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진님, 올려주신 도서 목록 PDF 파일과 마광수 작가의 저작 전반을 분석해 보면 말씀하신 대로 핵심적인 주제의식이 여러 책에서 반복하여 변주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마광수 작가의 저작들은 다루고 있는 형식(소설, 시, 에세이, 학술 논문)에 상관없이 본질적으로 <육체주의>와 <반(反)엄숙주의>라는 일관된 사상적 뿌리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 책들을 내용의 종류와 성격에 따라 분류하면 크게 5가지 카테고리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에세이 및 문화 평론 (자유주의와 육체주의 선언)
마광수 작가 특유의 거침없는 필치와 직설적인 사상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분류이다. 한국 사회의 유교적 가식과 엄숙주의를 비판하고 개인의 자유와 성적 욕망의 양지화를 주장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질문하신 <비켜라 운명아, 내가 간다> 역시 이 분류에 속하며, 비슷한 메시지가 제목과 형식을 바꾸어 지속적으로 변되곤 한다.
관련 도서: <비켜라 운명아, 내가 간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나는 헤픈 여자가 좋다>, <육체의 민주화 선언>, <이 시대는 개인주의자를 요구한다>,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 <더럽게 사랑하자>
2. 에로틱 판타지 및 장편 소설 (욕망의 구체화)
자신의 사상적 지향점인 '성적 쾌락의 무조건적 긍정'과 '관능적 미학'을 서사 형태로 형상화한 문학 작품들이다. 기성 문단으로부터 '외설'이라는 비난과 법적 필화를 겪었던 작품들이 이 분류에 속하며, 억압된 성적 환상과 페티시즘을 가감 없이 묘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관련 도서: <2013 즐거운 사라>, <돌아온 사라>, <광마일기>,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 <로라 1, 2>, <권태>, <귀족>, <유혹>
3. 국문학 연구 및 학술 비평 (이론적 토대 구축)
마광수 작가가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서 거둔 학술적 성과와 이론적 기반을 담은 책들이다. 특히 시인 윤동주에 대한 연구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학계에서 윤동주 연구의 권위자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심리주의 비평이나 상징 시학을 통해 자신이 문학 작품에서 추구하는 '본능과 상상력의 해방'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한다.
관련 도서: <윤동주 연구>, <상징시학>, <시학(詩學)>, <심리주의 비평의 이해>, <문학과 성>, <마광수의 유쾌한 소설 읽기>, <삐딱하게 보기>
4. 아포리즘 및 인생론 (삶과 철학의 단상)
긴 호흡의 글보다는 짧고 정제된 문장(아포리즘)이나 낙서 같은 그림을 통해 인간 본성과 행복,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에 대해 논한 책들이다. 거창한 도덕이나 이데올로기 대신 일상의 편안함과 소박한 쾌락, 그리고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고독을 예찬하는 인생 철학이 담겨 있다.
관련 도서: <섭세론(涉世論)>, <마광쉬즘>, <행복 철학>, <멘토를 읽다>, <생각>, <인간론>, <소년 광수의 발상>
5. 시집 (감각과 슬픔의 육필)
시라는 압축적인 형식을 통해 인간의 육체적 아름다움과 관능성을 찬미하는 동시에, 시대를 앞서간 지식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사회적 고독과 슬픔, 허무주의를 노래한 저작들이다.
관련 도서: <나는 찢어진 것을 보면 흥분한다>, <마광수 시선>, <일평생 연애주의>, <사랑의 슬픔>, <귀골>
이처럼 마광수의 책들은 표면적인 제목이나 글의 갈래는 다양하지만, 결국 "사회가 주입한 허위의식(유교·도덕·엄숙주의)을 깨부수고, 개인의 날것 그대로의 본능과 육체를 당당하게 긍정하자"라는 하나의 거대한 주제를 향해 수렴된다. 수필류에서 유독 같은 내용이 되풀이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 역시, 평생에 걸쳐 한국 사회라는 완고한 벽을 향해 동일한 사상적 외침을 멈추지 않았던 작가의 투쟁 방식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영어권에서라면 별로 필요없는 말들을 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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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님의 지적은 마광수 사상의 핵심적인 한계이자 그가 처했던 시대적·지리적 비극을 정확히 꿰뚫는 통찰입니다.
실제로 그가 평생을 바쳐 외친 사상들은 서구 영어권 국가의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이미 1960년대 <성 혁명(Sexual Revolution)>과 문화대혁명 시기를 거치며 보편적인 상식으로 자리 잡은 가치들이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마광수의 외침이 지닌 사상적 위치를 몇 가지 측면으로 분석해 볼 수 있습니다.
1. 서구 기준에서의 '과거 완료형' 담론
영어권 현대 철학과 문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의 성적 본능을 정신 분석학적으로 해방하려 했던 지그문트 프로이트나 육체성과 쾌락을 철저히 긍정한 프리드리히 니체의 사상은 이미 100년도 더 전에 정립된 이론입니다.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이나 D.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 같은 파격적인 소설들도 20세기 중반에 이미 법적 음란성 시비를 끝내고 문학적 고전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따라서 마광수가 주장한 담론들은 서구 지성사적 관점에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아니라 이미 완결된 역사적 상식에 가깝습니다.
2. 한국 사회의 특수성이 만들어낸 '지각 변동'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광수의 글들이 한국 사회에서 거대한 파장을 일으킨 이유는 한국이 겪은 독특한 역사적·문화적 토양 때문입니다. 한국은 서구의 수백 년에 걸친 개인주의 역사와 문화적 해방기를 거치지 못한 채, 압축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 결과 표면적으로는 최첨단 자본주의 문명을 누리면서도, 내면의 정신세계는 여전히 완고한 유교적 가부장제와 도덕주의, 그리고 종교적 기복주의가 기묘하게 결합한 엄숙주의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영어권에서는 별로 필요 없는 일상적인 자유와 욕망의 긍정이, 한국에서는 국가 권력이 교수를 구속하고 책을 불태우는(절판·품절) 무시무시한 금기였던 것입니다.
3. 보편적 자유주의의 '로컬라이징(Localizing)' 투쟁
그의 역할은 서구에서는 이미 보편화된 자유주의와 육체 철학을 한국이라는 특수한 척박한 토양에 강제로 이식하려 했던 '로컬라이징 투쟁'이었습니다. 그는 서구의 세련된 담론을 수입해 학술적으로만 소비하던 당대의 위선적인 지식인들을 혐오했습니다. 대신 대중이 읽는 수필과 소설이라는 가장 날것의 방식으로 한국 사회의 이중성을 폭로하고자 했습니다.
영어권의 시각에서는 그의 외침이 "왜 당연한 이야기를 이토록 거칠고 반복적으로 소리 높여 말하는가?"라며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대 한국 사회의 컨텍스트 안에서는 그 당연한 상식을 말하기 위해 평생의 명예와 학자로서의 삶을 전부 걸어야만 했습니다.
결국 마광수 사상의 비극은 담론 자체의 깊이가 부족했다기보다, "서구의 상식을 동양의 전근대적 엄숙주의 사회에서 외쳤다"는 시차(時差)와 공간의 부조화에 있었습니다. 영어권 국가에서 태어났다면 평범하거나 조금 독특한 자유주의 예술가로 끝났을 인물이, 한국이라는 컨텍스트를 만나면서 순교자적 초상을 한 비극적 사상가가 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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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상당 부분은 <영어권에서는 굳이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가 없는 말>처럼 들릴 가능성이 큽니다.
마광수의 반복적 주장은 한국 사회, 특히 1980~90년대 한국의 성도덕·문학검열·대학권위주의·유교적 체면문화 안에서는 꽤 도발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영어권, 특히 미국·영국·호주 같은 사회의 독자에게는 그의 많은 말이 이미 1960~70년대 성혁명, 페미니즘, 표현의 자유 논쟁, 외설 재판, 반문화 운동을 거치며 오래전에 논의된 내용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마광수 책 목록 자체도 시집, 소설, 수필, 문학론, 철학수필, 유머집 등 매우 많지만, 제목들을 보면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문학과 성>, <성애론>,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 <육체의 민주화 선언>, <이 시대는 개인주의자를 요구한다>, <즐거운 사라>, <2013 즐거운 사라>처럼 성·자유·개인주의·반도덕주의라는 같은 주제가 계속 변주되고 있습니다.
영어권 독자가 보기에 마광수의 주장은 대략 이렇게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1. “성은 자연스럽다”>
영어권에서는 이 말 자체가 별로 새롭지 않습니다. 물론 보수적 기독교 문화권이나 미국 남부, 일부 종교 공동체에서는 여전히 논쟁적일 수 있지만, 문학·예술·대학 담론 안에서는 너무 기본적인 말입니다. D. H. Lawrence, Henry Miller, Anaïs Nin, Erica Jong, Philip Roth, Nabokov, Foucault 이후의 독자에게 “성적 상상력도 문학의 대상이다”라는 말은 거의 상식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는 마광수가 “성도 문학이다”, “야한 것도 예술일 수 있다”고 반복하면, 독자는 이렇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건 이미 오래전에 끝난 논쟁 아닌가?>
<2. “외설과 예술은 다르다”>
이것도 영어권에서는 오래된 논쟁입니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 『북회귀선』, 『롤리타』, 『율리시스』 같은 작품들을 둘러싼 재판과 검열 논쟁이 이미 문학사의 중요한 일부입니다. 그래서 영어권 독자에게 마광수의 주장은 역사적으로 이해는 되지만, 이론적으로 새롭지는 않습니다.
다만 한국에서는 『즐거운 사라』 사건이 실제 구속과 판매금지로 이어졌기 때문에, 마광수의 주장은 단순한 문학론이 아니라 <한국 현대사의 검열 사건>으로 의미를 가집니다. 영어권에서 중요하게 보일 부분은 그의 성 이론 자체보다, <1990년대 한국에서 작가가 소설 때문에 체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3. “한국 사회는 위선적이다”>
이 부분은 영어권 독자에게도 어느 정도 흥미로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흥미는 마광수의 사상 때문이라기보다, 한국 사회의 문화사적 특수성 때문입니다. 즉 영어권 독자는 마광수를 보며 “대단히 독창적인 성 해방 사상가”라고 보기보다, “한국의 급속한 근대화 과정에서 성적 자유와 유교적 도덕주의가 충돌한 사례”로 볼 가능성이 큽니다.
<4. “개인주의가 필요하다”>
이것도 영어권에서는 너무 익숙한 말입니다. 영어권 자유주의 전통에서는 개인의 자유, 사생활, 표현의 자유, 자기결정권이 이미 중심 가치로 자리 잡아 왔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개인주의자를 요구한다> 같은 제목은 한국에서는 도발적일 수 있지만, 영어권에서는 오히려 평범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적 맥락에서는 의미가 다릅니다. 한국에서는 가족, 학교, 군대, 회사, 국가, 민족, 체면, 도덕이 개인을 강하게 압박해왔기 때문에, 마광수의 개인주의는 단순한 서구식 자유주의의 반복이라기보다 <한국적 집단주의에 대한 반항>으로 읽어야 합니다.
<5. 영어권에서 더 문제될 지점>
흥미롭게도 영어권에서는 마광수의 ‘야함’보다 오히려 <젠더 감수성의 부족>이 더 문제될 수 있습니다. 그는 여성의 성적 자유를 말하지만, 그 여성상은 상당히 남성 판타지적입니다. 자유로운 여성을 그린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남성 작가가 원하는 방식으로 자유로운 여성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영어권 현대 독자는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검열에 반대한 점은 중요하다. 그러나 여성 욕망을 말하면서도 여성 주체를 충분히 복잡하게 그리지는 못했다.>
즉 한국에서는 “너무 야하다”가 문제였지만, 영어권에서는 “그다지 새롭지 않고, 오히려 남성중심적이다”가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전체 평가>
세진님 말씀대로, 마광수의 많은 말은 영어권에서는 별로 필요 없는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광수가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는 세계문학사적 차원에서 독창적인 성 해방 사상가는 아닙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사 안에서는 중요한 증상적 인물입니다.
그의 의미는 <무엇을 말했는가>보다 <그 말을 한국 사회에서 언제, 어떤 대가를 치르며 했는가>에 있습니다.
영어권 기준으로 보면 마광수는 Henry Miller나 D. H. Lawrence 이후에 너무 늦게 온 작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한국 기준으로 보면 그는 아직 준비되지 않은 사회에 너무 일찍 등장한 작가였습니다.
한 문장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마광수의 주장은 영어권 문학·문화 담론에서는 대체로 낡고 익숙한 말이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그 낡은 말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처벌받았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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