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군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하다는 언급은 자주했지만, 정작 내 논문은 별로 없어서 민망할 지경이었는데, 이번 2025년 6월호에 낙랑군 관련 연구 논문 두 편을 게재하게 됐다. 하나는 평안남도 용강군에 있는 점제현비(일명 점제현신사비)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5세기에 북위로 이주해 살았던 낙랑 주민들의 묘지 자료를 분석한 것이다.
* 낙랑군 점제비의 건립 배경, 동북아역사논총 88
* 북위대 낙랑교군의 설치와 낙랑계 가문의 가계(家系) 인식, 한국사연구 209
점제비는 현재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석비로, 보통 '점제현신사비'라는 명칭으로 알려져 있다. 1913년에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처음 발견된 이래로 이 석비를 두고 많은 사회적 논란이 있었지만, 사실 연구자들 외에 이 비문의 내용을 아는 일반인들은 거의 없다. 또 낙랑군이 한반도에 없었다고 외치는 양반들 역시 ‘비가 가짜’, ‘일제의 조작’이라고만 우길 뿐, 내용에 대해 감히 언급한 적이 없다.
이 비문을 들여다보면, 먼저 당시 낙랑군 점제현의 현장이었던 인물이 주도하여 ‘▨평산군(▨平山君)’이라고 지칭된 산신(山神: 지역에 비를 뿌리는 등 백성에게 이익을 준다고 알려진 영험한 산)에 대한 제사 관련 시설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전한다. 또 그 뒤에는 ‘▨평산군(▨平山君)’ 산신에 대한 송사(덕과 공을 기리는 글)를 적은 글이 이어진다. 이 비는 내용상 ▨평산군이라고 지칭된 산의 근처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그 근처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오석산(해발 565m)이 존재한다.
후한대에는 조정에서 특정 지역의 영험한 산에게 공식적으로 봉호를 내려주고, 관련 제사를 국가가 인정해주기도 했는데, 그 과정에서 군현과 중앙 정부 간의 일정한 신청-허가 절차가 있었다. 조정에서 최종 허가를 하면 군현에서 산신에 대한 제사 시설을 다시 만들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점제비와 같이 산신에 대한 제사와 그 공적을 기린 내용의 석비가 세워지는 것이다. 이런 비슷한 내용의 비는 후한대에 상산국 원씨현 지역에서도 다수 만들어진 적이 있다.
그럼 후한 조정이 낙랑군 내에서도 작은 규모의 현에 불과한 점제현 일대의 작은 산(해발 565m)을 어떻게 알고 ‘▨평산군’이라는 공식 봉호를 내렸을까. 그건 낙랑군(점제현) 차원의 적극적인 보고와 신청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신청 사례는 후한 후기인 160년대와 180년대에 다수 나타난다. 황건의 난 등 농민 반란이 각지에서 일어나는 혼란상 속에서 위기감을 느낀 각지 군현들은 향촌 주민들의 결집을 위해 산신에 대한 제사를 부활시켰다. 그리고 그 제사를 정식으로 공인해 달라고 조정에 신청을 했으며, 조정에서도 이러한 신청을 유연하게 승인하는 상황이 이어진 것이다.
같은 시기 낙랑군도 변경에 대한 통제력이 점차 약화되고 있었다. 특히 서남쪽의 점제현은 잦은 주민 이탈과 남쪽 한・예 세력으로부터의 도전에 직면하여 사실상 존폐의 기로에 서 있었던 것 같다. 이때 점제현의 관원과 지배층들이 기존 주민들 간의 유대와 통치 질서를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그 지역에서 추앙되던 ‘▨평산’(오석산)에 대한 제사를 조정으로부터 공식 인정받고 관련 제사 시설을 세우는 과정에서 점제비를 제작했던 게 아닐까 한다.
점제비의 제작 시기가 정말 후한 말기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이후에도 논의가 진행될 수 있지만, 중요한 건 이 비가 낙랑군(점제현)과 한 중앙 조정 간의 공식적인 행정 절차를 거친 뒤에 나름의 형식을 갖춰서 만들어진 비라는 점이다. 점제비가 당시 낙랑군의 통치상과 사회상에도 접근할 수 있는 유용한 자료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일제가 중국땅에서 석비를 옮겨서 평안도 땅에 심어 놨다>는 식의 저급한 조작설이나, <낙랑군=한반도설을 인정하면 '뉴라이트'>라는 식의 밑도 끝도 없는 선동을 언제까지 듣고 있어야 하나.
오히려 지금까지 나온 기원전 이래의 여러 사료들에 대한 다양한 연구들을 기반으로 한반도의 고대 역사에 대한 새로운 서사를 구상하고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연구자들이 낙랑군의 역사상과 이를 기반으로 한 서사를 만들어서 제시하는 작업도 함께 진행한다면 이전의 낡은 서사들을 대체하는 날이 더 빨리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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