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12

「在日コリアン文学」の始源としての金達寿文学

 「在日コリアン文学」の始源としての金達寿文学 :

その総合的研究

メタデータ 言語: Japanese 出版者: 

公開日: 2015-06-03 キーワード: 

作成者: 廣瀬, 陽一メールアドレス: 所属: 

URL https://doi.org/10.24729/00002532

 

廣瀬陽一「「在日コリアン文学」の始源としての金達寿文学──その総合的研究」要旨 

 

本稿は、戦後日本の在日朝鮮人を代表する金達寿(キムダルス)の知的活動を総合的に考察し、そのアクチュアリティーを提示するものである。彼の本格的な知的活動は、日本の敗戦=〈解放〉後の 1946 年 4 月に創刊され、彼が編集長をつとめた日本語総合雑誌『民主朝鮮』に、日本語で「後裔の街」などの小説を発表することから始まった。その後も彼は次々と小説を発表し、「在日朝鮮人文学」というものの存在を日本社会に認知させるのに重要な役割を果たした。さらに 50 年代から 60 年代にかけては、新日本文学会などに属しながら、リアリズム研究会などの文学運動を独自に主導した。だが 70 年前後を境に、活動領域が文学から古代史研究へと移り、文学活動は「行基の時代」(78~81 年)で終わった。彼はその後、死去するまで古代史研究に没頭した。 

また彼は、特に在日朝鮮人知識人の少なかった 60 年代半ばごろまでは、日韓・日朝関係や韓国・北朝鮮関係で何か事が起こると、たびたび発言を求められた。金嬉老(キムヒロ)事件では特別弁護人を務め、韓国の詩人・金芝河(キムジハ)の投獄と死刑判決に対しては抗議のハンストを行った。この他にも、『民主朝鮮』から『季刊青丘』まで、様々な雑誌の編集長や編集委員をつとめた。これらの活動をとおして、彼は多くの日本人の目を、韓国・北朝鮮や在日朝鮮人に向けさせ、理解を促す架け橋の役割を担った。 

彼の活動はこのように、極めて多様な領域にわたっている。しかし現在まで、彼に関する研究は小説を個別に考察するにとどまり、彼の知的活動全体を射程に入れた議論はなされていない。そこで本論は彼の知的活動を①文学、②社会主義を標榜する国家や組織との関わり、③日本古代史、の 3 つに分類して考察した。その上で、彼が文学や古代史という特定の学問領域で活動した作家や古代史家ではなく、学問領域や党派を互いに独立させ自己完結的なものにしている理論的基盤に対して根本的な異議申し立てを行うことで、「日本と朝鮮との関係を人間的なものにする」ことを生涯の課題とした知識人だったことを明らかにし、彼の知的活動の全体像とそのアクチュアリティーを提示した。 

本論は序論と結論および 4 章から成り、各章は 2~3 節に細分化される。 

第 1 章は 2 節に分けられる。第 1 節では金達寿の生涯と活動を概観した。第 2 節では日本と韓国で発表された同時代批評や学術論文を、①日本人が日本国内で発表したもの、② コリアンが日本国内で発表したもの、③韓国国内で発表されたもの、に分類し、それぞれ整理した。 

第 2 章は文学活動に焦点をあてて考察したもので、3 節に分かれる。第 1 節では、金達寿が〈解放〉後まもなく提唱した、「日本語で書かれる朝鮮文学」概念をとりあげて論じた。彼はこの概念によって、在日朝鮮人が〈解放〉後もあえて日本語で創作活動をすることについて、一方では「朝鮮文学」の可能性を広げるものであり、他方では日本の左翼勢力との連帯を可能にするものと主張した。第 1 節では、これをうけて、この概念が意味するものを考察した上で、この概念が 40~50 年頃にかけての彼の文学活動にどのように実践されたか/されなかったかを問題にした。 

第 2 節では、金達寿の文学を本質的に志賀直哉から学んだ、自然主義リアリズムの文学の系譜に位置づける従来の通説を批判し、実際には彼が 50 年代を通じていかに志賀文学や自然主義リアリズムから訣別すべく闘争したかを論じた。さらに「日本の冬」を取りあげ、50 年初頭に起こった日本共産党内の激烈な権力闘争に巻きこまれた体験から、彼が日本と朝鮮、日本人と朝鮮人が対立関係ではなく、対立させられた関係にあるという認識を得たことを示した。その上で「朴達(パクタリ)の裁判」に焦点をあて、この小説が 50 年代をつうじた金達寿の文学的・政治的闘争の大きな成果であることを明らかにした。 

第 3 節では、「朴達の裁判」発表前後から本格化したリアリズム研究会の活動に焦点をあて、その活動をつうじて彼の文学が変質していった過程を論じた。まずリアリズム研究会結成の経緯や、研究会をめぐる同時代の状況を概観し、研究会が全国的な文学団体へと拡大していきながらも、次第に共産党の影響下に置かれるようになったことを明らかにした。その上でその悪影響が金達寿の文学活動に及んだことを、「公僕異聞」を取りあげて考察した。そして最後に、彼がこの活動から何を学んだかを示した。 

第 3 章では国家や組織と金達寿との関係を問題にした。彼は朝連から総連にいたるまで一貫して、反韓国・親北朝鮮系の社会主義組織に所属しつづけた。しかし 81 年 3 月の訪韓以後、急速に韓国社会の礼讃に転じた。本章ではこの態度変更を、北朝鮮や総連との訣別と、韓国への接近という 2 つの過程に分けて論じた。 

まず第 1 節では、①『朝鮮』に対する総連側の批判キャンペーン、②帰国事業への関わり、③講演会中止事件から訣別、という 3 つの局面を取りあげ、総連と彼との軋轢が深まっていくとともに、北朝鮮や総連に幻滅して訣別する過程を明らかにした。そして第 2 節では、アメリカ占領軍の権力を背景に、李承晩(イスンマン)が〈親日派〉を結集させて韓国国家を樹立させた過程を同時代的に見聞している金達寿が、韓国をどのように表象し、攻撃してきたかを整理した。その上で訪韓にいたる経緯と、訪韓後に浴びせられた周囲からの批判とそれに対する金達寿たちの反論について考察した。これをとおして、彼の北朝鮮から韓国への態度変更が韓国社会の無条件の肯定ではなく、また社会主義から民族主義への態度変更とイコールでもなかったことを示した。 

第 4 章は、70 年前後から本格化した、金達寿の古代史研究に焦点をあてて考察したもので、3 節にわけられる。第 1 節ではまず日韓における彼の古代史研究をめぐる状況と、彼が古代史研究に関わっていく過程を整理した。その上で、『日本の中の朝鮮文化』を国木田独歩の「武蔵野」と比較して、金達寿の文学活動と古代史研究とが、互いに無関係ではなく、いずれも文学や古代史という学問領域を成立させている言説の根拠を問いただすという点で、連続性が認められることを論じた。さらに彼の古代史研究が、各地の郷土史家や古代史愛好家と共同作業的に行われた点で、リアリズム研究会などの文学活動で果たせなかった、大きな飛躍となる運動の在り方を彼にもたらしたことを明らかにした。 

第 2 節では、金達寿が〈皇国史観〉を支える鍵と考えた、「帰化人」の語が意味するものをどのように問いなおし、日本人自身の問題へと転回させようとしたかを論じた。一般的に金達寿は、「帰化人」への差別的な認識が現代の在日朝鮮人差別につながるからこの言葉を使うべきではなく、彼らを「渡来人」と呼ぶべきと主張したと考えられている。しかし実際には彼は、在日朝鮮人は「帰化人」でも「渡来人」でもない人々だと主張しつづけた。本節ではこの発言を踏まえて、古代における「帰化人」の役割を積極的に評価した戦後日本の古代史研究者による「帰化人」概念をあらためて考察した。そして金達寿が「帰化人」ではなく「渡来人」の語を主張したことを、彼らへの差別が日本人自身への自己差別につながることを日本人に啓蒙し、それをとおして日本と朝鮮、日本人と朝鮮人との関係を人間的なものに変える戦略だったことを明らかにした。 

第 3 節では金達寿の最後の小説となった「行基の時代」を取りあげ、行基の生涯をとおしてあらためて問い直そうとした〈社会主義〉を、小説連載中の出来事である訪韓前後の金達寿の態度変更と重ねて論じることで、彼が最後に到達した〈社会主義〉が何であったかを考察した。まず「行基の時代」に描かれた行基の姿を、①文献学的・考古学的研究から得られた歴史的事実、②金達寿が歴史的事実と考えた「史実」、③彼の創作、に分類した。そして彼の小説には、学術研究から見て、不確実な事柄や創作が多数混じっていることを指摘し、それにもかかわらず、古代における「大和朝廷」の成立と朝廷内の権力闘争が、当時の朝鮮半島情勢と密接な関係にあることを描いた点で、現在から見て先駆的な視点が見られることを明らかにした。そして出家した行基が民衆とともに社会事業を行うようになったことと、金達寿の文学運動から古代史研究への転回とが平行関係にあることを示し、「行基の時代」には「朴達の裁判」で開示された〈飛躍〉と同じものが認められることを考察した。その上で、しかし金達寿は、訪韓後に日本人の友人たちから「よく生きて帰ってこられた」とねぎらいの言葉をかけられたことに衝撃を受け、新たな認識を練り上げていくことよりも、天皇の「お言葉」を利用してでも韓国に対する日本人の悪イメージを払拭することを優先してしまったことを問題にした。そしてこのことが、金達寿の〈社会主義〉の理念の変質をもたらし、彼自身も日本社会と在日コリアン社会の両方から忘れ去られることにつながったことを指摘した。 

結論では、2~4 章で展開した議論を総合して、あらためて金達寿の知的活動のもつアクチュアリティーと限界性を示した。彼の知的活動の根底には一貫して、民族の違いや学問領域の壁、専門家とアマチュアの隔たりを超える普遍的な批判精神があったことを肯定的に評価した。それとともに、彼の議論の中には資本主義への批判や、日本と朝鮮との関係を中華帝国との関係の中で考察する視点などが、不足ないし欠如しているという限界もあることを示した。その上で、日韓関係が悪化の一途をたどっている現在こそ、日本と朝鮮、日本人と朝鮮人との関係を人間的なものにしていくために、その道すじを指し示した金達寿の知的活動に、あらためて目を向けることの重要性を提示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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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코리안 문학」의 시원으로서의 금달 수문학 :


그 종합 연구


메타데이터 언어: Korean 발행인: 


게시일: 2015-06-03 키워드: 


만든 사람: 히로세, 요이치 메일 주소: 소속: 


URL https://doi.org/10.24729/00002532


 


히로세 요이치 「「재일 코리안 문학」의 시원으로서의 금달 수문학──그 종합적 연구」요지 


 


본고는 전후 일본 재일조선인을 대표하는 김달수의 지적활동을 종합적으로 고찰하고 그 액추어리티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의 본격적인 지적 활동은 일본의 패전=<해방> 이후 1946년 4월에 창간되어 그가 편집장을 맡은 일본어 종합잡지 '민주조선'에 일본어로 '후예의 거리' 등의 소설을 발표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 후도 그는 잇달아 소설을 발표하고 '재일조선인문학'이라는 것의 존재를 일본사회에 인지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50년대부터 60년대에 걸쳐서는 ​​신일본문학회 등에 속하면서 리얼리즘연구회 등의 문학운동을 독자적으로 주도했다. 하지만 70년 전후를 경계로 활동 영역이 문학에서 고대사 연구로 옮겨 문학 활동은 '행기의 시대'(78~81년)로 끝났다. 그는 그 후 죽을 때까지 고대사 연구에 몰두했다. 


또 그는 특히 재일조선인 지식인이 적었던 60년대 중반까지는 한일·일조관계나 한국·북한관계에서 무언가가 일어날 때마다 발언을 요구받았다. 김희로(김희로) 사건에서는 특별 변호인을 맡았고, 한국 시인 김시하(김지하)의 투옥과 사형 판결에 대해서는 항의 헌스트를 했다. 이 외에도 '민주조선'부터 '계간 아오카'까지 다양한 잡지의 편집장과 편집위원을 맡았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그는 많은 일본인의 눈을 한국·북한과 재일조선인에게 향하게 해 이해를 촉구하는 가교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의 활동은 이처럼 매우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에 관한 연구는 소설을 개별적으로 고찰하는 것에 머무르고 그의 지적 활동 전체를 사거리에 넣은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본론은 그의 지적활동을 ①문학, ②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국가나 조직과의 관계, ③일본고대사의 3가지로 분류하여 고찰했다. 게다가 그가 문학이나 고대사라는 특정한 학문영역에서 활동한 작가나 고대사가가 아니라 학문영역이나 당파를 서로 독립시켜 자기완결적인 것으로 하고 있는 이론적 기반에 대해 근본적인 이의신 일어나서 “일본과 조선과의 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한다”는 것을 평생의 과제로 한 지식인이었음을 밝혀 그의 지적활동의 전체상과 그 액추어리티를 제시했다. 


본론은 서론과 결론과 4장으로 구성되며, 각 장은 2~3절로 세분화된다. 


1장은 2절로 나뉜다. 제1절에서는 금달수의 평생과 활동을 개관했다. 제2절에서는 일본과 한국에서 발표된 동시대 비평과 학술논문을 ①일본인이 일본 국내에서 발표한 것, ②코리안이 일본 국내에서 발표한 것, ③한국 국내에서 발표된 것,로 분류하여 각각 정리했다. 


제2장은 문학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고찰한 것으로, 3절로 나누어진다. 제1절에서는 김달수가 <해방> 곧 제창한 '일본어로 쓰여진 조선문학' 개념을 논의했다. 그는 이 개념에 따라 재일조선인이 <해방> 후에도 굳이 일본어로 창작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 한편으로는 '조선문학'의 가능성을 넓히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의 좌익세력과의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제1절에서는 이를 받아 이 개념이 의미하는 것을 고찰한 후, 이 개념이 40~50년경에 걸친 그의 문학활동에 어떻게 실천되었는가/되지 않았는지를 문제로 했다. 


제2절에서는, 금달수의 문학을 본질적으로 시가 나오야로부터 배운, 자연주의 리얼리즘의 문학의 계보에 자리매김하는 종래의 통설을 비판해, 실제로는 그가 50년대를 통해서 어떻게 시가 문학이나 자연주의 리얼리즘으로부터 따로 따로 투쟁했는지를 논하고. 게다가 '일본의 겨울'을 취해, 50년 초에 일어난 일본 공산당내의 격렬한 권력 투쟁에 휘말린 체험으로부터, 그가 일본과 조선, 일본인과 조선인이 대립 관계가 아니고, 대립된 관계에 있다는 인식을 얻은 것을 나타냈다. 게다가 ‘박달리의 재판’에 초점을 맞추고 이 소설이 50년대를 넘어선 김달수의 문학적·정치적 투쟁의 큰 성과임을 밝혔다. 


제3절에서는 '박달의 재판' 발표 전후부터 본격화된 리얼리즘 연구회의 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그 활동을 감안하여 그의 문학이 변질해 가는 과정을 논했다. 우선 리얼리즘 연구회 결성의 경위와 연구회를 둘러싼 동시대의 상황을 개관해 연구회가 전국적인 문학단체로 확대해 나가면서도 점차 공산당의 영향하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을 밝혔다. 게다가 그 악영향이 김달수의 문학활동에 미친 것을 공공이문을 들고 고찰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이 활동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보여주었습니다. 


제3장에서는 국가나 조직과 금달수와의 관계를 문제로 했다. 그는 조련에서 총련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반한국·친북계 사회주의 조직에 소속을 이어갔다. 그러나 81년 3월 방한 이후 급속히 한국사회의 예찬으로 돌아갔다. 이 장에서는 이 태도변경을 북한과 총련과의 조별과 한국에의 접근이라는 두 가지 과정으로 나누어 논했다. 


우선 제1절에서는 ① 『조선』에 대한 총련 측의 비판 캠페인, ②귀국사업에 대한 관계, ③강연회 중지사건에서 訣別, 라는 3가지 국면을 취해 총련과 그와의 갈등이 깊어져가는 것과 동시에 북한이나 총련에 환멸하고 과별한다. 그리고 제2절에서는 미국 점령군의 권력을 배경으로 이승만이 <친일파>를 결집시켜 한국국가를 수립시킨 과정을 동시대적으로 보고 있는 김달수가 한국을 어떻게 표상해 공격해 왔는지를 정리했다. 그 위에 방한에 이르는 경위와 방한 이후 받은 주위로부터의 비판과 그에 대한 김달수들의 반론에 대해 고찰했다. 이를 통해 그의 북한에서 한국으로의 태도변경이 한국사회의 무조건 긍정이 아니고, 또 사회주의에서 민족주의로의 태도변경과 이콜도 아니었음을 보여주었다. 


제4장은 70년 전후부터 본격화된 금달수의 고대사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고찰한 것으로, 3절에 나온다. 제1절에서는 우선 한일에서 그의 고대사 연구를 둘러싼 상황과 그가 고대사 연구에 관여해 나가는 과정을 정리했다. 게다가 '일본 안의 조선문화'를 쿠니키다 독보의 '무사시노'와 비교해 김달수의 문학활동과 고대사연구가 서로 무관하지 않고 모두 문학과 고대사라는 학문영역을 성립시키고 있는 언설의 근거를 묻는다는 점에서 연속성이 인정된다는 것을 논했다. 게다가 그의 고대사연구가 각지의 향토사가나 고대사 애호가와 공동작업적으로 진행된 점에서 리얼리즘연구회 등 문학활동에서 완수할 수 없었던 큰 비약이 되는 운동의 존재 방식을 그에게 가져온 것을 밝혔다. 


제2절에서는 김달수가 <황국사관>을 지지하는 열쇠라고 생각한 '귀화인'의 말이 의미하는 것을 어떻게 묻고, 일본인 자신의 문제로 전회시키려고 했는지를 논했다. 일반적으로 김달수는 '귀화인'에 대한 차별적인 인식이 현대의 재일조선인 차별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되며, 그들을 '도래인'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재일조선인은 '귀화인'도 '도래인'도 아닌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본절에서는 이 발언을 근거로 고대에 있어서의 「귀화인」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평가한 전후 일본의 고대사 연구자에 의한 「귀화인」개념을 다시 고찰했다. 그리고 김달수가 '귀화인'이 아니라 '도래인'의 말을 주장한 것을 그들에게의 차별이 일본인 자신에게의 자기차별로 이어지는 것을 일본인에게 계몽하고, 그것을 통해 일본과 조선, 일본인과 조선인과의 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바꾸는 전략이었다는 것을 밝혔다. 


제3절에서는 김달수의 마지막 소설이 된 ‘행기의 시대’를 들고, 행기의 생애를 거쳐 다시 묻고자 했던 <사회주의>를, 소설 연재중의 사건인 방한 전후의 금달수의 태도 변경과 거듭해 논하는 것으로, 그가 마지막에 도달했다<사회. 우선 ‘행기의 시대’에 그려진 행기의 모습을 ①문헌학적·고고학적 연구에서 얻은 역사적 사실, ② 김달수가 역사적 사실이라고 생각한 ‘사실’, ③ 그의 창작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그의 소설에는 학술연구에서 보고 불확실한 일이나 창작이 다수 섞여 있는 것을 지적하고, 그럼에도 고대에 있어서의 「야마토 조정」의 성립과 조정내의 권력투쟁이 당시의 한반도 정세와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드러낸 점에서 현재부터 그리고 출가한 행기가 민중과 함께 사회사업을 하게 된 것과 김달수의 문학운동에서 고대사 연구로의 전회가 평행관계에 있음을 보여 ‘행기의 시대’에는 ‘박달의 재판’에서 공개된 <비약>과 같은 것이 인정된다는 것을 고찰했다. 게다가 김달수는 방한 후에 일본인 친구들로부터 '잘 살아 돌아왔다'고 부끄러운 말을 걸었던 것에 충격을 받고 새로운 인식을 반영해 나가는 것보다 천황의 '말'을 이용해도 한국에 대한 일본인의 악영상을 불식하는 것을 우선시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김달수의 <사회주의>의 이념의 변질을 가져왔고, 그 자신도 일본 사회와 재일 코리안 사회 모두에서 잊혀지는 것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지적했다. 


결론에서는, 2~4장에서 전개한 논의를 종합해, 다시 김달수의 지적 활동이 가지는 액츄어리티와 한계성을 나타냈다. 그의 지적 활동의 근본에는 일관되게, 민족의 차이나 학문 영역의 벽, 전문가와 아마추어의 격차를 넘는 보편적인 비판 정신이 있었음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와 함께 그의 논의 중에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나 일본과 조선과의 관계를 중화제국과의 관계 속에서 고찰하는 시점 등이 부족하거나 부족하다는 한계도 있음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한일관계가 악화의 일도를 따르고 있는 현재야말로 일본과 조선, 일본인과 조선인과의 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해 나가기 위해 그 길줄기를 가리킨 김달수의 지적활동에 다시 한번 눈을 돌리는 것의 중요성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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