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08

개신유학자 설태희와 그 영민한 후손들 설원식 설의식 설정식 설도식 : 네이버 블로그

개신유학자 설태희와 그 영민한 후손들 설원식 설의식 설정식 설도식 : 네이버 블로그

개신유학자 설태희와 그 영민한 후손들 설원식 설의식 설정식 설도식
정종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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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선각자 오촌 설태희 선생
망우역사문화공원 문인열전(12)
-개신유학자 설태희와 그 영민한 후손들 설원식 설의식 설정식 설도식
정종배(시인)
지사 오촌공 영정

저녁 먹고 산책을 나서며 핸드폰 메시지를 확인한다.
“저의 형님 설희순께서 오전 10시 53분 지병으로 별세, 일원동 삼성의료원 12호실에 모셨습니다. 8일 오전 11시 발인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메시지로 조의를 보냈다.
망우역사문화공원 개신 유학자 오촌 설태희 선생의 셋째 아들인 오원 설정식 시인의 셋째 아들인 설희관 선생으로부터 둘째 형님인 설희순(경남고, 서울대 기계과, 삼
성전자 전무 역임) 선생의 부고를 받았다.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후손 중 필자와 함께 사색의 길을 걸으며 얘기를 나누고 가족묘지에 올라 참배하는 경우는 설희순 선생이 유일한 분이다. 설희순 선생은 194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6.25 전쟁으로 피난을 공주를 거쳐 부산으로 가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재학 중 북으로 가신 아버지 시인 설
정식의 북한 생활을 쓴 기사를 책방에서 읽고 아버지 제삿날을 알 수 있었다. 설희순 선생은 의리의 영화배우 김보성(본명 허석)의 둘째 외삼촌이다.
필자가 망우역사문화공원 답사와 탐방 자료를 찾으며 인물열전 후손들 중 다양하고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는 집안은 오촌 설태희 개신유학자 후손들이다. 그 얘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오촌 설태희 부부와 아이들
“경경히 홀로 서서 어둠 속을 헤치고 뭇사람 깨우침에 남보다 앞섰다네. 여러 백성이 도왔으나 그 이름 어디에 있으며 벼슬길이 싫어서 헌신처럼 버리고 본원을 찾아서 심신을 닦았다
네. 여러 선비들에게 권하노니 지역 차별 두지 마소. 남북동서 모두가 한 몸이라네. 가산이 파탄된 어린 시절에 눈물을 머금고 멀리 떠났으니 이러한 심사를 누구에게 하소연하리. 하얀 눈
썹에 빼어난 얼굴 홀로 앉아 탄식하다가 만년에 글 엮어 바른 뜻을 길렀다네. 그 공력을 거두어 근본 바탕 삼았으니 자손들아 이에 삼가 지킬지어다. 문헌이 다행히 있어 꽃다운 향기
남겨두고 공이 먼저 떠났으니 여한이 어이 다하랴. 한강수 맑게 흘러 여경도 길이 있으리로다.” - 위당 정인보 삼가 지음(오촌 설태희 비문 한역 마지막 부분)
오촌梧村 설태희薛泰熙(1875~1940)는 자는 국경國卿이고 아버지 창호昌鎬와 어머니 진천김씨 사이에 1875년 1월 13일 함남 단천군 용성리에서 태어나 1940년 4월 9일 서울
에서 별세했다. 1886년 콜레라로 양친을 여의고 외척의 손에 맡겨져 한의로 활동했다. 필명으로 ‘반구실주인’, ‘반구자’, ‘시인’是人, ‘우우자’, ‘소성초부’, ‘소성’, ‘복성초부’, ‘오촌학인’ 등을 썼다. 부인은 완산이씨 이정경(1881~1961)으로 중추원 의관 이지영의 딸이다. 묘소는 서초동 우면산 예술의 전당 자리였다. 예술의 전당 건립으로 1970년대 말 망우리공동
묘지로 이장하여 가족묘지에 묻혔다. 묘지번호 204329로 부부 합장묘이다. 망우역사문화공원에는 오촌의 자녀 1녀 4남 중, 1녀와 셋째와 넷째 아들 설정식 설도식을 제외하고 두
아들과 세 며느리가 잠들어 있는 가족 묘역이다.
오촌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에 대하여 관심이 많아 일본으로 유학하여 메이지대학 교외생으로 졸업하였다. 고향 단천으로 돌아와 <유신학교>를 세웠다. 우리나라 최초로 현대적 법인
체인 주식회사 <흥업사>를 동지들과 1912년 창립하여 초대 취제역 사장을 역임했다. 서울에서 맨 처음 착수한 일은 <오성학교>의 설립이었다. 헤이그에 밀사로 파견된 이준 열사 등
과 함께 <한북흥학회>를 조직하는 등 애국계몽운동과 교육구국운동의 발흥에 나섰던 개화기 때 선각자였다. 경술국치 이전 갑산군과 영흥군 군수로 임명되어 경술국치 일제가 주는
전별금 받지 않은 두 분 중에 한 분으로 <대한자강회>와 <조선물산장려회> 명부에 입회순 1번으로 가입하여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1923년 5월 1일 어린이날 최초 지정 기념(방정환연구소 장정희 이사장은 『1922 방정환, 어린이날을 시작하다』을 2025년 4월 출간하며 “1922년 5월 1일이 어린이날 시작이다”라
고 주장함) 강연회에서 ‘제2사회의 지반’이라는 주제강연을 하였다.
1936년 첫째 아들 설원식과 조선어학회 사전편찬후원회에 참가하여, 비밀후원자 명단에서 부자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묘비의 맨 위와 오른쪽에 ‘오촌설공묘갈명’이라 새겨 있다. 오
촌의 비문은 위당 정인보(독립장,문화운동,1990)가 짓고 한용운(대한민국장,3.1운동,1962)의 비문을 쓴 여초 김응현의 숙부인 창애 김순동이 쓰고 제자는 위창 오세창(대통령
장,3.1운동,1962)이 썼다.
정종배 시인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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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 정인보 찬 김순동 서 오세창 전
설태희 집안의 호는 오동나무 숲이다. 본인은 오동나무 마을 오촌梧村, 첫째 아들 설원식薛元植(1896~1945)은 오동나무 그늘 오음梧陰, 둘째 아들 설의식薛義植(1901~1954)은
스스로 겸손하여 작은 오동나무 소오小梧, 셋째 아들 설정식薛貞植(1912~1953)은 오동나무 정원 오원梧園, 넷째 아들 설도식薛道植(1915~1975)은 푸른 오동나무 벽오碧梧였
다. 고명딸 이름은 설정순이다. 장손인 설국환薛國煥(1918~2007)은 육오六梧이다.
오촌의 첫째 아들 석천石泉 설원식은 대웅변가로 정치가의 풍모를 갖췄다고 알려졌다. 1913년 9월 육당 최남선(친일,중추원)이 주축이 되어 창간한 아동잡지 《아이들 보이》의 4호
와 7호 ‘글 꼬누기(겨루기)’ 란에 「시골의 가을빛」이 장원, 「뒷뫼의 솔나무 보고 느낌」이 셋째 장원으로 뽑혀 실렸다. 당시 나이 8살이었다. 일제 감시 속에도 웅변대회와 토론대회 등을
개최하여 애국 사상을 북돋았다. 일제강점기 강원도 평창군 운교리 <윤교금광>을 경영하였다. 16살 아래인 셋째인 설정식 시인이 이 금광에서 은둔한 적이 있다. 설정식의 수필 「산신령」은 금광에서 일한 경험이 녹
아든 글이다. “설원식씨 특지, 8백원 기부 - 경성부 숭4동에 원적을 두고 강원도 평창군 운교금광을 경영하는 설원식 씨는 동군 방림면 사무소 신축비로 4백원과 운교리 정호 시설비
로 일금 4백원 등 합계 8백원을 기부하였다는데 일반인사의 칭송이 많다 한다”.(《조선중앙일보》, 1934년 5월 8일). 석천은 세 형제들과 힘을 합쳐 ‘반구실총서’로 아버지 설태희의
글 「다반갱작」·「대학신강의」·「학림소변」과 「속리기변 속지」 등 4글을 3책(발행자 설원식, 발행소 소오산방)으로 1939년 11월 13일 제작·발행하였다. 당시 책값은 2원이었다.
오촌의 셋째 아들 설정식 시인의 두 아들 둘째 희순 셋째 희관은 할아버지 오촌과 그 영민한 후손들의 글과 삶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두 손주는 오촌의 「다반갱작」을 한글로 번역· 발행하며 선각자인 할아버지의 뜻을 펼쳐가고 있다. 희관은 할아버지 아버지 4형제 5부자의 글을 몇 년 동안 옛 신문과 각 대학 및 국회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 등을 샅샅이 뒤져 블
로그에 올린 뒤 전자책 7권으로 출간하였다. 지금까지 과문이지만 집안 문집으론 최고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정성이 가득하다.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후손 중 필자와 함께 사색
의 길을 걸으며 얘기를 나누고 가족묘지에 올라 참배하는 경우는 설희순 선생이 유일한 분이다.
필자는 2022년 5월 30일 설정식 시인의 2남인 설희순 선생의 강남구 자곡동 집에서, 1940년 ‘반구실총서’를 받았다는 한국과 일본의 도서관 및 대학도서관과 관련 학자 등의 답서
60여개를 보았다. 그 답장 중에 한글학자 고로 물불 이극로 독립지사만 한글로 써서 보냈다.
필자가 한국국학진흥원 근대기록문화조사원으로서 활동을 말씀드렸다. 설희순 선생이 「홍명희·설정식 대담기」와 시인 백석의 시 「마을은 맨천구신이 돼서」가 실린 《신세대》 1948년
5월호·시집 『鐘』·『葡萄』·『諸神의 憤怒』·최초 번역 셰익스피어의 『하므렡(햄릿)』·반구실총서 답서를 묶은 철 등 총 7권을 내주었다. 필자에게 좋은 곳에 쓰라며 만약에 중랑구 망우역사
문화공원 박물관이 건립되어 보관 및 전시 문제가 해결되면 기증하여도 좋다는 말씀을 덧붙였다. 그리고 집안 4촌들 단톡에 집에 있는 오랜 문서나 도서 사진 등을 함부로 버리지 말고 필자의 근대문화조사원 활동을 도와주라는 말씀을 전하겠다고 하였다. 필자는 중랑구청 문화관광과 향토문화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설희순 선생한테 받은 책자와 묶은 철 등을 서울시 등록문화재로 등재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2023년 5월 문화유
산 국민신탁 김종규 이사장 중명전 사무실에서 대학 과 동기인 심규환 형이 미국에서 보낸 최승희 사진 9개 중 두 개를 드리며 묶은 책을 보여드렸다. 김 이사장님 일성 “저 사진은 다
시 가져가고 이 묶은 철을 놓고 가라”고 하였다. 그 사진은 최승희 연구의 권위자인 중앙대 무용과 정병호 교수의 컬렉션이다. 심규환 동기가 《중대신문》 기자로 활동하며 정병호 교수
실에서 대담하고 최승희 사진 중 중복된 것을 선물로 받은 것이다.
둘째 아들 설희순 선생 친필 정종배 시인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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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 설의식은 함남 단천에서 설태희의 5남매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설의식은 1916년에 원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서울중앙학교에 입학했다가 3·1혁명과 관련하여 퇴
학당했다. 이후 니혼대학 사학과를 졸업했다. 1922년 4월에는 전남 장성의 약수학교 교사로 근무한 적도 있었다. 1922년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언론계에 들어가 주일특파원·사
회부장·편집국장 등을 지냈다. 그는 1926년 8월 11일 「헐려 짓는 광화문」을 《동아일보》 사설에 올렸다. 설의식은 1929년 주일특파원을 마치고 귀국하여 《동아일보》의 「횡설수설」 단평 칼럼을 집필했다. 1931년 잡지 《신동아》를 창간할 때 편집국장 대리로 제작을 총괄하였다. 그가 편
집국장으로 있던 1936년 8월 《동아일보》와 그 자매지 《신동아》와 《신가정》의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신문사를 떠났다. 금광 등 사업에 손을 대기도 하였다. 광복 후 《동아일보》가 복간되자 주필과 부사장을 지냈다. 1947년에 동아일보사를 떠나 ‘신문적 잡지적 신문’을 표방한 순간旬刊지인 《새한민보》를 창간했다. 한국민주당 노선과는
달리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을 지지하거나 남북협상의 성공을 바라는 등, 중간파적인 정치적 입장을 보이는 논조를 보였으며, 《서울신문》의 고문을 지내기도 했다. 1948년 설의식
은 「유관순 추념사」를 썼다. “성은 유씨요 이름은 관순이니 이 나라의 딸이다”로 시작하여 “짜른 일생을 나라에 바친 한 떨기의 무궁화! 사나운 된서리에 피지도 못하였던 봉오리는 이
제 자유에 느꺼운 삼천만개의 가슴에 피어날 것이다”에 이르면 가슴이 벅찼다고 이 추념사를 달달 외었던 국민학교 5학년은 권영민 서울대 국문과 명예교수이다.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이순신 장군이다. 소오 설의식이 6.25 전쟁 중인 1951년, 피난지 부산에서 ‘이충무공기념사업회’ 이름으로 출간한 『민족의 태양』이 『난중일기』의 제
대로 된 첫 한글 번역본이다. 설의식은 1953년에 다시 발췌 번역본인 『난중일기초-충무공 이순신 수록-』을 출간했다. 설의식이 사실상 우리나라 최초 『난중일기』 한글 번역자이다. 서
사시 이순신 「백의종군의 길」을 썼다. 6.25 전쟁 이후 이충무공의 정신을 함양하고 알리는데 온힘을 다하여 ‘충무광’으로 불리었다. 1953년, 충무공 이순신의 리더를 기다리며 다음
과 같이 썼다.
“민족의 혈사가 시작된 뒤로 세상은 한 자국 어지러워졌고 한 걸음 괴로워가는 양 싶습니다. 이리하야 ‘국난’이란 서글픈 용어 밑에서 그날을 보내고 그날을 맞을 뿐입니다. (중략) 태양
같은 ‘그 어른’의 모습에 힘을 얻어서 타고난 정열을 알맞게 뿜을 수 있었던 까닭입니다. 고마우신 유덕을 다시금 합장하면서 이 글을 끝칩니다”.(『난중일기초』 서문)
유네스코한국위원회가 밝힌 『난중일기』 등재 이유는 ‘임진왜란에 관한 전쟁 사료 중 육지에서 벌어진 전쟁에 관한 자료들은 상대적으로 풍부하다. 반면 해전에 관한 자료로는 『난중일
기』가 거의 유일하다. 이런 관점에서 『난중일기』는 당시의 동아시아 국제 정세와 군사적 갈등을 포함한 세계사 연구에 중요하며 세계사적 관점에서도 매우 귀한 자료’라고 자료의 객관
적 중요성도 언급하고 있다. 『난중일기』는 2013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국보 76호로 지정됐다.
소오는 8·15해방 후에 생긴 <조선신문학원>에서 ‘문장론’과 ‘시사문제’를 강의했다. 그 밖의 저서로는 『해방이후』·『해방이전』·『화동시대』·『금단의 자유』·『통일조국』·『치욕의 표정』·『역
풍기의 진로』· 『소오문장선』 등이 있다. 6.25전쟁 수복 후 명륜동에 살았다. 7~8개월 심장병으로 병석에 누웠다가 운명하였다. 설의식의 죽음에 대한 당시 추모시와 회고담을 소개하
면 다음과 같다.
소오 갔네 그려 / 다 버리고 갔네 그려 / 국토 갈라지고 / 세상은 어지러워 쓸 말도 많다더니만 / 붓을 놓고 갔네 그려 / 몸은 가시면서 / 정은 어이 두고 가나 / 정일랑 지녔다가 / 우리가
가져감세(중략) (노산 이은상(애국장,문화운동,1990)의 추모시)
“깨끗이 정돈된 방 한 구석에는 피난살이에 시달린 트렁크며 이 충무공에 대한 저서가 엄숙히 놓여 있다. 사십년 가까운 장구한 세월을 오로지 신문인으로 바친 노기자의 유산이란 아
무것도 없었다. 트렁크 몇 개와 서재에 가득 쌓인 책 그것이 전부였다”고 언론인 오소백은 설의식이 별세하기 두어 달 전의 만남을 회고하였다.(《국민보》, 1956년 2월 15일)
그의 동료였던 주요한(친일,문학)은 “소오는 본질적으로 언론인이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현대적 감각의 문장가였으며 수필가였고 직업적인 작가, 정치적 문제들을 격조 있게 논평한
평론가였다. 생활과 직업을 분별하지 않고 직업적으로 몰입하는 부지런한 성격이었으며 생활에 충실하고 자기 글을 아끼는 사람이었다고 회고하였다.(인물론 - 소오 설의식, 1975년
8월)
설의식의 외손주를 만나봤다. 소오가 출간한 책을 보관하는 정성이 대단하였다. 옻칠한 오동나무 상자 안에 책을 넣고 일정 기간 꺼내 책의 상태를 살필 정도였다.
망우로 중랑구청 망우리공원과
설태희의 셋째 아들인 오원 설정식은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영문학자다. 호는 오원 또는 하향何鄕이다. 1912년 8월 9일 함경남도 단천에서 오촌 설태희의 4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
났다. 1925년 《동아일보》 신년호에는 서울의 보통학교 재학생 중 장래가 촉망되는 아동 140명을 선발해서 특집을 꾸몄는데, ‘장래의 문학가’에는 교동보통학교 4학년의 설정식과 윤
석중이 여기에 뽑혔습니다. 경성공립농업학교(현 서울시립대학교)를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하여 퇴학당했다. 1930년 만주로 건너가 요녕성제3고급중학교에 잠시 있다 중퇴
하고 베이징 텐진 등을 유랑하다 만주사변으로 귀국한 뒤 연희전문 편입하고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메지로目白상업학교에 편입·졸업하고 1936년 귀국·복학한 연희전문학교 문과
를 1937년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오하이오주 마운트유니언대학과 컬럼비아대학을 다녔다. 1940년 아버지의 위독 소식을 듣고 귀국해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과수
원과 광산 등을 경영했다.
해방 후 1945년 8월 18일 결성된 ‘조선문학건설본부’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45년 11월에는 《동아일보》 복간문제로 교섭이 있던 미 군정청 공보처 여론국장과 과도입법의원 부비
서장으로 일했다. 1946년 9월 임화·김남천 등의 권유로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1947년 1월에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사무직인 부비서장으로 재직하다가 8월 사직하고 문학가
동맹 외국문학부장으로 각 행사에서 시를 낭독하는 활동을 하였다.
1948년 정지용과 함께 《문장》 속간호를 펴냈다. 11월에는 영문 일간지인 《서울타임즈(The Seoul Times)》의 주필로 활동하다가 《서울타임즈》가 폐간되고 체포령이 내리자 1949
년 12월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체포를 면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인민군 전선사령부 문화훈련국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1951년 소좌 계급장을 달고 개성 휴전회담 조중朝中대표단의 영어통역관으로 일했다. 당대 지식인들이 사회주의를 신념으로 지지했다고 해도 직접 미국에서 자유민주주의를 경험
한 유학파의 월북에 많은 이가 충격을 받았다. 1953년 북한의 남로당계 인사 숙청 과정에서 ‘미제스파이’라는 죄명으로 박헌영·임화·이태준 등과 함께 처형됐다.
1923년 9월 1일 일본인은 ‘간토대진재’ 조선인은 ‘간토대학살’ 제노사이드가 일어났다. 당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 ‘조선인이 방화했다’, ‘조선인 우물에 독극물을 넣었다’ 등의
유언비어로, 조선인이 공식적으로 6661여명(상해임시정부 발행 《독립신문》 1923년 12월 5일), 비공식으로 2~3만 명이 제노사이드 당했다. 해방 이후 첫 번째 관동대학살 때 목숨
을 잃은 조선인의 원혼을 위로하는 시가 딱 한 편 있다. 바로 시인 설정시의 시 「진혼곡」이다. 그 시 1연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정종배 시인의 방
7/8/25, 3:49 PM 개신유학자 설태희와 그 영민한 후손들 설원식 설의식 설정식 설도식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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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희순 선생 친필
조국 땅이 좁아서/ 간석지를 파야 될 까닭이 없었다 / 조국 땅이 좁아서/ 멀미 나는 현해탄을 건널 까닭이 없었다 / 조국 땅이 좁아서 / *우전천隅田川 시궁창에서 널쪼각을 주울 까닭
이 없었다/ 조국은 어디로 갔기에 / *천기川崎 *심천구深川區 제육공장 제함製函 공장 / 화장터 굴뚝 연기는 그래도 향기로울까 / 초연硝煙 십 리 사방 줄행랑에 / 두 눈깔 흰자위마
저 / 시커멓게 썩을 까닭이 / 없었다 다만 조국 주권이 / 조국 주권을 팔아먹은 자가 있어 / 조국이 간석지로 밀려나간 것이었다 / 조국 주권을 팔아먹은 자가 있어 / 그 족속이 유랑을 업
으로 삼았었다 / 그러므로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도 / 업으로 삼을 수밖에 없어/ 순順이의 봄을 오십 원에 팔았은들 / 애비를 나무랄 자 없이 되리만큼/ 조국은 어디로 가버려// -『제신
의 분노』(신학사, 1948)
(*우전천: 스미다가와. 일본 도쿄에 있는 강. *천기 심천구: 가와사키 후카가와 구)
이 시를 k-문화독립군 랑코리아 주세페 김 구미꼬 부부 음악가는 관동대학살 100년 2023·4년 9월 <성남아트리움> 공연장에서 이 시를 비롯하여 관련된 글과 시를 추모곡 위주로 작
곡하여 공연하였다. 2023년 공연에는 설정식 시인의 둘째 아들 설희순 선생이 <성남아트센터>로 잘못 찾아가 함께 하지 못해 아쉬웠다. 2024년 공연에는 셋째 설희관 시인이 공연
을 관람하고 감격에 젖어 간난 아기 때 헤어진 아버지 설정식 시인을 그리워했다. 포털에 진혼곡 (설정식, 제신의 분노 중에서 1948 작곡, 노래 주세페 김, 08:51) 유튜브 영상이 떠
있다.
설정식은 1932년 3월 《동광》에 「거리에서 들려주는 노래」)와 「고향」(《신동아》, 1932. 8) 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만주사변의 원인이었던 만보산사건과 관
련된 체험을 그린 《한성신문》 연재소설인 「청춘」·미국 유학 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동아일보》 연재소설인 「프란시스 두셋」·《신세대》에 연재한 해방 직후 민족현실을 그린 미완의
「해방」 등을 비롯해 1947년부터 2년간 『鐘』(백양당, 1947년 4월)·『葡萄』(정음사, 1948년 1월)·『諸神의 憤怒』(신학사, 1948년 11월) 등 시집 3권을 잇달아 출간했다. 번역에도 힘
써 해방 후 최초로 셰익스피어의 『하므렡(햄릿)』(백양당, 1949년 9월)을 완역 출간한 뒤 "번역하면서 절실하게 느낀 것은 나의 우리말 어휘 부족이었다"며 "사뭇 호미 하나를 들고 아
름드리 느티나무를 옮겨다 심는 것 같은 고생이었다"고 고백했다. 이어 "이번 번역은 직역"이라며 "나 자신 공부를 위해서나 후학을 위해서나 직역을 해 놓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해방공간인 1946년부터 4년간 폭넓은 작품 활동을 했다. 설정식은 월북 문인이란 점에서 베일에 가려졌으나 1987년 10월 19일 정부의 월북작가 문학 작품
2차 해금 대상에 포함되면서 조명되기 시작했다.
설정식의 아내는 전쟁 중 남편의 안부를 알지 못했다. 낯선 인민군 군복을 입고 판문점 휴전회담 장소에 통역관으로 참석했다는 소식을 접한 것은 나중 일이다. 6·25전쟁 전에도 자
주 형사들이 설정식을 찾으러 서울 명륜동 집으로 들이닥쳤다. 그때까지도 아직은 안녕하시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다 1953년 8월 6일자 《동아일보》에 설정식이 박
헌영 등과 함께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기사가 실렸다. 당시 설정식은 마흔한 살. 식구들은 그때 돌아가신 것을 알았지만 작고하신 날짜를 몰라 설정식의 생일날인 음력 8월 9
일에 제사를 지냈다. 또다시 설정식의 소식을 들은 것은 1962년 9월이었다. 둘째 아들 설희순이 대학 시절 우연히 책방에서 《사상계》를 읽다가 헝가리 종군기자인 티보 머레이
(Tibor Meray)가 쓴 「한 시인의 추억, 설정식의 비극」을 읽고서 아버지 설정식의 비극적 최후를 생생히 알게 됐다.
2021년 주한 헝가리 대사 초머 모세와 둘째 아들 설희순 선생과 대담하는 유튜브 영상이 포털에 떠 있다. 제목은 <월북 시인 설정식의 차남 설희순 선생과의 만남>으로 08:40 분량
이다.
헝가리의 소설가이자 종군기자인 티보 머레이는 1951~1952년까지, 그리고 1953년에 헝가리 공산당 중앙기관지 《스자바네프(Szabad Nep・자유인)》의 특파원으로 한국, 정확히
는 북조선을 찾았다. 14개월간 머무르며 6·25전쟁의 참상과 판문점의 휴전 조인을 눈으로 지켜보았다. 북한 정부가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영예인 국기훈장 1급을 받았다. 티보 머레이는 휴전 후 헝가리로 돌아갔으나 이후 프랑스로 망명했고, 파리의 한 잡지에 「한 시인의 추억, 설정식의 비극」을 기고했다. 1962년 당시 월간지 《사상계》가 이를 번역해
게재한 것이었다. 티보 머레이의 글에 놀랍게도 설정식의 육성이 그대로 실려 있다. 설정식은 자신의 짧지만 마디 굵은 삶을 벽안의 종군기자에게 고백한 것으로 보인다. 그 글에는 남
에서 북으로, 한 독재를 피해 다른 하나의 독재로 간 한 인간의 비극이 담겨 있다.
”나(설정식)는 1912년 함남 단천에서 출생하였다. 나의 아버지는 이른바 선비였다. 혁명가는 못 되었지만 그의 농업에 관한 저술에서 그는 토지개혁의 필요성을 암시한 바 있었기 때
문에 일본 정부는 그 저서를 몰수하였다. 여덟 살 때 서울에 와 살게 되었다. 서울에서 농업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광주학생사건이 일어나 거기에 가담했다는 죄로 퇴학당하였다. 그
뒤 나는 학업을 계속하기 위하여 봉천에 갔다. 그러나 1년 후에 소위 만보산사건이 일어나 한중 양국 학생 간의 충돌로 나는 봉천에 남아 있지 못하게 되었다. 북경에 잠시 머문 뒤 나
는 서울에 돌아와 신교에서 경영하는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나는 거기서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1936년 나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오하이오주 마운트유니언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후 다시 컬럼비아대학에서 2년 더 연구하였다. 나는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에 고국에 돌
아왔으나, 아무 일자리도 얻지 못하고 농장에서 일하였다. 농장에서 일한 몇 해 동안은 허송세월이었다. 나의 저술을 출판할 기회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독서만이 유일의 기쁨이었다. 종전과 해방은 나에게 새로운 삶을 가져다주었다. 남한에 미국인들이 들어왔을 때, 나는 희망과 낙관에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우리 민족의 처지가 마침내 나아지리라 믿었다. 나의 대
학 은사의 권고로 군정청 공보처에서 1년가량 일을 보았다. 나는 그 후 1947년 1월까지 미 군정청 과도입법원의 사무차장 일을 맡아 보았다. 내가 공산당의 지하조직에 참여하게 된
것은 이때 일이었다. 나는 미국인이 나를 쌍수를 들어 받아들인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나로 말하면 오하이오주의 대학을 나왔고, 영어를 잘하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날 필요로 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 미국인에 실망한 것이다. 나는 그들이 자기네 군사기지가 있는 나라에 대한 관심보다 군사기지 자체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았다. 나는 농민과 노
동자들이 전과 다름없이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아무런 경제적 향상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또 그들이 부패와 인권의 억압을 못 본 체하고, 그 무자비한 독재자 이승만만은 전폭적으로 믿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1948년 나는 《서울타임스》라는 영자신문의 편집자가
되었다. 이승만은 내가 그 신문을 좌경케 했다고 하면서 탄압하였다. (중략) 인민군이 서울로 진입하였을 때, 나는 잠시 작가 동맹의 일을 보다 자원입대하였다. 나는 가족과 아내와 세
아들과 외딸과 작별하였다. 나는 그들의 소식을 통 듣지 못한다. 군이 후퇴할 때 나도 따라 후퇴하였다. 심장병으로 입원했다가 지금 여기에서 근무하고 있다.“
필자는 2019년 10월 설정식 시인의 둘째 아들인 설희순씨와 망우리공원 설태희 가족묘지를 함께 참배했다. 설희순씨와 아버지 설정식과 가족에 대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 이후
에도 전화와 대면을 통해 설태희 가족사를 자세히 알게 되었다. 설정식 시인에 대한 대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정종배 시인의 방
7/8/25, 3:49 PM 개신유학자 설태희와 그 영민한 후손들 설원식 설의식 설정식 설도식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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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정식은 1951년 개성 휴전회담 조중朝中대표단의 영어통역관으로 일하였다. 티보 머레이는 1951년 8월 22일 밤 휴전 협상지 개성의 적막을 깨뜨린 폭발음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
해 열린 미군과 조중대표단 간 회의장에서 설정식을 처음 만났다. 티보 머레이는 「한 시인의 추억, 설정식의 비극」이란 글에서 통역관인 설정식을 이렇게 묘사했다. 장대좌張大佐(조중대표단 수석연락장교)의 바로 뒤에 40세가량의 한 장교가 통역으로 서 있었다. 이 장교는 자기 상관보다 키가 작았고 몸도 약해 보였다. 그의 얼굴은 앳돼 보였다. 그러나 장대좌의 말을 영어로 통역할 때 그의 깊고 울리는 음성이 마치 한민족의 슬픈 역사의 메아리인 양 밤의 적막을 뚫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무엇보다 문학을 사랑한다는 공통점
이 있었다. 설정식도 마찬가지였겠지만 티보 머레이 역시 낯선 개성에서 문학을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설정식이였다. 두 사람은 휴전협상의 지루함을 견디며 저녁이면 서로
의 숙소를 오가며 보드카나 부다페스트에서 보내온 브랜디를 마셔가면서 밤늦도록 ‘후세에 남은 「맥베스」의 원고가 진짜냐 아니냐, 「서풍부西風賦」 같은 시를 바르게 번역하는 것이 과
연 가능한가?’ 등을 논하였다. 티보 머레이는 막바지 전쟁과 휴전협정으로 들끓던 1953년 여름, 다시 북조선을 찾았다. “휴전협정 조인식 날 새벽 개성에 도착, 판문점의 모든 천막을 뒤졌으나” 설정식을 찾을 수
없었다. 며칠 후 평양에 가서 ‘미국 스파이와 반역자’에 대한 정치적 재판이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거의 1년 만에 설정식을 다시 보았다. 수인囚人들은 꿰맨 자국
이 선명한 다 해진 옷을 입고, 등 뒤에 죄의 경중의 순으로 1에서부터 14까지의 번호가 큼직하게 붙어 있었다. 설정식은 ‘맨 끝’에 있었다. ‘맨 끝’의 의미는 뭘까? “14명 중 죄가 가장
가볍다는 뜻이 아닐까?” 아니면 “가장 무겁다는 뜻으로 이해될까?.” 당시 1번 피고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이자 사법상을 지냈던 이승엽이었고 14번이 설정식이었다.
티보 머레이는 2005년 5월 24일부터 사흘 동안 대산문화재단이 주최한 ‘제2회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초대되어 처음으로 남한의 수도 서울에 왔다. 밤새도록 설정식의 3남 1녀와 이
야기꽃을 피웠다. 티보 머레이는 60여 년 전 취재노트와 김일성에게 받은 훈장 등을 보여주었다. 설정식의 시를 헝가리어로 번역하여 출간한 『우정의 서사시』라는 시집과 개성 휴전회
담장의 선친 사진 등 소중한 자료를 주고 갔다. 설정식 후손들은 티보 머레이를 만났는데 마치 북에 계신 아버지가 살아오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티보 머레이는 설정식은 누구보다
그리고 무엇보다 민족을 사랑했다고 회고했다. 휴전회담장에서 헝가리 술을 마시고 셰익스피어를 얘기했는데 문학을 사랑한다는 마음 하나로 의기투합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티보 머레이는 옛 친구인 설정식을 추억하는 또 다른 글인 「기억과 고통, 의심 그리고 희망」을 2005년 서울에서 공개했다. 이 글에 설정식의 재판 이야기가 나온다.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그를 거의 알아보지 못했다. 본디는 수려했던 그러나 고문으로 뒤틀린 그의 얼굴은 체념과 탈진으로 아무런 감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로봇처럼 움직였다. 나는 간절하게
희망했다. 제발 그가 내가 앉아 있는 쪽을 바라보지 않기를. 나에게 배당된 통역사가 조목조목 피고들의 죄목을 일러주었다. 미 제국주의자들을 위한 간첩행위, 테러와 살인, 가택침
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대한 국가 전복기도.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이 죄목이 너무나 낯익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헝가리와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서
행해졌던 판에 박은 재판들과 1930년대 소련에서 행해졌던 사전 각본에 의한 요식적 재판들을 여기서 다시 언급하지 말기로 하자. 재판을 둘러싼 모든 사항은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설정식이 관련되었다는 이 재판은 더더욱 그러했다. 도대체 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해 그가 무슨 짓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중
략) 섬세한 심장을 가진 일개 시인이 개성과 판문점을 오가며, 어찌 간 크게 간첩 노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자발적 선택으로 서울을 버리고 평양으로 온 사람이 왜 무엇 때문에 북한
정권에 대해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더구나 가족도 버리고 그 자신을 전쟁의 숱한 위험 속에 기꺼이 노출시켰던 사람이. 나는 그 재판이 거대한 조작극이었다고 지금도 확신한다.”
설정식의 셋째 아들인 설희관씨는 법원에 아버지의 실종신고서를 제출하였다. 가족관계 등록서(호적)에 아직도 생존해 있는 아버지의 호적을 실종으로 정리하기 위해, 형과 누이를 보
증인으로 세워 절차를 끝내고, 법원의 최종 결정을 받았다. 설정식은 아내 김증연(1914~1977)과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다. 《한국일보》 사회부 베테랑 기자로 활약했던 막내 희관씨가 평생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왔다. 설정식 탄생 100주년
인 지난 2012년 방일영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설정식 문학전집》(산처럼)이 세상에 나왔다. 설정식 시인의 아들들이 부르고 기리는 사부곡과 시비를 세우기 위한 정성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장남인 설희한 시인이 2017년 펴낸 시집 《수선화》에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항상 입 다문 채 / 우물 우물 우물 // 처자식 버리고 월북한 뒤 소식 없는/ 남편의 무사귀환을 위
해/ 주문을 외우셨다 / 입속으로 “옴마니반메훔” // 입 꼭 다문 채 “나무아미타불” // 쌀 한 보시기 / 절에 가져갈 자루에 떠 놓고는 “관세음보살” // 아궁이에 불 지피며 / 또 우물 우물 우
물 // 밥 안치면서도 우물 우물 우 물/ 밥 푸면서도 우물 우물 우물 / 염송을 하셨다 // 내가 열네 살 때 / 북으로 가버리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 그리움과 슬픔, 그리고 미움이 항상 엇갈
렸다 // 마흔도 안 되어 홀로 되신 / 어머니의 부처님을 향한 / 염송 소리와 기도하시던 모습이 / 지금도 눈에 선하다“ (설희한의 시 「불효자의 노래」 전문)
둘째인 설희순 선생은 망우역사문화공원 가족묘지 안, 2021년 5월에 마석 모란공원에서 이장한 어머니 납골 유택 옆에 설정식 시비를 새로 세우고자 노력하고 있다. 시는 「해바라기
2」로 어머니 ‘마석 모란공원’ 묘비에 있던 작품으로 망우역사문화공원 시비에 새기겠다고 결정하였다. 필자는 시비를 세우면서 할아버지 설태희 첫째 아들 설원석 사위인 김우창 교수
를 좌장으로 가족 중심 학술대회 개최를 제안하였다. 홍보대사는 셋째 설정식의 외손자 의리의 김보성 배우로 정하였다. 셋째인 설희관 시인의 2004년 펴낸 시집 《햇살무리》(책만드는 집)에 ”이데올로기의 홍수 속에 / 모습도 남기지 않은 채 휩쓸려간 사람 / 그래서 나는 그의 얼굴을 모른다 / 옆모습 뒷
모습도 허망하다 / 목소리는 어땠나 키는 몇 척이었나 / 도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 30대 청년의 정면 사진 한 장이 / 한평생 영정으로 남은 사람이여“ (설희관의 「아버지」 중 1연)
정종배 시인의 방
7/8/25, 3:49 PM 개신유학자 설태희와 그 영민한 후손들 설원식 설의식 설정식 설도식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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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태희의 4남인 설도식은 일제강점기 말에 가수로 활동하다가 해방 이후에는 사업가로 이름을 남겼다. 1936년 빅터레코드사의 전속 가수가 되어 1938년 10월까지 21개의 음반을
냈다. 대표곡은 <애상의 가을>·<달려라 호로(포장)마차>·<헐어진 쪽배> 등이다. 1936년 형인 설의식이 《동아일보》에서 퇴직한 후, 일제의 언어말살정책에 대항하기 위해 극작가 서
항석(친일,연극) 작곡가 안기영 등과 함께 ‘라미라 가극단’을 만들어 향토가극 운동을 벌였다. 그 모임에 설정식·설도식·김순남(‘산유화’의 작곡가) 등이 참여했다. 1944년 한국 최초
의 뮤지컬인 <견우직녀>는 ‘라미라 가극단’이 공연하였다. <견우직녀> 공연은 서항석이 극본을 쓰고 구성과 연출을 담당했고 설의식이 가사를, 안기영이 작곡을, 편곡은 김순남 안무
는 장추화가 맡았다. <견우직녀>는 배우 10여 명과 합창단 20여 명, 무용단 12명, 반주악단 20여 명이 39개 뮤직 넘버를 소화한 2시간 분량의 대작이었다.
1943년 말 자본금 100만원으로 강원도 삼척군(현 동해시)에 일본인 고레가와 긴조是川銀藏가 고레가와是川제철을 세웠다. 해방 후 적산기업으로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를 거치면
서 삼화제철공사라는 국영기업체가 되어 운영되었다. 1958년 5월 범한무역(주) 사장 설도식이 불하받았다. 대한민국 최초 민간제철인 삼화제철(주)로 출발했다. 범한무역의 설도식
은 철강인으로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다. 삼화제철을 인수한 후에도 삼화제철은 조업 부진을 면치 못했다. 1968년 박정희 대통령은 마침내 박태준에게 새로운 제철소 건립을 지시하
여 현재 포항제철 포스코가 1972년 준공되었다. 포항제철 설립으로 삼화제철은 무용지물로 변했다. 용광로 8기 중 1기는 2003년부터 포스코역사관 야외 전시장에 전시하고 있다. 국내 최초의 용광로이자, 우리나라 제철 기술과 제철공업 발달사에 중요한 자료로서 역사적·산업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2005년 등록문화재 제217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25m, 직
경 3m, 중량 30t이다.
개화기 선각자 오촌 설태희 머리 좋은 DNA 타고난 1녀 4남 후손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고명딸인 설정순의 남편인 김두백은 동아일보 기자로 조선노동당 최고인민위원회 위원장 한글학자 김두봉의 동생이다. 설태희의 첫째 아들인 설원식의 맏아들은 《한국일보》 초대 워싱톤 특파원을 역임한 언론인 육오 설국환이다. 설국한은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설영기는 대한여행사 회장, 차
남 설원기는 덕성여대 서양화과 교수로 재직하다 지금은 경기문화재단 대표이사로 있다. 장녀 설명기는 미국 뉴욕의 디자인 명문대학인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의 교수로
재직했다. 설원식의 딸 설순봉은 서울대 영문과 출신의 영문학자이며, 그녀의 남편은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다. 김우창 교수의 아버지는 김의택 국회의원으로 필자의 고향 지역구 출
신이다. 설순봉·김우창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자녀 모두 박사 학위를 받았다. 장녀 김 마가레뜨 윤미는 뉴욕주 변호사로 일하다가 현재 한국외국어대 로스쿨 교수로 재직 중이
다. 장남 김준형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생물학과장이자 컴퓨터공학과 겸임교수다. 둘째 아들인 김민형은 세계적인 수학자로 영국 에든버러대 수리과학 석좌교수로 활동하고 있
다. 2011년엔 한국인 최초로 영국 옥스퍼드대 수학과 정교수로 임용됐다. 그는 ‘수학의 세계’로 대중을 초대하려 노력하는 수학자로도 유명하다. 현재 국내에선 서울고등과학원 석학
교수를 맡고 있다. 방학이면 한국에 와 대중 강연도 한다. 2012년 호암과학상을 받았다. 차녀 김윤형은 케임브리지대학 수학박사로, 지금은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대학에서 연구원
으로 재직 중이다. 둘째 아들 설의식은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6·25 당시 경기고 재학 중이던 두 아들은 행방불명됐다. 딸 설순희는 남편 김준용 사이에 1남 4녀를 두었다. 장남 김영걸은 카이스트
교수, 장녀 김은영은 미국에서 거주 중인데 남편(Victor)이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이다. 차녀 김화림은 뉴욕주립대 박사이자 바이올리니스트로 활약하고 있다. 삼녀 김영아는 피트
니스센터를 운영하고 있고, 사녀 김선희는 중견기업인 매일유업 사장이다.
셋째 아들 설정식은 1936년 함경북도 명천 출신으로 숙명여학교를 졸업한 김증연과 결혼해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설희한(1937~2020)은 성균관대 경제학과 4학년 재학
중 해병대에 입대했으며 제대 후 한국공업, 삼화제철, 세방여행사에서 근무했다. 197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민을 떠나 부동산중개업, 건축업에 종사했다. 나이 예순에 공원묘지
내 꽃집을 인수하여 20여 년간 운영했다. 김정자 사이에 2녀를 낳았다. 장녀 설윤숙은 심리학 박사, 차녀 설정윤은 꽃집을 운영하고 있다. 장녀 설정혜는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이 바로 ‘의리의 사나이’로 알려진 배우 김보성이다. 본명은 허석許碩이다. 차남 설희순은 서울대 공대 기계과를 나와 삼성물산, 삼성전자 전무
를 지냈다. 대승불교연구원의 연구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노자 사상에 심취해 『도덕경, 노정종자배웃시으인시의다방』·『노자와 어머니 그리고 별』을 펴냈다. 김희선과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다. 장
7/8/25, 3:49 PM 개신유학자 설태희와 그 영민한 후손들 설원식 설의식 설정식 설도식 :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jjb3467&logNo=223925639430&navType=by 6/8
녀 설은이는 약사이고 남편 이수웅은 이현재 전 총리의 삼남으로 전기공학 박사로 삼성전자연구소에 근무하고 있다. 차녀 설재은은 스위스계 증권회사 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장남 설
홍기는 인디애나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와튼연구소에서 근무하다 몇 해 전 중앙대 경영학과 조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설정식 시인의 둘째 아들 설희순 선생 할아버지 오촌 설태희 묘역
2019년
설정식 시인의 둘째 아들 설희순 선생이 2025년 7월 6일 지병으로 운명했다. 《한국일보》에 실린 부음 소식을 옮긴다. ▲설희순(전 삼성전자 전무)씨 별세·김희선씨 남편상·홍기(중앙대 경영대 부교수) 은이(쉥커코리아 약사) 재은(현대차증권 책임)씨 부친상·정현정씨 시부상·이수웅(망고 부스트 이
사)씨 장인상=6일 오전10시53분 삼성서울병원 발인 8일 오전11시30분 (02)3410-6912
삼남 설희관은 한국외국어대 불어과를 졸업한 뒤 《한국일보》 기자로 재직했다. 사회부장, 문화부장, 총무국장, 한국일보50년사사편찬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대시학》 《한국수필》
을 통해 시인과 수필가로 등단했다. 2004년 시집 『햇살무리』를 펴냈다. 그는 네이버 블로그 ‘햇살무리’를 통해 2012년 아버지 설정식 시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서 발간한 문학전
집 내용을 장르별로 담아냈다. 지금도 국립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 옛 신문을 통해 설태희 가문 관련 글을 찾아 블로그에 올리고 있다. 이 블로그에 들어가면 설태희 가문의 내력과 후
손들의 활동과 작품과 저서와 삶 등을 읽을 수 있다. 김혜숙과의 사이에 아들 둘을 낳았는데 설정기, 설민기 모두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2023년 전자책 7권으로 묶어 출간하였다. 오촌 설태희의 넷째 아들 설도식 슬하에 설희철·설희종·설희중 등 아들 셋과 딸 설영자를 두었다. 대부분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망우역사문화공원 오촌 설태희 가족묘지 위 망우산 능선 새해 첫 해돋이
2015년
필자는 2015년 새해 해돋이 사진을 설태희 선각자 가족묘지 뒤 망우산 능선인 ‘구리둘레길 제1코스’에서 맞이했다. 소나무와 개나리 줄기가 어우러져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
으로, 찍은 장소를 묻는 이가 많았다. 그 소나무도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2021년 가을에 수명이 다하여 사라졌다.
《창조문예》 2022년 7월호 제306호 연재한 「망우리공원 문인열전」(12)을 바탕으로
2025년 7월 8일 오늘까지 내용을 덧붙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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