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김에 나눔의집 얘기를 한번 더 쓴다. 나눔의집은 어용언론(법보신문)도 갖고 있어 사사건건 사태를 호도하고 있고, 100억을 지키기 위해 웬만해선 쉽게 물러설 것 같지 않기 때문.나눔의집 관련해서 알게 된 것 중 가장 분노한 건 어떤 할머니가 작고하신 직후에 사무국장이 은행부터 가서 할머니 계좌의 돈을 나눔의집으로 이체했다는 얘기였다. 또, 입원한 병원이 열악한 환경이어서 저온화상을 입었는데도 세번이나 같은 병원에 입원시켰고 결국 그 병원에서 낙상해 대퇴골이 부러져 사망했다는 또다른 할머니 얘기. 같은 병원인지 여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알던 할머니는 병원이 이상한 약을 먹이려 한다는 의심까지 했었다. 이번에 내부고발을 하게 된 계기도 침대가 기울어 할머니가 떨어졌는데도 갈아달라는 요청을 운영진이 들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협박한 사건이었다고 한다. 또, 할머니들을 외출도 시키지 않으면서 조계사 행사엔 동원했고(그러니까 앵벌이 동원), 30년동안 나눔의집 계좌에선 할머니들 의료비를 단한푼 쓰지 않았다는 이야기. 병원 얘기는 관부재판 지원자를 통해 알았다. 자신들의 거처까지 옮겨가며 20년이상, 일본정부 상대로 재판하는 할머니들을 지원했던 노부부다. 더 분노했던 건 영화 <허스토리>가 그 재판을 다루면서 너무나 이 분들을 가볍게 취급한 점.우리가 아는 역사란, 실은 수많은 망각과 은폐 위에 지어진 집이다.
쓰는 김에 나눔의집 얘기를 한번 더 쓴다.
나눔의집은 어용언론(법보신문)도 갖고 있어 사사건건 사태를 호도하고 있고, 100억을 지키기 위해 웬만해선 쉽게 물러설 것 같지 않기 때문.
나눔의집 관련해서 알게 된 것 중 가장 분노한 건 어떤 할머니가 작고하신 직후에 사무국장이 은행부터 가서 할머니 계좌의 돈을 나눔의집으로 이체했다는 얘기였다.
또, 입원한 병원이 열악한 환경이어서 저온화상을 입었는데도 세번이나 같은 병원에 입원시켰고 결국 그 병원에서 낙상해 대퇴골이 부러져 사망했다는 또다른 할머니 얘기.
같은 병원인지 여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알던 할머니는 병원이 이상한 약을 먹이려 한다는 의심까지 했었다.
이번에 내부고발을 하게 된 계기도 침대가 기울어 할머니가 떨어졌는데도 갈아달라는 요청을 운영진이 들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협박한 사건이었다고 한다. 또, 할머니들을 외출도 시키지 않으면서 조계사 행사엔 동원했고(그러니까 앵벌이 동원), 30년동안 나눔의집 계좌에선 할머니들 의료비를 단한푼 쓰지 않았다는 이야기.
병원 얘기는 관부재판 지원자를 통해 알았다. 자신들의 거처까지 옮겨가며 20년이상, 일본정부 상대로 재판하는 할머니들을 지원했던 노부부다. 더 분노했던 건 영화 <허스토리>가 그 재판을 다루면서 너무나 이 분들을 가볍게 취급한 점.
우리가 아는 역사란, 실은 수많은 망각과 은폐 위에 지어진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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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전에 올린 일본어 기사 중 배춘희 할머니 관련 부분을 파파고 번역해 봤다. 마이니치신문 호리야마 지국장이 쓴 기사. 나눔의집 사태를 이만큼이나 총체적으로 잘 정리한 기사를 아직 보지 못했다.
일본어 하시는 분은 이 참에 마이니치신문 구독도 하세요. 매달 980엔에 특집기사도 다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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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장소나 유산 상속을 원하는 대로 선택하지 못한 할머니도 있다. 배춘희씨는 숨지기 몇 달 전부터 유산을 불교계 승가대학에 기부하고 싶다며 대학측과 교섭을 벌여왔다.박 교수에 따르면 2014년 5월 7일에도 기부를 약속한 승가대의 가장 높은 지위사람의 전화번호를 알아봐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나눔의 집을 나가고 싶다고도 했다. 박 교수는 5월 13일 약속을 하고 배씨를 만나러 갔으나 나눔의 집은 면회를 불허했고 이후에도 만날 수 있는 허가를 받지 못한 채 배씨는 타계했다.
나눔의 집은 전 재산을 모두 나눔의 집에 기부합니다라는 계약서를 근거로 (4월10일에 배씨와 체결했다는) 유족상대로 소송을 했고 지난해 승소가 확정되어 전액을 받았다.그러나 고발자들은 이 계약서에 대해 배씨가 4월 10일 가슴이 아파 구급차에 실려 간 점, 평소엔 서류에 지장을 찍는데 도장이 찍힌 점 등에 기반해, 유산을 가져가기 위해 당시 사무국장이 날조한 사문서 위조로 의심하고 있다.
박 교수는 배 씨의 사망 1주일 후, 나눔의 집으로부터 명예 훼손 혐의로 형사 고소되고, 동시에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당했다(모두 계류 중).박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의 저작 활동이 위안부에 대한 명예 훼손에 해당한다는 주장이었고, 소장에서는 박 교수등 유지들이 4월 29일에 연 심포지엄에서 운동 단체의 틀에 끼워맞춰지고 싶지 않다고 호소한 배 씨 등 전위안부 몇사람의 목소리를 소개한 것도 문제 삼았다.
"할머니의 유산이 모두 나눔의 집으로 건너간 것을 올해 5월에 알고 놀랐다.기부에 관한 상담을 받았고, 나눔의 집을 나가고 싶으니 보호자가 되어 달라고 했는데, (작고까지의 )마지막 2개월은 나눔의 집이 면회를 막아 전화통화밖에 할 수 없었다. 구해내지 못해 죄송하게 생각한다.”
박 교수는 고발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전재산을 대학에 기부하겠다고 밝힌 5월 7일 배씨와의 통화 음성을 언론에 내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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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집 내부고발자중 한사람인 야지마씨를 쫓아내려고 이사진이 움직이고 있는 듯 하다. 아마도, 민관합동위원회의 조사발표까지 이끌어낸 추진력의 근원이 이 사람에게 있다고 판단했을 터.
정치가들이 선거때나 되면 얼굴 내밀고 학생들이 봉사점수나 채우고 사라지는 동안, 수많은 일본인들이 번갈아 나눔의집을 방문하고 허드렛일까지 도맡아 봉사하고, 그러다가 눌러앉아 상주하며 본격적으로 “할머니를 위해” 사는 일로 ‘일본인’으로서의 속죄적 삶을 실천하는 걸 나는 여러번 봤다. 그리고 야지마씨는 내가 본 그 여러사람중 첫번째 인물이었다.
할머니들은 그들을 기다렸고, 신뢰했고, 때로 한국인 직원들한테 하지 못하는 얘기를 털어놓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환기시켜 주는 건, 우리의 국민적 “공감”이라는 것이 실은 지극히 피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을 수 있다는 혐의다.
일본인이 대부분인 어떤 모임에서, 야지마씨도 나눔의집 문제를 이미 10년전에 제시했다가 안신권 소장에 의해 해고당한 또다른 일본인남성도(무라야마 잇페이), 나눔의집 문제를 말하면서 “할머니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어야” 한다고 하기에 잠시 가슴이 뜨거워졌었다. “치유”니 “힐링”이니 하는 말 역시도 허울뿐인 관념에 불과했음을 너무나 명료하게 보여주는 말이었기에.
너무나 늦었지만, 이 30년이 어디서 어떻게 망가지기 시작했는지 이제부터라도 다시 봐야 한다.
맨처음에 해야 할 일은 야지마씨를 지키는 일이다. 경기도는 기존 민관합동조사위에 필요한 이들을 더 넣어 야지마씨가 바라는 대책위를 만들라. 그리고 나눔의집을 이제 그만 국가가 관리하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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