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13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 - 21세기의 친일 문제 복거일2012 초판 2003년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 : 알라딘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 - 21세기의 친일 문제
복거일 (지은이)북앤피플2012-10-20초판출간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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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품절 확인일 : 2015-01-13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의 개정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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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6쪽

책소개
우리 시대의 오랜 자유주의자로 살아온 작가 복거일 저자가 우리 사회의 “순수하고 단순한 진실”을 믿는 민중주의·민족주의적 역사관의 입장들을 겨냥해 쓴, 그리고 보다 거시적이고 합리적인 역사관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그동안 벼르고 있던 사유와 연구의 깊이를 쏟아놓음으로써 오늘날 우리 사회의 다소 경직된 역사관에 일침을 놓는 사회 비평서이자, 일제 식민지 시대의 총체적인 우리 사회 정황을 많은 양의 사료들을 근거로 다시 꼼꼼하게 살펴보고 깊게 성찰해보려는 저자의 의지가 깔린 역사 비평서이다.

일본의 식민 통치와 관련될 수밖에 없는 우리의 근대 역사에 대한 평가를 ‘계량적’ 연구로 접근하고자 한다. 즉, 그러한 연구 방법론은 “식민지 조선에서 조선 사람들은 실제로 어떻게 살았나?”(11쪽)라는 물음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저자 복거일 씨가 그 답을 찾는 과정은 특히 제11장 「일본의 조선 식민 통치에 대한 평가」에 잘 나타나 있다. 전체 15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제11장은 이 책 전체 분량의 1/3에 해당할 정도로 이 저술의 무게중심이 실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저자의 ‘계량적 연구 방법론’은 당시의 인구 추세를 살피는 데 있다.



목차


재판 서문
서언

제1장 친일 문제에 관련된 가정들
제2장 친일파의 정의
제3장 조선조 말기의 사회 상황
제4장 조선조 말기의 국제 정세
제5장 식민 통치 아래에서의 친일 행위
제6장 친일파의 판별
제7장 친일파 처벌의 법적ㆍ도덕적 근거
제8장 친일파 청산의 효용
제9장 반민족행위처벌법과 반민족행위특별조서위원회
제10장 프랑스의 경우
제11장 일본의 조선 식민 통치에 대한 평가
제12장 소급적 평가의 위험
제13장 친일 문제에 대한 합리적 접근
제14장 과거는 운명 자체다
제15장 일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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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원 (문학평론가)




저자 및 역자소개
복거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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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충남 아산 출생. 『미추홀-제물포-인천』처럼 역사를 주제로 삼은 작품들은 아래와 같다.
● 『비명(碑銘)을 찾아서: 게이조우京城, 쇼우와 62년』(1987) : 이토 히로부미 추밀원 의장이 안중근 의사의 저격에서 살아남았다는 가정 아래, 동양 역사의 전개를 그린 대체 역사alternate history 소설.
● 『파란 달 아래』(1992) : 남북한의 월면 기지들의 통합으로 남북한 통일의 가능성이 커지는 과정을 그린 미래 역사future history 소설.
● 『목성잠언집』(2002) : 목성의 위성 개니미... 더보기

최근작 : <미추홀, 제물포, 인천 2>,<미추홀, 제물포, 인천 1>,<‘87체제’를 넘어 새로운 대한민국> … 총 123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이 책은

자유주의자 복거일의 새로운 안티 테제: ‘친일 행위의 평가와 단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이 책은 우리 시대의 오랜 자유주의자로 살아온 작가 복거일 씨가 우리 사회의 “순수하고 단순한 진실”을 믿는 민중주의·민족주의적 역사관의 입장들을 겨냥해 쓴, 그리고 보다 거시적이고 합리적인 역사관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그동안 벼르고 있던 사유와 연구의 깊이를 쏟아놓음으로써 오늘날 우리 사회의 다소 경직된 역사관에 일침을 놓는 사회 비평서이자, 일제 식민지 시대의 총체적인 우리 사회 정황을 많은 양(尾註만 72쪽임)의 사료들을 근거로 다시 꼼꼼하게 살펴보고 깊게 성찰해보려는 저자의 의지가 깔린 (일종의 재야 입장의) 역사 비평서이다. 내용의 초점은 이 책의 부제가 말해주고 있듯이, (자칫 민감하고 뜨거운 논쟁의 불씨가 될 만한) ‘우리 시대의 친일 문제’에 맞춰져 있다.

친일 행위의 단죄, 과연 얼마나 타당한가?

그러한 이 책은 저자 「서언」 첫머리에서 그 집필 목적과 의의와 문제의식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식민지의 경험은 한 민족의 넋에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래서 그것은 여러 가지 풀기 어려운 문제들을 낳는다. 그렇게 풀기 어려운 문제들 가운데 특히 어려운 것은 식민 통치에 협력한 사람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다루느냐 하는 것이다. 다른 민족이나 나라의 지배를 받은 사회들은 무수히 많았지만, 이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한 사회는 없었다. 우리 경우, 그런 협력 행위들이 있은 지 6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그 문제는 깔끔하게 정리되지 못했고, 친일 행위들과 그런 행위들을 한 사람들에 대한 평가는 끊임없이 덧나는 상처처럼 우리를 괴롭힌다. 그래서 친일 행위들과 친일파의 처벌을 주장하는 목소리들은 여전히 높다. 그들은 그런 처벌이 우리 사회를 개선하고 발전시키는 데 긴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주장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서, ‘그런 주장은 과연 얼마나 타당한가?’ 하는 물음조차 좀처럼 제기되지 않는다. 이 책은 그런 물음을 제기하고 그것에 대해 가능한 한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답변을 마련해보려는 생각에서 나왔다.”(9∼10쪽)

“그들을 변호하게 된 것은 내가 작가이기 때문일 터이다.”

또한, 복거일 씨는 이 책을 저술하게 된 동기 혹은 스스로를 부추기게 된 책무에 대해서 자신의 세계관(역사관)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서문」의 말을 잇는다:

“이 글을 쓰면서, 특히 힘든 처지에서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했던 사람들에 관한 자료들을 찾는 과정에서, 나는 이제 자신들을 변호할 길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 일종의 책무를 지녔다는 것을 점점 절실하게 느꼈다. 산 사람들과 마주하면, 죽은 사람들은 늘 소수다. 『소수를 위한 변명』(문학과지성사, 1997)에서 나는 ‘개인은 궁극적 소수’라는 사실을 지적했었다. 만일 이렇게 말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나는 말하고 싶다. ‘죽은 자는 더 궁극적인 소수다.’ 산 사람들과는 달리, 죽은 사람들은 연합을 이룰 수 없다. 그들은 모두 홀로 누워서 자신을 변호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후대 사람들의 선고를 받는다.
/ 그들을 변호하게 된 것은 내가 작가이기 때문일 터이다. 세상이 버린 사람들을 작가는 거둔다. 그리고 그렇게 버림받은 자들에 관해서 세상이 듣기 싫어하는 얘기들을 들려준다. 그것이 그의 책무이다. 그는 때로 자신의 얘기를 예술적 진실이라 부른다. 예술적 진실은 윤리적 판단이라는 면이 역사학적 판단이라는 면을 가를 때 만들어지는 선이다. 때로 솟구치고 때로 추락하는 그 선이 드러낸 뜻밖의 모습들을 되도록 정직하게 바라보려 애썼다.”(10쪽)

식민지 시대 조선인 인구는 두 배로 늘었다

이러한 복거일 씨는 이 적지 않은 양의 저술에서 일본의 식민 통치와 관련될 수밖에 없는 우리의 근대 역사에 대한 평가를 ‘계량적’ 연구로 접근하고자 한다. 즉, 그러한 연구 방법론은 “식민지 조선에서 조선 사람들은 실제로 어떻게 살았나?”(11쪽)라는 물음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저자 복거일 씨가 그 답을 찾는 과정은 특히 제11장 「일본의 조선 식민 통치에 대한 평가」에 잘 나타나 있다. 전체 15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제11장은 이 책 전체 분량의 1/3에 해당할 정도로 이 저술의 무게중심이 실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저자의 ‘계량적 연구 방법론’은 당시의 인구 추세를 살피는 데 있다. 저자에 의하면, “어떤 통치의 성격과 효율은 궁극적으로 인구 추세에 반영”(11쪽)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식민 통치에선 그런 인구 추세의 상관관계가 더욱 긴밀하니,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역사가 잘 보여준 것처럼, 정복자들이 약탈적이거나 추출적extractive 정책을 펴면, 원주민들의 인구는 빠르게 줄어든다. 통치의 영향을 따질 때 흔히 고려되는 요소들만이 아니라 비제도적 차별과 식민자들이 퍼뜨린 질병들처럼 놓치기 쉬운 요인들까지, 심지어 식민지화의 심리적 충격과 같은 요인들까지, 인구 추세엔 반영된다.”(11쪽)

그런데, 복거일 씨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식민지 시기 조선인 인구는 1910년의 13,1128,780명에서 1942년의 25,525,409명으로 94.4% 늘었다”(12쪽)는 것이다. 즉, “혹독한 식민 통치를 받은 조선 사람들이 보인 이처럼 두드러진 인구 증가는 그 자체로서 아주 흥미로운 현상이며, 깊은 조사와 설득력 있는 설명을 받아야 마땅하다”(13쪽)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사실, 기본적으로 슬픈 근대사를 거쳐오면서, 즉 일본으로부터의 피식민지 근대사를 살아온 (누구나 민족주의의 유전인자를 가지고 태어난) 동시대의 우리들에게는 무척 민감한 사안이다.

왜냐하면, 복거일 씨는 “어쨌든, 이런 인구 추세에서 필연적으로 나오는 결론은, 식민 통치의 본질적 제약들과 폐해들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식민 통치 아래서 조선 사람들은 상당히 잘살았다는 것이다”(13쪽)라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덧붙인다: “그들은 조선인들은 조선조 통치 아래에서보다 훨씬 낫게 살았을 뿐 아니라, 물질적 조건들만 따진다면, 같은 시기의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실질적으로 못할 것이 없는 삶을 살았다. 이런 결론은 물론 우리 사회의 통념에 정면으로 부딪힌다. 그러나 그것을 피할 길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13∼14쪽)

그러면서 복거일 씨는 그러한 연구 방법론의 근거를 ‘기구 가설institution hypothesis’(“사회 기구들의 성격과 효율이 한 사회의 경제적·사회적·정치적 발전에서 결정적 요소로 작용한다는 주장” 14쪽 )에서 찾는다. 복거일 씨에 의하면, “이 가설은 유럽 열강의 식민지들이었던 나라들의 경험에 비추어 증명되었고, 자연히, 우리 식민지 경험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14∼15쪽)는 것이다. 결국, 그 기구 가설을 통해 우리 근대사를 살피면, 식민지 시절, 대만과 조선에 세워진 사회 기구들은 일본이 “정착자 사회” 방식의 식민지화 과정에서 (사회주의 체제로 가지 않은) 대만과 조선의 산업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고 복거일 씨는 추론한다.

“진실은 순수한 적이 드물고 단순한 적은 없다”

또한, 이 책 「서문」 말미에 인용한 오스카 와일드의 말 즉, “진실은 순수한 적이 드물고 단순한 적은 없다”(18쪽)는 명제를 모토로 한 복거일 씨의 이 저술은 ‘친일파’라는 용어 및 개념에서부터, 그 용어를 쓰게 된 당시 우리 근대사의 구체적인 사건 및 배경을 사료(史料)를 바탕으로 재고함으로써, 기존의 통념만큼 ‘친일파’를 명확히 정의할 수는 없다고 역설한다. 그 문제에 대해서 (그 예로) 복거일 씨는 이렇게 시작한다: “을미사변으로 집권한 제4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는 나쁜 사람들도 많았지만, 당시 명망이 높던 사람들과 후세의 역사가들이 애국자라고 판정한 사람들도 드물지 않았다.

그 사람들 모두를 친일파라고 정의하면, 친일파의 뜻이 어쩔 수 없이 느슨해지고 모호해진다”(25쪽) 또한, 흔히 쇄국주의자로 알려진 흥선대원군이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당시 왕비였던 민비를 시해하는 과정에서 일본 세력과 손잡았던 경우에선 그 사건을 범죄로 규정짓고, “친일 행위라는 개념들에는 법적 측면과 함께 도덕적 측면도 있다는 사실과 그 둘은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친일 행위를 정의할 때, 법적 기준은 당연히 중심적 기준이 된다. 그러나 도덕적 기준은 판단하기가 훨씬 어렵다”(26쪽)고 역설한다.

만해 한용운 선생도 친일 행위를 했다?

그런가 하면, 외국으로 망명하지 않고 한반도에 남은 조선인들의 대부분은 일본의 통치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는 대목에선, 당시 민족 지도자였던 만해 한용훈 선생의 행적을 예를 들면서, “『조선불교유신론』의 핵심적인 사항인 불교 승려들의 결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만해 한용훈 선생 융희 4년(1910년)에 ‘중추원(中樞院) 의장 김윤식(金允植) 각하’라고 수신자를 밝힌 『중추원 헌의서(獻議書)』를 냈다. 이어 그해 9월에 ‘통감(統監) 자작(子爵) 사내정의(寺內正毅) 전(殿)’이라고 수신자를 밝힌 『통감부 건백서(建白書)』를 냈다.

여기서 우리는 만해가 낸 문서의 명칭이 ‘헌의서’에서 ‘건백서’로 바뀐 점에 주목해야 한다. ‘헌의’는 ‘윗사람에게 의견을 아뢴다’는 뜻을 지녔지만, ‘건백’은 ‘임금이나 조정에 의견을 아뢴다’는 뜻을 지녔다. 만해가 통감이나 통감부를 임금이나 조정으로 여겼다는 얘기다”(29쪽)라고 쓰고 있다. 만해 선생이 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건백서를 낸 결정적인 이유는, 끝내 자기 혁신을 하지 못한 당시 조선조 정부에 대해 절망하고 체념한 데 있으며, 상대적으로 일본에 대해선 우려와 기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복거일 씨는 이 책에서 쓰고 있다.

그러면서 복거일 씨는 만해 선생의 이 ‘건백서’에 대해, “요즈음 무슨 조치가 실효를 거두려면 ‘대통령 직속 기구’를 통해 일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흔히 나오듯, 승려 금혼 해제가 ‘통감부의 명령’을 통해 빠르고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드러나서 흥미롭다. 1910년 9월이면 한일합방조약이 말 그대로 ‘잉크도 마르지 않은 때’였다. 그런 때에 그렇게 훌륭한 민족 지도자가 그런 건의를 일본의 식민 통치 책임자에게 냈다는 사실은 당시 조선인들의 현실 인식을 충격적인 모습으로 드러낸다”(30쪽)라고 한다.

전봉준·흥선대원군·일본 천우협(天佑俠)의 우호적 트라이앵글!

또한, ‘노비 제도’를 없앴다는 점에서 우리 역사의 혁명적 사건이었던 ‘갑오경장’은 5백여 년의 조선조 역사에서 이념과 범위와 효과에서 그만한 것이 없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갑오경장은 일본이 무력을 바탕으로 조선 정부에게 압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성공했다는 복거일 씨의 주장에 있다. 자칫 큰 논쟁의 여지가 있는 또 하나의 복거일 씨 주장은, ‘동학란’의 배경에 대한 정치적 관계에 있다. 복거일 씨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동학란의 성격과 의의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분석과 평가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동학란이 조선조 조정의 권력 투쟁과 연관이 있다는 증거들이 분명히 있고, 그 점에 대한 역사가들의 고증도 있었다. 전봉준(全琫準)이 여러 해 동안 흥선대원군의 거처인 운현궁(雲峴宮)에 드나들면서 대원군과 깊은 관계를 맺은 것은 널리 알려졌다. 대원군이 동학란을 일으키도록 전봉준을 사주하고 지원했다는 증거들도 적잖다. 그리고 그런 공작에서 대원군과 일본이 협력했음을 가리키는 증거들도 여럿이다.”(41쪽)

덧붙여, “전봉준이 일본인들과 만났고 그들로부터 상당한 도움을 받은 것도 거의 확실하다. ‘천우협(天佑俠)’이란 일본 국수주의 단체가 동학란 때 상당히 활발하게 움직인 것은 여러 가지 자료들로 증명되었다”(43쪽)라고 역설하면서, 당시 일반적인 조선인들이 갑오경장을 통해 일본에 대해 끌렸을 거라는 추론을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민족주의와 민중주의의 편향에서 벗어나 중립적 관점에서 갑오경장을 살피면, 그것의 혁명적 조치들로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 사람들은 일본에 대해서 호감을 품게 되었으리라는 사실이 이내 눈에 들어온다. 물론 그들은 일본이 조선을 위해서 추진하겠다고 내건 정책들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기대를 품었을 터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상당히 많았을 터이다. 해방된 노비들, 사회적 천대와 경제적 차별을 받았던 천민들, 재혼을 할 수 있게 된 여인들, 문반에 비해 차별적 대우를 받았던 무반들, 이전엔 도성에 드나들기도 어려웠던 불교 승녀들---이들 계층들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는 일본에 호감을 품었을 터이다.”(46쪽)

덧붙여, 복거일 씨는 당시 지식인들조차 일본 쪽으로 기울었던 이유에 대해 이렇게 기술한다: “당시 조선 지식인들이 일본에 대해 큰 호감을 갖게 된 또 하나의 요인은 조선조가 공식적으로 청(淸)의 속국이었고 실질적으로 조선에 주둔한 청군의 지배를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조선이 청의 속국이 된 것은 조선 중기 인조(仁祖) 때였지만, 양차의 호란 바로 뒤의 시기를 빼고는 청이 직접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는 않았다. 서양 세력이 들어오고, 청의 조선에 대한 지배적 위치가 위협을 받자, 청은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조선의 내정에 직접 간섭하기 시작했다. 조선 지식인들은 당연히 그런 사정에 대해 울분을 느꼈다.”(53쪽)

“어디까지가 강제된 행위들이고 어디서부터 자발적 친일 행위인가?”

또한 복거일 씨는, 당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무능한 조선 정부의 책임과 (위의 주장대로) 조선인들의 일본 편향뿐만 아니라, 당시 식민지 경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제국주의 열강들은 대부분 조선에 대해 호의적이거나 동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 통치를 자연스럽고 정당한 것으로 여겼다는 데서 찾는다. 그렇듯, 대내외적으로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 슬픈 근대사에서의 친일 행위에 대해, 반세기 넘게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았던 조선인들이 일본의 통치를 당연하고 합법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던 상황에서의 친일 행위에 대해 복거일 씨는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변호한다:

“군국주의, 천황 숭배, 조선 역사의 왜곡, 조선어의 말살과 일본어 강요, 창씨 개명, 강제 징집과 징용, 각종 헌금들의 모금과 같은 일본의 정책들을 적극적으로 찬양하거나 보급한 행위들은 특히 중대한 친일 행위로 여겨진다.

/ 이런 행위들은 물론 우리에게 혐오스럽다. 그러나 그런 행위들에 대해 판결을 내릴 때, 우리는 그것들이 이루어진 환경을 고려해야 한다. 위에서 살핀 것처럼, 일본의 식민 통치는 공식적이었고, 실질적이었고, 혹독했고, 길었다.

그리고 역대 조선 총독들이 모두 일본군 현역 장군들이었다는 사실이 상징하는 것처럼, 일본의 지배에 대한 조선인들의 저항은 아주 작은 것들도 용납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 총독부는 어느 때나 필요한 만큼 친일파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일제의 통치를 찬양하는 연사들이 필요하면, 조선 총독부는 조선 지식인들을 징집해서 그런 연사들로 만들었고, 조선인 순사들이나 헌병들이 필요하면, 그들도 어렵지 않게 만들어냈다. 조선이 공식적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기 전인 1908년에 일본이 조선인 헌병 보조원을 성공적으로 모집했다는 사실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어쩌다 한두 사람은 큰 값을 치르고서 그런 강요를 거부할 수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럴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실제로 친일 행위를 한 사람들이 그런 행위들을 하지 않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징집되어 그 일들에 동원되었을 것이고,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터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디까지가 강제된 행위들이고 어디서부터 자발적 친일 행위인가? (중략) 사정이 그러했는데, 지금 우리가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았던 조선 사람들에 대해서 무엇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모두 용감한 달걀이 되어 바위처럼 버티고 선 조선 총독부의 권력에 부딪히라고?

/ 일본의 식민 통치가 확고하게 자리 잡자, 조선 사람들은 그저 연명하기 위해서도 자발적으로 친일 행위들을 해야만 되었다. 예컨대, 글을 써야 먹고 살 수 있었던 문인들은 때때로 조선 총독부의 식민 통치 정책을 찬양하거나 돕는 글들을 써야만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는 자신의 작품들을 발표할 지면을 얻을 수 없었다. 절필할 수 있었던 몇몇 사람들을 빼놓으면, 당시엔 모든 문인들이 ‘잠재적 친일 문인’이었다. 올곧은 작가로 여겨져 작품 활동에 비해 무척 높은 평가를 받은 김정한(金廷漢) 선생이 실은 친일 문학이라고 분류될 수밖에 없는 작품을 적어도 한 편은 썼다는 최근의 연구 결과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 이런 사정은 친일 행위들과 친일파들에 대한 비난이 안은 논리적 문제를 또렷이 드러낸다. 친일 행위들과 친일파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하는 듯하지만, 그들이 선 자리는 논리적으로 지키기 어려운 곳이다.

/ 일본의 식민 통치 아래서 선 조선인들이 그들의 친일 행위들에 대해 비난을 받는다면, 그런 비난엔 그들이 친일 행위들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가정이 깔려 있다. 만일 그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면, 그들에 대한 비난은 물론 부당하다. 어떤 사람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을 때에만, 그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책임이 있다.

/ 그러나 일본의 식민 통치 아래서 산 사람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는 가정은 일본의 식민 통치가 그리 엄중하고 가혹한 것이 아니었다는 판단을 전제로 삼는다. 조선인들이 마음만 바로 먹었으면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고 조선 총독부의 협조 요구를 거부할 수 있었다는데, 어떻게 일본의 식민 통치가 엄중하고 가혹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 따라서 친일 행위들을 극렬하게 비난하는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일본의 식민 통치를 변호라는 셈이다. 이런 역설은 그들의 주장이 논리적으로 문제를 안았음을 가리킨다. 친일 행위와 친일파에 관한 논의가 보다 생산적이 되려면, 어려운 처지에서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평가를 조심스럽게 진행해서 그런 역설을 피해 가는 것이 긴요하다.

/ 위에서 살핀 것처럼, 식민 통치 시기의 친일 행위를 정의하기는 쉽지도 간단치도 않다. (중략) 그래서 지금 별다른 문제없이 친일 행위로 규정할 수 있는 것들은 언뜻 보기보다 훨씬 적다. 그런 행위들로 이내 꼽힐 수 있는 것들은 아마도 독립 운동을 한 조선인들에 대한 고문과 여자들을 속이거나 납치해서 ‘종군 위안부’들로 만든 행위 정도일 것이다.”(84∼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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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타기의 고수
술래 2017-08-18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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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 - 21세기의 친일 문제>

소설가이자 자유주의 비평가인 복거일의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는 한국 사회의 강고한 민족주의적·민중주의적 역사관에 정면으로 의문을 던지는 역사 비평서이다. 저자는 해방 후 반세기가 지난 시점에서도 여전히 격렬하게 분출되는 친일파 처단과 과거사 청산 논의를 냉정하게 돌아보고, 이를 감정적 단죄가 아닌 합리적 역사학의 영역으로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1. 친일파의 정의와 법적·도덕적 책임의 한계

저자는 우선 <친일파>라는 개념 자체가 매우 모호하며 명확히 규정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한다. 35년이라는 긴 식민 통치 기간 동안 해외로 망명하지 않고 한반도에 남아 삶을 영위해야 했던 대다수 민중은 일제의 행정 및 사법 체계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개인에게 도덕적·법적 책임을 물으려면 <자유로운 선택의 기회>가 전제되어야 하지만, 가혹한 식민 통치라는 거대한 집단적 강제력 아래에서는 그러한 선택권이 극히 제한적이었다고 본다. 따라서 부역의 정도가 극심하고 명백한 악행을 저지른 소수를 제외하고, 대다수 인물의 불가피했던 행위까지 소급하여 단죄하는 것은 법적·도덕적 정당성을 갖기 어렵다고 논증한다.

2. 계량적 역사학을 통한 일제 식민 통치의 재평가

책의 핵심 장인 제11장에서 저자는 인구 추세와 경제 수치를 바탕으로 하는 계량적 연구 방법론을 도입한다. 1910년 약 1,312만 명이었던 조선의 인구가 1942년 약 2,552만 명으로 94% 이상 증가했다는 통계 자료를 제시하며, 이는 연평균 0.12% 인구 증가에 그쳤던 조선 후기와 비교할 때 현저한 변화라고 강조한다. 다른 대륙의 수탈적 식민지와 달리, 일제 강점기 동안 근대적 위생·의료 체계와 사회 기반 시설이 도입됨으로써 조선인들의 물질적 생존 조건이 일정 부분 개선되었다는 분석이다. 저자는 이러한 객관적 정황을 직시할 때, 일제 통치 체제 내에서 이루어진 개개인의 적응과 협력을 일방적인 배신이나 범죄로만 몰아세울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3. 과거사 청산의 실효성과 미래 지향적 태도

저자는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 처단 사례(에퓌라시옹)와 한국의 반민특위 경험 등을 비교 검토하며, 지나친 과거사 청산 집착이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고 국가적 역량을 낭비하게 만든다고 경고한다. 이미 세상을 떠난 <죽은 자들>을 향한 뒤늦은 단죄는 경제적·사회적 생산성이 낮으며, 집단적 증오심을 자극하여 정치적으로 악용될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저자는 과거를 바꾸어 놓을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역사적 사실을 선악의 이분법이 아닌 진정한 역사적 사건으로 승화시켜 미래의 국익을 도모해야 한다고 제언하며 글을 맺는다.

평론: 감정적 성역에 던진 자유주의적 경종과 그 한계

복거일의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민감하고 성역화된 주제 중 하나인 친일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파격적인 노작이다. 한국 사회를 지배해 온 민족주의적 당위론에 맞서 자유주의와 계량경제학적 시각을 바탕으로 합리적 비판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지적 자극을 준다.

이 책이 지닌 가장 큰 미덕은 역사적 맥락과 개인의 선택 가능성에 대한 세밀한 접근이다. 역사적 사건을 단순한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구획하고 당대의 복잡한 삶의 결을 탈맥락화하는 대중적 민족주의의 한계를 냉정하게 짚어낸다. 강요된 체제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했던 개인들의 삶을 무조건적인 도덕적 단죄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라는 질문은, 역사 평가에서의 법적·도덕적 책임의 한계를 다시금 성찰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책은 명확한 공헌만큼이나 중대한 한계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 식민 통치의 구조적 폭력성에 대한 도피이다. 저자는 인구 증가와 물질적 삶의 개선이라는 수치를 근거로 식민지 근대화론의 입장을 대폭 수용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일제의 효율적인 수탈과 자국 이익의 극대화를 위한 부산물이었다는 본질을 간과한다. 수치화된 통계 뒤에 숨겨진 민족 차별, 정치적 권리의 박탈, 문화적 정체성의 살해라는 체제적 폭력을 경제적 계량 수치만으로 상쇄하려는 시도는 역사의 입체적 본질을 왜곡할 수 있다.

둘째, '강제성'과 '자발적 협력' 사이의 경계를 지나치게 모호하게 만든다. 어쩔 수 없이 체제에 적응하며 살아간 민중의 소극적 생존 행위와, 일제의 침략 전쟁을 미화하고 동족을 사지로 몰아넣는 데 앞장섰던 지식인·정치인들의 적극적·자발적 협력 행위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 저자는 구조적 강제력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지식인층의 윤리적 책임과 역사적 단죄의 정당성마저 과도하게 희석시키는 우를 범한다.

결론적으로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는 민족주의적 광풍에 휩싸이기 쉬운 과거사 논의에 '합리성과 객관성'이라는 중요한 화두를 던진 문제작이다. 비록 식민 통치의 비극적 본질을 다소 단순화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는 없으나, 감정적 증오를 넘어 역사적 사실을 냉철하게 대면하고 다원적인 시각에서 평가해야 한다는 저자의 경고는 21세기 한국 사회가 여전히 경청할 만한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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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거일,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 ― 21세기의 친일 문제』 요약·평론

복거일의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는 2003년 출간된 534쪽의 사회평론서다. 책은 <친일파의 정의>에서 시작해 조선 말기의 국내외 상황, 식민지기의 협력, 친일파 판별과 처벌, 반민특위, 프랑스의 대독협력자 청산, 식민통치 평가, 소급적 평가의 위험, 한일관계까지 15장에 걸쳐 논의를 전개한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죽은 친일 인사들을 ‘무죄’라고 선언하려는 책이라기보다는, <오늘날 우리가 식민지 시대 사람들을 재판할 때 어떤 기준으로 재판할 수 있는가>를 문제 삼는 책이다. 그러나 그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간 결과는 친일 청산론에 대한 매우 강한 비판이 되며, 바로 그 때문에 출간 당시부터 논쟁적이었다. 당시 소개 기사도 복거일의 중심 질문을 “그런 처벌이 과연 타당한가”라는 문제로 요약했다.

1. 출발점 ― ‘친일파’라는 말부터 정의해야 한다

복거일이 가장 먼저 문제 삼는 것은 <친일파라는 범주 자체의 모호함>이다.

식민지 시대에 일본인과 거래한 사람, 총독부 관리, 교사, 경찰, 군인, 기업가, 문인, 일본의 전쟁에 적극 협력한 사람을 모두 같은 종류의 ‘친일파’로 부를 수 있는가? 그는 그렇게 단순하게 묶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여기서 복거일은 법적 책임과 도덕적 책임을 구별한다. 법적으로 처벌할 수 있는 행위와 후세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비난할 행위는 같지 않다. 더구나 도덕적 판단에는 당시 사람들이 실제로 선택할 수 있었던 선택지와 그 선택에 따르는 비용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지점은 이 책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부분 가운데 하나다.

<친일 여부를 0과 1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2. 조선 말기의 ‘일본관’을 식민지 이후의 눈으로 보지 말라

복거일은 19세기 말 조선인이 일본을 바라본 시각 역시 1910년 이후의 식민지 경험을 거꾸로 투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당시 조선은 청·일·러시아 등 여러 세력이 경쟁하는 가운데 국가의 생존을 모색하고 있었다. 개화파 가운데 일본을 모델로 삼거나 일본과 협력하려 한 사람이 있었다고 해서 그들을 모두 훗날의 의미에서 ‘친일파’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갑오개혁으로 노비·천민·여성 등 전통적 신분질서 아래 억압받던 사람들이 이익을 얻었으며, 일부 조선인에게 일본은 처음부터 단순한 ‘침략자’만은 아니었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또한 청의 조선 내정 간섭을 싫어했던 개화 지식인이 일본에 기대를 걸었던 역사적 환경도 강조한다.

이것은 중요한 지적이다. 1894년의 친일과 1938년의 친일은 같은 것이 아니다.


3. 식민지에서 ‘자유로운 선택’은 얼마나 가능했는가

책의 철학적 핵심은 <책임은 자유로운 선택을 전제로 한다>는 명제다.

일본의 식민통치는 공식적이고 강력하며 장기간 지속된 통치체제였다. 학교에 다니고, 직업을 갖고, 관청과 거래하고,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려면 식민지 국가와 어느 정도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복거일은 묻는다.

<어디까지가 생존을 위한 순응이고, 어디서부터 자발적 협력인가?>

총독부의 요구를 거부하고 자신의 직업·재산·안전·가족의 생계를 희생할 수 있었던 사람은 제한되어 있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독립운동가와 같은 수준의 도덕적 용기를 요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한 사람을 후세가 비난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것이다.

복거일의 논리는 여기서 가장 강력해진다.

우리는 안중근이나 윤동주를 존경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조선인에게 안중근이나 윤동주처럼 행동할 의무가 있었다>

고 말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4. 그러나 친일에는 정도가 있다

바로 여기서 복거일 논리의 약점도 나타난다.

‘강압적 식민체제 속에 살았다’는 사실에서 모든 협력이 거의 불가피했다는 결론이 자동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 생계를 위해 하급 관리로 근무한 사람
  • 식민지 교육기관에서 교사로 일한 사람
  • 일본 기업과 사업한 사람
  • 독립운동가를 체포·고문한 경찰
  • 전쟁 말기 조선 청년들에게 자발적으로 일본군 입대를 선동한 지식인

은 동일하게 취급하기 어렵다.

즉 복거일이 제기한 <선택 가능성>이라는 기준은 매우 중요하지만, 오히려 그 기준을 적용하면 친일의 정도를 더 세밀하게 구별해야 한다.

식민지라는 구조적 강제와 개인의 능동적 협력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5. ‘법적 처벌’과 ‘역사적 평가’는 또 다른 문제다

복거일은 친일파를 현재 시점에서 처벌하려는 것에 특히 비판적이다.

그의 자유주의적 법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법치주의다. 당시 법으로 범죄가 아니었던 행위를 훗날 만든 기준으로 처벌하는 것은 소급입법의 위험을 안는다. 그래서 책은 별도의 장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과 반민특위를 검토하고, 또 프랑스의 나치 협력자 청산을 한국과 비교한다.

여기에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중요한 구분이 하나 더 필요하다.

<법적으로 처벌하지 않는 것>과
<역사적으로 친일 행위를 조사하고 기록하지 않는 것>

은 전혀 같은 일이 아니다.

이미 죽은 사람을 형법으로 처벌할 수 없다고 해서 그 사람이 독립운동가를 탄압했는지, 식민권력으로부터 어떤 특혜를 얻었는지, 전쟁동원을 적극 선전했는지를 역사학자가 조사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복거일의 논리는 때때로 지나치게 멀리 나간다.


6. 식민지근대화 문제

책은 일본의 조선 식민통치 자체에 대한 평가에도 상당한 부분을 할애한다. 제11장이 아예 <일본의 조선 식민 통치에 대한 평가>이고 이후 <소급적 평가의 위험>으로 이어진다.

복거일은 식민통치 아래에서 근대적인 제도와 시설, 경제적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반일 민족주의 때문에 무조건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실제 당시 한 서평 역시 그의 주장을 “식민지 아래에서의 변화와 그것이 현재 한국에 남긴 영향까지 인정해야 한다는 논지”로 정리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이 있다.

<식민지기에 근대화가 일어났다>와
<식민지배 덕분에 한국인이 잘살게 되었다>와
<그러므로 일본의 식민지배가 정당했다>

는 서로 다른 명제다.

첫 번째 명제가 사실이라고 해서 두 번째와 세 번째가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이 구별을 느슨하게 하면 복거일의 논리는 식민지근대화론에서 식민지배 정당화론으로 쉽게 오해되거나 실제로 미끄러질 위험이 있다.


7. 복거일이 가장 강하게 공격하는 것은 ‘현재주의’다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개념을 하나 꼽는다면 <현재주의(presentism)>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이 1930년대 조선인에게 말한다.

“왜 일본에 협력했는가? 왜 저항하지 않았는가?”

복거일은 여기서 당시 상황을 복원하라고 요구한다.

이는 역사학에서도 중요한 원칙이다. 과거 사람들이 우리처럼 미래를 알고 있었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1905년 사람은 1945년에 일본이 패망한다는 것을 몰랐고, 1937년 사람 역시 대한민국이 만들어질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이 보았던 세계 안에서 선택을 이해해야 한다.

이 점에서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는 읽을 가치가 충분한 책이다.


8. 그러나 피해자의 관점이 약하다

이 책의 가장 큰 한계도 명확하다.

복거일은 계속 <친일자로 지목된 사람에게 공정한가?>를 묻는다.

그러나 그만큼 강하게

<그 사람의 협력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공정한가?>

를 묻지는 않는다.

가령 독립운동가를 체포한 조선인 경찰에게 “식민지 체제에서 직장을 가진 개인이었다”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체포당하고 고문당한 독립운동가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여전히 매우 구체적인 가해다.

역사적 이해와 도덕적 면책은 같은 것이 아니다.

복거일은 전자를 강조하다가 종종 후자에 가까이 간다는 것이 이 책에 제기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비판이다.


9. 이 책의 진짜 공헌

그럼에도 이 책을 단순히 ‘친일파를 옹호하는 보수 우파 책’이라고 치워버리는 것은 아깝다.

이 책은 한국의 친일 논쟁에 적어도 네 가지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누가 친일파인가?>

<협력과 생존을 어디에서 구별하는가?>

<극단적 상황에서 개인에게 어느 정도의 영웅적 행동을 요구할 수 있는가?>

<역사적 규명과 법적·도덕적 처벌을 구별해야 하지 않는가?>

이 질문들은 복거일의 답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남는다.

오히려 제대로 된 친일 연구라면 이 질문들에 답해야 한다.


종합평가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는 <친일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책이라기보다 <친일이라는 죄목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를 묻는 책으로 읽을 때 가장 생산적이다.

복거일의 장점은 사람들이 실제로 처했던 <선택의 조건>을 강조한다는 데 있다. 독립운동가는 존경하되 독립운동을 하지 못한 평범한 모든 사람을 도덕적으로 유죄 판결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 있다. 친일 행위의 법적 책임과 도덕적 평가를 구별하자는 주장 역시 중요하다. 복거일 자신도 식민지기의 구체적 환경을 고려해 친일 문제를 보다 유연하게 평가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의 순응>을 이해해야 한다는 올바른 명제가 <적극적 협력자의 책임도 가볍게 보아야 한다>는 명제로 넘어가면 문제가 생긴다. 더구나 법적 처벌의 어려움과 역사적 규명의 필요성은 별개의 문제다.

따라서 이 책에서 가장 받아들일 만한 명제는

<친일은 이분법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고,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명제는 이것에서 더 나아가

<이제 친일 문제 자체를 역사 속으로 돌려보내자>

는 결론이다. 실제 책 소개도 저자의 최종적인 방향을 바로 그렇게 요약한다.

흥미롭게도 복거일의 문제제기는 <친일 청산을 하지 말자>는 논리보다 오히려 <친일 연구를 훨씬 정교하게 하자>는 방향으로 사용할 때 더 강력하다. 즉 ‘친일파 명단’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각 인물의 <시기·행위·동기·선택 가능성·이익·강제의 정도·타인에게 끼친 피해>를 따져야 한다.

그렇게 보면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는 친일 문제에 대한 최종 답안이라기보다, 한국의 지배적인 민족주의적 해석에 던진 매우 유용한 <반대신문>이다. 반대신문에는 상당한 힘이 있지만, 그것이 피고인의 무죄를 자동으로 입증하지는 않는다.

특히 식민지 시대를 직접 살아간 평범한 조선인의 실제 경험을 이해하려 한다면, 이 책의 <강제와 선택 사이의 회색지대>라는 문제의식은 상당히 중요하다. 독립운동가와 적극적 친일파라는 양극단 사이에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에는 오히려 이 질문이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원하시면 다음에는 <복거일의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를 강만길·서중석·윤해동·박지향·이영훈 등의 식민지 인식과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복거일이 한국 역사학의 스펙트럼에서 정확히 어디에 위치하는지가 훨씬 선명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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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비교해주세요

좋습니다. 복거일을 강만길·서중석·윤해동·박지향·이영훈과 함께 놓으면 한 가지가 먼저 분명해집니다. 이 여섯 사람을 단순히 <반일 ↔ 친일>의 한 줄 위에 세우면 상당히 왜곡됩니다. 특히 <윤해동과 이영훈>, <박지향과 이영훈>, <복거일과 이영훈>은 서로 다른 문제에서 기존 민족주의 역사학을 비판했을 뿐, 같은 역사관은 아닙니다. 이 구별이 중요합니다.

1. 먼저 전체 지도를 그려보면

대략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학자핵심 질문식민지 지배식민지기의 근대화친일·협력민족주의 역사학
강만길민족은 어떻게 해방·통일을 이루는가명백한 억압·수탈식민지 목적의 개발민족해방의 반대편기본적으로 긍정
서중석식민지·분단·독재의 책임은 무엇인가억압적 지배식민성 중시적극적 청산·규명강하게 계승
윤해동식민지 사회의 실제 삶은 이분법으로 설명되는가지배·억압이지만 복합적‘식민지 근대’ 자체의 모순저항/친일 사이 회색지대강하게 비판
박지향왜 근대 지식인이 제국에 협력했는가제국주의 지배근대성의 양면성동기·맥락을 이해해야 함도덕적 이분법 비판
이영훈근대적 경제성장은 언제 시작됐는가식민지이지만 제도적 변화 중시매우 중요민족주의적 친일론에 비판적근본적으로 비판
복거일후세가 과거 사람을 유죄판결할 권리가 있는가부당했지만 역사적 현실근대적 변화 인정선택 가능성·소급평가 문제강하게 비판

이 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복거일은 이영훈보다 오히려 박지향·윤해동과 문제의식이 만나는 부분이 상당히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 결론은 또 다릅니다.


2. 강만길 ― <민족해방>이 판단의 중심이다

강만길 역사학의 출발점은 매우 분명합니다.

그에게 한국 근현대사는

<식민지 → 민족해방 → 분단 → 분단극복>

이라는 큰 구조 속에서 이해됩니다.

강만길은 식민사학의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을 극복하기 위해 조선 후기의 내재적 발전 가능성을 연구했고, 이후 식민지 시대에는 민중과 민족해방운동을 역사 변화의 주체로 보았습니다. 최근 강만길 역사학 연구도 그의 기본 과제가 식민사학 극복이었고,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을 ‘민중’이라는 역사적 주체로 설정했다고 평가합니다.

따라서 강만길은 식민지근대화론에 상당히 비판적입니다. 식민지가 철도·공장·산업시설을 남겼다는 사실만으로 식민통치를 근대화로 평가한다면, 결국 침략과 타민족의 자기결정권 박탈이라는 근본 문제를 놓친다고 보았습니다.

복거일과 비교하면 차이가 선명합니다.

강만길은 묻습니다.

<그 사람이 민족해방이라는 역사적 과제에 어떻게 대응했는가?>

복거일은 묻습니다.

<당시 그 개인에게 실제로 다른 선택이 가능했는가?>

즉 강만길의 단위는 <민족과 역사운동>이고, 복거일의 단위는 <개인의 선택과 책임>입니다.

여기에서 두 사람은 상당히 멀리 떨어집니다.


3. 서중석 ― 강만길보다도 <친일 청산과 역사적 책임>을 분명히 한다

서중석은 강만길과 같은 민족민주주의 역사학의 큰 계보에 있지만, 관심의 중심이 조금 다릅니다.

강만길에게 민족해방과 분단극복이 중심이라면 서중석에게는

<친일 → 분단 → 이승만 체제 → 권위주의 → 민주화>

라는 정치사적 연속성이 특히 중요합니다.

서중석은 친일 문제와 과거사 규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왔고,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역사적 의의를 논하는 작업에도 관여했습니다. 또한 그의 연구 경력에는 과거사 진상규명, 이승만 정부, 독립운동세력, 제주4·3 등이 지속적으로 등장합니다.

따라서 복거일과 가장 직접적으로 충돌하는 사람이 이 비교에서는 서중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거일:

<죽은 사람을 오늘의 가치로 다시 재판해서는 안 된다.>

서중석:

<그들이 죽었다고 해서 국가와 사회가 역사적 책임을 규명할 의무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제가 앞선 답변에서 지적한 <법적 처벌과 역사적 규명은 다르다>는 구별에서는 서중석 쪽 논리가 더 강합니다.

복거일이 소급처벌의 위험을 정확하게 지적하더라도,

<친일 행위를 사실로 확인하고 기록하는 것>

까지 소급처벌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4. 윤해동 ― 여기서부터 상황이 아주 흥미로워진다

윤해동은 강만길·서중석과 같은 전통적 민족주의 역사학에서 출발했지만 그 틀 자체를 비판하기 시작한 학자입니다.

대표적인 제목이 이미 이를 보여줍니다.

<『식민지의 회색지대』>

입니다.

윤해동은 <저항 아니면 친일>이라는 이분법으로는 식민지 사회에서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았는지를 설명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그의 연구 주제는 ‘식민지 근대’, ‘식민지 공공성’, ‘지배와 자치’, ‘탈식민주의’, ‘민족주의 비판’으로 확장되어 왔습니다.

이 점에서는 복거일과 상당히 가까워 보입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복거일의 회색지대

<개인은 선택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었으므로 도덕적 책임을 조심스럽게 물어야 한다.>

윤해동의 회색지대

<식민지 사회 자체가 지배와 참여, 억압과 욕망, 강제와 자발성이 뒤섞인 공간이었다.>

즉 복거일은 <개인의 책임을 경감시키기 위해> 회색지대를 봅니다.

윤해동은 <식민지 사회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회색지대를 봅니다.

이 차이는 매우 큽니다.

윤해동에게 회색지대가 있다고 해서 제국주의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식민권력이 성공적으로 작동하려면 조선인의 참여·자치·욕망까지 동원해야 했다는 점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윤해동은 복거일보다 역사학적으로 훨씬 구조적인 접근입니다.


5. 박지향 ― 복거일과 가장 가까운 질문을 던지는 역사학자

이 다섯 학자 가운데 복거일의 문제의식과 가장 직접적으로 겹치는 사람을 한 명 고르라면 저는 <박지향>을 꼽겠습니다.

특히 박지향의 『윤치호의 협력일기 ― 어느 친일지식인의 독백』이 그렇습니다.

박지향 역시 윤치호가 실제로 신사참배를 하고 징병을 권유했으며 일본 귀족원 칙선의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친일파’라는 낙인이 붙은 뒤에는 그의 모든 삶과 사고가 그 한 단어로 환원되어 버리는 현상을 문제 삼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했는가뿐 아니라 <왜 그렇게 했는가>를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복거일의 질문과 놀라울 정도로 가깝습니다.

복거일:

<당시 상황에서 그 선택은 얼마나 자유로운 선택이었는가?>

박지향:

<그 인물이 무엇을 생각했고 왜 협력을 선택했는가?>

그러나 박지향은 복거일보다 역사학자답게 한 사람의 내적 세계를 복원하려 합니다.

가령 윤치호는 3·1운동 참가자들에게 연민을 느끼면서도 민중을 불신하고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운동이 만들어낸 정치적 기회만 활용하려는 복합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후속 연구에서도 이런 복합성이 확인됩니다.

따라서

<윤치호는 친일파였다>

<그러므로 윤치호의 80년 생애는 모두 친일이었다>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박지향의 접근은 복거일이 제기한 문제를 실제 역사자료를 가지고 더 정교하게 탐구하는 방법의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6. 이영훈 ― 복거일과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 질문 자체가 다르다

이영훈은 이 비교에서 가장 신중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그의 핵심 질문은 친일파의 도덕적 책임이 아닙니다.

<한국의 근대경제는 언제, 어떤 제도를 통해 형성되었는가?>

입니다.

안병직·이영훈 계열의 경제사 연구는 조선 후기 ‘자본주의 맹아론’을 비판하고, 토지소유권·시장경제·회사·금융·산업·인구 등의 계량자료를 통해 식민지기에 근대적 경제제도가 크게 확대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역시 이영훈이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수탈론을 비판하고 조선 후기 자본주의 맹아론을 비판한 인물로 정리합니다.

이 때문에 흔히

복거일 = 뉴라이트 = 이영훈 = 식민지근대화론

처럼 한데 묶이지만, 정확하지 않습니다.

복거일의 중심은 <자유주의적 도덕철학>입니다.

이영훈의 중심은 <경제사와 제도사>입니다.

복거일은

<친일한 개인을 후세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를 묻고,

이영훈은

<일제시대 조선 경제가 실제로 성장했는가?>

를 묻습니다.

물론 두 사람 모두 기존의 민족주의 역사서술을 강하게 비판한다는 공통점 때문에 정치적으로 같은 진영으로 분류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학문적 논리는 상당히 다릅니다. 식민지근대화 논쟁 자체도 처음에는 식민지기의 경제적 개발과 성장에 관한 경제사 연구에서 촉발되었습니다.


7. 가장 흥미로운 비교 ― <친일한 조선인 관리 한 사람>을 다섯 학자가 본다면

가상의 인물을 하나 생각해 보겠습니다.

1930년대 조선인 군청 관리입니다.

독립운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어를 잘했고 승진했습니다. 일본인 상사와 좋은 관계를 맺었습니다. 창씨개명도 했습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를 고문하거나 전쟁동원을 적극 선전한 일은 없습니다.

이 사람을 각자의 관점으로 보면 대략 이렇게 달라질 것입니다.

강만길

“그는 식민통치체제에 편입된 사람이다. 중요한 것은 민족해방운동과의 관계다.”

서중석

“구체적으로 무엇을 했는지를 조사해야 한다. 단순 근무와 적극적 반민족행위를 구별해야 한다.”

윤해동

“바로 이런 사람이 식민지 사회의 대부분을 이루었다. 저항/친일이라는 이분법만으로 그의 일상생활을 설명할 수 없다.”

박지향

“왜 그는 그렇게 행동했는가? 가족, 출세, 문명관, 일본 인식, 독립 가능성에 대한 판단을 그의 기록을 통해 살펴보자.”

이영훈

“그가 근무한 행정체제·시장제도·토지제도 등이 어떤 근대적 제도를 형성했는지 살펴보자.”

복거일

“그가 그 직장을 그만두고 가족의 생계를 희생할 도덕적 의무가 정말 있었는가?”

이렇게 놓으면 여섯 사람의 차이가 놀랍도록 분명해집니다.


8. 그리고 <적극적 친일파>를 놓으면 결과가 다시 달라진다

이번에는 동일 인물이 아니라,

<독립운동가를 색출하고 고문한 조선인 고등계 경찰>

이라고 해보겠습니다.

여기서는 강만길과 서중석의 책임론이 훨씬 강해집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윤해동이나 박지향의 방법을 적용한다고 해서 그 경찰이 면책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의 동기와 상황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명 explanation>

<정당화 justification>

는 다릅니다.

저는 이것이 복거일의 책을 읽을 때 반드시 유지해야 할 구별이라고 생각합니다.


9. 그래서 여섯 사람을 한 줄이 아니라 두 개의 축으로 놓아야 한다

이렇게 그려보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첫 번째 축: 민족주의 역사관

강함

강만길 ― 서중석

박지향 ― 윤해동

복거일 ― 이영훈

기존 민족주의 역사학 비판 강함

그러나 다시 두 번째 축을 놓으면 순서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두 번째 축: 식민지기의 복합성과 회색지대를 얼마나 강조하는가

강만길·서중석

이영훈

복거일

박지향

윤해동

저는 특히 <윤해동을 이영훈과 같은 식민지근대화론자로 보는 것은 큰 오해>라고 생각합니다.

윤해동은 식민지를 긍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식민주의를 비판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려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의 저작 목록 자체가 ‘식민지 근대의 패러독스’, ‘식민지의 회색지대’, ‘식민지 공공성’, ‘탈식민주의’라는 문제틀을 일관되게 보여줍니다.


10. 복거일의 정확한 위치

이제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가 어디에 놓이는지 상당히 명료해집니다.

복거일은 <강만길-서중석식 민족주의 역사학>에 대한 강력한 반론을 제기하지만, <이영훈식 경제사>를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역사학 바깥에서 자유주의 철학의 질문을 던집니다.

개인에게 책임을 물으려면 실제 선택 가능성이 존재했어야 하지 않는가?

이 질문 자체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박지향과 윤해동의 연구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이 질문을 역사학적으로 구체화합니다.

그러므로 제가 읽기 순서를 만든다면 뜻밖에도 이렇게 하겠습니다.

<복거일 → 박지향 → 윤해동 → 서중석 → 강만길 → 이영훈>

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파에서 좌파로 읽는 순서가 아니라,

<개인의 선택 → 협력자의 내면 → 식민지인의 일상 → 역사적 책임 → 민족해방의 구조 → 경제적 구조>

로 시야를 확대하는 순서이기 때문입니다.


11. 제가 보기에 가장 균형 잡힌 종합은 이것입니다

이 여섯 사람 가운데 어느 한 사람만으로 식민지기를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강만길이 옳은 것은

<식민지라는 구조적 폭력을 잊어서는 안 된다>

는 점입니다. 그의 역사학은 식민사학 극복과 민족해방운동을 중심 과제로 삼았습니다.

서중석이 옳은 것은

<가해와 책임을 역사적으로 규명해야 한다>

는 점입니다. 그의 연구와 공적 활동에서는 친일·과거사·국가폭력 문제의 규명이 지속적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복거일이 옳은 것은

<후세의 안전한 자리에서 모든 식민지인을 영웅적 기준으로 재판해서는 안 된다>

는 점입니다.

박지향이 옳은 것은

<친일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만으로는 그 사람이 왜 협력했는지 설명되지 않는다>

는 점입니다. 윤치호 연구는 바로 그 문제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윤해동이 옳은 것은

<실제 식민지인의 삶은 저항과 협력 사이에 놓인 거대한 회색지대였다>

는 점입니다.

이영훈이 옳은 것은

<철도·공장·생산량·소득·토지제도 같은 경험적 사실을 민족주의적 도덕판단 때문에 없었던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는 점입니다. 그러나 경제적 변화가 존재했다는 사실과 식민지배의 정당성은 별개의 문제이며, 바로 그 연결방식 때문에 식민지근대화론은 큰 논쟁을 불러왔습니다.

결국 가장 좋은 역사인식은

<식민지배는 강제적이고 부당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산 2천만 조선인의 삶을 모두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두 종류로 나눌 수는 없다. 근대적 변화도 실제로 일어났고, 조선인의 욕망과 자발성도 존재했다. 그렇다고 적극적 가해자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라고 정리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식민지기를 실제로 살아간 보통 사람들의 경험을 알고자 할 때 특히 중요합니다. 국가와 민족의 거대한 이야기를 넘어서면, 실제 사람들은 학교에 가고, 일본어를 배우고, 취직하고, 승진하고, 일본에 유학하고, 일본인 친구를 만들면서도 동시에 민족적 차별을 경험했습니다. 바로 이 복합성을 이해하는 데에는 <복거일의 질문 + 박지향의 인물사 + 윤해동의 회색지대론>을 함께 읽는 것이 강만길이나 이영훈 어느 한쪽만 읽는 것보다 훨씬 풍부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단계로는 이 비교를 훨씬 구체화해서 <1917~1922년생, 일본 유학을 경험한 실제 조선인 8~10명의 회고록을 놓고 이 여섯 가지 시각으로 각각 어떻게 다르게 읽히는가>를 해보면 아주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면 추상적인 ‘친일 문제’가 실제 식민지 세대의 삶의 문제로 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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