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초대 서울여자대학교 총장 고황경 高凰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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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사망 | |
본관 | |
호 | 바롬 |
가족 | 아버지 고명우, 어머니 김세라 언니 고봉경 |
학력 | |
약력 | 서울여자대학교 초대 총장 |
종교 | |
수상 | |
비고 | |
1909년 3월 6일 한성부(現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황해도 은진의숙을 졸업한 뒤, 관립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입학해 1924년 졸업했다. 같은 해 일본으로 유학하면서 도시샤여자전문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해 1928년 졸업하고, 같은 해 2월 근우회 교토지회 재정부 총무로 선출되었으며, 곧바로 도시샤대학 법문학부 경제학과로 진학해 1931년 졸업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1933년 미시간 주립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1935년 소녀 범죄에 대한 논문으로 사회학 박사 과정을 수료한 후 1937년 5월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면서 졸업했다.[1] 같은 해 8월 귀국해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임용되었고, 1944년 1월까지 재직하며 법학, 경제학, 사회학, 영어 등을 가르쳤다. 1937년 4월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교수로 있던 언니와 함께 잔다리[2]에 경성자매원을 설립하고 원장을 맡았으며, 1940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사과 과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당시 흔치 않았던 훌륭한 여성 지식인이자 교육인으로 보이겠지만...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1933년 미시간 주립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1935년 소녀 범죄에 대한 논문으로 사회학 박사 과정을 수료한 후 1937년 5월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면서 졸업했다.[1] 같은 해 8월 귀국해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임용되었고, 1944년 1월까지 재직하며 법학, 경제학, 사회학, 영어 등을 가르쳤다. 1937년 4월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교수로 있던 언니와 함께 잔다리[2]에 경성자매원을 설립하고 원장을 맡았으며, 1940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사과 과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당시 흔치 않았던 훌륭한 여성 지식인이자 교육인으로 보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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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금차회에서 친일 활동을 하는 고황경.[3] | |
1936년 12월 조선총독부 사회교육과가 가정의 개선과 부인교화운동의 촉진을 목적으로 주최한 사회교화간담회에 참석한 뒤부터 각종 친일단체에 참여하거나 좌담회, 강연회를 통해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등 본격적인 친일반민족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1937년 1월 방송교화선전협의회 주관 하에 경성방송국 라디오방송 부인교육강좌 제2부 강사를 맡아 황민화 정책 선전에 앞장섰으며, 같은 달 조선총독부 학무국에 설치된 조선부인문제연구회 제1차 회합에 참석했고 송금선, 차사백, 이숙종 등의 다른 여성 친일파들과 함께 회원으로 활동했다. 중일전쟁 직후인 8월에는 친일파들의 부인들과 여성계 친일 인사들이 조선총독부 조선중앙정보위원회의 권유를 받고 친일단체 애국금차회를 조직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해 간사를 맡았다.[4][5]
1938년 6월 조선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가 세계YWCA협의회에서 탈퇴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일본기독교청년연맹 가입을 결의할 때 김활란, 유각경, 박마리아[6] 등과 함께 실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9월에는 조선부인문제연구회가 여성들을 대상으로 조직한 전국순회강연반의 강사를 맡아 홍승원과 함께 호남 지역 강연을 담당했고 전라북도와 전라남도 일대를 순회했다. 같은 달 조선부인문제연구회가 전시생활 개선을 위한 '가정 보국운동으로서의 국민생활의 기본양식'을 제정할 때도 참여했다. 11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조직한 순회강연반의 연사로 참여해 경상남도 일대에서 강연했고, 1939년 9월 <동양지광>이 주최한 '내선일체 부인좌담회'에 참석했다.
1941년 2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부인지도위원으로 위촉되었고, 4월 국민총력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연맹이 전선여신도대회를 소집해 여자부를 결성할 때 임원을 맡았으며, 5월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8월 임전대책협의회[7] 결성에 참여했으며, 9월 임전대책협력회가 조직한 채권가두봉공대에 참가해 서대문 일대에서 홍보 활동에 나섰다. 또 같은 달에 대규모 친일단체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이후 12월에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을 맡았다.
1941년 10월 조선교화단체연합회가 조직한 '부인생활정의 강연반' 제2반 연사로 참여해 충청북도와 충청남도 일대를 돌며 강연 활동을 벌였다. 12월에도 <매일신보>가 주최한 '시국 부인 대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했다. 1942년 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부인지도위원회 회의에 참석했으며, 이 회의에서 '대동아전쟁에 있어서 총력운동상 특히 부인층에게 요망할 사항과 또한 이의 실천방책'을 종합한 『대동아전쟁에 부인도 참가』라는 책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5월에는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가 주최한 '국군의 어머니 좌담회'에 참석해 징병제 실시에 따른 다짐을 결의했다. 1944년 10월 조선교화단체연합회가 징병, 징용제의 실시를 원활히 하고 총후 생활을 결전화하기 위해 각 도에 부인강연반을 파견할 때 연사로 참여해 황해도 신천, 장연, 재령 일대에서 강연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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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병제 실시에 대한 소감을 밝힌 고황경 - 매일신보 1943년 8월 5일 | |
이 외에도 신문과 잡지에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해 일제의 황민화 정책을 선전하고, 여성들의 전시체제 호응과 생활 개선을 촉구했다. 그녀는 『반도의 빛』이라는 잡지에 발표한 글들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 있다.
"금번 조선에도 징병제도가 실시되게 되어 쇼와 19년부터는 황송하옵게도 우리 가정에서 황군을 낼 영광을 가지게 되었다. 황군을 양육하는 가정과 그 가정을 맡은 주부는 참으로 엄숙한 자각을 가지고 국가의 큰 임무를 맡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군인의 어머니로서 가진 모든 자격을 갖추려면 일상생활의 어느 부분을 막론하고 다시 반성하여 부족한 부분은 배워 나가야 할 것이며 가정에 숨어 있는 살림이나 맡은 사람이 무엇 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을 버리고 어디까지든지 발 벗고 나서서 국가와 하나가 되어 복무할 진심이 없으면 안 될 것이다. 남자는 직접 국방에 노력하고 여자는 총후의 봉공에 뜻있게 하여 제일선에서 활약하는 남편과 아들을 위해 집안에 대한 염려가 없도록 하게 하는 것이 큰일인 동시에 이 전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부락에서 애국반에서 할 때에는 내 가정 일과 같이 두 팔 걷고 나서는 자가 아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전시와 가정–가정은 국가의 뿌리」, 『반도의 빛』 1942년 8월호
"대전 1년 동안 우리는 국가에 대한 무한한 감사를 알게 되는 동시에 그 보답할 길은 몸과 맘을 국가를 위해 바치는 것"- 「대전(大戰) 1년간 배혼 것」, 『반도의 빛』 1943년 1월호
또한 1943년 8월 5일 <매일신보>에 「징병 감사와 우리의 각오, 건군정신이 투철」이라는 제목의 글을 실어 다음과 같이 일제의 징병제 실시을 감격스러워했다.
"1943년 8월 1일은 조선에 징병제가 시행되는 날로서 우리나라 병제사 우에 영구히 기록할 만한 일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중략) 이 과영이야말로 과거 34년 동안 역대 총독과 위정자 여러분이 일시동인의 성지를 받들어 반도 동포로 하여금 명실상부하는 황국신민을 만들려고 심혈을 기울여 분투한 결정이 아닐 수가 없다. (중략) 성은을 무엇으로 보답하올까. 나라를 위하여 한마음이 되어서 힘 다하여라. 임금님의 군사로 나서는 젊은이들, 젊은이들아, 그 집안 사람들아, 임금 위하여 참마음 하나로 일어서라 하노라."- 「징병 감사와 우리의 각오, 건군정신이 투철」, 『매일신보』 1943년 8월 5일
이 밖에도 일제의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조선인의 전쟁협력과 여성을 대상으로 징병참여를 독려하는 다수의 글을 기고하여 일제의 전시총동원 체제 구축에 앞장섰다. 주요 글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봉사의 기쁨」(『총동원』, 1940년 1월호) 「조선여자생활개선책」(『조광』, 1941년 5월호) 「명일의 가정–자랑과 수치」(『반도의 빛』, 1941년 5월호) 「임전하에 신년을 마지하자」(『반도의 빛』, 1942년 1월호) 「가정생활지표–우선 이상을 세우자」(『매일신보』, 1942년 7월 3일) 「최저생활 수감(隨感)」(『반도의 빛』, 1943년 6월호) 「앞으로의 자녀교육」(『반도의 빛』, 1943년 10월호) 「적전(敵前)에 새해를 맞이하여」(『반도의 빛』, 1944년 1월호) 「어려움을 기쁨으로 아는 생활」(『반도의 빛』, 1944년 9월호)
이와 같은 글을 통해 그녀는 전시체제 하에서 여성들의 역할과 임무를 강조했다.
이후 사회복지사업을 더 확장하여 1942년 무렵 출옥해서 갈 데가 없는 여성을 정서적으로 교화시키고, 한글을 가르치며, 경제적 자립 교육을 실시하는 여자감화원 가정료와 생후 1개월 미만의 기아를 수용하는 영아원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식량난이 극심해지자 무의탁 소녀들을 데리고 철원으로 내려가서 농사를 짓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이후 사회복지사업을 더 확장하여 1942년 무렵 출옥해서 갈 데가 없는 여성을 정서적으로 교화시키고, 한글을 가르치며, 경제적 자립 교육을 실시하는 여자감화원 가정료와 생후 1개월 미만의 기아를 수용하는 영아원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식량난이 극심해지자 무의탁 소녀들을 데리고 철원으로 내려가서 농사를 짓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8.15 광복 후, 1945년 8월 유억겸을 중심으로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가 조직될 때 평의원으로 참가했다. 10월 모교인 경기공립고등여학교 교장을 맡았고, 11월에는 조선교육심사위원회 제5분과위원회 위원(중등교육 담당)에 임명되었다. 1946년 8월 미국의 교육 실태를 참고해 국내 교육제도의 근간을 마련한다는 취지로 파견된 조선교육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에 다녀왔다. 그 해 9월 미군정청에 부인국 설치를 건의해 미군정 보건후생부 초대 부인국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여담으로 이때 그녀의 언니인 고봉경은 미군정 경무국 초대 여경과장을 지냈다. 1947년 3월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범아세아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고, 1949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 대학교와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약 1년간 머물면서 인구 문제를 연구했다. 그 뒤 영국 UN협회 초청으로 1950년 여름부터 1956년 초까지 영국에 머물렀다. 영국 체류 일정을 마치고 난 후 다시 미국으로 가서 사회학을 연구했다. 귀국 후, 1957년 4월부터 1960년 3월까지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근무했고, 1958년 4월 사회학과장을 맡으면서 재임기간 동안 여성사회학자를 양성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1958년 3월 대한어머니회를 창립하고 수석최고위원(지금의 회장)에 선임되었으며, 그 해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조직한 재단법인 정의학원의 이사로 활동했다. 1961년부터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이후 2000년까지 종신회원 겸 원로회원으로 활동했다. 1961년 4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서울여자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학장에 취임했다. 5.16 군사정변 직후, 같은 해 11월 재건국민운동본부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고, 1963년 대한소녀단연합회 회장과 국제연합 한국협회 이사 겸 부회장을 맡았으며, 1968년 국민교육헌장 제정위원으로 활동했다. 1971년 문교부 교육정책심의위원, 1973년 11월 국어순화운동전국연합회 회장, 1981년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상임위원, 1983년 순국열사 김마리아 기념사업회 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84년 4월 서울여자대학교 명예학장을 거쳐 1989년 3월 명예총장이 되었으며 2000년 11월까지 재임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1963년 광복18주년 문화포장(학술부문), 1970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고, 1985년 5.16 민족상(교육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0년 11월 2일 향년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의 가족은 4대째 개신교를 믿어온 집안이었으며, 상당히 미국 유학파 출신들이 많았다. 조부 고학윤은 미국인 선교사 통역이었고, 아버지 고명우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세브란스병원 의사로 활동했으며, 미국 유학을 다녀와서 영어에 능숙했다. 언니 고봉경은 미국에서 피아노 전공을 하고, 국내에서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피아노 교수를 지냈으며, 해방 이후 미군정 경무국의 초대 여경과장을 지냈다. 1950년 6.25 전쟁 발발 직후 아버지 고명우와 언니 고봉경은 모두 납북되었다. 외가는 황해도 송천에서 기독교를 일찍 받아들였고 많은 지식인을 배출한 가문으로 어머니 김세라는 정신여학교 1회 입학생으로 신교육을 받았다. 당고모는 본인과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독립운동가 김마리아이다.
- 인도기행 (1949) 고황경
- KOREA THROUGH BRITISH EYES (1952)
- 구라파 기행 (1959)
- 한국농촌가족의 연구 (1963) 고황경
- 걸어온 열돐 (1975)
- 오늘의 기도 (번역물) (1978)
- 지도자 수첩 (1979)
- 여성과 사회 (1984)
- 뜻있는 삶 (1985)
- 고황경박사 설훈집 Ⅰ, Ⅱ, Ⅲ (1989)
- 연설 - 통제 없는 자유는 절대 없다 ?고황경
- 2002년 대한민국 국회가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으며, 같은 해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명단에도 수록되었다.
[1] 한국인 여성으로는 송복신, 김활란에 이어 세번째 박사 학위 소지자가 된 셈이다.[2] 現 연희동과 동교동 근처.[3] 우측에 있는 인물. 해당 사진이 김활란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4] 회장은 그 경술국적의 매국노로 유명한 윤덕영의 아내 김복수가 맡았다. 친일 기업인 박흥식의 부인 등이 참여한 이 단체는 금비녀까지 바치면서 일제의 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이러한 금붙이 헌납 외에도 황군 환송, 총후 가정의 격려 등의 전쟁 협력 활동을 이어나간 것으로 알려진다. 고황경처럼 해방 이후 교육인으로 명성을 떨쳤던 김활란, 송금선, 이숙종, 조기홍, 서은숙도 이 단체에 간사와 발기인 등으로 참여했다.[5] 1938년 조선총독부가 중일전쟁의 지원을 선전하기 위해 제작한 영상에서 애국금차회의 활동 장면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연설을 하는 고황경의 모습이 찍히기도 했다. 상단에 올려진 사진이 바로 그 장면이다.[6] 이기붕의 아내.[7] 8월 29일 임전대책협력회로 개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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