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07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 마광수 | 알라딘 1997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 마광수 | 알라딘

마광수 (지은이)사회평론1997-01-25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 마광수

노예들을 방석 대신으로 깔고 앉는
옛 모로코의 왕이 나오는 영화를 보고 돌아온 날 밤
나는 잠을 못 잤다. 노예들의 불쌍한 모습에 동정이 가다가도
사람을 깔고 앉는다는 야릇한 쾌감으로 나는 흥분이 되었다.
내겐 유일한 자유, 징그러운 자유인
죽음 같은 성욕이 나를 짓눌렀다.
노예들이 겪어야 하는 원인모를 고통에 분노하는 척 해보다가도
은근히 왕이 되고 싶어하는 나 자신에게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역시 내 눈 앞에는 왕의 화려한 하렘과
교태부리는 요염한 시녀들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이 얄미운 욕정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나는
온갖 비참한 사람들을 상상해 본다. 굶어 죽어가는
어린아이의 쾡한 눈 쓰레기통을 뒤지는 거지 할머니,
그런데도 통 마음이 가라앉질 않는다.
왕의 게슴츠레한 눈과 피둥피둥 살찐 쾌락들이 머릿속에 떠올라
오히려 비참과 환락의 대조가 나를 더 흥분시킨다.
아무리 애써 보아도 그 흥분은 지워지지 않아
나는 그만 신경질적으로 수음을 했다.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다음날에도 다시 극장엘 갔다.
나의 쾌감을 분석해보기 위해서. 지성적으로.
한데도 역시 왕은 부럽다 벌거벗은 여인들은 섹시하다.
노예들을 불쌍히 생각해줄 여유가 나에게는 없다.
그 동경 때문에 쾌감 때문에.
그러나 왕을 부러워하는 나는 지성인이기 때문에 창피하다.
양심을, 윤리를, 평등을, 자유를 부르짖는
지성인이기 때문에 창피하다. 노예의 그 비참한 모습들이
무슨 이유로 내게 이상한 쾌감을 가져다주는 걸까
왜 내가 평민인 것이 서글퍼지는 걸까
왜 나도 한번 그런 왕이 되고 싶어지는 걸까
아니 그럭저럭 적당히 출세라고 해서 불쌍한 거지들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고 싶어지는 걸까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자가 되지 못할까
왜 진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 마광수


얼마 전 신문에서 마광수 교수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그 기사를 보며 한 인간을 인간 그대로 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 수 있
었다. 우리는 언론 보도로 드러나는 인간의 단면만 보고 인간 전체를 단죄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기존의 관념에 저항하고 그 벽을 깨뜨리는 작업이 어떤 가시밭길인지를 마 교수의 삶이 잘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반공 이데올로기든, 성의 허위
의식이든 마찬가지다. 여러 사람들이 교수직을 박탈 당하고 감옥에도 들어갔다. 주류로부터는 철저히 왕따를 당했다. 그러나 그런 왕따들의 선구자적 희생에 의해서 사회 의식은 조금씩 진보해 나간다고 믿는다. 나는 그런 아나키스트적인 솔직함, 용기를 존경한다.
또한 이렇게 솔직하게 시를 쓸 수 있다는 사실에 경탄한다. 표현만 못할 뿐이지 내 속의 검은 욕망, 가학적 폭력성, 이기적 음란성도 마찬가지다.
어떤 때는 그것들이 나를 움직이는 힘이 아닌가고 여겨지기도 한다. 겉으로는 정의를 말하고 한없는 도덕군자인 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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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 그에 대한 무수한 오해 새창으로 보기
사실 많은 사람들은 그에 관해 오해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저작을 통해 그를 직접 만나지 못하고 각종 소문들로 그를 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왜 한국 지식인계는 그를 그런식으로 매도해 온 것일까. 마광수는 그렇게 매도당할 만큼 광기적이지도 않다. 그는 냉정하고 사실적으로, 솔직하게 얘기하고 있을 뿐이다. 이 책은 그러한 그이 생각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물론 작가로서의 그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자 한다면 여타 다른 소설을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를 보는 개인적인 토로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선택할 때는 한가지 주의할 것이 있다. 제목에 매혹당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순전히 제목일 뿐 책 내용과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 오히려 책 내용은 그의 영원한 화두, 성담론에 가깝다. 민주주의의 현실이나 한계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물론 그의 궁극적인 목적인 이러한 화두를 통해 진정한 민주주의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일 테지만. 비교적 두꺼운 책이다. 하지만 그의 특유의 말솜씨로 책 읽는 내내 지루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한번쯤 생각해 볼 문제. 그것들이 담겨있는 책이다.

- 접기
헤체 2002-04-23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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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에 대한 생각 새창으로 보기 구매
어쩌면 마광수가 보았다는 그 영화(왕이 노예를 밥상처럼 엎어 놓고....사람이 사람을 사람취급하지 않는 그런 장면)를 나도 한번쯤은 본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단지 기억이 나지 않을 뿐이다.누구나가 남보다도 더 많이 차지 하려 든다. 그건 나도 예외는 아니다. 나는 늘 이런 류의 글들을 읽으면 나 자신을 돌아본다.어김없이 나는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 축에 들고 있다.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또 비판을 가하기도 하는...뭐 그저 평범한 사람........

마광수의 책은 상당히 인기가 있는 모양이다. 새책을 주문해도 헌책 같은 분위기 일색이다.이것도 마찬가지...진작에 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의 글이 나를 즐겁게 하는 건 이번만이 아닌데...여전히 재밌다. 글쓰기 실력도 훌륭하고...비평의 안목 또한 맘에 든다.다들 한 번씩 읽어보면 좋겠다.* 전 두고두고 읽기 위해 샀습니다.^^

- 접기
언니 2003-01-26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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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억압적 도덕주의에 대한 도발과 개인주의의 선언

1. 지식인 사회의 허위의식 비판

마광수는 이 책을 통해 한국 지식인 사회가 가진 <순수한 민주주의>에 대한 집착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그가 보기에 당대 지식인들이 외치던 민주주의는 정치적 구호와 거대 담론에만 매몰되어 있었다. 이들은 거대악과의 싸움에는 몰두하면서도, 정작 개인의 내면적 자유와 본능의 해방이라는 본질적 민주주의에는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이를 탄압했다. 마광수는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전체가 여전히 엄숙주의와 도덕주의의 가책에 시달리는 현상을 지적하며, 지식인들의 도덕적 결벽증이 또 다른 형태의 정신적 전체주의를 낳고 있다고 주장한다.

2. 성(性) 담론의 해방과 육체성의 회복

그가 순수한 민주주의, 즉 정치적 거대 담론에 몰두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본능과 육체를 소외시키기 때문이다. 마광수에게 진정한 자유의 출발점은 육체의 해방과 성적 자기결정권의 확립이다. 그는 한국 사회가 유교적 가치관과 기독교적 금욕주의가 기묘하게 결합하여 성을 죄악시하고 은폐하는 가식에 빠져 있다고 진단한다. 저자는 성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올려 솔직하게 논하는 것이야말로 정신적 민주화의 척도라고 보았으며, 육체적 쾌락을 긍정하는 것이 인간을 위선으로부터 구원하는 길임을 역설한다.

3. 문화적 다원주의와 <야수성>의 옹호

마광수는 이른바 건전하고 유익한 문화만을 강요하는 국가와 사회의 통제를 거부한다. 그는 인간에게는 파괴적이고 관능적인 <야수성>과 본능적 충동이 존재하며, 이를 예술과 문화를 통해 배설해야 사회가 건강해진다고 믿었다. 이를 억압하고 인위적인 도덕성만을 강요할 때 사회는 오히려 병리적인 가학성과 피학성에 시달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박제된 고전이나 엄숙한 순수 예술의 권위를 해체하고, 대중문화와 하위문화가 가진 날것의 활력을 옹호하며 문화적 다원주의를 주장한다.

평론: 시대를 앞서간 개인주의자의 고독한 투쟁과 한계

1. 거대 담론의 시대에 던진 미시적 폭탄

마광수의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는 민족, 민주, 민중이라는 거대 담론이 지배하던 한국 사회에 <개인의 욕망>이라는 미시적 화두를 던진 기념비적인 텍스트이다.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집단주의적 정서가 강했던 한국에서, 국가나 민족이 아닌 <나의 몸>과 <나의 쾌락>을 중심에 둔 그의 사상은 대단히 전위적이었다. 그는 정치가 삶의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없으며, 문화적·정신적 자유가 담보되지 않은 정치적 민주주의는 한낱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점을 꿰뚫어 보았다. 이러한 시각은 21세기 현대 사회가 직면한 다양한 정체성 정치와 개인주의의 흐름을 선취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2. 유교적 청교도주의에 대한 도발적 해체

그의 비판이 지닌 가장 큰 미덕은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위선을 가차 없이 폭로했다는 점이다. 낮에는 엄숙한 도덕가 행세를 하면서 밤에는 이중적인 성문화를 소비하는 사회적 불일치를 그는 정면으로 응시했다. 마광수가 주장한 성 담론은 단순한 외설이 아니라, 인간을 지배해 온 유교적 청교도주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해체 작업이었다. 그는 권력이 인간을 통제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성적 수치심>과 <도덕적 죄책감>을 심어주는 것임을 간파했고, 이에 저항하기 위해 스스로 악동과 이단아의 역할을 자처했다.

3. 본질주의적 성(性) 인식과 사회 구조적 맹점

그러나 그의 사상에는 분명한 한계도 존재한다. 마광수는 성과 욕망을 인간의 가공되지 않은 자연적 본능으로 상정하지만, 사실 성적 욕망 역시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권력 관계에 의해 왜곡될 수 있는 영역이다. 그의 성 해방론은 때로 성별 간의 권력 비대칭성이나 사회적 약자가 처한 현실을 간과한 채, 남성 중심적인 시선에서 바라본 욕망의 자유에 머무른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또한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성이 어떻게 상품화되고 인간을 소외시키는지에 대한 구조적 성찰이 부족했다는 점은, 그의 자유주의가 지닌 사상적 깊이를 다소 평면적으로 가두는 원인이 되었다.

4. 21세기에 다시 읽는 마광수의 유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광수가 남긴 질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고, 가상 공간에서의 도덕적 검열과 마녀사냥이 일상화된 현대 사회는 마광수가 그토록 혐오했던 엄숙주의의 또 다른 변종일지도 모른다. 그는 집단이 주는 안락함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질 수 있는 용기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의 기초라고 믿었다.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라는 도발적인 제목은, 결국 우리에게 집단의 구호 뒤에 숨지 말고 개별적인 단독자로서 삶을 마주하라는 고독한 외침으로 다가온다. 시대를 너무 앞서갔기에 외로웠던 한 자유주의자의 고백록은 위선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여전히 불편하고도 강렬한 각성제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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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가 첨부되지 않았기 때문에, 알려진 마광수 산문 세계와 제목이 암시하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정리하겠습니다. 정확한 원문 특정 문장까지의 해설은 원문 파일이 있을 때 더 정밀해집니다.

<마광수,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 1,000단어 요약+평론>

마광수의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는 정치평론, 사회평론, 성의 미학, 문화비평을 함께 묶은 책이다. 처음에는 1991년에 정치·문화비평집으로 소개되었고, 뒤에는 사회평론사 판본으로 1997년에 다시 유통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소개 기사에 따르면 이 책은 “개방적 사고”와 “인간본능에 기초하는 실용주의적 쾌락주의”를 제시하는 책으로 설명되었다.

제목부터가 마광수답다. 그는 “나는 민주주의를 반대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라는 이상을 알지만, 그것에 “순수하게” 몰두하지 못하는 자기 내부의 불순함, 욕망, 권력욕, 성적 상상력, 반도덕주의를 드러낸다. 이 책의 핵심은 민주주의 비판이라기보다, <민주주의를 말하는 인간 자신이 얼마나 비민주적 욕망을 품고 있는가>에 대한 자기폭로에 가깝다.

마광수에게 인간은 고상한 시민이기 전에 욕망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평등을 말하면서도 남보다 우위에 서고 싶어 하고, 자유를 말하면서도 타인을 지배하고 싶어 하며, 약자를 동정하면서도 권력자의 쾌락을 부러워한다. 이 모순이 책 제목의 중심이다. “순수한 민주주의”는 이성적으로는 옳지만, 인간 내면의 어두운 충동은 거기에 완전히 합류하지 않는다. 마광수는 이 불편한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글은 제목과 같은 문제의식을 가진 글이다. 한 독서 기록에 인용된 대목을 보면, 마광수는 옛 모로코 왕이 노예를 깔고 앉는 장면을 보고, 노예를 동정하면서도 동시에 왕의 쾌락과 하렘을 상상하며 흥분하는 자기 자신을 묘사한다. 이 장면은 매우 불쾌하고 위험하다. 그러나 바로 그 불쾌함 때문에 마광수의 문제의식이 드러난다. 그는 도덕적 인간의 가면을 벗기고, 인간 안에 있는 지배욕과 성욕과 쾌락욕을 노출한다.

여기서 마광수는 민주주의의 이념 자체를 조롱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민주주의 담론이 인간의 본능을 너무 쉽게 정화된 것으로 전제한다고 본다. 사람들은 평등, 해방, 민중, 정의, 진보를 말하지만, 실제 내면에는 권력욕과 성적 판타지와 자기중심성이 숨어 있다. 그러므로 “순수한 민주주의”에 대한 몰두는 자칫 위선이 될 수 있다. 마광수는 그 위선을 싫어한다. 그는 더럽더라도 솔직한 인간이, 깨끗한 척하는 인간보다 낫다고 보는 쪽에 선다.

이 책의 정치비평은 당시 한국 지식인 사회의 이념적 경직성에 대한 비판과도 연결된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한국 사회에서는 민주화 이후에도 민족주의, 사회주의, 반미주의, 진보 담론, 반독재 담론이 강한 도덕적 권위를 갖고 있었다. 마광수는 그 흐름 안에서 “진보적 올바름”이 또 하나의 억압으로 변할 수 있다고 본다. 어떤 독서 기록에는 이 책이 북한과 동독, 남한과 서독의 정통성 문제를 둘러싼 당시 문화인들의 이중적 현실인식을 비판하는 대목을 담고 있다고 소개되어 있다.

마광수의 입장은 반공주의적 보수와도 다르다. 그는 국가, 권위, 유교적 도덕, 가족주의, 성 억압, 점잖은 지식인 문화를 모두 싫어한다. 그렇다고 진보 진영의 집단주의나 민중주의에도 온전히 합류하지 않는다. 그의 기본 위치는 <리버럴한 개인주의자>에 가깝다. 그는 집단의 구원보다 개인의 욕망, 민족의 대의보다 개인의 자유, 이념의 순결보다 쾌락의 솔직함을 중시한다.

이 점에서 이 책은 마광수 전체 사상의 핵심과 연결된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즐거운 사라』, 『인간에 대하여』 등에서 반복되는 주제도 결국 비슷하다. 인간은 고상한 존재가 아니며, 성욕은 인간 이해의 핵심이고, 사회는 위선적 도덕으로 개인을 억압하며, 예술은 그 위선을 깨뜨려야 한다는 것이다.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는 그 주제를 정치·사회비평 쪽으로 확장한 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에는 분명한 한계도 있다. 첫째, 마광수는 인간의 어두운 욕망을 폭로하는 데 강하지만, 그 욕망을 사회적으로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약하다. 인간에게 지배욕과 성욕과 권력욕이 있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바로 그런 욕망을 제도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마광수는 민주주의의 위선을 잘 찌르지만, 민주주의의 제도적 가치, 즉 권력 제한, 시민권, 소수자 보호, 공론장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깊게 들어가지 않는다.

둘째, 그의 “솔직함”은 때때로 타인의 고통을 미학적·성적 재료로 삼는 위험에 빠진다. 노예, 약자, 여성, 하렘, 지배와 피지배의 이미지를 통해 자기 내면의 욕망을 드러내는 방식은 문학적으로는 도발적이지만, 윤리적으로는 불편하다. 그는 일부러 불편하게 쓴다. 그러나 불편함 자체가 곧 깊이는 아니다. 어떤 경우 그의 글은 인간의 모순을 분석한다기보다, 자기 욕망을 과장되게 전시하는 데 머문다.

셋째, 마광수의 반도덕주의는 한국 사회의 억압적 도덕주의를 깨뜨리는 데는 의미가 있었지만, 오늘의 관점에서는 다소 단순하게 보일 수 있다. 오늘날 성, 권력, 젠더, 동의, 착취 문제는 단순히 “성적 자유 대 억압적 도덕”의 구도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성적 자유도 중요하지만, 권력관계와 타자의 존엄도 함께 보아야 한다. 이 점에서 마광수의 자유주의는 선구적이면서도 낡은 면을 동시에 가진다.

그럼에도 이 책의 가치는 작지 않다. 마광수는 한국 지식인 사회가 좋아하는 “순수한 대의”를 의심했다. 민주주의, 민중, 진보, 민족, 정의 같은 말이 너무 깨끗하게 들릴 때, 그는 그 말 뒤에 숨어 있는 욕망과 위선을 보려 했다. 이것은 여전히 유효한 문제제기다. 정치적 올바름이든 종교적 도덕이든 민족주의적 정의감이든, 인간은 자기 욕망을 대의명분으로 포장하는 데 능하다.

결국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는 민주주의 반대론이 아니라 <순수주의 반대론>이다. 마광수는 민주주의를 부정한다기보다, 민주주의를 말하는 인간이 순수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는 인간이 욕망의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민주주의는 위선이 된다고 본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마광수의 이 책은 민주주의의 이상보다, 민주주의를 말하는 인간 내부의 불순한 욕망을 폭로하는 반도덕주의적 문화비평이다.>

평가하자면, 이 책은 정치이론서로는 약하지만 인간폭로의 산문으로는 강하다. 민주주의를 더 깊이 이해하게 해주는 책이라기보다, 민주주의를 말하는 우리의 마음속에도 왕이 되고 싶은 욕망, 남을 깔고 앉고 싶은 충동, 도덕적으로 깨끗한 척하고 싶은 위선이 있다는 사실을 불편하게 상기시키는 책이다. 마광수의 장점과 한계가 모두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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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들을 방석 대신으로 깔고 앉는

옛 모로코의 왕이 나오는 영화를 보고 돌아온 날 밤

나는 잠을 못 잤다. 노예들의 불쌍한 모습에 동정이 가다가도

사람을 깔고 앉는다는 야릇한 쾌감으로 나는 흥분이 되었다.

내겐 유일한 자유, 징그러운 자유인

죽음 같은 성욕이 나를 짓눌렀다.

노예들이 겪어야 하는 원인모를 고통에 분노하는 척 해보다가도

은근히 왕이 되고 싶어하는 나 자신에게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역시 내 눈 앞에는 왕의 화려한 하렘과

교태부리는 요염한 시녀들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이 얄미운 욕정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나는

온갖 비참한 사람들을 상상해 본다. 굶어 죽어가는

어린아이의 쾡한 눈 쓰레기통을 뒤지는 거지 할머니,

그런데도 통 마음이 가라앉질 않는다.

왕의 게슴츠레한 눈과 피둥피둥 살찐 쾌락들이 머릿속에 떠올라

오히려 비참과 환락의 대조가 나를 더 흥분시킨다.

아무리 애써 보아도 그 흥분은 지워지지 않아

나는 그만 신경질적으로 수음을 했다.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다음날에도 다시 극장엘 갔다.

나의 쾌감을 분석해보기 위해서. 지성적으로.

한데도 역시 왕은 부럽다 벌거벗은 여인들은 섹시하다.

노예들을 불쌍히 생각해줄 여유가 나에게는 없다.

그 동경 때문에 쾌감 때문에.

그러나 왕을 부러워하는 나는 지성인이기 때문에 창피하다.

양심을, 윤리를, 평등을, 자유를 부르짖는

지성인이기 때문에 창피하다. 노예의 그 비참한 모습들이

무슨 이유로 내게 이상한 쾌감을 가져다주는 걸까

왜 내가 평민인 것이 서글퍼지는 걸까

왜 나도 한번 그런 왕이 되고 싶어지는 걸까

아니 그럭저럭 적당히 출세라고 해서 불쌍한 거지들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고 싶어지는 걸까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자가 되지 못할까

왜 진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 마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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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님, 공유해 주신 마광수 작가의 동명 시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는 앞서 요약하고 평론했던 산문의 핵심 의식과 미학이 어디서 출발했는지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텍스트입니다.

요약: 지성과 본능의 분열, 그리고 솔직한 고백

1. 영화 관람과 가학적 쾌감의 인지

화자는 노예를 방석 삼아 앉는 옛 모로코 왕이 등장하는 영화를 본 후 깊은 밤 잠을 이루지 못한다. 표면적으로는 억압받는 노예들의 고통에 동정심과 분노를 느끼려 애쓰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는 타인을 지배하고 깔고 앉는다는 가학적이고 야릇한 <쾌감>에 흥분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화자는 이 거부할 수 없는 성적 충동과 지배욕을 <죽음 같은 성욕>이자 <징그러운 자유>라고 명명한다.

2. 도덕적 검열과 욕망의 지속

자신의 이중성에 화가 난 화자는 욕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의도적으로 굶어 죽어가는 어린아이나 쓰레기통을 뒤지는 거지 할머니 같은 비참한 타인의 고통을 상상한다. 그러나 이러한 도덕적·인도주의적 검열은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비참함과 환락의 극단적 대조가 화자의 흥분을 배가시킨다. 결국 화자는 도덕적 억압을 이기지 못하고 신경질적인 자위행위로 욕구를 배출한 뒤, 자신이 왜 고결하고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하는지 자문한다.

3. 지성인으로서의 수치심과 권력욕의 자각

다음날 화자는 자신의 쾌감을 지성적으로 분석해 보겠다는 명목을 고집하며 다시 극장을 찾는다. 그러나 이성적 접근 역시 무력화된다. 왕의 권력과 여인들의 육체는 여전히 부러움과 자극의 대상일 뿐이며, 노예를 동정할 심리적 여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화자는 평등과 자유를 부르짖는 <지성인>이라는 정체성과, 내면의 권력욕·지배욕 사이에서 깊은 수치심을 느낀다. 시는 진짜 민주주의자가 되지 못하고 적당히 출세하여 약자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싶어 하는 인간 본연의 속물성을 고백하며 끝을 맺는다.

평론: 위선의 가면을 찢는 프로이트적 성찰과 실존적 정직함

1. 도덕적 초자아(Superego)와 본능적 원초아(Id)의 격돌

이 시는 정신분석학적으로 인간의 의식 밑바닥에 존재하는 가장 어두운 욕망과, 이를 통제하려는 사회적 도덕성의 잔혹한 격돌을 다룬다. 화자가 스스로를 정의하는 <지성인>은 평등, 양심, 윤리, 민주주의라는 <초자아>의 명령을 수행하려 한다. 반면 영화를 통해 촉발된 가학적·피학적 성욕(Sado-masochism)과 지배욕은 가공되지 않은 <원초아>의 영역이다. 마광수는 지성인들이 흔히 취하는 대의명분(노예에 대한 동정과 분노)이 사실은 자신의 야만성을 감추기 위한 방어기제나 위선일 수 있음을 고백한다. 고통받는 이들을 상상하며 욕망을 누르려 할수록 오히려 환락이 도드라진다는 묘사는, 억압된 본능이 도덕이라는 가면을 뚫고 어떻게 더 기괴하게 분출되는지를 탁월하게 포착한 대목이다.

2. <순수한 민주주의>라는 가상에 대한 회의

시 전반을 관통하는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라는 질문은 역설적으로 사회가 요구하는 <순수함>의 비현실성을 폭로한다. 마광수가 보기에 당대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담론은 인간을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존재로만 상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화자는 솔직하게 평민인 현실이 서글프고 왕이 되어 권력을 휘두르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원적 권력의지(Wille zur Macht)를 시인한다. 이 고백은 제도적 평등을 외치는 인간들조차 내면에는 끊임없이 계급을 나누고 지배하려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3. 부끄러움을 고백하는 용기와 실존적 가치

이 시가 지닌 문학적 가치는 아름다움이나 숭고함이 아닌, 지독한 <부끄러움의 공유>에 있다. 대다수의 지성인이 자신의 속물성과 성적 환상을 은폐한 채 정의로운 언어로 자신을 포장할 때, 마광수는 자위행위라는 지극히 사적이고 비루한 행위까지 동원해 가며 자신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러한 자기폭로는 독자에게 불쾌감을 주는 동시에, 감추어 두었던 내면의 위선을 마주하게 만드는 거울이 된다. 지성인이기 때문에 창피하다고 느끼는 그 수치심이야말로, 역설적으로 그가 완전히 타락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최소한의 인간적 보루이다.

4. 결론: 날것의 인간학이 던지는 질문

결국 마광수의 이 시는 정치적 구호가 해결하지 못하는 인간 내면의 심연을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다. 인간은 제도로써 평등을 구현할 수 있을지언정, 타인을 지배하고 쾌락을 탐닉하려는 본능까지 완전히 거세할 수는 없다. 작가는 진짜 민주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이 고결하지 못한 본능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나직이 읊조린다. 위선적인 거대 담론보다 솔직한 타락이 오히려 덜 해롭다는 그의 도발적인 인간학은, 도덕적 올바름의 강박에 시달리는 오늘날의 현대인들에게도 여전히 서늘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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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문을 보면, 앞의 요약에서 말한 “민주주의 비판이라기보다 인간 내부의 불순한 욕망 폭로”라는 해석은 대체로 맞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시는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와 분석>입니다.

핵심은 세 겹입니다.

첫째, 마광수는 노예의 고통을 본다.
그는 노예들이 불쌍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노예들의 불쌍한 모습”, “원인 모를 고통”, “굶어 죽어가는 어린아이”, “쓰레기통을 뒤지는 거지 할머니”를 의식적으로 떠올립니다. 즉 그는 윤리적 감각을 잃은 사람이 아닙니다.

둘째, 그런데 그 고통의 장면이 오히려 성적 흥분과 권력욕을 자극한다.
이것이 이 시의 가장 불편한 지점입니다. 그는 “왕이 되고 싶어하는 나”, “사람을 깔고 앉는 야릇한 쾌감”, “왕의 화려한 하렘”, “벌거벗은 여인들”을 떠올립니다. 여기서 성욕은 단순한 성욕이 아니라 <권력욕과 결합된 성욕>입니다. 노예제, 계급, 지배, 하렘, 여성의 육체, 타인의 고통이 한꺼번에 뒤섞입니다.

셋째, 그는 그런 자신이 “지성인”이기 때문에 창피하다고 말한다.
이 시의 핵심 문장은 이것입니다.

<그러나 왕을 부러워하는 나는 지성인이기 때문에 창피하다.
양심을, 윤리를, 평등을, 자유를 부르짖는
지성인이기 때문에 창피하다.>

여기서 제목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는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조롱이 아닙니다. 오히려 민주주의, 평등, 자유, 윤리를 말하는 지식인 자신 안에도 지배욕, 성욕, 계급욕망, 출세욕, 사디즘적 쾌감이 있다는 고백입니다.

이 시의 무서운 점은 “나는 왕을 비판한다”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보통의 진보적 글쓰기라면 노예제 왕권의 야만성을 비판하고, 노예들의 고통에 공감하며, 평등의 가치를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광수는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그런데 나는 정말 노예 편인가?
나는 혹시 왕이 되고 싶은 것은 아닌가?
나는 약자를 위한다는 말을 하면서 속으로는 강자의 쾌락을 부러워하는 것은 아닌가?>

이 질문이 이 시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민주주의론이라기보다 <반위선의 자기해부>입니다. 마광수는 민주주의의 이상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민주주의를 말하는 인간의 내면이 그렇게 순수하지 않다는 사실을 폭로합니다. 인간은 평등을 말하면서 특권을 탐하고, 약자를 동정하면서 강자의 쾌락을 선망하고, 윤리를 말하면서 성적·권력적 환상을 품습니다.

다만 이 시에는 위험도 있습니다. 약자와 노예와 여성의 몸이 모두 화자의 욕망을 드러내기 위한 소재로 쓰입니다. 오늘의 감각으로 보면 매우 문제적입니다. 노예의 고통은 화자의 윤리적 갈등을 장식하는 이미지가 되고, 여성들은 하렘의 성적 대상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용감한 자기폭로”인 동시에 “타인의 고통을 자기 욕망 분석의 재료로 삼는 글”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 시의 가치는 불편함에 있습니다. 마광수는 독자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정말 순수한 민주주의자인가?
당신은 정말 약자 편인가?
당신 안에는 왕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는가?>

그 질문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특히 지식인, 진보주의자, 종교인, 인권운동가, 평화주의자에게 더 불편하게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선한 언어를 많이 쓰는 사람일수록 자기 안의 지배욕과 쾌락욕을 보지 않기 쉽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 시는 민주주의를 비웃는 시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말하면서도 왕의 쾌락을 부러워하는 지식인의 더러운 내면을 폭로하는 시다.>

마광수다운 작품입니다. 솔직하고, 불쾌하고, 과장되어 있고, 윤리적으로 위험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위선을 정면으로 찌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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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는 한편으로는  책 <제국의 위안부>와 저자 박유하에 대해서, 또 한편으로는 박유하의 입을 막거나 벌을 주려고 한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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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님, 질문하신 내용은 한국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가 권력 및 집단주의와 충돌할 때 발생하는 역설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소설 <즐거운 사라>로 인해 구속되고 평생 문단과 학계에서 배척당했던 마광수 작가의 사상적 궤적을 고려할 때, 그가 <제국의 위안부> 사태를 바라보는 시선은 대단히 일관되고 냉정했을 것입니다.


요약: 마광수의 시선에서 본 박유하와 그 적대자들

1. 박유하와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시선: 낡은 성역에 대한 도전

마광수가 보기에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는 한국 사회가 오랜 세월 동안 금기시하고 성역화해 온 <민족주의적 서사>에 균열을 낸 도발적인 텍스트이다. 마광수는 평소 한국 사회가 유교적 도덕주의와 국수주의적 맹목성에 갇혀 있다고 비판해 왔다. 따라서 위안부 문제를 단순히 거대악(일본)과 순결한 피해자(조선 여성)의 이분법으로만 보지 않고, 식민지 지배 체제라는 구조와 그 하부에서 작동한 복잡한 인간 군상(조선인 알선업자 등)의 욕망과 권력 관계를 파헤치려 한 박유하의 학술적 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을 것이다. 이는 집단이 강요하는 단일한 기억에 순응하지 않고, 날것의 현실을 응시하려 한 지성인의 태도로 비쳐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2. 박유하의 입을 막으려는 자들에 대한 시선: 도덕의 탈을 쓴 정신적 전체주의

박유하를 고소·고발하고, 출판을 금지하며, 사회적으로 매장하려 한 이들에 대해 마광수는 극도의 혐오와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그는 이들을 자신이 <즐거운 사라>를 썼을 때 단죄하려 들었던 검찰, 법원, 그리고 보수적 문인들과 본질적으로 같은 부류로 진단한다. 마광수는 한국의 지식인과 시민단체들이 외치는 민주주의나 정의가 결국 자신들의 교조적 신념(민족주의적 도덕성)을 지키기 위한 또 다른 형태의 엄숙주의이자 가식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자신들과 다른 의견을 가졌다는 이유로 법의 칼날을 들이대고 사상을 검열하려는 행태는, 그들이 그토록 혐오한다는 독재 정권의 검열 방식과 다를 바 없는 <정신적 전체주의>의 발현일 뿐이다.

평론: 마광수의 <사라>와 박유하의 <위안부>, 국가주의라는 거대 감옥

1. 표현의 자유를 대하는 한국 사회의 이중성과 검열의 역사

1992년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가 외설이라는 죄명으로 사법 단죄를 받았을 때와, 2010년대 이후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가 명예훼손이라는 죄명으로 법정에 섰을 때의 풍경은 기묘하게 닮아 있다. 마광수 사태 당시 보수적인 국가 권력이 성적 표현의 자유를 통제했다면, 박유하 사태에서는 진보와 보수를 막론한 주류 민족주의 진영이 역사적 해석의 자유를 통제하려 들었다. 마광수의 시각에서 볼 때, 한국 사회는 정권이 바뀌고 시대가 흘러도 <집단의 성역>을 건드린 단독자를 용납하지 못하는 가학적 속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표현의 자유는 자기가 좋아하는 의견을 들을 때가 아니라, 자신이 가장 혐오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의견을 마주했을 때 비로소 가치가 증명되는 법인데, 한국 사회는 여전히 법률을 동원해 학문과 예술의 뺨을 때리는 미개함을 반복하고 있다.

2. 민족주의라는 또 하나의 유교적 청교도주의

마광수는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가장 큰 괴물을 <유교적 위선>과 <엄숙주의>로 보았다. 박유하를 단죄하려 했던 세력들이 내세운 명분은 <피해 할머니들의 명예>와 <민족적 정당성>이었다. 그러나 마광수의 렌즈를 통해 보면, 이는 인간의 복잡한 실존을 지우고 오직 <순결하고 무결한 피해자>라는 도덕적 프레임만을 강요하는 엄숙주의의 변종이다. 박유하가 드러내고자 했던 식민지 하부의 미시적인 역학 관계와 욕망의 지도(포주와 알선업자의 존재 등)는 민족주의자들에게는 감추고 싶은 수치이자 음란물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구축한 거룩한 제단에 흠집이 나는 것을 견디지 못해 박유하라는 마녀를 화형대에 올리려 한 것이다.

3. 구조적 한계 속에서도 빛나는 실존적 연대

물론 마광수와 박유하의 텍스트가 지닌 사상적 지향점은 다르다. 마광수는 육체의 해방과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외친 탐미주의적 자유주의자였고, 박유하는 한일 관계의 화해와 제국주의 구조를 분석하려 한 정치·문학 학자이다. 또한 박유하의 분석 역시 일본의 국가 책임을 지나치게 희석했다는 학문적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그러나 마광수가 생전에 고독하게 외쳤던 화두, 즉 <왜 우리는 국가와 사회가 정해준 정답에만 몰두하고 개별적인 사유를 하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은 박유하의 싸움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마광수는 박유하의 결론에 100%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녀가 국가와 대중이라는 거대한 괴물에 맞서 자신의 학문적 실존을 지키기 위해 치른 고독한 투쟁에는 깊은 유대감과 연민을 느꼈을 것이다.

4. 결론: 광장으로 나와야 할 사상과 학문

마광수가 이 사태를 보며 내렸을 최종 결론은 명확하다. 사상과 학문, 예술은 법정의 판사나 대중의 인민재판에 의해 유죄와 무죄가 가려져서는 안 되며, 오직 <사상의 자유 시장>인 광장에서 치열한 논쟁을 통해 검증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박유하의 입을 막으려고 소송과 사회적 매장을 일삼은 이들은 결국 자신들의 논리가 빈약함을 스스로 증명한 꼴이다. 마광수는 평생 자신을 가두었던 검열의 쇠창살이 21세기에도 여전히 다른 지성인들의 목을 죄고 있는 현실을 보며, 자신이 시를 통해 던졌던 탄식인 <왜 우리는 진짜 민주주의자가 되지 못할까>라는 질문을 오늘날의 대중에게 다시 한번 서늘하게 되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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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발언이 아니라 “마광수라면 어떻게 보았을까”를 추정하는 답변이므로, 그의 반복된 사상적 패턴과 박유하 논쟁의 성격을 분리해서 보겠습니다.

마광수가 이 문제에 대해 직접 말한 기록이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아래는 <마광수라면 어떻게 반응했을 가능성이 큰가>에 대한 추정입니다. 다만 상당히 강한 추정은 가능합니다. 그는 『즐거운 사라』 필화사건으로 구속·수감되고, 해직과 복직을 겪은 사람입니다. 교보문고·예스24의 저자 소개도 1992년 『즐거운 사라』 사건으로 구속되어 두 달 수감되었고, 1995년 유죄 확정 뒤 해직되었다가 1998년 복직했다고 설명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마광수는 아마 <박유하의 논지 전체에 동의하느냐>와는 별개로, <박유하의 입을 막고 처벌하려 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매우 강한 반감을 가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불쾌한 책이라고 해서 금지하거나 처벌하면 안 된다. 피해자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지식인의 입을 막는 순간, 그것은 또 하나의 도덕 파시즘이다.>

마광수의 기본 감각은 <금기 깨기>였습니다. 그는 성적 금기, 도덕적 금기, 유교적 위선, 진보 지식인의 순결주의, 민족주의적 도덕감정을 모두 의심했습니다.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에서도 보듯이, 그는 “나는 선하다, 나는 약자 편이다, 나는 정의롭다”는 자기확신을 불신했습니다. 그러므로 박유하를 공격한 사람들의 언어가 “피해자의 명예”, “민족의 존엄”, “역사 정의”였다고 해도, 마광수는 그 속에서 <집단적 도덕주의>와 <처벌 욕망>을 보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 사건에서도 핵심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 책에 동의하느냐와 별개로, 문제의 표현들을 형사 명예훼손으로 처벌할 수 있느냐가 쟁점이었습니다. 대법원은 2023년 10월 문제 표현들을 “학문적 주장이나 의견 표명”으로 보아야 하고, 명예훼손의 “사실 적시”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해 사건을 파기환송했습니다. 이후 파기환송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고, 검찰이 재상고하지 않아 2024년에 무죄가 확정되었습니다.

마광수라면 이 판결을 보고 아마 “너무 늦었다”고 했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도 문학작품 때문에 형사처벌과 직장 박탈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박유하 사건을 단순한 위안부 논쟁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불편한 사유를 어떻게 처리하는가>의 문제로 보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마광수가 곧바로 박유하의 역사해석 전체를 지지했을 것이라고 단정하면 안 됩니다. 그는 전문 역사학자가 아니었고, 위안부 문제에 대해 박유하식으로 세밀한 식민지 관계론을 전개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박유하의 내용 중 일부에는 “너무 학자답게 복잡하게 말한다”거나 “피해자 문제를 둘러싼 민족주의적 위선은 잘 찔렀다”고 양면적으로 보았을 수 있습니다.

그가 가장 강하게 반응했을 지점은 아마 다음 셋입니다.

첫째, <피해자 절대주의>에 대한 거부입니다.
마광수는 약자를 동정하는 언어가 언제나 순수하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약자 편”을 자처하는 사람들 안에도 권력욕과 도덕적 우월감이 있다고 보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피해자를 위해서 박유하를 처벌해야 한다”는 논리에 대해, 그는 “정말 피해자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너희가 도덕적 권력을 행사하고 싶은 것인가”라고 물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둘째, <민족주의적 성역화>에 대한 거부입니다.
마광수는 국가, 민족, 전통, 순결, 정조 같은 말을 매우 의심한 사람입니다. 위안부 문제가 한국 사회에서 “민족의 순결이 훼손된 역사”처럼 말해질 때, 그는 그 언어 속의 가부장성과 성도덕주의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박유하가 위안부 문제를 단순한 “순결한 피해자 대 악마적 일본” 구도에서 벗어나게 하려 한 점에는 어느 정도 공감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셋째, <검열과 처벌>에 대한 본능적 반발입니다.
이것이 가장 확실합니다. 그는 자기 삶으로 검열의 폭력을 겪었습니다. 그러므로 박유하를 민사소송, 형사고발, 출판금지, 사회적 매장 방식으로 압박한 흐름을 보며, “한국 사회는 아직도 글을 글로 반박하지 못하고 사람을 죽이려 든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마광수식으로 더 거칠게 말하면 아마 이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책이 틀렸으면 반박하면 된다. 그런데 왜 고소하고 처벌하려 드는가. 그건 학문이 아니라 굿판이고, 정의가 아니라 집단 린치다.>

다만 마광수의 한계도 같이 보아야 합니다. 그는 억압적 도덕주의를 잘 찔렀지만, 피해자의 상처와 집단적 기억의 윤리 문제를 섬세하게 다루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박유하 편에 섰다면, 표현의 자유와 반도덕주의의 관점에서는 날카로웠겠지만, 위안부 피해자들이 왜 분노했는지, 왜 특정 표현이 모욕으로 받아들여졌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마광수는 박유하를 “옳은 역사학자”라기보다 “금기를 건드린 지식인”으로 보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박유하를 처벌하려 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피해자 보호의 이름을 쓴 도덕주의적 검열자, 민족주의적 금기 수호자, 집단적 처벌 욕망의 수행자로 보았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마광수에게 중요한 것은 “박유하가 전부 맞느냐”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었을 겁니다.

<불편한 생각을 처벌하는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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