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협력의 새 출발은 조세이탄광에서
수정 2025.07.08
조선인 강제동원 현장인 ‘군함도(하시마)’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면서 일본이 했던 약속의 이행 여부를 점검하려던 시도가 불발됐다. 일본이 군함도의 ‘강제노역’ 역사를 제대로 알리지 않고 있는 것을 한국이 의제로 다루려 하자 일본이 표대결까지 불사해가며 무산시킨 것이다. ‘과거사 불(不)사과’라는 ‘아베 독트린’이 일본 관료조직에 견고하게 새겨져 있음을 다시 확인케 한다. 아베 신조 전 총리는 2015년 종전 70주년 담화에서 “우리의 아이나 손자, 그 후 세대의 아이들에게 사과라는 숙명을 계속 짊어지도록 할 수는 없다”고 했다. 고인이 된 아베의 유훈이 아베와 정치색이 다른 이시바 시게루 현 내각에도 면면히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강제동원 배상 문제에서 일본 책임을 면제해준 윤석열이 불법계엄으로 파면돼 ‘한·일 아베 유훈 체제’에 제동이 걸린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3일 기자회견에서 “일본은 앞마당을 같이 쓰는 이웃”이라며 협력을 강조했다. “과거사 문제를 아직 청산하지 못하고 서로 과거사 문제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고 부연했으나 방점은 협력에 찍혔다. 이 대통령의 대일 태도는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주의 파고를 넘기 위해 한·일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제기되는 흐름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미·중 이외 국가들과 연대해 자유무역 운동장을 함께 키울 필요성을 감안하면 한·일 협력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한·일 간에 ‘미래’와 ‘과거’는 같은 무게의 등가물이다. 국가 간 관계, 특히 식민-피식민 관계였던 나라 사이에는 ‘존엄·감정의 균형’이 이익의 균형 못지않게 중요하다. 우격다짐으로 억눌러도 용수철처럼 되튀어 오른다. ‘과거를 딛고 미래로’라는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여전히 한·일관계 대원칙이다. 그러나 윤석열은 ‘과거를 건너뛰고 미래로’ 가려는 일본에 200% 동조해 한국의 항일 역사까지 지우려 했다. 그럼에도 일본은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사도광산 전시관에 ‘강제동원’ 문구를 빼는 등 무성의로 대응했다. 이재명 정부는 윤석열 재임 3년간 일그러진 한·일관계 [?] 를 ‘정상화’할 책무가 있다.
관계 정상화 파트너로 이시바 시게루 총리가 적합한지는 분명치 않다. 과거사에 전향적 인식을 가진 듯하나, 군함도 사태를 보면 이시바도 역대 총리 궤도를 크게 벗어날 것 같진 않다. 오는 20일 참의원 선거에서 집권 자민당이 의석을 잃게 되면 교체론에 휩싸일 수도 있다. 다만 자민당 정권이 계속되는 한 어떤 총리이건 과거사 문제는 한국이 원하는 모양으로 단박에 해결되기는 어려워진 게 현실이다. 그렇다면 장기적 시야에서 차분히 ‘빌드업’해 나가는 접근법도 필요하다.
일본 서부 야마구치현에서 전개되고 있는 한·일 시민 간 협력은 빌드업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지난달 18~19일 야마구치현 우베시 앞바다에서 양국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83년 전 조세이(長生) 해저탄광 붕괴로 수몰된 조선인·일본인 탄부들의 유해를 찾는 수중 수색작업이 펼쳐졌다. 1942년 2월3일 낙반사고로 조선인 136명과 일본인 47명 등 183명이 해저 갱도에 그대로 갇혔다. 조선인 136명이 귀향하지 못한 채 차가운 바닷속에 누워 있는 사실을 알게 된 이노우에 요코 등 일본 시민들이 1991년 ‘혹시나’ 하고 수몰자 명부에 적힌 주소로 국제우편을 보냈다가 한국 유족들과 연락이 닿았다. 시민들은 2013년 추모비 건립 후 지난해 82년 만에 갱도 입구를 찾아냈고, 지난달까지 4차례 유골 수색 작업을 벌여왔다. 하지만 갱도 중간이 무너진 탓에 유골 수색은 난항을 겪고 있다.
이노우에는 어린 시절 고향인 나가노현 히라오카 댐 건설에 동원됐다가 숨진 조선인들의 유골이 계곡에 함부로 버려진 사실을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 충격이 30년 넘도록 조세이탄광 조선인들을 추모하는 동력이 됐다. 일본 정부가 유골 발굴에 미온적 태도를 보이자 한·일 시민들의 모금으로 땅에 묻힌 채 80여년간 닫힌 갱도를 직접 찾아내는 열정은 놀라울 정도다. 일본 사회에 이런 귀한 마음을 지닌 이들이 여전히 버티고 있는 것에 안도한다.
유골 반환은 북한과 미국 같은 적성국 간에도 이뤄지는 인도적 조치다. 강제동원 조선인 유골 반환은 2004년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합의한 사안이기도 하다. 이시바 총리도 조세이탄광 건에는 전향적이다. 이재명 정부가 유골 수습 협력을 정식으로 요청해 이시바 정부에 힘을 실어줄 필요가 있다. 인도적 어젠다는 새로운 한·일 협력의 좋은 스타트 지점이 될 수 있다.
일본 서부 야마구치현에서 전개되고 있는 한·일 시민 간 협력은 빌드업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지난달 18~19일 야마구치현 우베시 앞바다에서 양국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83년 전 조세이(長生) 해저탄광 붕괴로 수몰된 조선인·일본인 탄부들의 유해를 찾는 수중 수색작업이 펼쳐졌다. 1942년 2월3일 낙반사고로 조선인 136명과 일본인 47명 등 183명이 해저 갱도에 그대로 갇혔다. 조선인 136명이 귀향하지 못한 채 차가운 바닷속에 누워 있는 사실을 알게 된 이노우에 요코 등 일본 시민들이 1991년 ‘혹시나’ 하고 수몰자 명부에 적힌 주소로 국제우편을 보냈다가 한국 유족들과 연락이 닿았다. 시민들은 2013년 추모비 건립 후 지난해 82년 만에 갱도 입구를 찾아냈고, 지난달까지 4차례 유골 수색 작업을 벌여왔다. 하지만 갱도 중간이 무너진 탓에 유골 수색은 난항을 겪고 있다.
이노우에는 어린 시절 고향인 나가노현 히라오카 댐 건설에 동원됐다가 숨진 조선인들의 유골이 계곡에 함부로 버려진 사실을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 충격이 30년 넘도록 조세이탄광 조선인들을 추모하는 동력이 됐다. 일본 정부가 유골 발굴에 미온적 태도를 보이자 한·일 시민들의 모금으로 땅에 묻힌 채 80여년간 닫힌 갱도를 직접 찾아내는 열정은 놀라울 정도다. 일본 사회에 이런 귀한 마음을 지닌 이들이 여전히 버티고 있는 것에 안도한다.
유골 반환은 북한과 미국 같은 적성국 간에도 이뤄지는 인도적 조치다. 강제동원 조선인 유골 반환은 2004년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합의한 사안이기도 하다. 이시바 총리도 조세이탄광 건에는 전향적이다. 이재명 정부가 유골 수습 협력을 정식으로 요청해 이시바 정부에 힘을 실어줄 필요가 있다. 인도적 어젠다는 새로운 한·일 협력의 좋은 스타트 지점이 될 수 있다.
24.09.23
조선인 136명 수몰된 장생 탄광, 82년 만에 열릴까
일본 시민단체 '장생 탄광 물비상을 역사에 새기는 회', 수몰사고 희생자 유골 발굴 에 나서
김지운(jioon73)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065071

▲야마구치현 우베시 토코나미 해안의 장생 탄광 피야(배기통) ⓒ 김지운관련사진보기
"가해국의 시민으로서 이런 말씀드리기 너무 면목이 없지만, 한국 정부와 시민들이 이번 장생(죠세이, 長生) 탄광 조선인 유골 발굴 사업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1942년 2월 3일, 갱도의 누수로 인해 조선인 노동자 136명이 수몰된 지 82년 만에 유골발굴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이노우에 요코 '장생 탄광 물비상(水非常)을 역사에 새기는 회' 대표의 마지막 당부다.
1932년 본격적으로 영업을 시작한 장생 탄광은 야마구치현 우베시 동부, 토코나미 해안에 위치한 해저 탄광으로 당시에도 갱도가 얕고 위험해 일본인 노동자들이 기피한 탄광이었다. 때문에 특히 조선인 노동자 수가 많아 '조선 탄광'으로 불렸다. 수몰사고 직전까지 약 1000여 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이곳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1942년 2월 3일 오전 6시경 해안 갱구에서 1.1km 떨어진 갱도에서 누수가 발생, 해저 갱도의 천반이 무너졌고 오전 8시경 갱도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생매장되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사고의 피해자는 183명. 그중 136명이 조선인 노동자였다. 사고 직후 '2차 재해를 방지하기 위해'라는 이유로 갱도 입구는 막혔고 그 후 갱구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장생 탄광 수몰 사고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이노우에 대표는 "일본 정부와 시민들은 장생 탄광의 역사를 정면으로 마주해야 된다. 말로만 사과하고 사과받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이번 장생 탄광의 유해 발굴 반환을 통해 한반도와 일본의 진정한 미래지향적 관계가 형성될 것이라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아래는 지난 8월 3일과 9월 19일, 총 두 차례 이노우에 요코 대표와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

▲장생 탄광 피야를 설명하고 있는 이노우에 요코 대표 ⓒ 김지운관련사진보기
- '장생 탄광 물비상을 역사에 새기는 회'는 어떻게 시작됐는지?
"사고가 났던 날 지역 언론 보도에서 수몰자 대부분이 구출되었다는 거짓 보도가 나갔고, 그 이후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수몰 사고 자체가 사람들에게 잊혀졌다.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나고 이 사실이 우연히 밝혀지게 됐다. 어떻게든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해 뜻이 맞는 분들과 함께 1991년 '장생 탄광 물비상을 역사에 새기는 회'를 만들고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수몰자들의 본적지에 '죽은 자로부터의 편지'를 보내면서 1992년에는 한국의 유족회가 결성됐다."
- '장생 탄광 물비상을 역사에 새기는 회'의 주요 활동은?
"처음에는 작은 모임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증언 자료의 수집, 피야(ピーヤ, 배기·배수통)의 보존, 추모비 건립이라는 세 가지 목표를 세웠고 1993년부터는 매년 유가족분들을 초청해서 추모 집회를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2013년에는 활동 22년 만에 '희생자 추모비'를 세웠다. 추모비에는 신원이 밝혀진 사망자의 본명을 새겼고, 한국·조선인 희생자로 기록된 돌기둥에 '강제연행'을 명시했다."
- '희생자 추모비'를 세울 때 힘들었던 점은?
"먼저 추모비를 세울 땅을 찾지 못해서 힘들었다. 그리고 추모비 건립 비용을 마련하는 것도 힘들었다. 시민 모금으로 1600만 엔(한화 약 1억 4800만 원)을 모았다. 너무 큰 힘이 됐다. 다행히 땅 문제도 해결돼서 22년 만에 추모비를 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추모비 건립에 대해서는 우베시도 적극적으로 협력을 하기로 했었는데, 추모비문에 일본인으로서 반성과 사과를 넣는 문제로 우베시와 타협이 되지 않았다. 추모비문에 대해 타협하는 것은 우리의 목적을 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행정에 의지하지 않고, 우리들의 힘으로 추모비를 세우자고 결단을 했다."
"두 나라 시민의 힘으로 82년 만에 새로운 역사 만들고파"

▲장생 탄광 희생자 추모비. 비에는 조선인 희생자들의 이름, 뒤쪽 추도문에는 강제동원을 사과하는 문구가 적혀있다. ⓒ 김지운관련사진보기
- 희생자 유골 발굴 사업은 어떻게 시작됐나?
"추모비 제막식 날, 우리는 추모비를 세웠다는 감격에 취해 있었다. 하지만 유족들은 우리가 추모비를 세운 것으로 운동을 그만두려고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내비치고, 자신들은 유골을 발굴해서 고향에 데려가고 싶다고 얘기를 했다. 이 말을 들은 당시 야마구치 대표가 2014년부터 유해 발굴을 제1목표로 삼아 다시 운동을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유해 발굴을 결단하고 나서 2018년에 일본 정부와 협상을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장생 탄광 수몰사고가 조사 대상이긴 하지만 현 단계에서는 어렵다는 입장을 반복할 뿐이었다. 정부의 태도를 바꾸기 위해서는 역시 피해를 입은 나라가 제대로 일본 정부에 탄광의 유해 발굴을 요청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총리는 강제동원 노동자의 유골 반환 약속을 했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장생 탄광 희생자의 유골은 깊이와 위치를 모르고 발굴이 어렵다는 입장을 바꾸고 있지 않다. 2023년 12월 8일에는 최초로 한국 유족이 참가한 대규모 정부 교섭을 실시했다. 지난해 정부 협상과 올해 2월 3일 추모집회를 전후로 한국과 일본 언론에서도 크게 보도가 됐다. 지난해와 올해도 일본 국회에서 장생 탄광 문제 해결을 위해 외무부 장관과 후생노동성 장관에게 질의가 계속되고 있지만 후생노동성은 유골 조사에 대해 기술적 논의 등 협상은 계속한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즉각 유골 발굴 결단을 내려야 한다."
- 유골 발굴 사업의 현재 진행 상황은?
"우선 민간의 힘으로 갱구를 열고 수중 드론·잠수 조사 등 유골 조사에 정부가 협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내고 싶다. 올해 갱구가 열리면 183명(조선인 136명)이 잠든 해저 탄광에 82년 만에 지상의 빛이 들어간다. 유골 조사도 가능하다. 우선은 많은 사업비가 필요하다. 예산은 800만 엔(한화 약 7400만 원)으로 계산하고 있다.
7월 15일 크라우드 펀딩을 시작해서 600만 엔은 확보가 됐고 다시 800만 엔을 위한 2차 크라우드 펀딩을 시작했다. 2024년 10월 26일 갱구의 입구를 열 계획이다. 현재는 갱구 입구 공사를 위한 진입로 확보 작업을 진행 중이다. 한·일 시민의 힘으로 82년 만에 갱구를 열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내고 싶다."

▲장생 탄광 갱구로 추정되는 곳. 수몰사고 82년이 지난 지금까지 정확한 갱구의 위치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 ⓒ 김지운관련사진보기
최근 국내에서는 '사도광산' 문제,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의 '중일마(중요한 것은 일본의 마음)' 발언,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과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의 역사 인식 논란 등 역사 논쟁이 뜨겁다. 역사를 '지우려'는 사람들과 역사를 '새기려'는 사람들, 진정한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를 위해서라도 장생 탄광 유골발굴 작업에 한·일 정부와 시민들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장생 탄광 유골 발굴 크라우드펀딩 사이트(한국어로 참여하는 방법 매뉴얼 참고)
https://for-good.net/project/100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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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한일 국교정상화 60돌…한국 유족께 유골 돌려주고파”
[짬] 이노우에 요코 ‘조세이 탄광의 물비상을 역사에 새기는 모임’ 공동대표
길윤형기자
수정 2024-12-03
https://www.hani.co.kr/arti/society/internalmove/1170341.html
https://www.hani.co.kr/arti/society/internalmove/1170341.html
이노우에 요코 ‘조세이 탄광의 물비상을 역사에 새기는 모임'(이하 새기는 모임) 공동대표가 2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 본사에서 한겨레와 만나 “하루 빨리 유골을 발굴해 한국의 유족들에게 전달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1991년 발족한 새기는 모임은 지난 30여년 동안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로 인해 목숨을 잃은 조선인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비 건설과 유골 발굴 사업을 진행해 왔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12회 리영희상 특별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유골을 발굴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2013년 2월이었습니다. 모임 결성(1991년) 이후 오랜 염원이었던 추도비를 만들고 모두가 마음이 들떠 있었습니다. 그때 한국의 유족분께서 '일본 사람들은 이것으로 운동을 끝낼 것인가. 우린 유골을 찾아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모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12회 리영희상의 특별상 수상을 위해 2일 한국을 찾은 이노우에 요코 ‘조세이 탄광의 물비상을 역사에 새기는 모임'(이하 새기는 모임) 공동대표는 여전히 상기된 표정이었다. “수상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은 지난달 19일이었어요. 마침 새기는 모임의 ‘운영위원회’가 진행 중이었어요. 조세이 탄광 희생자의 ‘유골 수습·반환’을 향해 일본인과 일본 정부가 지금보다 더 성의를 다하도록 한국 시민들이 응원과 격려를 해주신다는 의미로 생각하고 상을 받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노우에 대표는 이날 오후 4시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 본사에서 열린 리영희상 시상식에 참여해 “이번 수상을 계기로 조세이 탄광 사고에 대한 한·일 양국 시민들의 관심이 높아져 유골이 하루빨리 유족 품에 안겨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제12회 리영희상 시상식이 2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 청암홀에서 열려 본상 수상자인 박정훈(왼쪽 셋째) 대령과 특별상 수상자인 이노우에 요코(왼쪽 넷째) ‘조세이 탄광의 물비상을 역사에 새기는 모임’ 공동대표 등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왼쪽부터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 김효순 리영희재단 이사장, 박 대령, 이노우에 공동대표, 이종구 심사위원장, 김태성 해병대사관동기회장.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한국인들에겐 아직 낯선 조세이 탄광은 야마구치현 우베시 도코나미 해안에 있던 해저 탄광이다. 1932년 개업해 1938년 4월 제정된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모집' 형태로 동원된 값싼 조선인 노동력을 동원해 석탄을 캤다. 우베 지역의 중소규모 탄광이었던 조세이 탄광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많아 '조선 탄광'이라 불렸다.
이곳이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1942년 2월3일 오전 6시께 시작된 비극 때문이었다. 탄광이 수몰될 때 그 안에서 일하고 있던 183명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대부분인 136명(74.3%)이 조선인이었다. 이노우에 공동대표는 “사고 날은 광차(鑛車) 1천대분의 석탄 공출이 필수였던 ‘대량출하의 날’(大出しの日)이어서 회사가 안전을 도외시하고 채굴을 강행했다”며 “그런 의미에서 이 사고는 ‘인재’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피해 당사자인 조선인들이 귀국하며 사고는 기억에서 잊힌다.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이 사건을 역사의 전면으로 끌어올린 이는 지역의 향토 사학자(당시 고교 교사) 야마구치 다케노부(2015년 사망)였다. 그는 1976년 ‘우베지방사 연구’(제5호)라는 지역 학술지에 '탄광의 비상(非常)-쇼와 17년(1942년)의 조세이 광산 재해에 관한 노트'라는 글을 발표한다. 그는 이 글에서 “이 사고는 단순한 탄광 비상(탄광의 존망이 걸린 크고 위중한 사고를 뜻하는 탄광 용어)이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 정책과 인권 문제까지 포함한 문제는 아니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새기는 모임’은 이 정신을 이어받아 일본의 가해 책임을 부정하는 역사 인식을 극복하고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의 정확한 진실을 역사에 기록하자는 취지에서 1991년 출범했다. 이들이 지금껏 해 온 3대 사업은 △추도비 건립(2013년 실현) △피야(해저탄광과 연결된 배수·배기 통로)의 보존 △증언과 자료의 수집과 편찬이었다. 새기는 모임에 따르면, 1939년 10월의 조선인 노동자들을 ‘모집’해 온 첫해에 이미 ‘특고월보’(일제의 비밀경찰 ‘특별고등경찰’을 관장하는 내무성 경보국이 매달 간행한 자료집)에 41명이 도망갔다는 사실이 명기돼 있다. 회사쪽 자료 ‘조세이탄광 갱외도(坑外圖)’에는 끌려온 이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강제수용하던 건물인 ‘합숙소’의 존재가 적혀 있다. 이노우에 공동대표는 “조세이 탄광은 일본이 저질러왔던 수많은 ‘강제연행·강제노동’의 상징적 존재라고 단언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결심은 했지만, 유골 발굴은 쉽지 않았다. 바다 밑에 잠긴 갱구를 열어 수몰된 갱도 안으로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엄청난 돈과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도 지난 2월3일 열린 82주기 추도식에서 “매몰된 갱구를 시민의 힘으로 열어 유골의 존재를 분명히 하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7월15일부터 갱구 발굴과 잠수 조사를 위한 모금활동을 시작했다. 한·일 시민들이 적극 호응해 3개월간 약 1200만엔(약 1억1200만원)이 모였다. 9월26일에는 82년간 매몰돼 있던 갱구를 찾아내 열었고, 10월26일에 갱구 앞에서 한·일 유족들이 모여 제사를 올렸다. 이 자리에서 한·일의 두 유족인 전석호(92), 쓰네니시 가쓰히코(82)가 뜨거운 손을 맞잡았다. 이후 10월29~30일 1차 조사가 이뤄졌다. 이노우에 공동대표는 “이 과정에서 부담스러운 공사를 맡아주는 회사(시공업자)와 잠수사가 나타나는 등 여러 기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새기는 모임'의 끈질긴 노력에 일본 정부는 애매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후쿠오카 다카마로 후생노동상은 지난달 5일 기자회견에서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에 대해 “매우 가슴 아픈 사고라고 인식하고 있다”면서도 ‘유골의 구체적 소재를 특정할 수 없다'며 “정부가 직접 조사하는 대상의 범위 밖에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이 외무상이던 지난해 4월 “사정이 허락된다면 현지를 방문해 보고 싶다”는 뜻을 밝히는 등 완전히 이 문제를 외면하려는 태도는 아니다.
“마침 내년이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입니다. 이곳은 조사하면 반드시 유골이 나오는 곳입니다. 양국 정부가 미래지향을 말하는데 이렇게 유골을 방치하고 어떤 미래지향이 있을 수 있나요.” ‘새기는 모임’은 정부가 언급한 ‘유골의 구체적 소재'를 확인하기 위해 1월31일부터 3일간 2차 잠수 조사를 시작할 예정이다. 이노우에 대표는 “이제 2세 유족들도 대개 돌아가시고 생존자도 90살이 넘었다”며 “60주년을 맞아 두 나라 정부가 유골 발굴을 공동사업으로 추진해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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