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23

좌우합작을 시도한, 민족의 선각자 김규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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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합작을 시도한, 민족의 선각자 김규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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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엄청나게 가난하여, 영양실조로 죽을뻔 한 김규식

고아원 시절 김규식
1881년 경상남도 동래군에서 동래군수 종사관 김지성(金智性)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
다고37한다. 아버지4 김지성은, 유학까지 다녀온 인텔리였으나 민씨 정권의 대일본 의
존 정책을 비난하다가 귀양을 갔고, 어머니 마저도 사망하여,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됐
다.
친척들도 형편이 안 되어, 김규식을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목사”의 고아원에다가
그를 데려다 주었지만, 언더우드 목사의 고아원은 8세 미만의 어린아이는 양육하기
어렵다 하여 다시 되돌려보낸다. 그 후 김규식은 삼촌들이 양육했지만, 가난한 삼촌
들은 그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그는 굶주림으로 영양 실조와 열병에 걸려 죽기 직
전까지 갔다.
언더우드 목사는 아이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다는 소문을 듣고 김규식을 찾아갔다
고 한다. 아이가 몹시 아픈데도 돌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딱한 소식을 듣게 된 것
이다.
언더우드 목사 발견 당시 너무 굶주렸던 어린 김규식은 먹
을 것을 달라고 울부짖으며 벽지를 뜯어 삼키고 있었다. 언
더우드 목사는 아이가 너무 딱하고 불쌍해 고아원에서 어
린 아이를 돌보는 것이 어려움에도 결국 데려가기로 결정
한다
김규식은 조선의 첫 고아원 겸 예수학당(경신학교)의 학생이 됐다. 경신학교에서 영
어와 수학, 라틴어, 신학, 과학 등을 배웠다.

2.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에 나서게 되다.

젊은시절의 김규식
1894년 한성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에 1기생으로 입학하여 영어를 배웠다. 이
시기 서재필의 “독립신문 기자”로 잠시 일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896년 미
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는데, 그때 당시 김규식의 나이는 경우 17살이었다.
1897년 버지니아 주에 있는, 루터교회 계열 인문대학 “로노크 대학 부속 고등학
교”에 입학하여 연설 경연 대회에서 최고상을 받았으며, 1900년 “로노크 대학”으로
진학, 문학 동호회 “데모스테니언 문학회의 회장”이자 1903년 전체 3등으로 학사를
취득했다.
대학 재학중, 의친왕(義親王)을 만나 친분을 갖게된다.
그래서, 의친왕의 상해망명 시도당시, 김규식의 모종의 역
할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당시 김규식은 임시 정부의 주요 인사였다.

1903년 대학 졸업 직후 미국 뉴저지 주의 프린스턴 대학교(Princeton University) 대
학원 석사과정에 입학, 1905년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프린스턴 대학원
측에서는 그가 박사 학위 과정에 진학하면 장학금을 주겠다고 했으나 그는 "조국의
앞날이 염려된다"는 한 마디를 남긴 채 귀국했다.
조선에 귀국 후 에는, YMCA학교 학생부 담당 겸 간사(학관의 학감)를 지낸다. 뛰어
난 영어 실력 덕분에 경술국치 이후에도, 조선총독부 학무국으로부터 장학금과 도쿄
외국어대학 영어 교수직을 제의받으나 거절한다.

3. 중국에 망명하여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가담하다.

파리강화회의에 함여한 김규식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군사학교 설립, 독립군단 창설을 추진하려다 실패하였
다.
1918년에는 상하이로 건너와, 여운형 등과 함께 “신한청
년당”을 창당하였고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1919년의 파
리 강화 회의에 참석하려했으나, 회의 주최국인 프랑스 외
무성 측으로부터 정부 자격이 아니면 참여할 수 없다는 말
을 듣자, 그는 정부 수립(임시정부)의 필요성을 알렸다.
이에 따라 독립 운동가 들은 만세 운동을 준비하여 실행에
옮겼고, 3.1 운동을 기회로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된
다. 그리고 임시정부가 수립이 되자, 1919년 4월 그는 현
지에서 상해 임시정부의 외무총장으로 선임되었다.

파리의 신문에 기고한 김규식의 기사
1923년 국민 대표 회의에서 창조파(임시정부를 새롭게 만들자)와 개조파(임시정부
를 부분적으로 개조하자)를 놓고 갈등할 때, 김규식은 신채호와 함께 창조파의 입장
에 섰다.
그 뒤 임시정부에 실망감을 느껴, 이승만을 성토하고 임정을 떠나 1920년대초 고려
공산당 후보 당원으로 가입하고, 1922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동방 노력자 대회
(극동 피압박자 민족 대회)에 한국 대표 의장 자격으로 참석하여 영국과 프랑스, 미국
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동방 피압박 민족 대회의 회장직을 맡으면서, 기관지 “동방민족”을 창간하고, 1927
년 텐진(天津)으로 옮겨가 북양대학(北洋大學)의 영문학 교수로 초빙되어, 1929년까
지 교수 생활로 자녀와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러나 교수 생활로 벌어들이는 수입은
한계가 있었고, 이조차 일본 영사관 경찰의 눈을 피해 다니느라 일정하지도 못하여
생계는 어려웠다.

4. 분열된 독립운동을 통합하기 위한, "민족 유일당 운동"에 참여하다.

김규식의 가족
1930년 8월 다시 임시 정부에 입각하여 임정 국무 위원 겸 학무장에 선임되고, 그해
11월 임시 정부 국무 위원에 재선됐다.
1932년 4월 상해 윤봉길 의거 직후, 김원봉이 남경 중앙 정치 학원에 한인 특별반을
설치하자 김규식은 남경 중앙 정치 학원 한인 특별반의 군사 교관이 되었다. 1932년
11월부터 1935년 10월까지 임시 정부의 송병조·양기탁 등의 요청으로 국무 위원에
취임하였다. 1932년 겨울 '중·한 민중대동맹', 대일 전선 통일 연맹, 한국 광복 동지
회 등의 단체를 결성, 조직하였으며 이후 항일 독립을 위해 민족 정당의 통합을 역설
하였다. 그해 10월 12일 상해에서 한독당의 이유필, 송병조, 김두봉, 조선 혁명당의
최동오, 한국 혁명당의 윤기섭, 신익희, 의열단의 한일래, 박건웅 등과 함께 "민족 유
일 당 창당 회담"을 가졌다.

5. 임시 정부 재 입각
1940년 민족 유일당 운동을 성사시키기 위해 김구 등을 만나 회담을 하였으나, 의견
차이로 유일당 운동은 실패하고, 그 대신 김구와 “항일 공동 연합 전선 설립”을 결정
하여 민족 혁명당의 임시 정부 입각을 결정한다.
1940년부터 1947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냈으며 주로 외교 활동을 전개해나갔다.

6. 광복후 정치 활동을 시작하다

광복 후에는 45년 12월 임시 정부 인사 자격으로 귀국하였고, 제1진의 한사람으로 김
포 비행장으로 입국했다.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 한반도 신탁 통치 안
이 보도되자 김규식은 처음에는 신탁 통치에 반대하다가
모스크바 3상 회의 전문을 입수하면서 부분적 찬탁을 동의
했다.
김규식은 국제적 합의를 무시할 수 없고 일단 통일된 임시 정부를 구성하여 임시 정
부가 신탁 통치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부터 그는 반탁 세력에 의한 테러 위협에 시달려 수시
로 거처를 옮겨야했다. 김규식을 암살하려던 자객들이 김
규식의 자택인 삼청장의 담을 넘다가 걸려서 도주하는 일
도 있었다.

7. 민족의 통합을 위하여 "좌우 합작 운동과 남북 협상"에 참여하다.
좌우 합작은 독립을 위한 제1단계요. 이 단계를 밟지 않으면 둘째 단계인 독립을 얻
을 수 없다면 내가 희생하겠소. 당신이 나를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들어댈 것도 알고
있소. 또 떨어뜨린 후에는 나를 짓밟을 것도 알고 있소. 그러나 나는 독립 정부를 세우
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하겠소. 내가 희생된 다음에 당신이 올라서시오.
1946년 5월 미소공위 결렬로 분단 위기가 고조되자 여운형과 함께 좌우 합작 운동을
시작한다. 처음에 김규식은 여운형에 비해 좌우 합작에 소극적이었다. 김규식은 좌
우 합작으로 인한 우익의 분열을 걱정했다. 미군정의 지지는 김규식이 태도를 바꾼
전환점이었다. 미군정은 이승만과 김구, 한국민주당에게 좌우 합작을 지지하는 성명
을 발표하게 하고 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도 지지를 선언했다. 덕분에 좌우 합작 운
동은 급진전되어 그 해 7월 좌우 합작 위원회가 결성됐다. 김규식은 좌우 합작 위원회
를 북한의 소련군정과 좌익 세력과의 통일 협상을 담당하는 대표 기구로 성장시키려
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과 한국 민주당의 비타협적 태도로 좌
우 합작 운동은 어려움을 맞는다. 1947년 5월, 미소 공위
가 재개되자 김규식은 중간파를 결집하는데 애쓴다. 그러
나 우익을 협상에서 배제하려는 소련의 주장으로,
미소 공동위원회는 결렬됐다. 얼마 후 여운형마저 암살되
며 좌우 합작 운동은 실패했다.
이후 중도파를 결속해 1947년 12월, 민족 자주 연맹을 만들어 그 총재가 되었다.
1948년 4월 남한 지역의 단독 총선거에 반대하여 김구와 함께 북한으로 건너가 남북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자 정계를 떠났다. 남북 협상 이후 그는 좌파로 몰렸는
데, 그는 서재필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공산주의자로 몰리는 것에 대한 억울함
을 토로하기도 했다

8. 한국동란 때 북한에 납북되는 김규식 선생

1950년 6.25 전쟁 때 북한군에게 납북되어 12월, 평안북도 만포진이란 곳에서 뇌출
혈, 천식, 동상 등으로 병사했다. 수백만이 슬퍼한 김구의 죽음이나 여운형의 죽음에
비교하면 그의 죽음은 정말로 억울하고 비참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이승만 정부”와 그 이후의 박정희 정권에서는 외면받아
오다가, 1989년에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9. 김규식 선생에 대한 평가와 안타까움
임시 정부 소속이 었음에도, 좌우 합작과 남북 협상에 둘 다 참여한 몇 안 되는 정치인
이 었으며, 러일전쟁을 예견하거나 모스크바 3상회의의 성격을 이해하는 등 외교적
안목이 상당히 뛰어났다. 다만 정치를 주도할 할 만큼 주도력이 약한편이라는 평가
가 있다.

처음에는 좌우 합작 운동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남북 분단과 좌 - 우 정치적 지형이 극단화되어갈수록 이대로 있어서 안된다는 생각
에 좌우 합작운동을 추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일화 하나로 1946년 어느날, 이승만이 김규
식에게 찾아와 좌우 합작을 권하면서 당시로는 큰돈인 50
만원인가를 내놓자, "형님은 대통령이나 하시오. 나는 대
통(장죽 담배)이나 즐기겠소"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
서, 이승만에게 "형님은 나를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들어
댈 것임을 알고있소. 그러나 나는 독립 정부를 세우기 위
해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하겠소"라고 발언했다고 한다.
어학의 천재로 다국어에 능했고 영어를 매우 잘하여서 미군이 놀랄 정도였으며, 임
시 정부 활동 시절에 임정 요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역할도 했다고 한다.
허례허식을 매우 싫어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자신을 지지하던 청년 하나가 찾아와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쓰자 "왜놈들이나 하던 짓 쓸데없이 무엇 하러 하시는가?"
라며 일축했다고 한다.

10. 베트남의 호치민과 김규식 선생과의 일화

김규식과 호치민
프랑스 파리에서 임시 정부 외무 총장이자 파리 위원부 대표로 활동을 할 당시에 호찌민과 친
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호찌민이 김규식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내용의 문건들이 프랑스 정
부 자료에 자세히 담겨있을 정도다. 구체적으로 호찌민을 밀착 감시하던 당시 프랑스 파리의
정보 경찰은 1920년 2월 메모에서 "호찌민이 프랑스에서 기고한 모든 글이 번역돼 중국에서
간행됐는데, 모두 호찌민이 김규식에게 부탁한 것"이라고 적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김규식은
중국 신문의 미국 특파원을 호찌민에게 연결해줘 인터뷰를 주선하기까지 했다. 또한, 당시 중
국에서 발행된 신문에는 호찌민과 김규식이 서로의 집을 방문할 정도로 친밀했다는 정황이
묘사되어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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