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03

앙의 일생을 [앙이 직접 말하는> 영적 여정 spiritual journey으로

 책과 인터뷰에 나오는 앙의 일생을 <앙이 직접 말하는> 영적 여정 spiritual journey으로 1,000 단어로 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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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여정으로서의 나의 일생>

나의 일생은 단순한 의술의 집행이나 기술의 습득이 아닌, 보이지 않는 신의 섭리와 인간에 대한 거대한 사랑을 깨달아가는 기나긴 영적 여정이었다. 돌아보면 나의 발걸음은 언제나 내가 계획한 인도주의적 선행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과정에서 신이 예비해 두신 길을 따라 움직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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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정의 시작은 나의 고향 싱가포르와 말라야의 비극적인 역사 속에서 싹텄다. 나의 부모님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포로수용소에서 처음 만나 서로를 의지하며 고난을 버텨내셨다. 특히 어머니는 일본군의 모진 고문 앞에서도 결코 동지들을 배반하지 않은 강인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전쟁이 끝난 후 태어난 나는 외할아버지에 의해 중국의 <자비의 여신> 관음의 대자녀로 바쳐지며 신의 가호 아래 어린 시절을 보냈다. 훗날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매일 마주해야 하는 시체 해부실의 공포 앞에서 좌절하고 의학을 포기하려 했을 때도,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라며 눈물로 나를 꾸짖고 비전을 심어준 이 역시 나의 어머니였다. 어머니를 통해 나는 인간의 고통과 여성을 향한 학대를 외면하지 않는 법을 배웠으며, 그것은 내 영혼에 새겨진 최초의 영적 이정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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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을 공부하고 싱가포르종합병원에서 외과의사로서 수련을 쌓아가며, 나는 점차 영적인 갈급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의학 지식과 기술은 인간에게 부와 명예를 가져다줄 수 있지만, 의사는 결국 사회 속에서 인간을 섬겨야 하는 존재라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의과대학 시절 나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며 나의 의술을 신의 공의와 이웃 사랑을 위해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끊임없이 자문했다. 1977년, 나는 인권 변호사인 프랑시스 쿠와 결혼하여 조국을 향한 헌신을 다짐했으나, 싱가포르 정부의 가혹한 탄압 아래 남편은 정치적 망명길에 올랐고 나 역시 독방 감금과 가혹한 신문을 견뎌내야 했다. 조국을 떠나 영국에서 난민의 아내이자 이방인 의사로 살아가며 마주한 서구 의료계의 성차별과 인종적 편견은 내 영혼을 더욱 단단하게 연단시키는 광야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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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82년 여름, 내 영혼의 고향이자 영적 여정의 가장 거대한 분수령이 된 베이루트의 부르심이 찾아왔다. 텔레비전 뉴스 화면을 통해 비친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 무고한 민간인들을 향한 무차별적인 폭격은 내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주일학교 교사 시절, 이스라엘은 신이 선택한 거룩한 백성이라 믿었고,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가장 좋아했던 나에게, 거대한 골리앗이 되어 무고한 어린아이들과 여성들에게 인체 살상용 백린탄을 투하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도저히 신앙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비극이었다. 신에게 이 불조의 공의에 대한 해답을 구하며 울부짖던 어느 날, 베이루트에서 전쟁 피해자들을 치료할 정형외과 의사를 시급히 구한다는 국제적 SOS 요청을 들었다. 그것은 신이 내 기도에 내리신 명확한 응답이었고, 내 영혼은 비로소 깊은 평화를 얻었다. 난민 여행 증명서 한 장만을 쥔 채,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레바논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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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나는 내 생애 한 번도 알지 못했던 천사 같은 존재들, 바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만났다. 교회와 서구 언론은 그들을 <테러리스트>이자 성경 속의 <블레셋 인>이라 부르며 증오하라고 가르쳤지만, 내가 서베이루트의 가자 병원과 라후트 지하 병원에서 만난 난민들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아낌없이 베풀 줄 아는 거룩한 영혼들이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모든 것을 잃고 먼지 구덩이 속에 살면서도, 그들은 나에게 수줍게 아랍 커피를 대접하고 손에 쥐여줄 수 있는 모든 비단 천과 귀걸이를 선물하며 신의 사랑을 몸소 증명해 보였다. 그들의 눈빛 속에서 나는 인간의 존엄성이란 폭탄이나 siege로도 결코 파괴할 수 없는 신성한 것임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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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흘간 몰아친 사브라-샤틸라 대학살의 지옥 같은 순간은 내 영혼을 완전히 부수어 버렸다. 1982년 9월 15일부터 18일까지, 나는 가자 병원의 지하 수술실에서 쏟아지는 총상 환자들을 치료하며 72시간 동안 잠도 자지 못하고 피비린내 나는 시체들의 산을 마주했다. 이스라엘 탱크가 캠프를 완전히 봉쇄한 채 조명탄을 쏘아 올리는 동안, 무장하지 않은 노인과 여성, 어린아이들이 무참히 짓밟히고 도살당했다. 한 아랍 어머니가 총탄을 뚫고 들어와 나에게 자신의 갓난아기를 맡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나, 들이닥친 킬러들에 의해 아기는 다시 빼앗겼고 결국 어머니와 아기 모두 차가운 길가에서 사살당했다. 수술실에서 수혈할 피가 부족해 숨을 거두어가면서도 고통 속에 신음하던 청년에게 자신의 마지막 혈액 팩을 양보하고 세상을 떠난 팔레스타인 여인의 거룩한 죽음 앞에서 나는 가슴을 찢으며 울부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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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비한 학살자들이 우리 외국인 의료진을 벽 앞에 세워두고 불도저로 벽을 무너뜨리려 했던 모의 처형의 순간에도 내 안에는 공포 대신 거대한 분노와 공의를 향한 갈망이 불타올랐다. 학살이 끝난 후 alleys에 가득 찬 수천 구의 처참한 시체들과 고문당한 아이들의 눈망울을 보며 나는 신에게 절규했다. “신이시여, 당신은 진정 어디에 계십니까?”. 세상의 모든 Conscience가 사라진 것 같은 어둠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살아남은 자로서, 목격자로서 죽어간 이들을 대신해 세상에 진실을 외치는 것이야말로 신이 나에게 부여한 영적 사명이라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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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곧장 목숨을 걸고 학살의 증언을 작성해 telex로 전 세계에 발송했고, 이스라엘로 넘어가 카한 위원회 청문회에서 군 수뇌부와 아리엘 샤론의 전범 행위를 낱낱이 증언했다.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성적 우월주의에 눈이 먼 수많은 그리스도교 형제들과 동료 의사들이 나를 저주하고 고립시켰지만, 내 영혼은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성경을 창세기부터 다시 읽으며 신이 소외되고 박해받는 자들의 하나님이며, 모든 민족이 이 땅을 supremacy가 아닌 나눔의 언약으로 가꾸어야 한다는 진정한 영적 진리를 발견했다. 영국으로 돌아와 일생을 바쳐 <팔레스타인을 위한 의료 지원(MAP)> 자선단체를 설립한 것 역시, 그들의 이름을 세상에서 지우려는 자들에 맞서 진실과 사랑의 다리를 놓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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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여름, 레바논의 캠프들이 또다시 무자비한 폭격을 당했을 때, 나는 내 평온한 삶과 정형외과 외과의사로서의 커리어를 뒤로하고 다시 한번 부르주 엘-브라네 캠프로 뛰어들었다. 무너진 하이파 병원의 지하 수술실에서 촛불을 켜고 손으로 수술 도구를 꿰매어가며 환자들을 치료하는 동안, 나는 폐허 속에서 다시 피어난 팔레스타인 영혼들의 불굴의 저항 정신과 신앙을 목격했다. 40일 밤낮 동안 쏟아진 수천 발의 포탄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승리의 표식을 들어 올리던 아이들의 미소 속에서, 나는 신의 살아계심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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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 일생은 베이루트에서 예루살렘으로, 그리고 고통받는 모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심장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거대한 십자가의 길이었다. 육체적 고통과 영적 추방, 세상의 불의가 나를 덮칠지라도, 박해받는 자들과 연대하며 신의 사랑을 실천하는 이 밤의 임무는 내가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고통의 어둠 너머로 반드시 찾아올 역사적 해방의 새벽을 바라보며, 나는 오늘도 신이 예비하신 거룩한 여정을 묵묵히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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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팔레스타인의 친구가 되었는가>
― 앙 스위 차이(Ang Swee Chai)가 직접 들려주는 영적 여정

나는 말레이시아에서 중국계 가정의 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 신앙 속에서 자랐다. 내가 배운 예수는 사랑과 자비의 예수였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나는 세계 정치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알던 것은 서방 언론과 교회에서 들은 이야기뿐이었다.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들이 세운 나라이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종종 폭력을 사용하는 문제적 집단이라는 이미지였다.

젊은 시절 나는 영국으로 건너가 의학을 공부했고 정형외과 의사가 되었다. 당시만 해도 내 삶의 목적은 좋은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종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길로 우리를 이끄신다.

내 영적 여정의 첫 번째 전환점은 키프로스에서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만난 일이었다. 그들은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 전혀 달랐다. 그들은 가족을 잃고 집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노인과 아이들이 있었고, 평범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팔레스타인 문제"가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인간의 삶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멀리 떨어져 있었다.

1982년 레바논 전쟁이 시작되었다. 텔레비전 화면에 베이루트가 불타고 있었다. 병원이 폭격당하고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의료진이 부족하다는 호소를 들었다. 정형외과 의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매우 단순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내가 의사라면 왜 가지 않는가?"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길가에 쓰러진 사람이 누구인지 묻지 말고 도우라고 하셨다. 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정치적 입장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다치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다.

그래서 나는 베이루트로 갔다.

그 여행이 내 삶을 영원히 바꾸었다.

가자 병원에 도착했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언론에서 보던 "테러리스트"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아이들을 안고 울고 있는 어머니들, 부상당한 노인들, 가족을 찾는 청년들이 있었다.

나는 수많은 수술을 했다.

때로는 전기가 없었다.

때로는 마취제가 부족했다.

때로는 수술실 천장 위로 폭탄 소리가 들렸다.

그곳에서 나는 인간의 고통을 보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것을 보았다.

나는 인간의 존엄을 보았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이 빵 한 조각을 나누어 주었다. 자기 가족도 먹을 것이 부족한 사람들이 외국인 의사인 나를 가족처럼 대했다.

나는 그들에게서 복음을 보았다.

놀랍게도 나는 팔레스타인 난민캠프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1982년 9월, 사브라·샤틸라 학살이 일어났다.

그 사건은 내 영혼을 완전히 뒤흔들었다.

나는 병원 안에 있었다. 총성이 들렸고 사람들이 쓰러졌다. 부상자들이 끝없이 밀려들었다. 나중에 거리로 나갔을 때 나는 수많은 시신을 보았다.

여성들.

노인들.

아이들.

그들은 무장 전투원이 아니었다.

그 순간 나는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보았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나는 침묵할 것인가?

아니면 증언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떠나기를 원했다.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침묵할 수 없었다.

내가 본 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나의 신앙은 개인적 경건의 수준을 넘어섰다.

나는 정의가 없는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는 성경을 다시 읽었다.

예언자들을 다시 읽었다.

예수의 말씀을 다시 읽었다.

그러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예수는 단지 개인의 영혼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었다.

그는 억압받는 자들과 함께하셨고,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셨으며, 권력자들에게 진실을 말하셨다.

나는 이것을 "해방의 복음"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 이후 나는 런던으로 돌아와 Medical Aid for Palestinians(MAP)를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

많은 사람들은 내게 물었다.

"왜 팔레스타인인가?"

나는 언제나 같은 대답을 했다.

"나는 팔레스타인 편이 아니다. 나는 정의의 편이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같은 상황에 있었다면 나는 그들을 위해서도 일했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유대인 친구들도 많이 만났다.

특히 사브라·샤틸라 이후 나는 여러 유대인 평화운동가들과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그들은 나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었다.

팔레스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유대인을 미워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는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방문했을 때 깊이 울었다.

유대인들의 고통은 진짜였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인들의 고통도 진짜였다.

한 민족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다른 민족의 상처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믿게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의 신앙은 더욱 단순해졌다.

젊었을 때 나는 정답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나는 질문을 더 많이 갖고 있다.

왜 인간은 서로를 두려워하는가?

왜 종교는 사랑보다 증오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는가?

왜 우리는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가?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하나님은 권력의 편보다 고통받는 사람들의 곁에서 더 쉽게 발견된다.

나는 팔레스타인 난민캠프에서 그것을 보았다.

부서진 병원에서 그것을 보았다.

아이를 잃고도 살아가는 어머니들의 눈에서 그것을 보았다.

나의 영적 여정은 팔레스타인으로 향한 여행이 아니었다.

그것은 두려움에서 연대로,

편견에서 만남으로,

침묵에서 증언으로,

그리고 추상적인 신앙에서 살아 있는 사랑으로 나아가는 여정이었다.

이제 돌아보면, 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도우러 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나를 변화시켰다.

나는 의사로 갔지만, 인간됨을 배우고 돌아왔다.

나는 기독교인으로 갔지만, 이웃 사랑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믿는다.

하나님은 국경이나 민족의 편에 서시는 분이 아니라, 고통받는 인간의 편에 서시는 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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