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08

Kyunghee Lee - 김민석의 진실? - 광야에서 돌아온 소쩍새

김민석의 진실? - 광야에서 돌아온 소쩍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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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6.4
1.
한국에서 국내 정치를 수동적이라도 관찰하는 내 또래 사람이라면 “김민새”를 기억할 것이다. 때는 2002년, 월드컵 4강 열기 뿐 아니라 16대 대통령 선거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재선 민주당 의원 김민석은 노무현만으로 선거를 이길 수 없다며 정몽준과 단일화를 주장했다. 그는 민주당을 탈당하고, 후단협을 꾸리고, 정몽준이 이끄는 국민통합21캠프에 합류했다. 이후 말로 다 못할 우여곡절 끝에 민주당 후보로 단일화가 이루어졌는데, 선거 전날 폭탄이 떨어졌다. 12월18일 밤, 투표를 불과 몇시간 앞두고 MJ가 “지지철회”를 해버린 것이다. 청천병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초침은 아침을 향해 짹각짹각 흐르고, 상황은 점점 돌이킬 수 없게 되어갔다.
나는 당시 민주당 선대위에서 후보 외신보좌역을 하고 있었다. 사건이 터지자 AFP등 외신 기자들의 전화가 한밤중에 빗발치는데, 무슨말을 해 줄 수 있겠나! 누가 봐도 상황은 너무 암울했다. 그러나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고, 선거는 끝날때까지 끝난게 아니다. 내가 외신 기자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게 다였다. 내게 그때 6개월은 그랬다. 내가 자원해서 들어갔고, 나는 이상하리만큼 단 한번도 당선 여부를 생각하지 않았다. 노통은 무조건 당선 되야만 했다. 이번 대선에서 국힘 당권파가 막판 후보교체를 위해 엄청난 새벽 쇼를 펼쳤는데, 2002년 당시 후단협의 노무현 흔들기는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치가 떨리게 했다. 2002년 한밤중의 지지철회는 그 흔들기의 절정이었다.
지지철회의 밤이 그렇게 지나고, 다음날 노통은 기적같이 당선되었다. 떨어진 폭탄은 국민이 그렇게 불능화했다. 그러나 한번 날아간 새는 이미 배신자로 낙인 찍혔다. “김민새”는 김민석을 배신자로 낙인찍는 이름이였다. 당시 저쪽당에선 독수리 5형제도 유명 했는데, 김민새란 호칭은 진영을 바꿔 날아다니는 정치 “철새”에 빗대 김민석 이름을 한 번 더 희화한 것이다.
김민석은 5공화국 시절, 21살에 서울대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되었고, 20대 후반에 DJ 키드로 정당 정치에 화려하게 등장한 인물이다. 그는 그시절 정계 최고의 아이돌 스타였다. 2002년 당시 30대에 이미 재선의원이었다. 이랬던 그는 아마도 후단협의 상징이 되어, 후단협에 대한 모든 원한과 비난을 한 몸으로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었다.
2.
후단협 이후, 스타는 끝없이 추락했다. 기억은 희미해지지만 불신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나 역시 그랬다. 지금으로부터 한참 전이긴 하지만, 나는 언젠가 가까운 지인에게 김민석에 대한 나의 비호감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내 취지는 대충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였을 거다.
그런데 지인의 대답이 너무 뜻밖이었다. “그럴 수 도 있지” 라고 했다. 그렇게 말한 지인은
5공시절 “민족고대” 운동권 지도부 출신으로, 김민석과 동시대를 산 인물이다. 누구 못지 않은 운동권이었다. 나를 대선 캠프와 연결해 준 인물이기도 하다. 16대 대선이 끝난 후, 조선일보는 그가 오랜 세월 잊고 지낸 공안 관련 수배령을 1면에 실어 그를 투옥시키는데 성공했다. 노무현 정부 흠집내기였다-무려 인수위 시기에. 그런 그였다. 그는 어떤 사유로 김민석이 “그럴 수 도 있”었다는 건가? 나는 김민석도 지인도 이해를 할 수 없었고, 나에겐 이 일이 오랫동안 미스테리로 남았다. 다만, 열혈 운동권 출신인 내 지인은 알고 곁다리 "교포" 운동권 출신인 나 모르는 뭔가가 있나? 있다면 그게 뭘까? 그것이 궁금했다.
3.
어느 시점부터인가 김민석이 정치권에서 다시 눈에 띠기 시작했다. 내 한 몸 건사하느라 그런가부다 하고 또 몇 년이 흘렀다. 그랬던 그가 지난 12.3 내란 이후 조금씩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혀도 살짝 짧고, 사람의 모습이나 말하는 스타일이나 워낙 신중해서, 말을 할 때 사람을 확 휘어잡거다 빨아들이지는 않는다. 다만 그가 미리 준비한 텍스트에 조금만 귀 기울이면 그 속에 단단한 내공이 엿보였다. 정교하고 수려하기조차 해 보였다. 여의도 바닥에서 그만한 언어 구사력이 있는 정치인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또 오랜 공백기를 마치고 정치권에 다시 착지하는게 결코 쉽지 않았을텐데, 여기까지 오는데 그가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을지 나는 오직 상상밖에 할 수 없었다. 내란 상황에서 그의 역할이 돋보이기 시작했다. 오로지 성실함과 헌신으로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4.
내가 김민석으로부터 오래된 불신을 거두는 데 쐐기를 박은 사건은 민주당 대선 후보의 현충원 방문이다. 김민석의 권유로 박태준 묘에 참배했다는 것이다. 예사스럽지 않았다. 기회가 된다면 그동안 김민석이 한 말들을 차분히 훑어 봐야겠지만, 나는 우선 내 나름의 결론부터 내렸다. 아, 오래전 그의 철새짓은 어쩜 철새짓이 아니라 진심일 수도 있었겠구나.
나는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박태준이 누군가? 5.16때는 박정희 비서실장을 지냈고, 포항제철의 초대 사장으로 박정희식 경제개발, 한국 압축성장의 주역이다. 중국의 덩샤오핑은 그런 그를 78년부터 만나고 싶어했다고 한다. 흑묘백묘 발언으로 유명하고, 중국 개방정책 의 아버지인 덩샤오핑이 박태준을 만나려고 했던 이유는 오직 한가지. 자국의 경제 기반을 닦기 위해서였다. 박태준은 실제로 덩샤오핑 초청으로 1992년 상하이에서 그를 만나고 그가 요청하는 도움을 주었다고 하는데, 박태준은 이 사실을 죽기 1년 전인 2010년까지 비밀에 부쳤다고 한다. 한-중 수교는 맺었지만 국가 기간 산업인 포항제철기술을 중국에 오픈 했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민감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포항제철 없는 지금의 한국은 상상하기가 힘들다.
중국 현대사에서는 실패한 국-공 합작이 유명하다. 돌이켜 보면 노무현-정몽준 단일화는 국공합작만큼이나 애초에 성공 가능성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와 별개로, 덩샤오핑이 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박태준을 만났듯이, 마찬가지로 박태준이 이념의 장벽에 얽매이지 않고 중국과의 관계를 잘 맺어 수십년 한국에 어마어마한 무역흑자를 가져다 주었듯이, 어쩜 젊은 김민석은 그런 취지의 “좌우합작,” 그런 취지의 단일화에 진심이었을 수 도 있겠다. 김민석에 의하면 노무현 대통령만큼은 자신의 진실을 인정해 주었다고 한다.
5.
2002년도 시도한 단일화는 취지가 비슷한 선례가 있다. 97년도 DJ-JP 연합이다. 다른점이 있다면 2002년에는 실패했고, 97년의 경우 DJ가 당선 되는데 까지는 성공을 한 셈이다. 단 누가 봐도 이 두 경우 모두, 무늬만 합작이지 화학적 결합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막 끝난 2025년도 민주당 대선을 보면, 후보가 현충원에 가서 이승만, 박정희는 물론 박태준 묘에서 까지 참배를 한 경우는 아마도 이번이 처음 아닌가. 어디 이 뿐인가. 내가 보기에 이재명이 추구하는 좌우합작은 정치적 수단으로서의 합작, 무늬만 합작이 아닌것 같다. 좌와 우가 일체가 되는 화확적 결합을 추구하는 것 같다. 운동장을 넓게 쓰자는 말도 표현은 다르지만 뜻은 같은 말이다. 이러한 이재명의 횡보를 두고, 또다른 386 출신 스타 정치인 임종석은 민주당 정체성을 누구맘대로 그렇게 바꾸려고 하냐고 따진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러한 불만 표출은,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임종석이 당권에 대한 자신의 지분을 우회적으로 주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게 바로 구태정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난 임종석의 불만에 동의 할 수 없다. 난 이재명의 방향이 백번 , 천번 옳다고 생각한다. 이재명의 방향이 2025년 진보의 시대정신을 반영한다고 굳게 믿는다.
6.
내가 김민석을 다시 보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상황 덕분이다. 즉, 지금으로부터 25여 년 전, 어쩜 젊고 영민하고 화려했던 재선의원 김민석은 그때 이미 진영 정치의 한계를 본 게 아닐까? 자신이 체험한 여의도 정치판의 한계를 온 몸을 던져 부셔보려 시도한 것은 아닐까? 덩샤오핑과 박태준을 꿈 꾼 것일까?
그렇다 치더라도, 아뿔사, 정몽준은 결코 덩샤오핑도 박태준도 못 될 사람이란걸 왜 몰랐을까?! 나같으면 절대 정몽준 같은 소인배에게 내 정치생명을 걸지 않았을 텐데. 딱 보면 모르나?
다만 그 때 그의 “배신”이 그런 저런 실수였다면, 나는 그것을 배.신.이라 부를 수 없.겠.다. 그건 배신이 아니고 실수라고 하겠다. 그리고 그런 실수라면 나는 백번이라도 천번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그 누구도 완벽하지 않으니까.
7.
나는 김민석과 일면식도 없다. 설령 친구라 하더라도 이제와서 너 그때 왜 그랬어? 라고 직접 물어볼 수도,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이해를 하고 못 하고는 나의 몫이지 그의 몫은 아니니까. 그래서 나는 “그럴 수도 있지”의 미스테리가 드디어 풀렸다. 저 유명한 노랫가사처럼,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그리고 목숨까지도 바칠 준비로 대의를 위해 나섰던 나의 지인 같은 사람은, 남의 진실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그럴수도 있지"에 숨은 미스테리가 풀렸다. 이렇게 오래된 미스테리가 풀려 또하나의 진실을 얻게된 것이 요즘 내가 김민석을 보며 피운 나만의 국화꽃이다. 나도 남의 진실을 쉽게 속단하지 말아야지. 속죄할 사람은 김민석이 아니라 나다.
김민석도 근래에는 마음이 많이 편해진 것 같다. 언듯 듣자하니 자신의 오랜 정치 공백기를 “험난한 광야생활”로 비유하는 데 이의가 없는 듯하다. 그리고 오늘 그는 국민주권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로 지명 되었다. 곧 임명절차가 끝나겠지. 이 정도면 화려한 복귀 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진실이 드디어 통한 것으로 봐야겠다. 그리하여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20여년의 세월을 소쩍거려 각자의 국화꽃을 피웠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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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
2008년을 기억합니다. 하지만 세상이 변한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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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unghee Lee
이정민 오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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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 Hyekyung
멋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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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unghee Lee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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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y Lee
"그럴수도 있지" 라는 말은 정말 새겨두고 때때로 생각하고 쓸 말 인것 같아요. 마음을 넓여주고 여유가 생기는군요. 이분 잘 모르지만 지난 몇달동안 주의깊게 보고 있다가 이번총리 선정에 저도 이상하게 기대가 되더군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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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unga Shin
저도 김민새라고 낙인 찍었는데 이번에 보니 오랜 낭인 생활을 하며 철이 쑤욱 들었더라구요.
그리고 어디선가 유명 아나운서였던 그의 부인 사진을 보았는데 힘들게 살아온 흔적이 보여서 짠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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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unghee Lee
반갑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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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승
너무 길다. 경희야. 오늘 하네다에서 중국 옥중 다녀올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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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en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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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 읽었습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주시네요


Kyunghee Lee - 보수는 주류 자리를 빼앗길까? -- 미리 보는 국민주권정부... | Facebook

보수는 주류 자리를 빼앗길까? -- 미리 보는 국민주권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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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6.8
아래 김민석 회고 인터뷰를 들어보니, 지나간 이야기임에도 이 시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정말 많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인상에 남는 이야기는 새천년민주당 창당에 대한 그의 회고다 (2000년 1월 20일 창당). 그의 이야기는 25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마치 잘 짜여진 씨나리오 콘티처럼 한 박자도 놓치지 않고, 이재명의 중도보수론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아, 이에 대한 내 생각을 적어 본다.
내 귀를 번쩍 뜨이게 한 것은 다음 구절이다: 새천년민주당이 "최초로 집권 이후에 폭넓게 한국사회의 주류를 끌어안으려고 새롭게 스펙트럼을 넓혀서 만들어봤던 정당"이라는 것이다. 또 이 정당의 스펙트럼을 김민석 자신이 "기획"했다는 것이다 (34:05). 나는 이 말을, 민주당이 최초로 한국에서 주류 세력이 되는 상상을 해 보았다는 말로 해석한다. 이제 4번째 여당을 하는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은 아직도 자신들을 주류라고 생각하는데 익숙치 않은 것 같다. 심지어 일부는 주류가 되길 완강히 거부한다. 그런데 사 반 세기 전에 이미 이런 상상을 했다면 그건 정말 엄청난 사건이다.
이번 대선에서 이재명이 중도보수론을 들고 나왔을 때, 즉 운동장을 넓게 쓰자는 얘기를 들고 나왔을 때, 난 그 말을 민주당 정체성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촉구하는 말로 받아들였다. 즉, 민주당이 스스로를 이 사회 주류로 인식하기를 촉구하는 발언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나 스스로 처음으로 그 가능성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지금은 그런 인식의 전환을 해도 충분히 괜찮은 시기라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25년 전 새천년민주당 창당 이야기는 올해 이재명이 대선에서 들고 나온 중도보수론과 서로 딱 맞아 떨어지는 이야기다.
도덕성이 담보되지 않은 세력은 결코 한 국가 공동체의 주류가 될 수 없다. 한국에서 진보진영이 주류가 된다는 것은, 식민통치, 독재통치의 유산에서 벗어나 드디어 진보적 가치가 한국사회에서 보편적 가치로 자리잡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진보진영이 추구하는 대동세상에 좀더 다가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소 아이러니하게도, 진보세력이 주류가 되는 과정은 세계 어디에서나 결과적으로는 중도보수화 되는 과정이라고 본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보수 원로 논객들은 때마침 우파 진영의 "갈라파고스"화를 우려한다 (2025.6.6. SBS 김태현의 정치쇼). 25년 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국힘으로 대변되는 한국의 우파진영은, 원로 논객들의 우려대로, 한국사회에서 주류 자리를 과연 빼앗길까? 어쩜 이재명 정부 출범을 신호탄으로, 우리 사회 주류가 보수에서 진보로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이제 대한민국엔 DJ, 노무현 대신 이재명이 있고, 그 옆에 김민석이 있다. 25년 전 DJ 옆에서 민주당의 "스펙트럼을 기획"했던 김민석은, DJ의 조언대로 야인 시절 퇴수를 잘 한 것 같다. 이번 선거에서 내가 깨달았던 것 보다 훨씬 더, 대한민국의 미래가 이 둘의 행보에 달려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첨으로 해 본다. 즉, 나는 조심스레 약간의 희망일지언정 가져보고자 한다. 설령 이 둘의 주류화 기획이 완벽하게 성공하지 못해도, 방향을 제시한 것 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사족: 한국의 범진보진영은 투트랙 전략을 가져가야 한다고 본다. 민주당은 운동장을 넓게 쓰는 중도보수의 노선을, 그리고 조국혁신당, 기본소득당, 민노당 등 군소정당은 여럿이 함께 민주당의 왼쪽을 담당해야 한다고 본다. 즉 한국의 범 진보진영는 1개의 거대 정당과, 여러개의 군소 정당, 이렇게 두 세력을 함께 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범진보진영이 좀더 튼튼하게, 좀더 오래 세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본다. 새천년민주당은 천 년 하자고 지은 이름이었단다. 미국식 양당 정치로는 더이상 안 될 것 같다. 미국 양당정치의 한계가 너무 끔찍하다. 앞으로 K-민주주의가 집회만 잘 할게 아니라, 한없이 높은 문화의 힘으로 세계사에 새로운 양상으로 정당 정치 시스템을 선도하면 좋겠다.
<김민석의 DJ 이야기>
기획: 광주mbc
방송일: 2024년 1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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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버전] 이재명 정부의 국무총리 후보자 김민석이 말하는 김대중과 이재명 | 김민석은 어떻게 DJ의 정치적 아들이 되었나? | 김민석 총리 후보자의 정치 역정

광주MBC

47,864 views  Nov 12, 2024  #김대중대통령 #이재명김민석
#김대중대통령 #김대중김민석 #이재명김민석

00:00 인트로
00:32 DJ를 처음 만난 것은?
01:36 1985년 서울 미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이란?
04:21 1987년 대선에서 분열한 양김을 보면서...
06:01 마음 속으로 DJ를 따르게 된 계기는?
09:02 92년 총선에 첫 출마하게 되는데...
10:25 92년 대선 때 김대중 후보를 도왔던 역할은?
11:43 92년 DJ 낙선 이후에 떠난 미국 유학
13:31 1994년 북핵 위기 국면에서 본 DJ의 리더십
17:18 김민석의 97년 대선 TV 광고
18:48 DJT 중 박태준 총재를 담당했는데...
21:23 대선 선거운동 중에 김민석의 말에 DJ가 눈물을..?
22:19 '국보급 연기자' 최불암 vs '국보급 정치인' 김민석
25:07 1992년 낙선 당시 DJ의 지원유세와 비하인드 스토리
28:08 새천년민주당 창당작업에 참여하는데...
29:35 김민석은 DJ의 정치적 아들?
32:48 새천년민주당의 386 젊은피 수혈
33:48 새천년민주당은 스펙트럼이 넓은 정당?
34:58 '민주당'이라는 당명이 향수가 있었던 DJ
36:14 새천년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분당
38:34 김대중의 업적을 뽑아본다면?
43:21 지금은 DJ 같은 거인의 리더십이 필요한 때?
45:54 동교동에서 DJ와 길게 나눴던 이야기는?
48:05 DJ가 김민석에게 준 화두, 퇴수란?
50:10 숱한 낙선의 경험이 만든 DJ의 평정심 
50:41 DJ의 유머 연설 토론 
56:09 다큐감독(?) 김민석의 DJ 다큐
59:25 김민석 PICK 'DJ를 만든 5가지'
01:00:02 DJ의 전라도 영어가 미국에서도 먹혔던 이유는? 
01:01:48 DJ의 과오를 말한다면..
01:06:54 김대중과 이재명을 비교해 보면..

==
Transcript
===
인트로
f [음악]
[음악]
[음악]
DJ를 처음 만난 것은?
직접 뺀 것은 제가 85년도에 감옥에 가서
3년이 있었는데 제가 서울대 학생 회장 전학년 의장이었던 저희 교통사고로 저희 둘째
형이 돌아갔습니다 그때 잠깐 귀라고 해서 상을 치르라고 제가 하루
나왔었는데 그당 씨의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 김영삼 두 분을
그때 잠깐 거기서 벤 것이 처음 벤 겁니다 그때는 뭐 특별한 것이
없었고 저는 사실은 제도권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양김 그냥
이렇게 막연하게만 알고 있었던 경우고 김대종 대통령이
85년도 그때 이제 아마 22 총선때 망명을 맞추고 귀국하고 이런
때였는데 그 때문에도 사실은 김대용 대통령 잘
1985년 서울 미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이란?
몰랐죠 제가 학생 회장을 할 때 제가 이제 최초로 광주 학살의 진상을
규명해 그리고 그것을 미국이 용인하지 않고 가능하지 않지 않느냐라는
방식으로 제기한게 85년도 서울 미문화원 사건입니다 그걸로 사실상 최초로 80년대 이후에 광주 문제를
국제적으로 알린 거거든요 그때 제가 서울대 학생 회장이고 전국 학생 연합
의장이었던 바로 그 해까지만 해도 1985년 제가 학생 회장일 때까지가
아마 아 학생운동 사에서 서울대가 그리고 서울대 학생회장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했던 마지막 해 가장 좀 전성 기면서 마지막 해였을 겁니다
그래서 그때는 학생 회장으로 제가 서울대에서 무슨 기자 회견을 하면은
그물로 제하 인사들이 다 오고 뭐 이러던 일종에 학생운동이 전체 민주화운동의 중심이고 서울대 학생회가
또 그 중심이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저희 어머니는 제가 구속되면서 구속자
그리고 이제 민가협 회장이 되셨고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이제 아마
인연이 다왔을 거고 아까 말씀처럼 제가 구속된 중에 저희 형이 돌아가고
한때 두 분이 참석하시고 한 것도 당시까지
서울대가 학생 운동에서 갔던 위상이 높았던 그 시절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수 있죠 부산미문화원 방화 사건이 이제 그
후에 박근혜 정부 때 그 한나라당 쪽으로 가셨던 김현장 씨 광주
출신의이 그분들이 한 것이고 저희가 관련됐던 것은 서울 미하원
농성 사건입니다 저는 직접성 면은 안 했는데 밖에서 어 그것들 이제 소
배후라고 했죠 문제제기하고서 지원했던 케이스고 그때 아 밖에 있으면서
연대에 이런 삼민투 위원장이었던 것이 국정원 차장을 하다 지금 국회에 들어온 박선원 위원이고 그 박선원
위원이 처음으로 학생들 통역을 하고 싶다고 자원해서 데려와서 저희가 알게
된게 지금 국민 회에 있는 인요한 씨고 그 청년 시절부터 한 40년을
입니다 그리고 서울 미문화원 농성에 직접 참여했던 분들이 지금 국민
회에가 있는 함문경 그리고 신정훈 이런 분들이죠 그게 이제
꽤 워낙 큰
1987년 대선에서 분열한 양김을 보면서...
사건이었습니다 5년 6개월 징역을 받아서 2년 9개월을 살다가 나왔는데 정권 바뀐 후에 88년
2월에 나왔습니다 근데 뭐 열심히 운동도 하고 또 투쟁도 하고 하면서
슬기로운 과목 생활을 했는데 87년 6월 항쟁이 진행될 때
총주 교도소에 있었는데요 김대중전대통령 그서 사형을 받은 후에
계시던 병사 총주교 병사 바로 옆에 거기에 제가 있었습니다 아 6월
항쟁이 진행되는 소식을 듣고 하면서 그때 저희가 탈옥을 꿈꿨습니다 나가서
봐야 되겠는데 그래서 별생각을 다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기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근데 결국은 이제
그렇게 못했었는데 이제 이때에 안에 있으면서 가슴이 뛰었죠 근데 8 7년
대선 때까지를 감옥안에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사실 저는 양김 김대중 김명상 두 분을
굉장히 미워했습니다 단일화 실패해서 국민이 만들어 놓은 그냥
완전히 밥상을 걷어찬 결과가 돼서 그때 제가 기성정치 또 야권 지도자
양김 두 분에 대해서 굉장히 싫어했습니다 그래 저는 정치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단일화에 실패했던 김재중 대통령에 대해서도 굉장히 비판 적이었고 그때만해도 제가 독자 후보에
의한 후보 다녀라 노선 그런 백기환 선생을 제가 영치금을 털어서 지원금을
보내고 위 했었으니까요 그랬던 시절이 있습니다
마음 속으로 DJ를 따르게 된 계기는?
김대정 대통령에 의한 정권 교체를 해야 되겠다라고 제가 야권의 지도자로서뿐만 아니라 제 마음까지
얹어서 지지하고 전력 투구를 해서 운동을 하고
하는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고 단일화 실패 때의 어떤 비판적 생각을
거두고 진심으로 김대중 대통령을 리더로서 받아들인 것은 94년
이었던가요 북핵 위기가 났을 때 그때 북핵 위기가 났을 때 김대종 대통령이
북핵 위기에 대한 해법을 내쉬는 것을 보면서 그때는 대선에지고 영국 망명
아 망명 영국의 이제 해외 공부하러 나가셨을 때입니다
그때 저는 미국에 공부하고 있었고요 그때 제가 아
DJ 앞으로 대선에서 이기건 지건 상관없이 저 양반을 리더로
끝까지 밀어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본가는 아버님의 뿌리가 경남 사천에서
부산으로 넘어가서 할아버지 때부터 계셨고요 외가의 뿌리는
진도에서 저 제주로 넘은 가서 그 박지원 대표님하고 박지 원내대표와 그
아버님이 나오셨다는 진도 고성 초등학교를 저희 외부가 함께 마을
분들하고 지으셨다는 그게 그 저도 가봤습니다 그래서 그 그래서 그
시절만 해도 영남 쪽에 본가의 뿌리가 있는 민주당 계열의 드문
정치인이었습니다 아 민주화 87년 민주화 이후에 이제는 제하 운동이
현실정치로 가야 된다는 생각을 전 했습니다 근데 저는 할 생각이 전혀 없어서 선배들 하는 걸
도와주자라고 생각해서 그때 뭐 처음 얻은 분들이
뭐 이부영 김근태 뭐 장기표 이런 분들이 이제 제에서 정치적으로 넘어갈
때였습니다 저는 그렇게 제도 정치로 가는 것이 맞다고 봤고 제가 청년층
중에서는 조금 이렇게
대표격이었던 90년대만 해도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서 좀
비판적이었다 야권은 해야 되고 그때로서는 그 할 수 있었던 것이
당당의 반대에서 남은 세력이 그때가 이제 소희 노무현 김정길 뭐 요런 그
그리고 그 대표로서 이기택 런 분들이 있었던 그게 꼬마
민주당입당 합류를 했고요 노무현 김정길 뭐 이철 아 뭐 이부영 이런
분들 그래서 시작이 된 거죠 92년도 이제 대선을 앞두고 통합민주당이 된
거고요 그렇습니다
92년 총선에 첫 출마하게 되는데...
92년 총선에 처음 나왔고요 28살 때 그때도 전혀 출마할 저는 사실은
학생회장 출신들이 나중에 보니까 학생회장을 할 때 다음에 정치를 할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들 많이 했던가 본데 전혀 아니었거든요 노동운동을 하려
그랬습니다 감옥에서 나오면 공장에 가려 그랬는데 제가 자고 일어나면은
이렇게 이불 펼치면 물이 흥건하게 고이는 그야말로 송판 얇은 판 하나
있 데서 3년을 살았는데 그러고 나니까 골병이 들어 가지고 제가
지금도 사실 목 하고 허리가 별로 안 좋은데 40년 정도 지났는데 아 나와서 감옥에서 나와서 한 10년
정도는 글씨를 못 쓸만큼 몸이 안 좋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노동 운동하고 공장하는 걸
포기하고 그러다가 이제 선배들을 도와서 정치를 이렇게 하시라고
도왔는데 92년도 그 정치에 들어온 과거제 세력이 선거에 나가는 첫
개인인데 청년 주에서도 하나는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대표격으로
차출이 돼서 그냥 정말 뭐 뭐도 모르고 그때는 첫 출마를 한 것이
92년도 나배 부총 이하고 붙어서 한 200표 차이로 근소하게 치고 이제
그러면서 이제 정치에 진입이 된
92년 대선 때 김대중 후보를 도왔던 역할은?
거죠 야권에 사실 상 이제 유일한 후보이기 때문에 당연히 김대중 어
대통령 편에 서서 92년 대선을 치렀고 92년 대선 당시에 제가
김대종 대통 쿠보 TV지지 연설을 했었는데 그게 꽤 화제가 됐었습니다
제가 28이 있는데 그때만해도 요새는 이제 별로 그것도 이제 좀 지나간
흐름이 됐는데 TV지지 연설이 중요했습니다 그때는 그지지 연설이
끝나자마자 한 10분 있다가 그때 김대중 후보께서 전화를 주셔 가지고 잘했다
할 정도로 조금 그때 호평을 받았었던 그런 기억이납니다 아마
그때가 부산 복초 복집 사건이 있었던게 92년 대선일 텐데요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 노무현 대통령하고 저희가 다 그 부산 쪽에 연구가 있는
드문 정치인 아주 손에 꼽았으니 그때 서면에서 아주 신나게 저희가 연설을 하다가 좋은 복집 사건을 듣고
처음에는 와 했어요 이게 좋은 일인 줄 알았어요 그 나중에 보니까 그게
확 뒤집혀 가지고 악제가 되더라고요 아 그래서 그 정말 그런 경험을 했던
92년 DJ 낙선 이후에 떠난 미국 유학
기억이납니다 저는 저대로 결혼을 하고 그리고 미국 유학을 갔습니다 저는
정말 생각도 못했던 저희 서울 미문화원 사건에 저희가 주역이고
그때는 미국 알기를 좀 그렇게 알 때니까
근데 결혼하고 갑자기 주변에서 미국에 공부하러 가면
어떠냐고 사실은 처음에는 제가 굉장히 심리적인 저항감이 있었는데 아 공부를
하는 것도 좋겠다 그리고 그 미국과 큰 세계 세상에 대해서 아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저도 공부를 하러 가고 케임브리지에 계시던 김대중 이제
그때는 선생님이죠한테 제가 멀리 있으면서
자문도 구하고 여쭤보고 그러니까 야 정치를 하는데 꼭 무슨 뭐 정치하는
사람이 그러 하기가 필요하냐 처음에 이러시더라구요 저는 뭐 꼭 하기를 따라고 간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저는 정치를 쉴 때마다 미국에 가서 처음에는 그렇게
미국 가서 한번 국제정 제약하고 공부를 하고 캐네디 스쿨 가고 그다음에는 또 로스쿨을 가서 이렇게
매번 하기 과정을 했는데요 그런 것이 이제 필요하다고 봐서 공부를 하게 됐고 그렇게 갈 때도 대통령님께 이제
여쭤보고 그렇게 해서 공부를 하러 갔죠 그러니까 김대중 대통령님은
대선지고 나서 영국에 계셨고 저는 대선 지구 제 총선지고 나서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던 중에 아까 말씀드린 94년 1차 북핵 위기가 생긴 겁니다
1994년 북핵 위기 국면에서 본 DJ의 리더십
제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때 이제 1차 북핵 기기가 나서 한반도가
굉장히 불안했는데 김대중 대통령님이 그때 영국에 이렇게가 계시면서 최초로 이름
일괄 타론 패키지 딜 미국과 북한의 맞교환을 하게 하자 서로 원하는 것을
그러면서 카터를 특사로 보내는 안을 제시하셨습니다 제가 그때 무슨 생각을
했냐면 는 결국 국민과 국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인데 그 어려운 국가적
위기가 딱 왔을 때 DJ 유일하게 대한을 제시하더라도
IL 수도 있고 90점이 수도 있지만 대안을 제시하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에 저분이 유일한 리더다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때 제가 진짜로
리더로 딱 받아들인 거예요 그전 92년 대산을 했지만 그때는 그냥 정권 교체를 해야 된다라는 당위론 한
거고 94년에는 나라가 위기에 빠졌는데 나라와 민족의 위기에 유일하게 대안을
제시하는 분이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제가 DJ 대통령이 되든 안 되든
저는 저분을 민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딱 이렇게 일종에 진심으로 로얄티를
갖게 됐죠 그렇게 하고 제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95년도 DJ 한국으로 돌아오셨어요 서울 시장
선거에 우리가 이기게 된 첫 조순 시장 선거 당선 있니다 DJ 그때 아
제야 인사로서 조순시장 선거 지원을 위해서 이해찬 백기선 김민석 세례를
보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최초의 큰 선거를 승리하고 그것이 정권 교체 이전에 최초의 큰 선거 승리입니다
그리고 나서 DJ 이기택
민주당에 복귀하지 않고 새정치 국민회의를 만들고 민주당에 있던
국회원 상당수가 새정치 국민 회의로 가서 새정치 국민 회의로 총선을 돌파하는 그런 일이 생기게 되죠
그때만 해도 명분 론으로 DJ 정개 복귀 자체에 대한 비판이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기억하시겠지만 DJ 정개 은퇴를 한 것이 약속인데 정개 복귀를 한 건 약속을
깼다고 해서 우리나라의 내노라 하는 지식인들이 다 DJ 비판했습니다
심지어 노무현 대통령도 그때는 다 비판하는 쪽이었습니다 근데 제가 아
아 김대중 대통령님을 그때 동교동에서 만나서 저녁에 한 세네 시간 정도
얘기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땐 청년 대표였습니다 그때 취지가 뭐였냐면
저는 정개 복귀 하시는 거 찬성인 왜 민주당으로 하셔도 되는데 굳이 새정치
국민의를 그 그때는 이름은 정해지지 않죠 왜 신당 창당을 하십니까 이렇게
복잡하게 시끄럽게 그리고 내부가 분열도 될 수 있는데 그때 대통령께서
저한테 이유 설명을 하셨어요 핵심은 공작이 들어온다 이런 우려를
말씀하셨는데 제가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전 사실 별로 설이 안 됩니다 동의는 안 됩니다
그러나 제가 지도자로 인정했기 때문에 전술적 판단에 대해서는 지도자를
따릅니다 그리고도 제가 세정 국민회 신당창당에 소위 8세대에서 처음으로
갔습니다 소위 8세대의 대부분이이 때인 전대협의 뭐 그
이후에 뭐 이인형 등등 이런 분들이 다 주저했는데 제가 가고 그다음에
다른 팔들이 합류하기 시작했던 그때부터 저는 DJ 길을 한 번도
벗어난 적은 [음악]
없습니다 97년 대선을 할 때 기억나는 것들이 첫째는 잘할 사람 뽑아서 대통령 만들어야 되지 않습니까
김민석의 97년 대선 TV 광고
그때가 IMF 됩니다 그 TV 광고를 제가 메인으로 했던
그때 같이 나왔던 분들이 추미에 노무현 저 이렇게 셋인데 그때 제가
메인으로 그 TV 광고를 했던 것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첫 번째 기준이 뭡니까 잘할
사람 뽑는 겁니다 대통령 하나 잘못 뽑아서 온 나라가이 고생 아닙니까
지금 제일 큰 문제가 뭡니까 경제 살리고 남북 문제 풀어서 나라를 안정시키는 겁니다 DJ 자타가
고민하는 하버드에서도 인정한 경제 통이라는 건 다 알려진 사실입니다 우리가 남미가 우리가 남미가 아직도
이런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한테 어떻게 21세기를 맡기겠습니까
물론 DJ 싫은 분들도 있겠죠 하지만 누가 진짜
대통령인가 어떤 조사를 해봐도 자질은가 1등입니다 또 하나는
대선기간 한 달 내내 김대 대통령 바로 옆자리에 수용에 타고 다녔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제일 막내 그래서 그냥 말동 하라고 옆에 그냥
이렇게 말동 하라고 앉아 있던 가장 최연석 국회의원으로서 [음악]
그때가 둘 이었으니까요 그래서 한 달 내내 같이 전국을 돌았던
[음악] 기억이납니다 그때가 DJP 그니까 김종필 총리와의 소희 DJP 연합인데
DJT 중 박태준 총재를 담당했는데...
하나가 더 있었던 것이 박태 종필 박태준의 연합으로 정권을
잡은 건데 제가 박태준 담당이었습니다 박태준 총리께서 YS
테 탄압 받고 나갔다가 들어와서 첫 무소속 선거를 치른 포항 선거를 할 때 제가 DJ 명을 받고 가서 막
응원도 해 드리고 이제 그러면서부터 2년이 돼서 무소속인 때
결국 대선 때 박태준 총리가 DJ 지지하게 하는 쪽에 역할을 하고 그
담당으로 제가 쭉 대선을 치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 그 차를
같이 타고 다니다가 이제 박태준 총리라고 김대중
대통령께서 아마 그때 월드컵 때가 한일 월드컵 때가 일본을 같이 가서
뭐 축구를 보셨던 기억이 있는 거 같습니다 그걸 전후해 어떤 일이 있을 때 제가 안 지켰는데 알아서 뭔
일처리 하나 했던 거 같아요 그 대통령님께서 그때 좀 기특했는지 아
이렇게저렇게 다가 지갑을 꺼내가지고 용돈 늦추시고 이랬던 기억이 지금 나네요 거액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때 제가 아 이거 얼마 그때 막 다녀야 되니까 제가 이제 청년 대학생들마다 제가 아 이거 얼마 전에
주셨는데요 이랬어요 그랬더니 아 그래 또 주는 거야 이러시 그 그렇게 대선
때 그랬군요 그러니까 내내 같이
[음악] 다니고 그때가 내일 모래가 내일이면 이제 선거 끝납니다 끝나는 날 김대중
대통령님이 중국집을 좋아하셨어요 석교동에 대통령님께서 좋아하시던 중국집에 내일인가 모레 이제 끝나는데
저녁을 먹다가 제가 그때는 총재 님이라고 부르니까
총재님이 어려울 때 대통령이 돼 가지고 나라를
살리시려고 그렇게 많이 떨어뜨리나 봅니다 제 그랬어요 그랬더니
DJ 그렇지 하고 끄덕끄덕 하시다가 우시는 거예요 아 제가 그게 얼마나
뻘쭘 했겠어요 울컥하고 그때 그걸 잊을 수가 없고
그 눈물이 DJ 취임식 때 연설을 하다가 울컥
했잖아요 바로 그런 겁니다 그것이
[음악] 기억이납니다 이제 선거 한날 투표날
대선 선거운동 중에 김민석의 말에 DJ가 눈물을..?
내일 아침 이제 다 끝나서 내일 아침에는 나가서 당선 인사를 해야 되는 날이었는데 그때 어디 계셨냐
men 일산 대게에 계셨어요 그때는 일산에 그때 일산 대에서 저희가
당선의 아침을 맞이했는데 그날 그 일산 대계 2층에
있었던 그 당시의 초선들이 저하고 정동영 정동채 김한 길이었 뭐 하니까
지금 그렇던 거 같아 한 세러 명 있었는데 그때 뭐 그다음날 연설문 같은 것도 쓰고 뭐 이랬는데
대통령님께서 이제 내일이면 당선 인사하는데 중간에 쓰 올라오시다 좀 먹고
하지 세발 낙지를 먹었던 기억이 뭐 드시는 걸 좋아했어요 뭐 그런 것
정도가 대선때 에피소드네요
[음악] 그전에 92년에 제가 처음 떨어졌지 않습니까 92년에 첫 떨어질 때 첫
'국보급 연기자' 최불암 vs '국보급 정치인' 김민석
공철 때가 김대중 이기택 그 통합민주당 대입니다 그러니까 그야말로
그 운명의 지역구가 된 영등포에서 공천을 받았는데 그것도
사실은 최불 선생님한테 우리가 선거 운동할 때 제가 뭐라 그랬냐면 아니
저는 잘하면 앞으로 포급 정신이 된다 최보라 선생님은 국보급 연기자다 그때
우리가 합동 유세가 있을 때였어요 제가 그래서 합동유세 하면서 아니 저를 찍으면 국보급 정치인 놈도 하나
건지고 국보급 연기자 연기를 계속하니까 국보 두 개를 건진다 나를
떨어뜨리면 국보급 정치인들로 하나 없어지고 국보급 연기자는 연기를 못 한다 그니까 국보를 두 개 건지실니까
국보를 두 개 버리시니까 이렇게 청중들 테
얘기했어요 근데 재밌는 것은 그 선거에서 제가 이겼잖아요 최보람 선생님의 일성이
뭐였냐면 나는 국보급 연기하기 때문에 연기를 계속하겠다 이러셨다 그니까 그렇게 기분은 안 나쁘셨던 거 같고
재밌는 것은 제가 그때로부터 거의 20년 30년이 지나서 지난 총선 때
다시 복귀를 할 때 한 20년 넘어서 했는데 그 첫선 것 때 제가 국보
얘기한 걸 기억하는 유권자들이 있더라고요 그렇게 영등포을 시작할 때
DJ 전략적 판단이 전혀 다른 물건을 갖다 붙인다는 그런 판단에 의해서
제가 거기에 그때로서는 너무 이게 범접하기 어려운 상대하고 선거를 했던
거죠 그게 96년도 제가 첫 선거가 된 거고요 제에게는 참 감사한 것이
그때는 국회의원이 이름바 상임위의 재경이 정무의 지금은 이제 기재인요
그건 진짜 핫한 상임이 있습니다 가기가 어려워요 그리고 보건복지
위원회는 정말 비인기 상어요 근데 제가 미국의 하버드
캐네디 스쿨에서 복지 연금 공부를 좀 했기도 했고 관심이
있었고 재경 정무는 안 될 왔더라고요 거기는 신청을 안 하고 복주의 신청을
했는데 DJ 정치를 하려면은 재경이 정무부 해서 경제 공부를 해야 된다
본인이 그거부터 시작하셨다 그래서 저를 거기다가 배치를 해서 초재선 때 제가 재경이 정무위를 했습니다 그리고
한참 있다 돌아와서 삼선 때 그때 제가 비인기 상인이었는데 못 갔던
복지위에 가서 보건 복지 연장을 했죠 그러니까 참 그 흥미로 어떤 그런
뭐 저 국회 첫 진입 과정이
[음악] 있었습니다 제가 깜짝 놀란게 김대중 대통령님이 이제 대통령
1992년 낙선 당시 DJ의 지원유세와 비하인드 스토리
그만두시고 2005년도에 이제 저도 정치 안 할 때 제가 이제 동교동에
대통령님을 찾아가서 이런저런 말씀을 그야말로 둘이서 한 서너 시간을 말씀을 나눴던 적이 있었어 아주 흥
재밌게 그때 외교부 출신의 비서원 하던 분이 딱 한 분 계셨는데 그분이
이렇게 이게 시간 오랫동안 일대일로 재밌게 대화하시는 거는 처음 본다고
하셨던 그런 시간을 가졌던 적이 있어요 제가 아유 짜내서 그러실 겁니다 이랬는데 그때 제가 깜짝
놀란게 92년도 제가 처음 떨어질 때 그때는 DJ 이렇게 지원 유하러
다니면 그게 표가 막 막 움직일 때였어요 근데 가는 데마다
그 후보들이 붙잡아서 안 나줘서 계속 늦어지는 거예요 제 앞에 쭉 늦어지다
영태 갑구에 늦어져서 영태 울고 제 지역으로 올 때 한 시간 반이 지났어요 그까 한시간 반은 우리
동네에서이 정당 연설에 모여 있던 당원과 지지자들이 지쳐 가지고
빠졌는데 지금 저는 이제 못 오십니다고 너무 미안해서 그냥 혼자서 막 얘기하다가 근데
그때 김대 대통령이 그 총제 시절에 도착을 하신 거예 그때 저희 지역에 대방초등학교라 데데
사람들이 빠져나가는데 그때 제가 대통령님을 차에서 내리시기 해가지고 단 5분이라도 연설을 하시게 했어야
되는 거예요 근데 제가 미안해서 너무 고생하시는 님 그냥 차에서 손흔
드시고 그냥 가시라고 제 그랬거든요 근데 2005년도에 대통령 은퇴하시고
났을 때 대통령님을 배러 갔는데 그날 일을
얘기하시더라고요 자네 연설을 해줬으면 자네가 당선됐을 텐데 이러더라고 그게 200표 차이였던 지역구는 제가 아
2표 이기고 군 부제에서 22표를 졌었어요 그런데 그 말씀대로
그랬을지도 몰라요 그때는 정말 뒤이 막 확확 바람이 불 때니까 그 제가
너무 놀랬어요 야이 양반이 그런 걸 다 기억하는구나
그랬던 기억이납니다 그니까 그만큼 제가 이제 안 된 거에 대해서
조금 이제 뭐 안타까워도 하셨고 뭐 그러니까 되고 나서
[음악] 기뻐하셨고 그 되고 나서는 제가 사실은 과하게 사랑을 받았죠 먼 외
시절에 사실은 청년 특보 청년 특기 부위원장 청년특위 위원장은 노무현 부위원장은 김민석 부위원장이면서 청년
특보 제가 대통령 님한테 말씀을 들어서 노 대통령한테 권하던 뭐 이런 때가 있었고 그러니까 대통령께서
초선때 시켜서 조순시장 당선 역할을 했고 직권 되고 우리가 처음으로
새천년민주당 창당작업에 참여하는데...
만든게 세천재 민주당인재영입
그것을 창당 준비를 위한 기획
영입 대변인 여론조사 공천 그리고 나서 첫
대통령 겸 총제 비서실장 쭉 제가 했으니까 어마어마하게 일을 시키신 거죠 그 뭐
여론 조사 영입 공 실부 다 했으니까 심지어 영입을 할 때 새차 민주당 때
그때만해도 우리가 자료가 별로 없었을 텐데 제 혼자 만 명 자료를 찾아서 그거를 100명으로 추려서 그 당시에
당의 사무총장을 지냈던 정균환 사무 총장하고 둘이서 한 50 명씩 만나서
막 50명 이상을 영입하고 일했던 때니까요 그때는 정말 열심히 일을 했던 거 같고 대통령께서 소희 정풍
파동이라는 것 이후에 그만두셨는데 총재를 그만두실 때 총재직 사퇴
성명을 제가 썼었 그요 총재 비서실장 그래서 새천년민주당의 창당 아 58
6의 영입 소 젊은 피 수열 과정을 다 했고 대통령께서 총지 물러 나실
때까지는 정말 한 2년 이상을 오로지 일만 했던 거
[음악] 같습니다 저도 몰랐는데 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김민석은 DJ의 정치적 아들?
왜냐면 그게 흔히 이야기하는 여의도 정책의 문법으로 보면
어마어마한 힘을 쓰는 자리였던 거예요 몰랐어요 그게 여론 조사를 우리당에 처음
도입하는 걸 실제로 제가 기획해서 했고 여론 조사에 의한 공천을 처음 도입했고 영 했고 오팔 경을 했고
그때 총재 비서실장으로 당시에 청와대 안에 방이 수석회의 하는데 제가 갈
수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때 당 대표나 사무총장이
계셨는데 가면 청와대 이렇게 있을때 대통령께서 저한테 대표하고 총장한테
보고를 시켰으니까 그러니까 참 지금 돌이켜 보면 굉장히
일을 많이 시켜 주신 거죠음 그것을 권력이라고
생각했으면 아마 제가 살아남지 못했을 것 같아요 그냥 오로지 일만 했으니까
그냥 아라는 거 보고 계속 시키셨던 것 같고 한 가지 더 경험을 이야기한다면 97년도 대선 당선되고
IMF 극복하는 과정에 IMF 비대위가 만들어졌습니다 IMF
극복하고 기업 금융 구조 조정을 주도했던 이현재 금감위원장 그 비대위 구성을 사실은 제가 건의를
했었습니다 그 대선 다음날 우리가 이견 다음날 저희 동기들이 외환
시장에 있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저도 잘 몰랐는데 연락이 와서 설명을
하는데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경제를 맡기려고 생각하셨던 아까 말씀드린 박태준
총리께 찾아갔어요 설명을 쭉 드렸더니 박태준 총리는 경제를 아는 분이잖아요
대통령께 보고를 해야 될 것 같다고 당선 다음날 그래서 제가 보을 드렸더니 대통령께서 비대 위라는 걸
만들어라 하셔서 박태준 총리 쪽에 김영환 그리고 저
양자가 만나서 처음으로 김영환 장관이 함께 나온 것이
이현재 제가 그 비대 위에 일할 정부의 국과장 인선을 했습니다 제가
사실 뭘 모르잖아요 그래서 처음에 미국 유학 갔을 때 알았던 케네디
스쿨 하버드 출신 같이 공부했던 분들을 추천을 상당히 했는데 나중에
[음악]
[음악] 장관한테 를 하는 사람 아니고 돈벌이를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정책으로서 바라보는데 비교적 생각을 갖게 된 것이 김대정 대통령이 배려해
주셔서 재경이 정무를 하고 비대위 같은 것들을 해보면서 갖는 경험이
크게 토양이 됐다 이렇게
[음악] 생각합니다 제가 재선 그니까 유일한 초선이 있고 그다음에 보궐 선거로
새천년민주당의 386 젊은피 수혈
들어온 것이 송길 그다음에 제가 재선이 되면서 영입을 했던 분들이 이인형 임종서 우상호 그때 그분들이
이제 초선으로 우상호 이인형 이런 분들이 비례를 권했는데 지역으로
나가서 처음엔 떨어졌고 임종석 어 실장이 원래 본인이 원하는 자리를
이렇게 해서 당선이 돼서 초선이 됐고 오영식 의원이 비례로 됐던 거 봐
이렇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분들이 처음 팔들이 소위 젊은 피로 수열이 되게 된 과정이 있었죠 그때
사실은 국민의 힘에서 대선주자로 지금 거론되는 분들이 한 두 분 있는데
그분들이 원래 마지막 영입 대상이고 거의 영입 될 마지막까지 왔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막판의 국민의 힘에 갔던 뭐 이런 경우가 있는데 제가 누구라고 밝히지
[음악] 않겠습니다 새천년 민주당이 평민당 어 뭐 새정치 국민의 이렇게
새천년민주당은 스펙트럼이 넓은 정당?
쭉 이어져서 정권 교체까지 했던 DJ 세력이 최초로 집권 이후에 폭넓게
한국 사회의 주류를 끌어안으려고 새롭게 스펙트럼을 넓혀서 만들어 봤던
정당입니다 그 정당의 스펙트럼을 제가 기획을 해봤는데 그니까 그게 나름대로
제게 경험이 됐죠 그러니까 그동안에는 전혀 민주당에는 없었던 세력으로서 애경 그룹에 전에 회장을 했었던
장영신 회장님 여성 회장이 심지어 마라도는 황영지 그리고 그리고 각계각층에
정말들을 쫙 모셔서 이제 과거에 어떤 전통 야당과는 다른 색깔을 한번
만들어 보자라고 한 최초의 시도 아니었나 그렇게 기획을 해서 설계를
하고 영입을 해서 그에 맞는 분들을 모셨던 그런
[음악] 정답이었습니다 통합민주당 이었다가 정치 국민회를 어쩔 수 없이 창당을
'민주당'이라는 당명이 향수가 있었던 DJ
하셨는데 대통령이 그때 장명 할 때 민주당이라는 당명에 대한 향수가
굉장히 강하셨다 그을 만들어 와라라 이렇게
심부름을 시키셨는데 저희가 원대한 꿈을 가지고이 당으로 천년 가자 해가지고 앞에 새천년 붙이고 뒤에
민주당에서 새천년 민주당이라는 걸 가져갔어요 대통령께서 민주당이라는
당명을 다시 이렇게 회복한 것에 대한 굉장히 기뻐하셨어요 네 민주당이라는 당명은 아 100만
불을 넘어서 천만 불짜리 그런 이름 아닙니까 한국에서 유일하게
사시는 역사를 가진 정당의 이름 아닙니까 유일하게 정당 다운 역사를
가진 유일한 정다 그 [음악]
민주당을 다시 만들어서 첫 정권 교체하고 집권당으로 만들었다는 것에
대한 그 김대 대통령님의 기쁨 그걸 굉장히 기뻐하셨던 모습이 지금 다시
생각이 나네요 총재면서 대통령인 마지막 이셨고 그래서 제가 대통령
비서실장은 박지원 대통령인 총재 비서실장은 저 이렇게 해서 총재 비서실장을 하면서 청와대를 왔다 갔다
했던 겁니다 저희 정풍 파동 있을 때 이제
새천년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분당
대통령께서 결국 총재직을 물러 나셨고 저는 사실은 그 이후에 아들이다
이렇게까지 표현되고 동교동 막내다 이런 얘기했지만 저는 사실 동교동 활동을 해 본 적이 없어요 제가 원래
무슨 개파 활동을 하는 스타일이 아니어 가지고 그리고 공천을 받을 때도 무슨 이렇게 동교동 뭐 이렇게
해서 받은 것이 아니고 그냥 학생 회장이 출신이어서 처음에 됐던 거거든요 지금도 우리 권노갑 곰님
같은 분 정말 이렇게 저희가 존경하고 이렇게 잘 모시고 이렇게 하지만은
그런 이미의 동교동 활동을 한 거는 아니죠 어쨌든 이제 대통령님 께서
이런저런 이유로 총재 지금 물러나시고 당이 어려워지고 정권 창출은 재창출은
그래도 됐고 정권 재창출이 된 이후에 결국은 대통령 은퇴하신 이후에 해천의
민주당이 이제 열린 우리당이 만들어지면서 사실상 분당이 되는 과정을 겪었지 않습니까 아주
힘들어하셨고 그리고 그 열린 우리당이 만들어진 이후에 다시 이제 통합이 될
때까지의 몇년인가요 한 2002년부터
2007년 그니까 통합되고 전당대회가 제대로 된게 2008년이 그 제가
2008년에 정세균 대표가 대표 됐을 때 최고 연을 했으면 복귀를 했으니까 분 분열에 한 5 6년
그거는 우리 민주당과 야당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아픈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야당이 분열하면 안 된다는 것을 너무나 깊이 배운 그
이후에도 무슨 뭐 안철수의 세치 연합도 있었고 이런 등등이 있었지만 만들어졌다고 없어지고 국민의 당
이것도 만들어졌다 없어지지만 잠깐이고 열린우리당 시기가 해는 분열이 몇 년
간게 상처가 너무 컸고 히나 민주당이 어떤 이유로도
분열하면 상처도 그고 분열하고 나면 정치 전체의 수준이 동반 하락하는구나
하는 걸 너무 뼈저리게 느낀 그래서 절대 분열은 안된다 분당은 안 된다
하는 것을 저를 에서 많은 사람이 뼈저리게 배운
[음악] 시간이었죠 IMF n 그니까 우선 총론 먼저 말씀드리면 지도자가 참
김대중의 업적을 뽑아본다면?
중요한 거죠 대한민국은 김대중 대통령께 많은 빚을 치고 있죠 DJ
아니면 아은 못했죠 국제 사회가 실제로 DJ 브랜드를 보고 어 인정해
준게 많거든요 당선자 시절에 사실은 DJ IMF 복을 시작했고 당시
IMF 상황이어서가 대통령인데 그냥 손을 놓고 DJ 맡기다 피 했거든요
그때 IMF 인하 마느냐를 놓고 이렇게 대선과 논란이 있었는데 그 부분을
정리하고 하는 그 정리하는 작업을 제가 해봤던 적이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국제적인 경이라 통찰력으로
IMF 극복하는데 IMF 극복하고 기업금융 구조 조정을 했기 때문에
그다음에 또 우리가 다시 올라갈 수 있었죠 그 가 참 놀라운 것이 본인의
필생의 수원이 남북 관계인데 남북관계를 IMF 극복 과정에서 꺼내지 않았습니다 IMF 극복이
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IMF 극복하고 힘을 축적하고 그다음에 남북
관계로 갔죠 그 남북관계로 가서 어쨌든 첫 정상 회담을 만들어 내고
우리가 지금 막 두 개의 국가가 인내 만네 정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전쟁은 그까지 는 안 날 수 있을 것 같다 정도 한 그 바탕이 DJ 때 만들어진 건 아니겠습니까이
남북관계가 있죠 그리고 아 지금 한국의 위상이이 정도 되는데 결정적인
것은 아하고 환류 아닙니까 최근에 어떤 영상을 보니까 DJ 어디서 연 설명을 하면서 앞으로
세상이 바뀌면 이게 무슨 라디오 같은 뭐가 이런 거에서 뭐가 다 돼 가지고 이게 인터넷을 설명한 거이 양반이
감옥에 있으면서 알빈 토 플로나 이런 걸 공부하면 그거를 저희 정부
시대라는 우리도 못 들어본 정부 운명 얘기를 하신 거예요 그게 아로 간 거죠 그 자락을깐 거잖아요 고속도로
박정희는 경부 고속도를 깔고 김대중은 it 고속도로를 깔고 그게 전통이
이어져서 지금 이재명 대표가 에너지 고속도 여기까지 가는게 그런 거지 않습니까 니니도 지금 우리는 아하고
할류 때문에 먹고 사는 거잖아요 지금 윤성 정권이 이렇게 말아 먹었는데도 그나마 우리가 버티는게 그거 버티는
거잖아요 근데 그때 정권이 입만 열면은 그 오부찌 김대중 선언
얘기하면서 자기네도 비슷하다고 얘기는 건 전혀 다릅니다 왜냐면 오부찌 선언은 일제의 잘못에 대한 인정과
사가 위에 일어난 거거든요 그거를 받아내면서 한일
관계를 만들어내고 일본의 시민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기 때문에 DJ
일본의 양심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하면서 그때만해도 우리 진보진영
내부에서 상당히 우려가 있던 한일 문학 방을 과감하게 한 거예요 그 누구보다도 한일 문제에 있어서 원칙을
지키면서 누구보다도 한일 문제에 있어서 열려 있었어요 탁월한 거죠
IMF 남북관계 it 한류 이런 것들을 다 기반을 쌓았고 또 하나
매우 중요한게 아까 제가 IMF고 비로소 남북 관계를 제기했다
그렇잖아요 그리고 비로서 사회 개혁을 했습니다 지금 얘기하는 어떤 뭐 뭐
기초생활 보장부터 시작한 의학분업 등등의 이런 사대 보장 그것을 그때
해서 우리 복지 국가의기를 그때 쌓은 거거든요 생산적 복지 그니까 사실은
박정희 대통령의 많은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우리가 일정하게 산업화의기를 닦았다 이렇게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그 이후에 현대적인 국가로서의 어떤 경제적인 기초
복지적인 기초 평화의 기초 문화의 기초 이건 DJ 다 만든 거죠 노무현
대통령이 언제가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내가 뭘 해보라고 정책을 이렇게
스터디 하면 나중에 보면 깜짝 놀랐는데 족족 DJ 손을대 놨더라 DJ 교과서의 모든 페이지를 정지를
해 놓은 거예요 그 위에서 노대통령이 이렇게 상상력을 발휘해서 가고 그런
의미에서 민주당이라는 정당이 원래 해방 이후에 한민당의
정에 보면 약간 우리 사회에서의 보수 어 어 양반으로 이어지는 그런
정당으로부터 DJ 의해서 비로소 중산층 서민의 민주주의
정당으로 진화하고 변해서 큰 틀을 잡았고 대한민국 사회도 독재로부터
벗어나서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병행 발전이라는 새로운 틀을 잡은
[음악] 거죠 김진표 전 국회의장의 책을 우히
지금은 DJ 같은 거인의 리더십이 필요한 때?
가설을 보다 한 페이지 우연히 봤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보니까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었다 DJ 이렇게 얘기 DJ
대해서 이렇게 평가합니다 저는 요새 시간이 지날수록 DJ 경륜이 정말 필요한
때구나 지금이 반성하게 됩니다 지금이 정권의 본질이 결국은 친일을 뛰어넘는
정권이고 그러면서 이걸 극복하는 과정에서 미국과 일본 러시아 중국
북한까지 다 설득해야 되는 리더십이 필요한 시기고 새로운 경제적인 신냉전이는 어려운 상황이 왔는데 사실
국내적인 정치 공항만 못 푸는 때거든요 지금이야말로 DJ 같은 거인의
리더십이 필요한 때입니다 거인의 시야가 그 DJ 어깨 위에서 세상을
볼 때 후배 정치인들은 편했습니다 DJ 판단해 주면 되니까 그니까 그 길을 가면 됐어요 근데 DJ 아는
정치인이 없는 시기에 와서 어느 정도는 우리가 버텼습니다 근데 지금은
다시 DJ 같은 거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그러한 경륜이 없으면 풀어갈
수 없는 상황이 다시 온 겁니다 그냥 국내만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큰 판을 바라보는
리더십이 아니면 안 된다 리더십이라는 건
한마디로 이렇게 봅니다 아주 심플하게 한국의 대통령과 한국의 지도자라는 걸 뭐 하는 사람이냐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북한의지도 와 머리싸움 하는 사람입니다 간단합니다 그걸 해서 술 싸움을이기는 사람이 대한민국의 지도자
우리가 사는 겁니다 DJ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 정도의 우리가 시야와
시각을 가지고 있는가 정말 반성하고 그 제가 요새 얼마 전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하거든요 책을 읽고 그 바쁜데 동교동 서재에서 밤마다
10시부터 12시까지 독서를 했던 DJ 왜 그랬던가 하는 거를 저리게
요새 사실은 반성을 하면서 다시 공부를 시작하게 되는 시간입니다 아
그래서 저뿐만 아니라 정치를 한는 모든 사람들
또 지도자들 또 후배들이 진짜 절박하게 지금은 공부해야 한다 DJ
아는 정치인은 공부하는 지도자였다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동교동에서 DJ와 길게 나눴던 이야기는?
[음악] 제가음 가장 길게 말씀을 나눈 것이
두 번인 거 같습니다 지금 기억하기로는 한 번은 아까 말씀드렸던 DJ 정개 복기를 하실 때 그때
동교동에서 아까 말씀드렸듯이 정개 복기 찬성입니다 저는 대통령도 무조건 되시던 안
되시는지 지지할 겁니다 근데 양이면 민주당으로 못 귀 하시지 왜 신당을 상당해야 됩니까 그 얘기를 할 때
정말 제가 간절하게 말씀드 드렸거든요 그때 몇 시간 대화를 했고 그 이후에
쭉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했지만은 그리고 가서 가장 길게 대화한게 은퇴하시고 나서 동교동 둘이서 어
일대일로 한 서너 시간 얘기를 했던 거 같은데 2002년 대선 때 이제
제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때에 대해서도 대통령께서 여러 가지 말씀을 주셨고 위로도 하시고 또 공부
열심히 하라고 이런 말씀도 하시고 또 제가 새만금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옛날부터 그래서 만금이
과거에는 100% 농지로 전용 계획이 돼 있었는데 제가 대통령께 그러면 안
됩니다 이건 앞으로 미래 산업의 보고로 쓰여져야 됩니다 그래서
100% 농지가 아닌 방법으로 이것이 가야 된다는 말씀을 제가 그때 강하게 드렸던 기억이납니다 그리고 그때
대통령님께서 저한테 그때 은퇴하시고 나서 저희를 부르시기를 저한테 김치
이렇게 부르셨을 때 한테 김동진은 올해 몇이여 이러시더라구요
그때 제가 2002년 이후에 서울시장에 떨어지고 야인이 돼서
18년간 야인 생활을 하던 초기에 미국에 가서 미국 변호사 공부를 하던
중간에 와서 잠깐 뵀던 때여서 2006년도 있나 그랬습니다 그니까 제가 4 44 때였는데 그때 제가
제가 이제 4마 몇입니다 말씀을 드렸더니 지금도 생각이 나는데 는
앞으로 80까지 정치를 해야 되니까 수를 잘하시오
DJ가 김민석에게 준 화두, 퇴수란?
[음악] 이러더라고 제가 그때 첫째는
끔찍했고 이분이 본인은 대통령까지 하시고 이미 그때 팔순이 넘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앞으로 내가 정기에 복귀할지 아닐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인데 아 무슨 80까지 정치를
하라고 하시라 이게 황당했고 하나는 두 번째는 수를 잘하라고
하는데 그게 무슨 말씀인지 몰라가지고 처음에는이 바둑
영어인가이고 나와서 사전을 찾아봤더니 저도 처음 알았는데 물러날에 다수
해서 그게 천주교에서는 피정 같은 단어로 쓰는 물러나 조용히 자신을
닦는다는 뜻이었어요 일종에 내공을 닦는다는 뜻이었어요 그 저에게 아
정치를 쉬고 야인생활 저에게 지표가 됐습니다 그 단어 그래서 제가
그때부터 다시 미국에 돌아서 공부하면서 퇴수 일기라는 걸 썼습니다 퇴수 일기를 써서 홈페이지에 올리고
이렇게 해서 글을 남겨서 나중에 퇴수 일기라는 책이 그때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중국에서 공부하고 이랬는데요
미국과 중국에서 세상을 보면서 썼던 글들이 있고 오바마 대통령이 대통령이 될
거라고 제가 오바마 대통령이 대통령 되기 2년 전에 예기한 글이 하나 있습니다 미국에 있을 때 그때 썼던
글들도 있고 그런 것이 이제 퇴수 일기인데 수의 시간을 아 저것은
2002년 서울시장 떨어지면서 2020년 다시 국회 복귀하기까지
18년 18년 만에 제가 정개 복기를 한 건데요 지난 3선이 됐을 때
18년에 수의 시간을 가진 거죠 그 수의 시간이 그렇게 길어질지도
몰랐지만 김대중 대통령님께서 게 수라는 화두를 주시지 않으면은 그
시간 제가 이렇게 쉬지 않고 공부하고 하기가 어려웠겠죠 이런 생각을
숱한 낙선의 경험이 만든 DJ의 평정심
합니다 제 나이만 해도 선생님은 저에 안 붙는 때였어요 저희 위에 목두
님이라 권노갑 님이 라든가 이분은 선생님이 입에 셨던 거 하고 그
시절에 어묵한 때 동교동 시절을 함께하셨기 때문에 저희 말에도 선생님이라는 말은 잘 안 썼고 총재님
뭐 그다음에 대통령 되셨으니까 대통령님 이렇게
DJ의 유머 연설 토론
했는데 원래 선거를 하면 다 재정신이 아니라고 얘기하거든요 어떤 사람도 재정신이 다 정신이 있습니다 대서는
크니까 얼마나 더 그렇겠습니까 DJ 평생 떨어졌는데 마지막 대통령이 돼야
될 그 대선 뭐 소희 얘기는 굴곡도 있고 막 난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때 얼마나 예를 들어 저나 정동용 추미에 신기남 런 분들이 다 저보다
딱 열살 정도 위거 제가 막내 동기인데 막내입니다 제가 제가 재선일
때 이나연 박병성 이런 분들이 초선이 그요 나이는 위지만 그때 정동용
추미에 얼마나 펄펄 날 때니까 초선이 우리가 다 대통령님 그때 님 이래야
됩니다 저래야 됩니다 이래야 이깁니다 저러면 떨어집니다 하고 막 잘난 척할
때요 우리가 그리고 막 실제로 선거는 막 요동을 치고 그러면 그리고 우리 막 불안하니까
그리고 막 사고는 나고 하니까 그 어떻게 하라 근데 제가 그때 느낀게 있어요
김대중 대통령이 그 후보로서 그 많은 그 풍파 막 그 요동치는 선거의
과정에 한번도 동을 안 하더라고 그 제가 그걸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어
아이 저 성관 많이 떨어지면 저렇게 구력이 붙나 보다 이렇게 생각이 들거 요동을 없는 거예요 우리 같으
막 어 이거 큰일 났데 막 이렇게 하는데 저 미동이 없어 제가 아
선거라는게 많이 떨어져 보는게 같는 장점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나 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도 그렇고 저는 노무현 대통령도 꽤 가까이서 뵙기 때문에 노무현 대통령도 그렇고 지금 제가
이제 이재명 대표하고 가깝게 있으니까 이렇게 보면서 그러는데 민주진영 진보진영의 지도자들이 갖는 특성이
하나 있는데 토론을 좋아합니다 열려 있어요 사람들이 지금 이재명 대표한테
그렇게 얘기하지만 DJ 때도 얼마나 막 빨간 색깔에 막 뿔 달리는
마귀라고 다 봤잖아요 많이 자기 맘대로 하는 독재자라고 막 요새 이런
얘기하지만 일화는 유가 아니죠 그때는 무슨 뭐 무슨 황제 뭐 재적 총제 막
어들 때
아닙니까 제가 DJ 어떤 분이냐고 물으면 제 첫 번째 대답은 유머가 있는 분 DJ 항상 유머를 달고
다녔어요 근데 DJ 갖는 유머가 의미 있었던 것은 DJ 사형을 받는 것을
포함한 고난을 겪은 정치인이기 때문에 그 고난을 유모로 승화 켜는 것이고
자기가 사형 또는 무기를 받았을 때 그 경험을 유머로 이야기할 때 갖는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힘이 있는 거거든요 DJ만이 갖고 있는 힘이 있습니다 항상 사람들을 만나면 조크로
시작하는 정치인 최고의 언어도 저는 풍격 있는 유머의 언어라고 봐요 DJ
유머가 있었 토론을 좋아했는데 토론을 하면과 우리가
이제 상대가 안되는 아기들 아닙니까 라는 거장과 이제 막 초선인데 3
40대 막 파릇파릇한 하다가 저희 나름대로 막 이게 올입니다 저게 올입니다 이러잖아요 그럼 또 DJ
쉽게 그걸 팍 이렇게 받아들이지 않아요 때로는 우리가 맞든 거 같은데도 끝까지 그거를 약간 웃기세요
근데 그게 맞으면 어떻게 하느냐 그다음날 싹 이렇게 와 가지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우리가 주장한
대로 갑니다 그러니까 그 뭐냐면 다 판단해서 이것이 합리적이다 생각하면은
더 생각해 보고 더 숙고한 후에 그다음날 바꾸는 거예 저는 DJ 늘
한국 모왕 같다고 생각했어요 항공 모함은 선미를 살 움직여서 가거든요
워낙 거대한 산이기 때문에 산같이 또 항공 모처로 움직이는 그러한 분이다
이런 생각을 많이
하죠가 연설 잘하는 대한민국의 대표 분 아닙니까 DJ
연설에는 감동도 있고 또 유머도 있고 그랬는데 정치인의 가장 큰 자질 중에
하나가 뭐냐면요 똑같은 얘기를 네번 새롭게 하는 것처럼 하는 거예요 어떻게 매번 새로운 얘기를
하겠어요 정치인이 불가능하잖아요 컨텐츠에도 한계가 있고 근데 재밌는
것은 어제가 DJ 그런 말씀을 했는데 야 미국 대통령 선걸 예로 들면서
레이건이 이 배우 출신으로 남들은 좀 모자라다고 했지만 똑같은 얘기를
일관되게 했다 그 상대였던 먼데 이은 지식인이 맨날 새로운 얘기했지만
처음엔 근사한 거 같았는데 다 기억을 못 했다 일반적이 똑같은 얘기를 해야 된다 딱 대선 때 이런 얘기를 여러
번 하셨어요 그리고 똑같은 얘기를 늘 새롭게 처음 하는 것처럼 해야 되는데
그거는 열정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근데 그렇게 똑같은 얘기를 심지어
똑같은 조크를 많이 하셨는데 저희가 매번 들으면서도 매번 웃기는
거예 그러니까 그게 어떤 대중에 대한 책임감이
다큐감독(?) 김민석의 DJ 다큐
있죠 제가 DJ 다큐를 만든 적이 있습니다 제가 정치를 쉴 때 제가
다큐 공부를 해가지고 다큐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큐 감독이 돼서 제가 레드카펫을 밟았습니다 뽕을
해서 제가 다큐 감독이에요 제가 제일 는가 감독이에요
DJ 다큐를 하나 만들고 싶어서 거창하진 않고 제 나름의 해석을 해서
한 10몇 분짜리 만들어 놓은게 하나 있어요 저로서는 의미 있는 작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꿈 그것이
고난 아내 자연 민중 기도와
함께 김대중을 세계적 정치인으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많은 분들이 DJ 업적에 관심을 봤는데 저는 무엇이 djl 만들었는가 관점에서
접근했어요 DJ 만든 것이 무엇인가 고난 학습
내 기도 꽃과 동물 다섯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걸 기획하고 나레이션을 만들고 제가 직접
나레이션을 하고 편지까지 한 작품인데요 저는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이 고난의 산물이고 그렇지만 걸리 했고 그냥 고난이 아니라 학습을
해서 지독하게 공부를 했고 그리고 이호 여사가 없었으면 저는 그걸
몰랐어요 그 전에는 그냥 사모님으로 생각했어요 여사님 DJ 돌아가시고 이호 여만
있던 시기를 보내서 이호 여사님의 자서를 읽고 나서 제가 반성 했요 아
이여사가 정말 대단했구나 그 저는 한국은 김대중과 이희 호라는 둘
다 독립적으로 탁월한 리더의 부부를 가진 거의 유일한 케이스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윤성열 김근희
부부하위체계 적 리더십이 있었어요 근데 DJ 이호 여사는 독보적입니다
한부는 정말 민주 운동의 지도자가 한 분은 인권운동의 또는 여성 운동의
지도자로서 초창기 리더의 역할을 했잖아요 그러면서도 이여사가 딱 DJ
지도자가 된다고 보니까 많은 분들이 이호를 더 높게 쳤었는데 자기를
낮추고 DJ게 모든 거를 힘을 실어 주셨잖아요 어마어마하다고 저는 생각
제가 그걸 아 내가 이호 여사를 사모님으로 봤었구나 하는 그런 반성을
한 적이 있어요 그리고 꽃과 동물이라는 것은 DJ게 화초를 가꾸고
동물의 왕국을 보는 시간이 없었다면 저는 그의 그 고난의 시간을 아
채우는 정서적인 보호 어려웠을 거라고 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는 기도
신앙인으로서의 DJ 빼놓을 수 없다 겁니다
김민석 PICK 'DJ를 만든 5가지'
김대종 대통령이 대통령이면서 쓴 대통령 수칙이 있습니다 그 저희 방향 걸려
있는데 제가 액자로 만들어 놨는데 쭉 이렇게 돼 있어요 그 항부터 쭉 있습니다 뭐 매일 공부를 하자 건강을
지키자 그다음에 언론과 비판을 잘 듣자 그렇지만 영 아닌 얘기는
단호하게 정리하자 뭐 그다음에 국민을 존중하 이런 얘기 맨마지막에 나는 할
수 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 딱 이렇게 돼 그건 신앙인으로 DJ이기 때문에 가졌던
떤 것이 있어요 저는 그것이 굉장히 의미 있다고 생각합 무엇이 djl
DJ의 전라도 영어가 미국에서도 먹혔던 이유는?
만들었는가를 보는 것이 DJ 같이 훌륭한 정치인이 되고자 하는
후배들에게는 중요한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저는 사실 제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했던 그런 다큐를 만든 적이
있습니다 DJ 40 넘어서 영 공부라 분이잖아요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DJ 콜럼비아 대학 앞에 있는 뉴 스쿨이라는 데에서 학생님들 뭐고
거기서 영어 연설 하시는 걸들은 적이 있어요 내가 이렇게 눈을 갖고 이렇게 들으니까 아 전라도 사트 있더라고이
DJ 영어는 완벽한 전라도
양이에요로 오토미로 오토미 이렇게 가이 듣고 있으면
이것이 뭔 말이야 이런 생각 때가 있어 그런데음 제가 그때 느낀게 있습니다
외국 사람들이 DJ 영어를 듣습니다 그건 뭐냐 한국 사람이 영어를
잘한다는 것의 본질이 뭔가 그것은 발음과 이런 것이 아니라
어떤 이야기를 하는가가 중요하다 DJ 하고 싶은 얘기가
명확했습니다 한국말로 원투쓰 하나 둘 셋 하듯이 똑같이 영어로 얘기했습니다
물론 억양은 전라도 있습니다 근데 그것이 명확하니 전달이 됐던 거예요 근사한
단어와 막 사게 혀를 굴린다고 해서 영어를 잘하는 것이다 전는 사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항상 그래서
저는 스피치를 공부하는 후배들한테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생각하는데 90%을 써다 이런 얘기를
DJ의 과오를 말한다면..
합니다 DJ 완벽한 인간 이었는가 약점이 많 알았죠 저는 기억합니다
DJ아요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한유라 약속을 못 지켰던 제를 저는
굉장히 싫어했었다 그요 그렇지만 나중에 그가 원칙을 쭉 지키는 거를 보고 제가 존경한 거죠 모든
지도자들이 역사에서 그렇듯이 틀릴 때가 나오거든요 그럴 때 그런 오류를
겪었던 거죠 그건 DJ 대의 앞에서 판단의 미스가 있었던 거죠 그런가
하면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20억 플러스
알파라는게 있었잖아요 어마어마한 일이었죠 지금 생각해 보면은 DJ
입장에서는 한편으로는 정치 자격이라는 면에서 필요해질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그다음 대선을 가야 되는데
군사정권 측에서 그렇게 나오는데 혹시 그걸 거절했을 때 뭔가 그 사람들이
아 김대중이 끝까지 심을 품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해서 할까 봐 오히려 저런
걸 수 면도 있을 수 있었다고 봅니다 실제로 근데 어쨌든 20억을 그
노태우 측에서 제공하는 정치 작을 받았던 것을 제가 고백한 적이 있잖아요 그리고 그것이 국민의
눈높이는 맞지 않는다라고 얘기한 적이 있잖아요 저희로서도
충격이었죠 근데 그때 제가 김대전 대통령님과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습니다 어릴 때까 저 사실 이해하기 어렵잖아요 근데 그러면서가 진짜 자기 본인 때 마음을
얘기하시고 그외 다른 것 없다 이런 얘기를 하시는 들으면서 제가 또
하나는 지금도 김대룡 대통령 최근에 사저 매각 이런 것에서 드러나고
하지만은 김대룡 대통령이 활동하실 때요 야당 총제 때 빨갱이다 이런
레드 컴플렉스뿐만 아니라 강남에 있는 중국 집이면 뭐가 DJ거다 모가 디제거다 저기저기 돈을 숨다 별거 다
있었습니다 지금 아무것도 없다 이게 다 알려져 있잖아요 그러면서 지금
이제 그 사절을 하는 과정에도 근본적으로는 특별히 다른 거 물려 준게 없는 그런 것이 있는 거거든요
정말 가까운 분들은 압니다 진짜 없다 근데 DJ n 평생 완전한 독재의
감시하에서 몸이 베어 있었던 분 아닙니까 그러니까 함부로 정치자금을 받을 수도 없고 아 그런 때 가졌던
어떤 그런 어려움 또 어떤 때는 어떤 상황이 됐을 때 조용히 불러
가지고 다 드러내지 않으시지만 인간적인 흔들림 같은 걸
보여 주실 때가 있었어요 그런 등등을 보면서 인간 김대중의 모습을 본 거죠
그런데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역사는 정치인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그가 어떤 시대 정신에 따라서 노력했는가 그것만
남긴다라고 봅니다 훌륭한 인품도 갖춰야 하고 또 할 수 있다면 도덕적으로도
완결한 것이 좋고 그렇지만 그러나
역사가 정치인에게 요구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시대정신을 찾아서 그
시대정신을 구현하려고 처절하게 몸부림 치는가 이것이 첫째다 적어도 저는
제가 기억하는 한 김대중과 노무현 이런 분들은 그런 시대정신을 체한
분들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개인으로서는 어떻게 부족함과 흠이
없겠습니까 아 그리고 당장 대통령으로서 제일 절정의 시기에
아들들이 다 구속되는 어려움을 겪었죠아요 얼마나 그게 한
개인으로서는 통제 영역 밖에 일이 없겠습니까 누구에게도 이해하기 어려운 설명하기
어려운 그런 아픈 손가락이 한 부모로서 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러나 저는 김대중은 일관되게 적어도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그러한 노력에 있어서는 부끄러움 없이 간
지도자였다 DJ 이제 돌아가셨을 때 그때 제가 아 정치에 잠깐 복귀에서 원외로 최고
연을 할 때였어요 어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저가 최고 연을 했으니까 그때 정말 이제 간절하게
기도했던 거 같아요 대통령께서 이제 돌아가시고 나서 아
이게이 그런 얘기가 있더만요 이제 어떤 분이 떠나고 나면 그 영혼이
정말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근데 아 이게 정말 DJ
이렇게 고민했던 것들 이런 것들이 후배들에게 잘 전해져서 그중에 저
같은 사람도 그중에 하나가 돼서 잘 우리가 이어갔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고
김대중과 이재명을 비교해 보면..
한편으로는 DJ DJ 하는 것이 너무 옛날 일이기 때문에 사실 지금 젊은
후배들에게 김대중을 이야기하는 것은 안닿을 수도 있고 제가 이제 지금
이재명 대표와 김대중 대통령을 가끔 비교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이재명 대표에게 실제로 진짜로 DJ 겪었던
시대와 어떤 그런 리더십이 다시 이재명 대표에게 다시 어떻게 숙제로 오고
있는 거 같다는 생각을 정말 많이 한다 그렇게 고난을 겪고 그리고 지금 새로운 어떤 비전을 만들어 내고과의
위기를 극복하고 살려야 되는 숙제가 와 있는 거죠 너무 그런 어떤 일정
오버랩 교차되는 걸 너무 많이 느껴요 저는 굉장히 많이 느낍니다 그래서 꼭
그런 것을 이어받아서 새롭게 DJ 했던 것처럼 개인의 고난을 이기고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는 새로운 정권 교체를 만들어가는 지도자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걸 권하고 진심으로
하거든요 그리고 그거 하는데 초선 재선이 제가 30대가 이제 저도 이제
어느 정도 이제 익어서 전력을 다해서 그런 새로 길을
여는데 정말 역할을 다 하는 것으로 그 채워도 좋다 그런 마음으로 사실은
하거든요 어떤 분들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제가 그렇게 비교를 하면 야 어떻게 김대중을 이재 명하고
비교하냐 그 위대한 김대중을이 어 부족한 이재명과
비교하냐 DJ 좋아했던 분들도 있고 어떻게 지금의 이재명을 옛날 김대중
아고 비교하냐는 지금의 이재명을 좋아하는 분들도 있어요 그니까 다
어떻게 보면은 불반 족이 있는 영역이 있는 거예요 근데 아 그런 것을
보면서 저는 그냥 과거로의 김대중이 아니라
이제 우리는 저를 포함한 만 우리 모두에게는 새로운 김대중 그 김
당연히 세상은 진화해야 되는 것이고 정치도 진화해야 되는 것이고 당연히
김대중부인 정치인들이 전 나와야 되고 나올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김대중부인 정치인이 되도록
노력해야죠 그거를 포기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같은 나이의 김대중은 훨씬
훌륭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 부끄럽죠 그러나 저를 포함해서 모든 정치인들이
김대중이 겪었던 시기보다 훨씬 어려운 대한민국을 지금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국민에 대한 도리와 역사에 대한 책무로 더 열심히 공부해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하게 [음악]
됩니다 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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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올꺼야
6 months ago
긴시간 진지하게 들었습니다ㆍ김민석 의원 대단한 내공이 있으시네요ㆍ이번에는 이재명 도와주시고 그다음은  김민석 갑시다 ㆍ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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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관최-g5u
1 month ago
저는 김인석 총리님   적극 응원합니다. 인품이  남다릅니다. 5년후에 또 뵙겠습니다. 지금은  이재명 대통령님  시대입니다. 화이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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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al6740
1 month ago
다시  한국을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감사합니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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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고생각하자
7 months ago
최고다 
그때 김대중 옆에 김민석이 있었고
지금 이재명 옆에 김민석이 있으니, 
경제위기가 와도 이겨낼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다.
탄핵안부결로 심란한 밤에 희망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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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스토리7
6 months ago
김민석의원님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국회로 돌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의원님이 계셔서 힘이 됩니다. 끝까지 나라를 지켜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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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희-z6r
7 months ago
김민석의원님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앞으로  차차기 대통령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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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숙-b7q
6 months ago
김민석 의원님  존경합니다  선하고. 말씀 도 조근 조근 하면서 도 재미.   있게 말씀. 하시고.  응원하겠습니다 힘내십시요    이탄희 의원님 과 함께. 자차기  후보님. 되셔서 😝😜😛🥲💞💥💥  보란듯이. 민주당.💥👍🏻👍🏻👍🏻👍🏻💙💙💙💙💙💙💙💙💙💙☘️ 진보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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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영-e4m
6 months ago
이번 위기때 입장발표문이나 여러가지를 보면서 눈에 띄는 정치인이셨는데 역시나 엄청난 분이셨네요
어린시절 고초를 겪고 김대중대통령을 보좌하면서 많은것을 배우셨을것 같아요
차차기 대통령 이번엔 국무총리를(개인적생각)하셔도 되실것 같은 인재 이십니다
지성에 겸손까지 갖추신 소통력까지 겸비하신 분인것 같네요
경혐 깡패이신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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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k9998
6 months ago (edited)
김민석의원님 정말좋아했는데 갑자기 안보여서  어디가셨나 항상 궁금했는데 그동안 이런역사가 있었군요 앞으로  우리나라의 큰 업적을 남겨주십시요~~~응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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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마리아-j4f
6 months ago
김민석의원님 영등포을 의원시절 신길동 대신시장 부근에 살고있을때 자주 신길동에와 마주치던 기억이 있어요 일잘하는 의원이라 생각했는데 요즘 민주당 보석 김민석의원 일하는 모습 응원하고 있습니다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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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길섭
7 months ago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수석 최고위원은 고 김대중 대통령의 신뢰를 받고 가르침을 받은 점들을 소중한 자산으로 삼아 대성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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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MS-k8t
6 months ago
김민석의원님을 정치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제 알아가고 있는데 국회에선 근엄하고 무거운? 분인줄 알았는데 인간적인면도 많으시고 웃음도 많은 분이라는것을, 정치인으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의 김민석이라는 분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민주진영에 계신 분들이 제대로 된 분들이 많은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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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미-m8s
6 months ago
김민석의워님
멋있어요 
좋은정치 해주세요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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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그리고엄마-u5d
7 months ago
김대중 대통령님을 본받아 그분보다 더 멋진 정치인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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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bpark4423
6 months ago
저에게 이재명 이후는 당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 많은 빚을 졌다고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정치인, 지도자가 되실거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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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ku1532
6 months ago (edited)
저또한 요즘 관심깊게  보는  정치인이신데~~~난세영웅은  꼭 나오기마련입니다...김민석의원과 이탄희의원이  함께한다면 야당은 국민적 지지를 받는다고 봅니다! 이제부터라도  양당이 헐뜯기바쁘고.깎아내려서내가 일어서는 프레임씌우기 정치는 멈추고  건강한토른과 올바른 협치정치로 거듭나길 바래봅니다..그래야 대한민국이 삽니다!그중심에  김민석의원이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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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codaengdaeng
6 months ago (edited)
김민석 의원님 항상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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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4talk
3 months ago
김민석의원님도 이제 빛을 발할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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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ante-ot1xc
7 months ago
이재명 이후를 책임질 큰 정치인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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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망-b9p
6 months ago
응원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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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현-n8m
7 months ago
난 김민석을 응원한다...차기든..차차기든 언젠가 지도자가 될감이다...다만 욕심이아니라 당원이 원할때 그때 나선다면 좋은결과가 있을겁니다. 정치인중 이정도 경험 이정도 준비가된 정치인 많지않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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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잼민이김하퍼
6 months ago
의원님 존경합니다 대표님  곁에서  큰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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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그리고엄마-u5d
7 months ago
감사합니다❤❤지금도 .. 싸워주시는점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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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yangchan
6 months ago
정말 좋은 정치인들이 많이 생길 것 같습니다. 이런 좋은 예를 보았고, 혹은 불만족하여 직접 국세를 바꾸려 드는 적극적인 정치인들이 많이 생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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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짐단.내란단.영현백
7 months ago
아.c.val. 왜 눈물이 나냐?!?

고속도로-IT고속도로-에너지고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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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r4u
7 months ago
김민석최고의원남
항상 응원합니다.
사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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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sdomofdeparture
6 months ago
경제적 신냉전.
사방이 적으로 변한 이시점에 DJ의 세계관,정치적 성과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김대중의 어깨 위에서 국내가 아닌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낍니다.

퇴수. 18년간 잘 마친 김의원의 미래가 그 어떤 정치인 보다 크게 기대 됩니다.

오래전 사소한 얘기들도 꼼꼼히 메모하던 기억이 나는데 그것이 DJ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 같네요.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는 정치인으로서 정진하며 이재명의 옆에서 그가 DJ가 그랬던 것처럼 이 국난을 극복해 가는데 힘이 되어주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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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길-n7w
6 months ago
감사합니다' 김민석 의원!
Dj를 지켜줘서 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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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gwater1000
7 months ago
1시간이 바람처럼 흘러갔네요
최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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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joonsong886
7 months ago
김대중의 정치적 아들 미스터 싱싱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님! 김대중 정신을 이어 갈 수 있는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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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yo3pb1qf
6 months ago
다큐 감독까지 하셨어요~?? 와~~  대단하세요.  민주당에는  대선주자 인물이 많네요^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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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림-j3k
7 months ago
너무나도 김민석 상임위원님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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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dong4889
7 months ago
참 훌륭한 정신을 이어받은 훌륭한 정치인입니다. 감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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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일kim
6 months ago (edited)
김민석의원님 감사드립니다 꼭 국민을위한 지도자가 되 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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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joolee4741
3 weeks ago
영상을 김민석 총리후보 지명되시기 전에도 한번 봤고 오늘 다시 한번 봅니다. 어느모로보나 총리하셔야 하는 분입니다. 기레기들과 내란당이 아무리 거세게 준동하고 공격하더라도 우리 민주시민들이 절대 지켜드릴겁니다. 총리되시는 날만 기다립니다. 김민석 총리님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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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joonsong886
7 months ago
민주통합의 첫아들이자 김대중의 정치적 아들! 뼛속깊이 김대중 사람 미스터 싱싱 더불어민주당 김민석 의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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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그리고엄마-u5d
7 months ago
김대중대통령님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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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유-k1k
6 months ago
보고싶은 김대중대통령님 이야기 잘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미래의 대통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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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f5e
6 months ag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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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량-f8v
6 months ago
김민석 의원님은 계속하여 김대중 대통령님의 정치인 아들로 길을 가시면 절대로 후회하지 않고 더 큰 지도자로의 길을 걸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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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road1112
7 months ago
눈물이 날라고 합니다. 이런...ㅠㅠ 그 양반은 정말...대한민구그이 보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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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joonsong886
7 months ago
김민석 의원 曰) "저는 뼛속깊이 김대중 사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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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스틱-o6q
6 months ago
차차기 대통령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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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봄석-c6x
7 months ago
네가 좋아하는 김민석
의원. 앞으로 큰정치인
으로 성장 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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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tzroy7338
6 months ago (edited)
44:51 한국의 대통령, 한국의 지도자는 뭐하는 사람인가?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북한의 지도자와 머리 싸움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걸해서 수싸움을 이기는 사람을 대한민국의 지도자로 두어야 우리가 사는겁니다. 명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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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Redbaal
6 months ago (edited)
대선 후보 경선해도 될 정도의 인물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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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pahe23
4 hours ago
대통령준비 잘 하고 있군요. 차기 대통령감으로 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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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ief8150
7 months ago
김대중 대통령도 그리  치열하게 공부를 많이 하셨어야 했는데, 이렇게도 절박한세대에, 윤석열 머리로 무엇을 바랄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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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왕짱-b8n
6 months ago
차기 대통령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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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joonsong886
7 months ago
김대중 정신 계승자 미스터 싱싱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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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udi701
1 month ago
이제사 김민석이 누군지 알게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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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길-n7w
6 months ago
포스트 이재명!  김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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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태rhfoglawnf
2 months ago
김민석 이분은 과연 어떤 직책를 맡을까 진짜 궁금. 민주당이 정권 잡으면~ 비서실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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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숙-e8e
7 months ago
김대중대통령님 정치적 아들은 안진걸소장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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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수-u7n
1 month ago
김민석최고의원님오늘날김민사김니석의원님김데중전대통령님이개신것역시김미뇨ㅓㄱ오늘닌오늘날감사합니다아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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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UIII-z4f
1 month ago
운동권시절 김민석을 제일 좋아했다. 잘생겼는데 똑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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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keyyoon-l2v
6 months ago
퇴수일기 읽고싶은데 책이 없네요ㅜㅜ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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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윤-w4p
2 weeks ago
비교자체가 넘사벽이고  발톱의 때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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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종-h4m
7 months ago
나는 할수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에 아멘 
새천년문화재작가 조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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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필-k2x
1 month ago
네 담당역할에충실
해서 지금도그렇게
계시잖아요
임종석 실장을지금
도 의장이라고
하는건 남.북에큰업적을
남겼잖아요  전대협
대단한단체잖아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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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여사-q7m
2 months ago (edited)
5.18을사기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면 반납하라!5.18광주사태
수배자들은 생년월일까지바꿔서국회의원을역임했다니 이얼마나 파렴치한 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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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숙-e8e
7 months ago
김민석의원님 국회의원 4선에 업적이 뭐가 있나요?
왜 자꾸 이재명 팔다가 /김대중 대통령님 팔다가 하십니까?
당신의 업적을 쌓아보시라구요
지금부터라도 숟가락 그만 올리고 당신의 업적을 쌓기를 바랍니다 
민주당 권리당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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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숙-e8e
7 months ago
김민석
김대중대통령님 팔지 마시오 
민주당 권리당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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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근봉-n6o
7 months ago
좋은 얘기.경청했어요.이제 앞으로 가야는데 어깨가 무겁다.더 큰 정치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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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otoninman
1 month ago
댓글들 보면 무슨 정치인을 물고빨고 난리네 도구로 생각해야지 무슨 종교단체 수장인줄 댓글들 보니까 자기 생각없는 좀비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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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사람-u4k
7 months ago
고인물은 썩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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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p4b
6 months ago
김민석의원 이주 훌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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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효박-i9i
7 months ago
같잔다 감히 너같은게 무슨 대통령님 정치적아들? 너말고 누가 그러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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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hz8xx4vr4x
7 months ago
누가돈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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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섭-c4f
7 months ago
김영삼, 김대중, 김재규, 김기춘, 김무성 등은 김일성 김씨일까요...
이들이 김일성 김씨라면 흉노족이므로 우리 민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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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량-f8v
6 months ago
김민석 의원님은 김대중 대통령님의 정치적 아들로서 앞으로 중요한 결정을 할 때 김대중 대통령님이 무엇을 원했는가를 생각하며 결정하신다면 크게 빛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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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숙-s2s
7 months ago
기인석의으ㅟ님 잘모났던사신을  아내해줏ᆢ서   고맙읏니다  항상  으뭔사게습니다  강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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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향기-h6k
6 months ago
김민석이 최영환(최불암)을
이기고 당선되어 청문회에서
핸썸한 마스크에 촐지않고 기백을 보일때 김민석은 언젠가
이나라 대통령이 한번은 될 사람이다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중간에 정치를 떠날때 많이 아쉬웠는데..
다시 돌아오셔서 반갑고
대통령 꼭 한번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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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덕-z4h
7 months ago
난 당신이 대통령이 될줄알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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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호-y6d
6 months ago
지금이시기에 오버하지마라 아직일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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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철-m7x
7 months ago
괜찬은 사람이 어쩌다가 죄명이 똘똘이가 되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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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elweiss3423
7 months ago
김민석은 김대중 어른을 함부로. 논하지말라
천벌받는다. 잔당이라고. 할자가 죄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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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ボヘミアン-k7t
7 months ago (edited)
영원한 영등포 을 지역구!!
나 또한 45년투표를  영등포 을에서 
평민당을 비롯 민주당만  ~~
하지만 올해부터는 
 영등포 갑으로 변절(?) 
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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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랜클랜-q9e
7 months ago
대중이가 사람 잘못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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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키-p5k
6 months ago
버르장머리 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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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v7hd
5 months ago
​ @럭키-p5k ㅋㅋ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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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tGPT의 말:

“오지랖”이라는 말과 Kyunghee Lee 님의 김민석에 대한 회고문(『김민석의 진실? – 광야에서 돌아온 소쩍새』)은 뜻밖에도 깊은 철학적 울림에서 만납니다. 이 두 텍스트를 함께 읽고 코멘트 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오지랖 – "주제넘은 간섭"인가, "공적 관심"인가?

"오지랖이 넓다"는 말은 원래 한복의 앞자락이 넓어 남까지 덮는 데서 유래한 표현으로, 지금은 주로 남의 일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사람에 대한 비꼼으로 쓰입니다오지랖의 뜻 - '오지랖이 넓다'라는 말의…. 하지만 Kyunghee Lee 님이 김민석을 회고하며 보여준 태도는 이 단어를 정면으로 뒤집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김민석도 지인도 이해를 할 수 없었고, 나에겐 이 일이 오랫동안 미스테리로 남았다…
그렇다 치더라도, 아뿔사, 정몽준은 결코 덩샤오핑도 박태준도 못 될 사람이란 걸 왜 몰랐을까?”

이 고백은 단순히 누군가의 선택을 평가하는 것을 넘어, 타인의 진실에 대해 "감히 판단하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비롯된 존중 어린 오지랖입니다.


🧠 사르트르와 ‘지성의 오지랖’

Kyunghee Lee 님은 페이스북 소개문에 “오지랖이 넓은 게 지성이라고” 썼습니다. 사르트르의 언급(“The intellectual is someone who meddles in what does not concern [her]”)은 오지랖의 의미를 전복시키며, 지성인의 사명은 자기 일이 아닌 곳에 개입하는 것임을 드러냅니다.

Kyunghee Lee 님의 글 전체는 결국:

  • 한 사람의 과거를 성급히 ‘배신’이라 단정하지 말자,

  • 진심이 무엇이었는지 질문하자,

  • 시간이 흐르면 진심이 통할 수 있다,

라는 윤리적 오지랖의 실천기록이라 볼 수 있습니다.


🌾 회고의 ‘오지랖’이 피워낸 국화꽃

“그리하여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20여년의 세월을 소쩍거려 각자의 국화꽃을 피웠다 하겠다.”

이 문장은 ‘오지랖’이 가져온 가장 깊은 열매입니다. 타인의 진실을 기어이 끝까지 파고든다는 것은 때론 ‘주제넘은’ 개입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안에 깊은 애정과 집요한 사유의 윤리가 있기에 감동을 줍니다.

오지랖이란 때로는 남을 비웃는 말이지만, Kyunghee Lee 님의 글에서는 남을 이해하려는 긴 여정이 됩니다. 그리고 그 여정은 결국 ‘자기 속단에 대한 반성’으로 마무리됩니다:

“속죄할 사람은 김민석이 아니라 나다.”

이 말은 ‘지성의 오지랖’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고요하고 숭고한 지점입니다.


📌 결론: 오지랖은 때로 사랑의 다른 이름

‘오지랖’은 한국 사회에서 참견과 간섭의 상징이지만, Kyunghee Lee 님의 글에서 그것은 진실에 대한 탐구, 타자에 대한 존중, 그리고 과거에 대한 속죄의 언어로 변모합니다.

이처럼 ‘오지랖’은 단어 하나가 품고 있는 문화적 전복의 가능성이자, 사르트르가 말한 “진짜 지성”의 실천입니다. Kyunghee Lee 님의 회고가 보여준 것은 단지 한 정치인의 재조명이 아니라, 인간을 바라보는 태도의 변화, 그리고 그 변화가 가져오는 사회적 희망이었습니다.

나의 말:
김민석에 대해 코멘트해주세요,
ChatGPT의 말:

네, Kyunghee Lee 님의 깊이 있는 회고문과 인터뷰 자료를 바탕으로 김민석에 대한 코멘트를 아래와 같이 정리드립니다.


🧭 김민석이라는 인물에 대한 성찰적 평론

“그럴 수도 있지”에서 “이해와 존중”으로


1. 화려한 출발, 치명적 낙인

김민석은 1980년대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자 대표적 운동권 청년 정치인이었고, 1990년대에는 "DJ 키드"로 정계에 화려하게 진입한 스타였습니다. 그러나 2002년 대선 직전의 정몽준 지지 철회 사태 속에서 **'후단협의 중심 인물'**로 비춰지며 "배신자"이자 "철새"라는 낙인을 깊게 받습니다.

  • 특히 Kyunghee Lee 님이 회고한 “김민새”라는 조롱은, 단순한 정치적 이탈 이상의 도덕적 낙인이었음을 보여줍니다.

  • 이 낙인은 그 후 긴 야인 생활(“광야의 소쩍새”)로 이어졌고, 김민석은 무려 18년을 '퇴수(退修)'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2. 시간이 가르쳐 준 것들 — 회복과 재해석

이 글의 진정한 힘은, 한 정치인의 변화를 관찰한 것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편견을 돌아보는 저자의 내면 여행에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이, 단순한 용서가 아니라 ‘진실은 복잡하며, 인간은 실수하고, 진심은 언젠가 드러난다’는 지성의 자세로 전환됩니다.

Kyunghee Lee 님은 김민석의 “박태준 묘역 참배”라는 작은 행위에서, 그가 단지 정파적 연합이 아닌 “이념을 넘는 화학적 통합”, 즉 한국 정치의 갇힌 구조를 넘고자 한 초기 실험자였을 수도 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3. 김민석은 실패한 정치인이었는가?

답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입니다.

  • 그는 한때 정치를 ‘망친 자’로 간주되었지만, Kyunghee Lee 님이 보기에 그는 한계를 넘으려다 실패한 자였습니다.

  • 그렇기에 그 실패는 ‘배신’이 아닌, 정치적 이상주의자 특유의 미숙함과 조급함의 산물로 재해석될 수 있습니다.


4. 오늘날 김민석의 위상 — '포스트 DJ의 정치적 아들'

이 회고문은 단지 한 인물의 사면이나 미화가 아닙니다.

  • 김민석은 지금 이재명 정부에서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되었고,

  • 그의 언어는 신중하면서도 정교하며,

  • 오랜 ‘퇴수의 시간’을 통해 숙성된 내공이 보인다고 평가됩니다.

그의 복귀는 ‘화려한 재기’가 아니라, 진심이 통한 결과로 읽힙니다.


5. Kyunghee Lee의 코멘트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정치

이 회고문은 단지 김민석을 “재발견”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 그것은 오히려 ‘자기 성찰의 정치’,

  • “내가 그를 오해했던 것이고, 속단한 내가 속죄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역방향의 책임 윤리로 나아갑니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정치인뿐 아니라 서로에게 필요한 태도가 아닐까요?


🔚 결론

김민석은 실패도 했고, 침묵도 길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말을 시작했고, 사람들이 다시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의 진심이 지금에서야 도달한 것이라면, 그를 기다린 사회도 함께 성숙한 것입니다.

Kyunghee Lee 님의 글은 그 기다림을 가능케 한 지성의 오지랖, 그리고 회복적 정치에 대한 성찰적 증언으로 기억될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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