
Preceded byTsutomu Hata
Succeeded byRyutaro Hashimoto
President of the Liberal Democratic Party
In office
9 August 1993 – 2 October 1995
Vice PresidentKeizō Obuchi
Preceded byKiichi Miyazawa
Succeeded byRyutaro Hashimoto
Leader of the Opposition
In office
9 August 1993 – 30 June 1994
Prime MinisterMorihiro Hosokawa
Tsutomu Hata
Preceded bySadao Yamahana
Succeeded byToshiki Kaifu
Chief Cabinet Secretary
In office
12 December 1992 – 9 August 1993
Prime MinisterKiichi Miyazawa
Preceded byKoichi Kato
Succeeded byMasayoshi Takemura
Director-General of the Science and Technology Agency
In office
28 December 1985 – 22 July 1986
Prime MinisterYasuhiro Nakasone
Preceded byReiichi Takeuchi
Succeeded byYataro Mitsubayashi
In office
29 January 1967 – 21 July 2009
Preceded byIchirō Kōno
Succeeded byYōsuke Kamiyama
Constituency3rd district (1967–1976)
5th district (1976–1996)
17th district (1996–2009)
Personal details
Born15 January 1937
Died8 June 2026 (aged 89)
PartyLiberal Democratic
(before 1976; 1986–2026)
Other political
affiliations
New Liberal Club
(1976–1986)
ChildrenTaro Kono
Parent
RelativesKenzō Kōno (uncle)
Seiichi Tagawa (cousin)
Waseda University

Yōhei Kōno (河野 洋平, Kōno Yōhei; 15 January 1937 – 8 June 2026) was a Japanese politician who was President of the Liberal Democratic Party. He served as Speaker of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from November 2003 until August 2009, when the LDP lost its majority in the 2009 election. Kōno served as speaker for the longest length since the set up of House of Representatives in 1890.[1]

Kōno was the president of the Japan Association of Athletics Federations from 1999 to 2013.[2]

Early life and education

Kōno was born in Hiratsuka, Kanagawa on 15 January 1937, the eldest son of politician Ichirō Kōno. His father served as deputy prime minister and was in charge of the 1964 Tokyo Olympics. His younger uncle Kenzō Kōno served as the president of the House of Councillors from 1971 to 1977.

After graduating from Waseda University Senior High School, he studied Economics at Waseda University. Upon graduation, Kōno worked with the Marubeni company. In 1967, Kono's political career began due to the death of his father.

Political career

Kono with members of Murayama Reshuffled Cabinet (at the Prime Minister's Official Residence on 8 August 1995). Despite Murayama served as Prime Minister, Kono as leader of the LDP led the Cabinet.

He was Deputy Prime Minister of Japan from 1994 to 1995 which he had strong influence in the Murayama Cabinet. He was Minister of Foreign Affairs under Prime Minister Tomiichi Murayama and Yoshirō Mori (1993-1995, 1999-2001). He was a member of the Liberal Democratic Party (LDP). He was once President of the LDP from 1993 to 1995, and to date is one of two LDP leaders, along with Sadakazu Tanigaki, to have never served as Prime Minister of Japan. As he was one of the pro-China faction of the LDP, he came under pressure domestically in the spring of 2005 when anti-Japanese movements in China became intense due to then Prime Minister Junichiro Koizumi visiting the Yasukuni Shrine which he opposed the visit to.

Kōno was known for his acknowledgement of comfort women. During his tenure as Chief Cabinet Secretary, in a speech titled the official statement he made in 1993, made after historian Yoshiaki Yoshimi announced he had discovered in the Defense Agency library in Tokyo documentary evidence that the Imperial Japanese Army established and ran comfort stations, he admitted that the Japanese Imperial Army had been involved, directly and indirectly, in the establishment of comfort stations, and that coercion had been used in the recruitment and retention of the women. His subsequent call for historical research and education aimed at remembering the issue became the basis for addressing the subject of forced prostitution in school history textbooks.

Death

Kōno died in June 2026, at the age of 89.[3]

Foot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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